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울주 살티공소와 김영제 베드로 남매의 묘소 성지
<살티공소>
언양(彦陽)의 향리(鄕吏) 출신인 김교희 프란치스코(金喬喜 1775~1834)와
그의 육촌 처남(몇몇 문서에는 4촌 처남) 오한우 베드로(吳漢佑 1760~1801)는
권일신, 정약용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익히고 1790년 입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오 베드로가 치명하자, 김 프란치스코(다른 이름 재권)는
간월산(看月-대동여지도, 肝月, 澗月寺 등 여러 표기가 있다.)
불당골(佛堂谷 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피신했다.
이후 박해에 쫓겨 고향을 떠난 각지의 교우들이 이곳에 흘러들어와
움막집을 짓고 토기, 옹기, 숯을 구워 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 나가
1815년에는 경남지역 최초의 간월공소를 설립했고,
1815년 을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도 잠입,
큰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신자 수도 늘고 공소 건물도 신축되었다.
<가족 묘소 가장 윗자리의 김교희 부부, 김상은 부부의 묘>
◆ 증거자 김영제 베드로(金永濟 1827~1876)
김교희 프란치스코의 손자인 김영제 베드로는 간월골에서 태어났다.
김 베드로는 부산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경상도 지방을 담당한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를 맞이해 미사를 드리고
1858년에는 공소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로 간월공소는 불타 버렸고
교우촌은 폐허로 변했다.
이때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교우들은 살티로 도망쳐 새 터전을 닦았다.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상남도 밀양군·울주군의 경계에 위치한
가지산((迦智山 1239m) 중턱에 있는 첩첩산중으로,
수목이 울창해 대낮에도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던 곳이라서
사람이 찾아 들기 힘든 은밀한 지역이었기에
박해시대 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피난처가 되었다.
1868년에는 살티공소를 설립했는데
간월공소(1815~1860), 대재공소(1840~1868)에 이은 세 번째이고
현존하는 부산교구 가장 오래된 공소로서,
지금의 건물은 1982년에 부산교구의 도움으로 건립됐다.
주소 ;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144-4
도로주소 ; 상북면 덕현살티길 9
<살티공소> <살티공소 성전>
살티는 예로부터 전쟁을 위한 화살을 만들었던 곳이라 해서
시현(矢峴)으로도 불리었다.
병인박해 이래 간월, 언양 신자들이 안살티(현 청수골)로 피난 와 살기 시작하자
‘박해를 피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살티’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860년 경신박해 때 간월골을 급습한 포졸들은 김영제 베드로를 비롯,
그의 부친 김상은 야고보(金商垠)와 많은 신자를 체포했다.
김 베드로는 이때 요행으로 방면되었으나,
병인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쓴 1868년 다시 체포되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경주로 압송됐다.
그 후 세 사람은 울산 장대에서 순교하였고,
김영제는 대구 감영을 거쳐 서울로 이송되어 9개월 동안 극심한 고문과 문초를 당했다.
김 베드로는 종지뼈가 으스러져 떨어져 나가 불구의 몸이 되어
1869년 봄 고종의 혼인날을 기해 특사로 풀려났다.
흩어진 가족들을 안살티에서 찾아 정착한 그는 이곳에 공소를 설립,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이끌었으며, 이후 현재의 살티로 이주했다.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안살티에 살던 신자들은
논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를 찾아 현재의 공소가 있는 살티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증거자 김 베드로는 혹독한 고문에 따른 장독으로
결국, 1876년 1월 24일 장하치명(杖下致命),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고문으로 인해 생긴 병이 악화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교회에서는 '장하 순교(杖下殉敎)'라 일컫는다.>
<살티공소 홈페이지, 성지목록, 울산 저널, 가톨릭 사전 등>
◆ 김영제 베드로, 동정녀 김 아가다 남매의 묘 성지
<살티 순교자 묘소>
살티공소에서 700m 떨어진 곳에 김 베드로 남매의 묘소 성지가 있다.
1981년 11월 언양 본당 신자들이 김영제 묘를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고,
1994년 4월 2일에는 교회사연구소의 주관으로 원래 자리에서 서북쪽 18m 지점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해서 묘역을 조성했다.
2008년 3월 4일에는 옛 간월공소 뒷산에 안장되어 있던 누이동생 동정녀 아가다를
이곳으로 옮겨와 오라버니 곁에 모셨다. (상북면 덕현리 산 218-1번지)
옆에 있는 가족묘의 가장 위쪽에는 할아버지 김교희 부부와
부친 김상은 부부의 묘소가 있다.
김 아가다(1836~1860)는 1836년(헌종 2) 간월 마을에서 태어났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붙잡혀 갔다가 풀려나온 김 아가타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신자임을 밝혀 다시 체포되었다.
이들은 압송되는 길에, 자신들을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도망쳐
아가다는 대재공소(竹嶺里) 죽림굴(竹林窟)로 들어갔다.
당시 죽림굴에는 간월공소를 순회하며 전교하다가 박해를 맞은
최양업 신부와 1백여 신자가 숨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연기를 내면 발각될까 봐, 곡식을 물에 불려 생식을 하며 지냈다.
아가다는 최 신부를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했고
순교하기를 바라며 동정녀로 살다가 1860년 타계했다.
김 아가다의 얘기는 최 신부가 남긴 서한에 잘 기록돼있다.
<증거자 김 베드로 묘> <동정녀 김 아가다 묘>
◆ 최양업 신부의 서한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 공동 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 분뿐만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중략)
24세 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들 중에서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하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한테 가서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신자들의 만류로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거기서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포졸한테 가서 잡혀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이 동정녀가 가르치며 선생처럼 지도한 두 처녀를 묶어가지고 가다가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으므로 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처녀들을 농락하고 나서 다른 데 팔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놓아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놓여났습니다.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의 부친과 오빠가 감옥에 갇혔고, 집도 갈 곳도 없어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게로 왔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러있던 신자들과 같이 임종경(臨終經)의 마지막 말마디를 끝내자
아가다는 운명하였습니다. (하략)”
◆ 증거자(證據者 confessor)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신앙고백함으로써
의연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한 사람들을 증거자라 한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순교자와 증거자의 개념이 명백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즉 이교도 재판관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다 순교한 사람들을 순교자,
신앙고백으로 고문과 투옥 등 온갖 박해를 받았으나 순교를 면한 사람들을
증거자라 불렀다.
박해가 끝난 4세기 후부터는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증거자라고 했고,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모든 성인들을 증거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교 초기에 많은 순교자와 함께 증거자가 나왔는데
특히 신앙 때문에 옥고를 당하는 사람들을 증거자로 호칭하였다.
[가톨릭대사전]
<살티 순교자와 그 가족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