논리는 뇌의 형식으로 정신영역에 있다. 논리는 인간 존재성의 하나이다. 존재성는 배타성에서 찾을 수가 있고, 배타성은 유무와 범주로 나타난다. 여기서 논리는 배타적 범주를 형성한다.
논리라고 하면 흔히 수학을 떠올릴 수가 있다. 수학은 수와 기호를 차용한 약속이 아니라, 이들의 논리적 연결이다. 약속이라면 외우면 그만이지만, 수학의 여러 공식을 그저 암기한다고 수학을 잘할 수 없다. 수학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수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식을 이해하라고 한다. 이는 수와 기호의 논리적 관계를 이해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으니, 인간은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는 비단 수학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도, 심지어 인문학에서도 논리는 적용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일상의 삶에서도 논리는 흔하게 적용된다.
논리의 기본적 속성은 ‘관계의 정합성’이다. 논리는 형식이고, 그 형식은 정합성을 향해서 흐른다. 무엇보다 논리는 다섯 감각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에, 굳이 말하자면 논리를 여섯 번째 감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육감(六感)을 경험과 추리로 느끼는 예민한 감각이라고 정의한다.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모호한 형체가 있다. 오감으로 그 형체를 파악하기에는 너무 멀다. 순간 그 형체를 배라고 어림짐작하지만, 형체의 움직임이 예사롭지가 않다. 주변의 다른 형체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로지른다. 문득 주변에 공항이 있음을 떠올린다. 이로써 그 형체를 비행기라고 알게 된다. 이때 앎은 믿음이 아닌 사실에 대한 결맞음이다.
어림짐작과 실증은 대체로 논리를 통해서 이뤄진다. 논리로 규명하고자 하는 바는 참과 거짓이다. 무엇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데 있어서 논리는 유용하다. 즉 “어림짐작과 실증”은 사실여부를 따지는 논리작용이다.
논리는 인간존재성의 하나로 굳이 구분하자면 인식영역에서 그 메커니즘을 가능하게 한다. 그 구분에 따르자면 지각영역에서 그 메커니즘이 가능한 근원은 감각이다. 그리고 그 구분에 따르자면, 인식과 지각이 어우러진 것을 인지라고 한다. 인간은 동물이고 동물로서의 인간은 감각한다. 그렇다면 인식은 지각을 보완하며 상호작용을 한다고 볼 수가 있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언표에 갸우뚱하거나 거리낌이 생긴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는 논리로 실증 가능한 사실들로만 세계가 이뤄져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논리가 감각을 보완한다는 관점에서 당연하다.
논리가 인간존재성의 하나이기에 인간은 ‘논리를 이해할 수가 있다’는 전제의 긍정을 통해서 논리적 사고를 한다. 한편 논리의 속성이 ‘관계의 정합성’이고, 이때의 정합성은 자연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생의 양태이자 대자연의 연장이기에, 자연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합성을 속성으로 가진 논리를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다. 이는 선천적이다. 한편 논리학에서 다루는 고차원적인 논리를 배우거나,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여러 법칙을 고난이도의 논리전개로 배우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의 배타성(존재성의 범주)에 따름이다. 그래서 당연하지만, 수학을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전혀 말할 수 없다. 물론 논리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비논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익고 떨어지는 것을 당연히 안다. 우리는 산 속 계곡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을 당연히 안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곱셈을 하는데, 거기선 결코 20에 도달할 수 없는 곱셈이 있을 뿐이다. 그곳에선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앨리스가 다른 이들에겐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나무에서 사과도 열리고 바나나도 열리고 빵도 열리고 심지어 구워진 삼겹살도 열리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에선 사자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다가 개구리로 잠들다가 올챙이가 된다면, 지금의 논리가 적용될까? 그곳에선 1 더하기 1은 2가 될 수가 없다. 관계의 정합성이라는 속성을 지닌 논리에 따르면, 비정합성만이 정합성이 되는 세상이라면, 관계의 정합성은 비정합성이고, 그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비정합성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안다. 그곳의 존재들은 모든 것이 변수로 환원되는 논리, 모든 것이 우연으로 귀결되는 논리를 선천적으로 지니게 된다.
상대적 관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논리는 인위의 형식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대자연의 형식이다.
논리가 하나의 형식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만이 형식으로써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우리는 논리적 전개가 내 삶을 압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존재성에는 또 다른 형식이 있다. 인간행동메커니즘에 주요 인자들이 감각(몸), 환경(외부환경), 정신(mind)이고, 이들의 멱집합이 행동으로 드러날 때, 그 멱집합에 방향성을 주는 무엇이 있다면, 그 무엇이 이유(cause)가 된다면, 그 무엇을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주체는 인간존재성이고, 실체substance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속성attribute이다. 인간은 실체를 지각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체를 통해서 그 실체와 이어진다. 하지만....... 그래서 그 실체를 왜곡할 수도 있다. 우리의 주체는 하나가 아니다. 문명이전 사람들의 주체가 조화주체라면, 그 주체는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혹은 흔적으로나마 혹은 양심으로 남아 있다면, 문명이후 인간들에게는 권력주체도 있다.
인간행동메커니즘에서 인자(因子)인 정신(mind)은 뇌라는 감각기관이 몸 및 환경과 연결하여 드러나는 자아의 의식적 및 무의식적 작용으로 한정하여 사용한 용어이다. 논리가 인식영역에서 그 메커니즘을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인자(因子)로써의 정신에 논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논리는 뇌의 형식이고, 이때의 정신은 머리-정신이다. 한편 언급한 바, 마음-정신은 자아의 형식이고, 이를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언급했듯이 머리-정신과 마음-정신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하나에 압도된 상태에서 행동하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대체로 어우러져 작용한다. 언급한 내적갈등이 그렇고, 또한 논리전개에 있어서 마음에 끌린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으며, 반성에 있어서 분석적 논리전개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