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무 그늘 [이태수]
길을 달리다가, 어디로 가려하기보다 그저 길을 따라 자동차로 달리다가, 낯선 산자락 마을 어귀에 멈춰 섰다. 그 순간 , 내가 달려온 길들이 거꾸로 돌아가려하자 늙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그 길을 붙들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한 백 년 정도는 그랬을까. 마을 초입의 회화나무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오가는 길들을 끌어안고 있었는지 모른다. 세월 따라 사람들은 이 마을을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했으며, 나처럼 뜬금없이 머뭇거리기도 했으련만, 두껍기 그지없는 회화나무 그늘.
그 그늘에 깃들어 바라보면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며 펄럭이는 바람의 옷자락. 갈 곳 잃은 마음은 그 위에 길릴 뿐, 눈 앞이 자꾸만 흐리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할는지, 이름 모를 새들은 뭐라고 채근하듯 지저귀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여태 먼 길을 떠돌았으나 내가 걷거나 달려온 길들이 길 밖으로 쓰려져 뒹군다. 다시 가야 할 길도 저 회화나무가 품고 있는지, 이내 놓아줄 건지. 하늘을 끌어당기며 허공 향해 묵묵부답 서 있는 그 그늘 아래 내 몸도 마음도 붙잡혀 있다.
- 회화나무 그늘, 문학과지성사, 2008
정동 산책 [이상협]
라일락이 시작되었어
목발 짚은 회화나무 그늘을 지나왔어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빗방울이 시작되었어
턱을 괴고 무릎을 기대고 있었어
사람들은 모두 한쪽 방향에서 온다
죽은 작곡가의 기념비에선 노래가 흘러나왔지
거울에 얼굴을 대고 휘파람을 불었어
어떤 시간의 내가 가깝다 흐려졌지
94년産산 바람 냄새가 났어
교회의 장미 담장을 넘겨다보았고
갈래 길에선 종교를 가질까 생각해 보았지만
라일락이 시작되었어
신이란 문득 코밑을 지나는 그리운 냄새 같은 게 아닐까
그걸 매일 기억하는 일이 기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빗방울이 시작되었어 흙냄새가 올라와
꽃 냄새를 덮고 하늘은 한층 어두워졌어
담배를 끊었지만 나는 자주 연기 속에 있었고
광화문 구름 밑에 검은 거인은
길을 돌아가면 어른이 된다고 했지
-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 민음사, 2018
회화나무 [최재영]
시간을 거슬러 회화나무 그늘에 앉았네
꿈을 꾸듯 떨어져 내리는 잎들은
어느 시절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잎이 피는 곳과 떨어져 닿는 사이
그 무한한 간격으로
신생의 언어들이 수북하게 흩날리네
피고 지는 사이가 아득히 멀어
나무는 부지런히 품을 넓히고 속말을 키웠네
시간을 한참 거슬러
회화나무의 젊은 날과 마주 앉았네
도란도란 잎을 틔우고
작은 입술 내밀듯 쌀알 같은 꽃잎 펴는 저녁은
아낙의 쌀 이는 소리 멀리서 들려왔네
여기저기 새로운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날엔
허공 가득 새들을 불러들였네
나무의 한복판이 뜨거워져
혈관을 타고 오르내리는 숨결 밤새 눈물겨웠네
인간의 영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중이라며
회화나무가 조근조근 읊조리네
오랜 세월 나무는 향기롭게 그늘지고
나는 회화나무보다 더 빠르게 늙어가네
-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시인동네, 2016
내것이 아닌 그 땅 위에 [나희덕]
주춧돌을 어디에 놓을까
이쯤에 집을 앉히 는 게 좋겠군
지붕은 무엇으로 얹을까
벽은 아이보리색이 무난하겠지
저 회화나무가 잘 보이게
남쪽으로 커다란 창을 내야겠어
동백숲으로 이어진 뒤뜰에는 쪽문을 내야지
여기엔 자그마한 연못을 팔 거야
곡괭이를 어디 두었더라
돌담에는 마삭줄과 능소화를 올려야지
앞마당에는 무슨 꽃들을 심을까
대문에서 현관까지 자갈을 깔면 어떨까
소리만 들어도 누가 오는지 알수 있을 테니까
저 은행나무 그늘에는
나무 의자를 하나 놓아야지
그래도 식탁은 둥글고 큼지막한 게 좋겠어
벌써 문 밖에 누가 찾아온 모양이군
오늘도 집을 짓는다
내 것이 아닌 그 땅위에, 또는 허공에
생각은 돌담을 넘어
집터 주위를 다람쥐처럼 드나든다
집을 이렇게 앉혀보고 저렇게 앉혀보고
수없이 벽돌을 쌓았다 허물며
마음으로는 백 번도 넘게 그 집에 살아보았다
그러나 내것이 아닌 그 땅에는
이미 다른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지 않은가
-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
당인리 근처 [권달웅]
-유재영에게
서강에 종일 비 내리면
당인리 근처 회화나무에
혼자된 동박새가
울다 간다
누구나 떠날 때는 혼자다
휘휘한 바람처럼
새가 울다간 그 자리에
불현듯 찾아가는
한적한 합정역 7번 출구
깻잎 미용실 지나
커피 충전소 지나
당인리 발전소 앞
키 큰 모과나무 기다리는
동학사 이 층에 들어서면
책 표지화 속 소년 하나가
새파랗게 이끼 낀 돌에
동구마니 앉아
고욤꽃 떨어지는 소리를
엿듣고 있다
- 현대시학, 2011년 2월호
물메기국 [고두현]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뺕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 팔 때 깜쪽같이 없어졌지
아들아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 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헹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두레밥상
빈 둥지 올려다보며
껍질 몰래 삼키던 그 모습에
목이 메던 풍경이 있었네
해질녘까지 그 자리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
- 시와사람, 2007 여름호
다시 쓰는 편지 [조정인]
1.
늙은 대추나무 언저리에서 어떤, 빛알갱이 탁 터지며
나비가 날아나와 담장에 쓰윽 연둣빛을 묻히여 날아갔었죠
햇빛은 셀 수 없이 많은 나비와 나뭇잎으로 몸을 바꾸던 걸요
지난 여름의 빛의 레이스로 성장한 숲을 갔을 때
숲속, 반짝이던 해의 마그마들을 기억해요
저수지 수면 위에 부서져 내리는 빛의 일회성을 바라보던 우리는
두, 빛기둥
2.
오늘 다 읽어낼 수 없을만큼 많은 눈이 내렸어요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우리를 스쳐갈 뿐인, 그 일회성을
망막 가득 담아내려 고개를 젖혔습니다
당신이 네 사랑을 펴봐, 하신다면 말간 손금이 흐르는 손 바닥을 펴 보일 뿐인, 나는 하늘 한 가득 마음이 흩날렸어요
어쩌면 저것은 먼 옛날 어떤 연인들의 석류빛 약속이나처럼,
이제 하얗게 사위어 분분해진 화산재가 아닐런지
들리는 말로는 지금 어떤 들녘엔가 봄눈 설풋 입술 댄 자국마다
강자지풀 풀씨가 발까락을 꼼지락대고
오백년 된 회화나무 밑둥, 오백년도 더 된 녹빛 우물서 들리는
두레박 내리는 소리 더욱 청명하다던 걸요
문득 한 장 손수건 처럼 흔들리는 별!
당신이 내 강아지, 라고 불러주는 봄눈 내리는 이 별에서
남들 낡았다고 버린 언어를 주워 다시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 창작과 비평 2000 여름호
큰 회화나무 꽃 떨어진 무늬 [한영옥]
무더운 어느 하루라도
큰 회화나무에서 떨어진 꽃무늬는 참 좋다
줍고 싶을 만큼 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제 그늘 안쪽으로 살풋하게 내려앉은,
흰빛에서 연둣빛 사이를 오가며 엮은
수수한 돗자리처럼 보이는 슴슴한 무늬가
두어 평 남짓 안에서 고요하다
수수한 자리에 슬며시 들어가서
몹시 우는 매미를 열심히 생각해주노라면
이해 불가능에서 이해 가능으로 길이 꺾이고,
꺾이자마자 길은 곳곳이 맘 좋은 초록이다
몇 송이 꽃잎을 더 내려 앉혀주며 이름은
편하게 제 깊이를 다 펴고 한숨 잔다
고요한 그 사람의 속 깊은 염려 속인가.
생각수레 덜컹거리지 않아 악의(惡意)도 잘 잔다
꺾인 길섶으로 한참은 더 초록이 좋으리
큰 회화나무 꽃 떨어진 무늬는 좋기도 하지.
- 아늑한 얼굴, 랜덤하우스중앙, 2006
생각을 찍다 [김명기]
가을 나들이 나선 할매들이 늙은 회화나무 앞에서
까르르 소녀처럼 웃으며 사진 찍는다
이빨 시리지 않은지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있는 힘껏 허리 펴고
몇 백 년은 산 나무 그늘 속에서
그녀들 아직 어린 아이다
그러고 보면 몸이란 생각이란 그늘에 묻혀
혼자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속살까지 온통 시멘트로 땜질한 채, 살아남기 위해
늙어가는 것마저 저당 잡힌 나무보다야
옥죄인 생의 매듭을 스르르 풀듯
사진기를 들이대면 웃음이 터지고 허리가 펴지는 순간
그녀들의 연대기는 입에 문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어느 곳에선가 다시 시작해도 좋겠다
포즈가 바뀔 때마다
물드는 회화나무 품속
물먹은 가을빛이 무르익어가듯
바늘구멍 사진기 시간의 초점 속으로
더디게 자라나는 그녀들이 찍히고 있다
-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 전당, 2009
첫댓글 회화나무에 관련된
시숲에 마음을 내려놓고 푹 빠졌습니다
회화나무를 심으면 잡귀신의 접근을 막아준다는군요.
평안을 가져다 주는 기특한 나무네요.^^*
주페님 나눔의 품이 회화나무처럼 두껍습니다
시향 가득한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
오!
시향이 가득하다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회화나무는 참 좋아하는 나무,
회화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한 백 년은 지나온 기분...
제가 태어난 종로에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많습니다.
그 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평안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