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29
12월4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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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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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mc_31YFX7o (이주형 세례자요한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761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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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한없는 겸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 그 비결이었습니다!>
요즘 봉독되는 성경말씀에는 대림시기라는 무대를 빛낸 위대한 조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마리아와 요셉, 세례자 요한...사실 그들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던 존재,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함과 겸손함을 바탕으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명으로 충실성으로 인해, 구세주 예수님의 육화강생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세세대대로 교회 안의 위대한 인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세례자 요한은 이 대림시기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인 동시에 신약 시대를 활짝 여는 가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의 위대성에 대해서 극찬하신 바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 복음 11장 11절)
세례자 요한의 위대성 그 배경에는 지극한 겸손의 덕이 자리잡다는 것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있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신원에 대해서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근원과 한계에 대해서 늘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진짜입니다. 그분은 너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한갖 티끌이요 먼지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제게 큰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나는 이 땅 위에 잠시 등장했다가 즉시 사라지고마는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나는 길이 아니라 이정표입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배우입니다.”
한없는 겸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 그 비결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보잘것 없는 주님의 피조물이지만, 겸손의 덕을 통해 위대해집니다. 힘든 일이겠지만 자신을 낮추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어렵더라도 우리 내면을 말끔히 비우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득가득 채워주십니다.
구약시대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대 예언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의 태도는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만일 제가 세례자 요한이었다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 앞에 조금은 망설였습니다. 스스로를 좀 더 있어보이게 하려고 포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메시아까지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잘 알고 있으며, 일정 부분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분과 나는 아주 가까운 친척 관계이며, 그분의 가족들도 잘 알고 지낸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하늘을 찌르는 인기 앞에 조금도 우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유효 기간이 언제까지 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떠날 순간이 왔음을 인지하자, 단 한 순간도 지체없이,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잘 마련된 무대를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넘겨드린 다음, 신속히 구세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리 아쉬움이 많은지, 미적미적, “아직 떠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어요. 좀 더 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홀연히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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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맑은 정신으로 늘 깨어 기도했던 광야의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듯해 보입니다. ‘있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몰려들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세례자 요한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 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 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 옷에 가죽 띠입니다. 그는 대체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 귀 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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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QOphv10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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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분이었습니다. 회개란 ‘나’를 바라보는 것에서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회개는 희랍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파라오로 상징되는 자아를 의지하는 삶에서 ‘나는 나’라고 하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나오게 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나를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하는 극도의 자기 무력화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 살았습니다. 그는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습니다. 낙타 털은 죽은 낙타가 썩어서 남겨놓은 것입니다. 길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가죽 띠는 동물의 거친 육체를 절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메뚜기와 들꿀은 경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뚜기는 잡기도 어렵습니다. 날아오면 먹고 없으면 굶어야 합니다. 들꿀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견도 어렵지만, 벌들이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왜 위대한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이 그런 삶을 선택했을까요?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의지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통장 액수’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통장 액수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거나 불안하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자아, 곧 파라오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이 있건 없건 이집트 안에서는 돈의 노예로 살아가야 합니다. 노예는 고통스럽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라 외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만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면서 통장 액수를 어느 정도선에서 제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한 달 생활할 돈만 남겨놓고 다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사제만큼 철밥통이 있을까요? 죽기까지 먹고 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액수를 유지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돈을 모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통장 액수 줄이기를 실현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점점 저 자신을 믿는 이집트로 회귀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삶으로 나아가려면 작은 신앙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나의 힘을 뺄 때 주님께서 힘을 주시는 곳입니다. 파라오에 의지하지 않을 때 만나와 물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아도 샌들이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굶기지 않으십니다. 일론 머스크는 한 달을 30달러로 살아보고는 가진 재산을 다 투자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의탁하기 위해 나를 믿는 마음을 포기하고 그것으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를 챙겨 주실 수밖에 없는 분이심을 체험할 때 조금 더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사회복지를 하시는 한 수녀님을 도와 주시는 두 봉사자분이 저를 찾아오셔서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 수녀님은 노숙자들, 탈북자들, 독거노인들, 결손가정 아이들 등을 정신없이 도와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떨어져서 고기반찬도 올리지 못하고 멸치를 주시는데 작은 멸치도 못 사고 큰 멸치, 그것도 똥도 빼지 못해 쓴 멸치를 반찬으로 내어놓아야 하는 처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어머, 걱정하면 안 되는데….”라며 주님께 의탁하려고 노력하신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에 의지하려 광야에 머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겨울이 찾아오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써 달라고 얼마의 돈을 맡기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것을 왜 안 쓰냐고 할까 봐 ‘어디다 써야 할까?’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두 봉사자분이 오서서 그런 말씀을 하니 제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수녀님이 깜짝 놀랄 액수를 드렸습니다. 물론 수녀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힘을 빼고 광야로 나온 이에게 주님께서 가지시는 마음이 아닐까요? 물론 저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부터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 더 맡길 줄 아는 사람부터 당신 모든 것을 쏟아주십니다.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십일조’입니다. 통장 액수는 내 힘으로 사는 상징입니다. 내가 주님께 십일조를 바치려고 할 때 나는 광야에 살게 됩니다. 돈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펴보면 선악과를 바쳤을 때의 에덴동산에 머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 챙겨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올바른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은 결코 내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선으로 당신 창고의 문을 그 사람을 위해 여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큰 교훈입니다. 저는 내년부터 초등학생부터 시작하여 모든 신자분에게 각자의 교무금 통장을 만들게 할 것입니다. 각자가 신앙 고백을 하는 만큼 광야로 나올 수 있고 그래야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피부병이 들어 털이 다 빠지고 먹지 못하여 죽어가는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 죽어가는 강아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물보호소에 맡겼습니다. 강아지는 치료받았지만, 털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강아지를 입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누가 입양했겠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자기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죽었을 바로 그 대상입니다. 그를 발견한 이가 그 강아지를 입양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반려견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강아지는 자신이 아니면 또 외로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강아지입니다. 조금만 사랑이 있어도 양심상 그런 강아지를 그냥 버려둘 수 없습니다.
이런 예는 아주 많지만 ‘뼈만 남은 채 버려져 죽어가는 개에게 다가간 여성이 한 일’이란 ‘개감동이야’ 유튜브 채널을 시청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피아’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피아는 ‘자비롭다’라는 뜻입니다. 자비로운 자의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합니다. 하느님은 자비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해 보려는 사람은 제쳐 놓으시고 가장 힘을 뺀 이를 먼저 찾으십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로 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내년부터는 십일조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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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춘천교구 대림특강]
●대림특강1
(엄기선 베네딕토 신부님)
주제 ; 말씀과 함께
https://youtu.be/lyIK5WZt2F0
●대림특강2
(하창섭 안토니오 신부님)
주제 ; 행복의 조건
https://youtu.be/HbneeiduL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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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신화’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을 나왔지만 곰은 끝까지 참았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책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은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입니다. 하늘세계에서 사는 환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세계를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마치 하느님의 아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이 되신 것과 비슷합니다. 환웅이 제시한 조건은 호랑이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육식동물인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은 먹기 힘들었습니다. 잡식동물이 곰에게 쑥과 마늘은 먹을 만했습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호랑이에게 캄캄한 동굴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곰에게 동굴에서의 생활은 편안한 집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말은 단군신화의 세상에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단군신화는 환웅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하였습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시천주(人乃天侍天主)의 동학사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난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에서의 노예해방에 서명한 지 100년이 되었지만 흑인들에게는 여전히 기회는 공평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고, 결과는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흑인목사 마틴루터 킹은 1963년 8월 28일에 ‘I have dream'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연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울리게 할 때 하느님의 모든 자손들인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방인들,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해방되었도다!’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환웅의 꿈과 마틴루터 킹의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러한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Dreams come true!" 20년 이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은 기적과 같이 16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환인의 꿈, 마틴루터 킹의 꿈,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꿈은 혼자서 간직하면 꿈으로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마침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신화’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을 나왔지만 곰은 끝까지 참았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책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은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입니다. 하늘세계에서 사는 환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세계를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마치 하느님의 아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이 되신 것과 비슷합니다. 환웅이 제시한 조건은 호랑이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육식동물인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은 먹기 힘들었습니다. 잡식동물이 곰에게 쑥과 마늘은 먹을 만했습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호랑이에게 캄캄한 동굴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곰에게 동굴에서의 생활은 편안한 집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말은 단군신화의 세상에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단군신화는 환웅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하였습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시천주(人乃天侍天主)의 동학사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난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에서의 노예해방에 서명한지 100년이 되었지만 흑인들에게는 여전히 기회는 공평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고, 결과는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흑인목사 마틴루터 킹은 1963년 8월 28일에 ‘I have dream'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연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울리게 할 때 하느님의 모든 자손들인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방인들,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해방되었도다!’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환웅의 꿈과 마틴루터 킹의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러한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Dreams come true!" 20년 이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은 기적과 같이 16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환인의 꿈, 마틴루터 킹의 꿈,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꿈은 혼자서 간직하면 꿈으로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마침내 현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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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3,1-1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오늘 전례의 주제는 회개이다. 회개는 항상 그리스도를 향한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인간들 가운데 정의를 다시 세우시고, 모든 피조물 사이에 평화를 다시 이루신다고 한다. 이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복음도 요한 세례자의 회개 외침이 나온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2.10) 결단을 내려야 하여야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자신보다 더 큰 권능을 가지신 어떤 분을 예고하는 것이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11-12절) 이는 심판 표현이다. 즉 요한은 구원의 소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새로운 때와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알려준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그분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요한 세례자는 곧 임하실 메시아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증인이다. 이런 면에서 요한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게 해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세 가지 형태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있다.
1)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은 권위 있는 사람이다. 요한은 초대교회에서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종살이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야 했던 신비스러운 인물을 요한으로 생각하였다. “한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 또 요한은 금욕 생활의 특성 때문에 엘리야와도 관련하여 생각하였다. “몸에는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른 사람이었습니다.”(2열왕 1,8) 메시아 예고자로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말라 3,23) 초대교회는 이 모든 것이 요한 세례자를 통해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요한은 이러한 사명에 자신을 봉헌하기 위해 바친 정열에 비추어 보아서, 또 자신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는 자기이지만, 주님을 알리는 겸손하고도 기쁨에 찬 그의 자세를 보아서 그는 우리를 저절로 주님께로 인도해 준다.
2) 그의 가르침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해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2절) 회개의 의무를 모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7-9절) 모든 것은 오직 변화되고 쇄신된 생활의 증거만이 우리가 모든 착각의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하여 회개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3) 요한은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서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해준다. 그런데 요한은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1절) 요한의 세례는 인간들의 태도와 행동에 대하여 이미 하느님 심판의 불을 댕겼으므로 그가 선포한 회개를 세례라는 표지와 죄의 고백(6절)을 통해 실현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에서 성령 은총의 선물로 성취될 것이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1절) 세례는 이 대림 시기에 계속 회개의 태도처럼 생활화해야 한다. 세례라는 것은 우리의 생활 전체를 통해서 입증되어야 할 변화의 표지이다.
바오로 사도는 어리석은 인간의 역사가 그 의미를 되찾고 사랑의 역사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셔야 한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다 같이 한목소리로 예수님을 주님이요 우리를 구원하러 사람의 몸으로 오신 참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게 될 때 의미가 있게 될 것이다.(1요한 4,2-3 참조) 회개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또 나약한 인간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매 순간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 언제든지 열어드릴 준비되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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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황경원 안드레아 신부님]
<세상의 고통과 사회교리>
케이 컬처(K-culture) 유행, 경제 규모 세계 10위(191개국 중) 달성, 1인당 국민소득 3만 5친 달러 돌파 등 우리나라의 좋은 일이 세계적으로 알려질 때 우리는 기뽑니다. 그러나 이런 자랑을 뒤로하면 먹고사는(집 걱정. 노후 걱정. 일자리 걱정. 돌봄 걱정 등) 일상의 고단함으로 허탈해지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살면서 겪는 고통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교회의 사회교리는 이정표.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41회 인권 주일이며 제12회 사회교리 주간(12월 4일~10일) 첫날입니다. 사회교리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공동선을 증진할 수 있도록 사회의 다양한 영역(인권, 노동. 경제, 정치. 국제 공동체 환경. 평화 등)의 현실을 관찰하고, 복음에서 제시하는 기준으로 성찰하며, 성찰한 바를 구
체적인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신앙인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처럼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필요한 일을 찾아 연대하여 이들을 도율 수 있습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182항 참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기업가 고용주라면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처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지틀 알고, 소수의 이익만을 우선하지 임아야 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277-280항 참조: '노동은 자원보다 본질적으로 우위)
남보다 더 많이 결정하고 책임지는 직분에 있다면 더욱
더 황금률("남이 너회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회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 7.12) 이것이 황금률'이다. I 가톨릭교회 교리서 1789항(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회교리를 가르친다) 대로 대우받고 싶은 만큼 남을 귀하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 간추린 사회교리 144항 참조: 모든 인간의 동동한 인간의 존엄성)
선한 사마리아인, 포도밭 주인. 황금률 등 인권과 공동선을 사회에서 구현하기 위한 정치 공동체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교회는 정치 공동체의 임무가 "시민들이 인간의 권리를 참되게 행사하고 그에 상응하는 의무들을 온전하게 이행할 수 있는 인간적인 환경을 조성해 주고자 노력함으로써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89항 참조)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들을 실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죄의 구조를 공동선의 구조로 바꿔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초대합니
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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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1─2장이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3장의 시작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도록 파견된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공적으로 처음 등장하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이 먼저 등장하는데, 이러한 이야기 순서는 그의 위치와 역할을 설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등장을 묘사할 때 같은 그리스 말 동사 ‘파라기노마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동사는 3장 1절에서는 ‘나타나다’로, 3장 13절에서는 ‘찾아가다’라는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예수님과 맺어진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는 세례자 요한의 신원은 같은 복음 선포 문구의 사용으로 추가로 증명됩니다. 곧 3장 2절에서 사용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4장 17절에서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선포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설교의 중심에는 하늘 나라가 있었고, 그는 하늘 나라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회개를 제시하였습니다. 3장 5-6절과 7-8절에 묘사된 두 개의 예시는 세례자 요한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첫 번째 사례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에서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찾아와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곧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을 꾸짖으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합니다. 첫 번째는 긍정적 예시를, 두 번째는 부정적 예시를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선포되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입니다(교황청 경신성사성, 『강론 지침』[Homiletic Directory], 2014. 6.2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제1판[2015], 90항 참조). 세례자 요한은 ‘부름받은 백성’ 또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사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 곧 죄의 상태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심과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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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용태 마태오 신부님]
<우상>
“한 시간 안에 끝내주세요!” 주일 10시 반 교중미사 후에 지휘자가 와서 그런다. 왜냐고 물으니 성가연습을 하려면 교중미사가 11시 반 이전에는 끝나야 한다는 거다. 평일에는 잘 안 모이니까 주일 교중미사 후에 연습해야 한단다. 그래서 물었다. “성가연습은 왜 하세요?”
가끔 본말 혹은 주객이 전도된 경우를 보게 된다. 미사를 위한 성가연습이지 성가연습을 위한 미사일 수가 없는데 이를 거꾸로 생각하는 것처럼 수단이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경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이런 모습들이 참 많다. 그리고 그중 많은 경우가 우리 삶의 목적이 되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심각한 결과를 야기한다. 학업이 학생을 위해 있는 것인데 학생이 학업 때문에 자살하는가 하면, 돈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국가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인데 국민이 국가에 의해 희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목적이 되어 버린 수단’을 우리는 다른 말로 ‘우상’이라 부른다. 우리의 유구한 신앙전통 안에서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했던 우상숭배의 죄란 한마디로 수단이 목적을 가리고 도리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우상숭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지는 걸까? 한갓 수단 때문에 소중한 목적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어찌 범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자신의 욕망이 수단에 투사되어 목적처럼 드러나는 것이고 둘째는 수단이 너무 화려해서 목적을 가려 버리는 것이다.
우상은 욕망의 결정체다. 물욕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재물은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삶의 이유가 되어 버리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권한은 국민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국민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 버리고 공명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명예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아니라 자신의 값어치가 되어 버린다.
한편 우상은 늘 호화롭고 찬란하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만일 그 손가락을 금은보화로 치장해놓는다면 사람들이 과연 손가락을 볼까 아니면 달을 볼까? 손가락을 바라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수단이 너무 화려하면 목적은 가려지고 수단만 보인다.
결국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려면 화려한 수단에 현혹되지 않고 목적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비움의 자세가 필요하다. 세례자 요한이 화려한 차림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아니라 초라하게 서 있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스스로를 온전히 비우고 낮추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하늘나라를 위한 회개’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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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용하진 실바노 신부님]
<후회하십니까? 회개하십니까?>
우리가 지내고 있는 대림 시기는 이미 오셨던 주님을 기억하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기다림이 지루하거나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설렘입니다.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일이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 이야기를 전하는 오늘 복음은 설렘을 안고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에게 그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합당한 준비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지난 대림 제1주일의 주제가 ‘깨어 준비함’이었다면, 오늘 대림 제2일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에서 시작하지만, 후회에만 그치진 않습니다. 후회가 과거의 말과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라면, 회개는 그것을 포함하며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즉, 회개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과 내일’을 위한 새로운 출발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는, 변화되고자 하는 삶에 장애가 되는 지난날의 잘못을 찾아내는 성찰과 이를 아파하는 통회뿐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려는 결심과 구체적인 실천까지 아우르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죄 없는 스승을 팔아넘긴 걸 후회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승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사도로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후회와 회개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후회는 잘하지만, 회개에는 미숙합니다. 신학생 시절, 고해성사를 보고 나서 영성 지도 신부님께 “신부님, 보속이 지난번과 같은데요? 새로운 보속거리는 없을까요?” 하고 웃으며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신부님도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고백한 죄가 지난번과 똑같아서 나도 같은 보속을 준 건데!”
분명 농담 같았지만, 뼈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거기엔 늘 반복되는 같은 고백과 같은 후회를 하지만 새롭게 변화되지는 못하는 저를 향한 따끔한 가르침이 담겨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열심히 드리는 고해성사만큼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에도 열심이시겠죠?
매번 반복되는 같은 모습, 같은 마음, 같은 삶으로 맞이하는 ‘주님의 오심’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변화된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실 주님을 설렘으로 맞이하는 대림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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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오주환 요셉 신부님]
<우리가 지녔던 첫 마음>
우리는 지금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대림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구세주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노력을 해야 할까요? 세례자 요한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회개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길을 어떻게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묵시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 2,4-5)
과연 우리가 지녔던 첫 마음은 무엇일까요? 저도 세례를 받던 날의 마음은 간절한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주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이 없었기에 기도문도 잘 못 외우고, 교리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과연 주님께서는 저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실까? 주님께서 저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신다면, 뭐든지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제가 세례를 받을 때에 마음을 기억하곤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처음에 지니셨던 그 마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마음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유혹에 빠져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는 신앙회복을 위해서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 기도문을 받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코로나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이 흔들려 주님을 멀리했다면, 이제는 회개하고 주님께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구세주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잘못을 저질렀다면,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되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가 당신 자녀임을 잊지 않고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녔던 그 마음으로 주님께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는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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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재구성한 세례자 요한의 설교>
마태오 3,1-12 (세례자 요한의 설교)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재구성한 세례자 요한의 설교>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벗들이여!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벗들이여!
회개하십시오!
삶의 방향을 바꾸십시오.
제멋대로 가던 길에서 돌아서 하느님께로 향하십시오.
제 살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길을 걸으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늘에 계신 분께서(5,48; 6,9: 7,21) 땅을 다스리러 오십니다.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예레 15,19)고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오십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한걸음에 하느님께 달려가십시오.
인간의 죄악과 불의로 죽어버린 고사목(枯死木) 그루터기의 죽은 뿌리에서 피어나는,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 ‘지식’과 ‘경외’의 영을 가득 머금은 햇순과 새싹(이사 11,1-2 참조)으로 주님께서 다가오시니, 지금 당장 죽음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서십시오.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는”(이사 11,2) 분께서 오시니, 화려하게 덧칠한 부패의 옷을 미련 없이 찢어버리고, 회개의 옷, 청렴의 옷, 정의의 옷, “힘든 일을 하거나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사람, 철저히 복종해야 하는 사람이 입는 옷”, 곧 “세련되지도 우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낙타 털 옷”(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교부들의 성경 주해, 신약성경1, 마태오 복음서 1-13장, 분도출판사, 105쪽)을 입으십시오.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는”(이사 11,3) 분께서 오시니, 독을 품은 감언이설과 진실을 왜곡하는 추잡한 변명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저 ‘사람이 되시어 여러분 가운데 오시는 말씀’(요한 1,14 참조)을 담은 소리가 되십시오. 그리하여 큰 소리로 외치십시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이사 40,3) 라고.
그분은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러”(이사 11,4) 오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불의한 권력과 추악한 탐욕이 나뒹구는 환락의 도시가 아니라, 짐짓 거룩함과 고상함의 높은 장막으로 두른 위선의 성전이 아니라, 힘없는 이들 근근이 살아가는 척박한 광야로, 빼앗긴 이들 내쫓긴 변두리로, 가난한 이들 한숨소리 그칠 줄 모르는 거친 땅으로 나가십시오.
그분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니”(이사 11,4), 정녕 그분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불의와 위선을 일삼는 권력자들에게 당당하게 맞서십시오. 두려움 없이 꾸짖으십시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라고. 정녕 그분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선을 행하다 의롭게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하십시오. 아니, 여러분이 그렇게 죽으십시오.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벗들이여!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벗들이여!
내가 앞장서가니 나를 따르십시오.
내가 기꺼이 내 뒤에 오실 분이 밟고 지나갈 길이 되리니
벗들 역시 기쁘게 그분의 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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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영성으로 살아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렸지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시간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당신의 숨, 영을 불어넣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능으로 살지 아니하고 이성으로 삽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갖고 한 차원 더 나아가 영성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보면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쩌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이사11,6-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난폭합니다.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가 됩니다. 더군다나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사자나 늑대가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제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난폭한 습성을 버리고 오히려 양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면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다음 수백 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이 변했습니다. 몸을 파는 창녀가 제 습성대로 살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을 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다 떠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는 더러운 습성을 버리고 주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은총이 충만했습니다.
사납게 굴던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한마디로 온순하게 되었고, 남을 등쳐먹던 세리 자캐오가 자기 습성이나 본능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네 곱절로 갚았습니다. 서로 미워서 등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죽었던 나자로가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때로는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놔두고 그야말로 삶의 터전을 떠나 기꺼이 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능적으로 살았을 때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가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새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린 강도도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0) 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본능대로 살지 않고 악습대로 살지 아니하며 잘못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음 보따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면 그래도 봐 줄 수 있는데 남 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남이야 상처를 받건 말건, 상대방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것을 다 떠벌립니다.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진실성은 사라지고 자기 본능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요. 평상시에는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하고 꽁무니를 빼던 사람도 남을 흉볼 때는 어찌나 그리 말을 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주님을 영접하려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자와 늑대, 표범이 사나운 입을 다물고 새끼염소나 송아지와 함께 지내듯 사나운 입을 다물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아직도 뒷담화를 하십니까?” 묻습니다.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프란치스코교황)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 신부님께서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으셨기에 저런 말씀을 하실까? 누굴 두고 하는 말씀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누굴 두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자기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보고 고칠 것을 고치면 되는데 남에게 먼저 관심을 두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면 나는 쏙 빼놓고 다른 사람만이 죄인인 줄 생각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비를 청하면 되는 것인데 왜 그리 힘이든지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폭음과 폭식을 하고는 탈이 나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질투로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보다 더 넓은 땅을 사면 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분노, 적개심...
혹시라도 이런 마음이 있다면 오늘 그 본능적인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성령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회개한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사도 26,20)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나의 좋지 않은 습관, 삶의 태도를 한 가지라도 바꿀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 3장 10절에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 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도끼가 뿌리에 닿아있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지금 좋은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하셨으니 여러분은 부디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곳간을 차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두 번째 대림초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밝아 졌기를 희망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콜로새서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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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뵙고 싶어졌습니다. 전화할 수도 없고, 편지를 써도 수신이 가능한 주소도 없습니다. 기도해도 부모님께서는 침묵 중이셨고, 꿈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무작정 운전해서 부모님 산소에 갔습니다. 산소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그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무기력한 마음마저 더해져 우울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비가 쏟아졌습니다. 쌀쌀한 날씨였는데, 비까지 맞으니 추워서 도저히 산소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미사 가방을 챙기고, 부모님께 인사한 뒤에 차 있는 곳까지 뛰었습니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산소까지 차를 끌고 갈 수 없었기에, 한참을 비 맞으며 뛰어야만 했습니다.
차에 도착해서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는 순간, 우울한 마음이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차를 운전하는데 라디오에서 아주 멋진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저를 위로해주고 힘내라며 옆에서 가수가 불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 주인과 직원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해서 나가려고 하자, 괜찮다면서 주문받습니다. 비 맞은 제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자기들이 먹는 계란 후라이가 남았다면서 먹으라며 주십니다. 식당 주인의 배려에 감동하며 정말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외로움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서 생겼음을 비 맞으며 뛰다 보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노래를 듣고, 계란 후라이를 먹으며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음을 그래서 외롭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함께하는 주님과 나의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으쌰~”를 외치며 힘차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자기만의 구원을 위해 이렇게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미리 알려준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무기력함과 함께 희망 없는 삶이라며 절망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때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즉,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또 세례자 요한처럼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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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삽시다>
-꿈. 공부, 찬양, 회개-
오늘은 대림2주일이자 제41회 인권 주일이며 제12회 사회교리 주간 첫날입니다. 주님 오실 날도 점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 둘이 우리 내면의 어둠을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라며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오늘 인권주일과 사회교리 주간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면서 제대로 인권을 누리며 살게 하기위한 구체적 처방이 사회교리입니다.
“사회교리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공동선을 증진할 수 있도록 사회의 다양한 영역의 현실을 관찰하고, 복음에서 제시하는 기준으로 성찰하며, 성찰한 바를 구체적인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대로 인권신장과 유지를 위한 사회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성공부와 필히 함께 가야할 사회교리 공부입입니다. 방금 흥겹게 부른 화답송 후렴의 시편 기도가 이런 우리의 열망을 표현합니다.
“정의가 꽃피는 그의 성대에 영원히 평화넘치리이다.”
정의가 꽃피고 평화가 넘치는 세상은 예언자들은 물론 우리 인류의 가장 깊은 염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도처에서 정의와 평화가 유린되는 세상을 목격하곤 합니다. 어제 국회앞에 모인 민주노총 6000명의 노동자 대회의 다음 구호를 통해 정의와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 지 깨닫습니다.
“죽일테면 죽여라. 어차피 이렇게는 못산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은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청년 자살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제하에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자살 사망자들은 2778명이었고 그중 20대 사망자들은 56.8%인 1579명 하루 4명꼴이며 그 추세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합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입니다.
“자살예방은 사라져가는 사람들을 삶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역할이지만, 사람은 삶의 일정 조건들이 충족돼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예방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자살 원인을 해결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이 중요하다. 인간은 ‘죽고 싶은’ 충동보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지지해주는 이만 있어도 자살 충동은 크게 줄 수 있다.”
이런 작금의 어둔 현실 앞에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절박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리하여 대림2주일 강론 제목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정했고 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꿈꾸라!”입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사람만이 꿈을 꿉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삶, 살아있다 하나 죽어있는 삶이요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끝까지 버텨내고 견뎌낼 수 있습니다. 꿈이 희망이 없으면 곧장 무너집니다. 꿈이 없는 세대는 길을 잃은 세대입니다.
꿈중의 꿈이 궁극의 꿈이 하늘나라의 꿈, 평화의 꿈입니다. 예수님은 물로 성서의 모든 예언자들이 하느님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제시하는 평화의 꿈, 유토피아의 꿈도 우리를 한껏 고무하며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대림시기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이런 모든 피조물이 평화롭고 정의롭고 조화로운 세상일 것입니다.
“늑대가 새끼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고무적인 꿈이요 비전인지요! 그대로 성탄 밤미사 때 제1독서에서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런 평화와 조화의 세상이 우리의 궁극의 꿈입니다. 이런 평화의 꿈이 있어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 수 있습니다. 끝까지 안주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한 품위을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꿈을, 희망을 잃어가는 오늘날 세대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 생생해야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공부하라!”입니다.
꿈을, 희망을 키워주는 공부입니다. 하느님 공부, 성경공부, 말씀공부요, 졸업이 없는 평생공부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비로소 무지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병인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처방인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빛이요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가고 나를 알아 갈수록 자유로운 삶에 하늘나라의 꿈도 희망도 늘 생생히 지닐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을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성경공부는 꾸준해야 하고 한결같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권하는 바, 매일미사책을 통한 하느님 공부, 말씀공부입니다. 입당송부터, 영성체후 기도까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에 간직하며 기본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활화, 말씀의 일상화, 말씀의 습관화에 매일미사책을 통한 공부의 수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매일미사까지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습니다. 이렇게 부단히 말씀을 통해 영혼을 튼튼히 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찬양하라!”입니다.
찬미, 찬양의 기쁨으로, 행복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입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의 기쁨과 행복도 하느님 찬양에 있습니다. 하느님 찬양은 영혼의 본능입니다. 찬양의 기도와 삶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제 행복기도중 다음 대목에서도 찬양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주님,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바오로 사도 역시 찬양의 기도를 바칠 것은 권고합니다. 제2독서 후반부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들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찬양과 감사의 삶과 기도가 샘솟는 영적 삶의 원천이 됩니다. 하늘나라의 꿈도, 말씀공부도 하느님 찬미와 찬양의 기도와 삶을 통해 비로소 실현됩니다. 부단한 찬양의 삶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넷째, “회개하라!”입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가 평화의 꿈을 보여줬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말씀공부와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회개를 강조합니다. 대림1주일의 주제가 “깨어있어라” 였다면 대림2주일의 주제는 “회개하여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우선 선포한 것도 회개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인생 광야 여정의 순례자들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이어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촉구합니다. 마음으로만 회개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회개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
하느님의 심판 앞에 일체의 기득권은 무용지물임을 천명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당신 뒤에 오실 예수님께서도 가차없는 심판을 하실 것을 예고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과연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알곡의 삶인지, 혹은 회개가 없는 쭉정이의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의 삶이요 알곡의 삶입니다. 구체적 회개의 실천으로 바오로는 서로 받아들일 것을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회개의 은총입니다.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기다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도와주십니다. 이샤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이런 성령 충만한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회개의 은총이요, 우리 또한 성령 칠은을 받습니다. 또한 이런 성령의 은총이 우리를 끊임없는 구체적 회개의 실천으로 이끕니다. 참으로 이런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1.늘 하늘 나라를 꿈꾸는 삶, 2.늘 말씀 공부에 충실한삶, 3.늘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 4.늘 회개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성령충만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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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 제2주간은 '사회 교리 주간'입니다.
불을 밝힌 대림초 두 개가 주님께서 좀 더 가까이 오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오늘 복음(마태 3,1-12)에서 세례자 요한이 설교하고 있는 '회개의 세례'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권 주일은 'Imago Dei' 곧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인간의 존엄성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이러한 인권이 잘 보호받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교리'는 이에 대한 '교회의 구체적인 가르침'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두 개의 교리'가 있습니다. 곧 '믿을 교리와 지킬 교리'입니다. 이 두 교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교리이자, 하나의 사랑(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회교리'는 예수님 말씀에 근거합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마태7,21)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마태25,31-46)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10,29-37)' 등등
'사회 교리란?' 인간노동, 경제생활, 정치공동체, 환경보호 등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세상 안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교리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하고 있는 회개의 세례는 분리되어 있는 두 교리(믿을 교리와 지킬 교리)를 하나가 되게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비참한 이들, 소외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들을 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 특히 부와 자산을 소유한 사람들의 의무입니다."('모든 형제들' Fratelli Tutti, 285항)
모두의 구원인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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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HCQL7Wxzs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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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마태 3, 11)
하늘 나라와
회개는
가까이 오신
예수님의 인격을
맞이하는 인격의
힘찬 기쁨입니다.
회개 없이
가까이 온
하늘 나라를
사람이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까이 온
하늘 나라와
회개를 힘차게
이야기합니다.
회개는
존엄한 인권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의 인권은
구체적인
사회 교리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소중한 사람의
회개입니다.
준비 없는
겸손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광야의 여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겸손한 삶의
힘찬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의 길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와 새로워지는
세례를 통해
주님의 길은
마련됩니다.
나의 길이 아니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
겸손입니다.
물로 세례를 주는
요한 세례자의
세례를 아우르며
성령과 불로
우리를 세례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거짓을 태우시고
진실은 모아들이시며
모순된 삶을 깨끗이
바꾸어 놓으십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많은 것을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시는
합당한 분이십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다시 깨끗하고 겸손한
우리의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변화의 도끼는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아 있습니다.
좋은 열매는
우리의 참된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
하나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회개의 대림이
주님의 길을
만나는 기쁜
회개이길
기도드립니다.
광야에도
길이 있고
삶에도
길이 있습니다.
길은 길을
닦고 길을
고르게 내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주님의 길
사람의 길을
새롭게 하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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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 1)
모두가 소중한
주인공들입니다.
방향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회개는 방향을
가르쳐줍니다.
가까이 온
하늘 나라를
가리킵니다.
가장 낮아진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회개는 우리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께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존중에서
더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회개를 따라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합당한 열매는
분명 회개입니다.
회개의 힘을
믿습니다.
회개로 주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인권 주일을 통해
인간 존중의 이유를
예수님을 통해
만나시길 기도드립니다.
회개에는
회개하는 정직한
인격이 있습니다.
소중한 인격을
위한 대림시기
입니다.
회개의 길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안에서 소중한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켜주는
인격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요란한 것이 아닌
고요해지는
회개입니다.
회개와
하늘 나라는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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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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