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南九萬, 1629~1711), 藥泉集 第26, 家乘, 麻田郡守南公墓碣銘
南嶸(1548~1616), 宜寧 士秀
公諱嶸 字士秀。籍宜寧。五代祖諱誾。籍開國勳。封宜城君。配享太祖廟庭。高祖諱景祐。判中樞府事。襲封宜城君。曾祖諱暿。訓鍊院都正。祖諱俶。朔寧郡守贈左承旨。考諱禮錫。副司果贈漢城府左尹。妣商山金氏。守門將世均女。司藝長春之曾孫。以嘉靖戊申歲生公。甫冠而孤。執喪踰禮。兩目不視物。久乃已。
마전 군수(麻田郡守) 남공(南公) 묘갈명
공은 휘가 영(嶸)이고 자가 사수(士秀)이고 관향이 의령이다. 5대조 휘 은(誾)은 개국 공신에 녹훈되어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지고 태조(太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고조 휘 경우(景祐)는 판중추부사로 의성군에 습봉(襲封)되었다. 증조 휘 희(暿)는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이고, 조고 휘 숙(俶)은 삭녕 군수(朔寧郡守)로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선고 휘 예석(禮錫)은 부사과(副司果)로 한성부 좌윤에 추증되었다. 선비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수문장 김세균(金世均)의 따님이고, 사예(司藝) 김장춘(金長春)의 증손녀인데,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 3)에 공을 낳았다.
공은 겨우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서 부친을 여의었는데, 상을 당하여 예(禮)보다 지나치게 슬퍼해서 두 눈으로 물건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오랜 뒤에야 병이 나았다.
母夫人有痼疾。公曰事親者不可不知醫。按方索訣。深得其妙。鍼藥輒效。鄕黨服其孝。
모부인이 고질병이 있었는데, 공은 말하기를,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술(醫術)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는 약방문을 찾아보고 비결을 찾아서 그 묘리를 깊이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침을 놓고 약을 쓰면 그때마다 효험을 보니, 향당에서는 공의 효성에 탄복하였다.
公勤身篤行。不求進取於當世。年五十餘。柳相公成龍一見知其厚德。以才行兼備薦於朝。萬曆辛丑。始除造紙署別提。移尙衣院。旋移歸厚署。出安奇道察訪。癸卯轉長興庫直長。甲辰上時政得失疏報聞。
공은 몸소 부지런히 일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여 당세에 벼슬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나이 오십이 넘어서 상공 유성룡(柳成龍)이 한 번 보고는 공의 후덕함을 알아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것으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리하여 만력 신축년(1601, 선조 34)에 처음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제수되고 상의원(尙衣院)으로 옮겼으며, 곧바로 귀후서(歸厚署)로 옮기고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으로 나갔다. 계묘년에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으로 옮겼으며, 갑진년에 시정(時政)의 득실에 대하여 상소하니, 상이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時宣祖大王患頭風。夜半猝𠙆。衆醫遑遑不知所出。上令政院訪問朝士中解醫方者。以公對。促召入問之。公以川流之開導而地氣宣。國綱之振擧而治化行。譬諸人身脈絡之疏決而疾病祛。縷縷數十言。上亟稱善。命醫官施鍼於所占之穴。隨手卽差。上大悅曰此人所對。乃達理之士。不但治病而已也。命超授堂上階。臺諫爭之不允。
이때 선조대왕(宣祖大王)이 두풍(頭風)을 앓아 한밤중에 갑자기 병세가 심해지니, 여러 의원들이 경황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이 승정원으로 하여금 조정의 신하 중에 의술을 아는 자를 찾게 하였는데, 공이라고 대답하자 급히 불러 들어오게 하여 병에 대해 물었다. 공은 흐르는 냇물을 터놓아야 지기(地氣)가 펴지고 국가의 기강이 진작되어야 정치와 교화가 행해지는 것을 가지고 사람의 몸에 맥락(脈絡)이 원활하게 소통되어야 질병이 제거되는 것에 비유하여 자세히 수십 가지를 아뢰니, 상은 좋은 말이라고 극구 칭찬하고, 의관(醫官)에게 명하여 공이 점찍은 혈(穴) 자리에 침을 놓게 하였는데, 손을 따라서 놓는 즉시 차도가 있었다. 상은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대답한 내용은 바로 이치에 통달한 선비의 말이요, 단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다.” 하고는 명하여 당상관의 품계에 초수(超授)하고, 대간(臺諫)들이 간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乙巳拜五衛將。出鎭川縣監。御史以異績聞。丙午移陽城縣監。丁未病遞。未幾拜麻田郡守憂遞。甲寅拜僉知中樞府事。丙辰出陰竹縣監。御史連以治最聞。道臣以身病啓罷。朝廷使勿罷。調理察職。
을사년(1605)에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고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나갔는데, 어사(御史)가 공의 치적(治績)이 뛰어나다고 보고하였다. 병오년에 양성 현감(陽城縣監)으로 옮겼다가 정미년에 병으로 체직되고, 얼마 안 있어 마전 군수(麻田郡守)에 제수되었는데 병환으로 체직되었다. 갑인년(1614, 광해군 6)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병진년에 음죽 현감(陰竹縣監)으로 나갔는데, 어사가 연이어 공의 치적이 최고라고 보고하였다. 도백이 신병을 이유로 해직할 것을 아뢰었으나 조정에서는 해직하지 말고 병을 조리한 뒤에 직임을 살피도록 하였다.
十二月初三日卒于官。朝廷念公服勤官政。治理著聞。且推先朝眷遇之恩。特贈嘉善大夫兵曹參判。命沿路給擔夫。令本道差員護喪。庀葬具。以翌年二月庚申。窆于尙州銀城里負壬之原。仁祖丙戌歲。以仲子昌祖原從功。加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12월 3일에 관청에서 별세하니, 조정에서는 공이 정사에 부지런히 봉직하고 치적이 크게 드러난 것을 생각하고, 또 선왕조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을 미루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을 추증하고 연로(沿路)에 명하여 상여꾼을 지급하게 하였으며, 본도로 하여금 인원을 차출하여 호상(護喪)하게 하고 장례 도구를 마련하게 하였다. 다음 해 2월 경신일에 상주(尙州) 은성리(銀城里) 임좌(壬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인조(仁祖) 병술년(1646)에 둘째 아들 창조(昌祖)의 원종공(原從功)으로 인해서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을 더 추증하였다.
前夫人淸州韓氏。部將胤福女。不育。葬咸昌文昌。後夫人坡平尹氏。軍資監僉正淳女。後公二十三年卒。葬咸昌梨峴山面离之原。
전취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부장(部將) 한윤복(韓胤福)의 따님인데 자녀를 생육하지 못하였는바, 함창(咸昌)의 문창(文昌)에 장례하였다. 후취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 윤순(尹淳)의 따님인데, 공보다 23년 뒤에 별세하여 함창 이현산(梨峴山) 오향(午向)의 산에 장례하였다.
男長昌尹通德郞。次卽昌祖縣令。次昌宇進士。次昌緖通德郞。次昌夏通德郞。昌尹二子極丙,極星。昌祖一子極老。昌宇一子極柱生員。昌緖二子極樞,極壽。昌夏一子極杓生員。方爲典牲署直長。曾玄以下多不盡記。而極老之子垕文科承旨。垕之子圖翼方爲承文院著作。
장남 창윤(昌尹)은 통덕랑(通德郞)이고, 차남은 바로 창조이니 현령이며, 다음 창우(昌宇)는 진사이고, 창서(昌緖)는 통덕랑이고, 창하(昌夏)는 통덕랑이다. 창윤은 2남을 두었는데 극병(極丙)과 극성(極星)이며, 창조는 1남 극로(極老)를 두었고, 창우는 1남 극주(極柱)를 두었는데 생원이며, 창서는 극추(極樞)와 극수(極壽) 2남을 두었고, 창하는 1남을 두었는데 생원 극표(極杓)로 현재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으로 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하는바, 극로의 아들 후(垕)는 무과에 급제하여 승지이고, 후의 아들 도익(圖翼)은 현재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으로 있다.
槪公平生。隱居求志。孝友爲政。中年之後。始從薄宦。下澤優游則馬少游。墨綬棲遲則邴曼容。才具之美。不得顯施於當世。然其流風遺敎。今之可想者。猶在於桐鄕之民謠。顏氏之家訓。
공의 평생을 개괄해 보면 은둔하여 지조를 지키고 가정에서 효도와 우애를 일삼았다. 중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낮은 벼슬에 종사하여 하택거(下澤車)로 한가로이 노닌 것은 마소유(馬少游)와 같고, 묵수(墨綬)로 낮은 벼슬에 처한 것은 병만용(邴曼容)과 같았다. 훌륭한 재주를 당세에 드러내어 베풀지 못하였으나 그 유풍과 남긴 가르침을 지금 상상할 수 있으니, 오히려 동향(桐鄕)의 민요(民謠)와 안씨(顔氏)의 《가훈(家訓)》에 남아 있다.
若言其臥治。褒騰廉問。寵光哀贈者。已敍之於前矣。若言其身敎。在幼執禮。旣衰守制。晨謁祠堂。日省丘墓。自是終身之服勤。而孝感魚躍之異。且載於咸寧志中。
고을을 잘 다스린 것으로 말하면 염찰(廉察)하는 어사(御史)의 표창하는 계사에 올랐으며 군주가 총영을 내려 죽음을 애도하고 관직을 추증하였는바, 이 사실을 이미 앞에서 서술하였다. 그리고 몸소 솔선하여 가르친 것으로 말하면 어려서는 상례를 잘 집행하였고 노쇠한 뒤에는 예를 지켰으며, 새벽에 사당에 참배하고 날마다 묘소에 성묘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종신토록 부지런히 행한 것이며, 효성에 감동되어 물고기가 뛰어나오는 이변이 있었는바, 이는 또 함녕(咸寧)의 읍지(邑誌)에 기재되어 있다.
及于子姓。儒素之業。謹飭之行。益修而不替。文籍連倫。簪紱綿世。不食之報。爲善之勸。其在斯與。極杓謂余爲同宗。來乞公墓表。誼不可辭。遂爲之銘曰。
자손들에 이르러서는 지켜 오던 유학(儒學)의 업과 삼가고 조심하는 행실을 더욱 닦고 변치 아니하여 문적(文籍)에 오른 자가 연달아 나오고 높은 벼슬이 대대로 이어지니, 자신이 다 차지하지 않은 보답과 사람들에게 선을 하도록 권면함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극표(極杓)는 내가 동종(同宗)이라 하여 찾아와서 공의 묘표(墓表)를 지어 줄 것을 청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越在公先。世居漢師。及公之考。踰嶺南爲。胥宇于咸。爰樹以德。蘭玉盈庭。蔚爲盛族。公幼失怙。乃能自勵。官因薦剡。贈由治勩。存沒哀榮。式至今休。劬躬燾後。夫孰與儔。瞻彼虎溪。杖屨攸息。山川雲物。寓慕如昨。顧此銀城。衣冠所瘞。香火蘋蘩。欽于世世。有孫克孝。來謁銘章。鑱石表墟。永眎不忘。
공의 선대는 / 越在公先
대대로 한양(漢陽)에 살았는데 / 世居漢師
공의 선고에 이르러 / 及公之考
영남으로 넘어왔네 / 踰嶺南爲
함창(咸昌)에 집터를 정하여 / 胥宇于咸
이에 덕을 쌓으니 / 爰樹以德
훌륭한 자제들 뜰에 가득하여 / 蘭玉盈庭
훌륭한 집안이 되었다오 / 蔚爲盛族
공은 어려서 부친을 잃었으나 / 公幼失怙
능히 스스로 힘썼네 / 乃能自勵
벼슬은 천거로 인하였고 / 官因薦剡
추증은 치적(治績)에 연유하였으니 / 贈由治勩
생전과 사후의 애영이 / 存沒哀榮
지금까지도 아름답도다 / 式至今休
부지런히 수행하여 후손을 비호하니 / 劬躬燾後
그 누가 공과 짝할까 / 夫孰與儔
저 호계(虎溪)를 바라보니 / 瞻彼虎溪
지팡이와 신이 머문 곳으로 / 杖屨攸息
산과 냇물과 구름에 / 山川雲物
추모하는 마음 어제와 같네 / 寓慕如昨
돌아보건대 이 은성(銀城)은 / 顧此銀城
의관을 묻은 곳이라오 / 衣冠所瘞
향화와 제수를 올려 / 香火蘋蘩
대대로 공경히 받드네 / 欽于世世
효도하는 손자가 있어 / 有孫克孝
와서 명문을 청하니 / 來謁銘章
비석을 새겨 묘에 세워서 / 鑱石表墟
영원히 잊지 않음을 보이노라 / 永眎不忘
남영(南嶸, 1548~1616)은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벼슬하여 선조 때 어의(御醫)를 지냈으며, 광해군 때 음죽 현감(陰竹縣監) 등을 지냈고, 문경에서 함창으로 이주하였다. 숙종(肅宗) 때 경상도 문경(聞慶)에 건립된 소양서원(瀟陽書院)에 정언신(鄭彥信)ㆍ심대부(沈大孚)ㆍ김낙춘(金樂春)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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