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이야기/ 이몽룡의 실제 인물 성이성(成以性)
경북 봉화(奉化)를 가고 있다. 창녕성싸 계당공파 130여 명이 관광버스 4대에 나누어 타고 선조 순례차 춘향전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 이몽룡의 생가를 찾아 봉화로 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이 글의 제목이 '이몽룡의 실제 인물 성이성'이라니 이는 또 무슨 말인가. 이를 밝히기 전에 우선 춘향전에 대하여 알아보자,
*. 춘향전 이야기
한국문학 중 소설을 전공하고 있는 미국인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고대소설(古代小說) 하나만을 들어 보라 하였더니 그 답이 기대하는 춘향전(春香傳)이 아니고 구운몽(九雲夢)이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정절(貞節)은 목숨보다 하위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 춘향전에 비하여 구운몽(九雲夢)은 주인공 양소유가 8선녀와 더불어 하늘 나라와 이승을 넘나들며 노니는 로맨스가 얼마나 멋지고 호탕한 볼륨이 있는 작품인가 하더란다. 그래서 춘향전은 구운몽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춘향전을 논한다면 솔직히 말해서 모순이 많다.
당시 사회상으로 보아 일개 기생의 딸인 성춘향이가 현령인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하며 맞설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춘향과 헤어진 지 1년 정도의 시간에 어떻게 이몽령이 어사가 되어 남원에 내려와서 변학도를 응징할 수 있는가. 당시의 제도상으로 가능한 일인가. 이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국문학을 전공한 필자가 춘향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다가 여러 사전(辭典)에게 춘향전애 대하여 물어 보아 찾은 이야기 들이다. 여기서는 주로 국어국문학사전(서울대학교동아화연구소 간)의 춘향가를 많이 참조하였다.
-춘향전은 한국고대소설의 대표작 작품이다. 주인공 이몽룡(李夢龍)과 여주인공 성춘향(成春香)의 연애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의 사회적 특권계급의 횡포와 이속(吏屬) 및 농민들의 생태와 감정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변학도(卞學徒)의 관권에 대한 천민(賤民)들의 항거와 자의식의 발로를 높이 평가 되며, 춘향의 정절(貞節)을 당시 부도(婦道)의 거울로서 삼아 찬양하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몇 군데 모순이 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서민들은 이를 무시하고 그들의 꿈의 실현을 위해서 이론을 초월하여 모순을 뛰어넘어 서민들이 꿈꾸는 세계를 무리하여서라도 만들어 놓은 이야기가 춘향전의 스로리란 것이다.
춘향전은 원래 조선 말기의 판소리나 판소리계 소설을 말한다. '춘향가', '춘향타령', 열녀춘향수절가(완판본; 전주본), 옥중화(이해조 신소설 및 창극 대본) 등 한글본, 한문, 영역, 프랑스, 영국, 독일, 덴마아크, 일본, 중국본 등 그 종류가 100 여종이나 되어 소위 춘향소설군(春香小說群)을 이루고 있는 한국 고전문학의 최고 걸작이다.
-'국어사전 (이희승 편 참고
춘향전의 기본적인 풀롯은 춘향과 이도령의 연애담에다가 춘향을 탐내는 변학도에 대한 어사 이몽룡의 통쾌한 응징으로 내용이 거의 같으나 이본(異本)에 따라 그 사설이 조금씩 다르다. 춘향전 한문본에서는 어사 이몽룡의 이름이 다르고 어사가 출두를 당시 실정에 맞게 합리적으로 하기 위해서 어사 이몽욜이 변학도와 술 한 잔 마시며 춘향이 자기의 애첩임을 들어 부탁하는 대목이 나온다.
춘향전의 이본에 따라서 성춘향이의 신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퇴기 월매의 딸이 아니라, 성참판(成參判)이나 성천총(成千摠)의 서녀(庶女)로 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기생(妓生)으로 나오기도 한다.
춘향의 이러한 신분에 따라 춘향이의 몸가짐도 그 신분에 맞게 기생일 때는 이몽룡에 대한 애정 행각이 읽기에도 민망스러울 만큼 노골적이다가 서녀 때는 점잖아지는 둥 각가지로 달라진다.
작자연대 미상인 이 춘향전을 국문학자들은 춘향전이 지어질 당시 시중의 염정설화 (艶情說話)인 영남의 '아랑(阿娘)형 설화', 선조 대의 '심수경(沈守慶) 설화' 등이나, 남원의 신원(伸寃)설화인 '박색터 설화' 등에다가 암행어사(暗行御史) 설화인 선조 때 '이시발(李時發) 설화', 노'진(盧진) 설화', 광해군 때 '성이성(成以性) 설화', 현종 때의 '김우항(金宇杭) 설화'나 영조 초의 '박문수(朴文秀) 설화' 등이 혼합되어 이를 광대들이 판소리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완성된 이 판소리 춘향가가 고대소설로 신소설로 창극으로 발전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이몽룡은 실제인물인 성이성(成以性)이라고 하는 것이 유력한 학설이 되었다.
'춘향전은 성이성의 모델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학설이 인정 받고 있는 것이다. 연세대 설성경 박사의 박사 논문이 그 연구였다.
그래서 국문학을 전공한 나도 성이성이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의 실제인물인지를 찾아 우리 창녕성씨 계당공파와 함께 경북 봉화(奉化)로 가고 있는 것이다.
*. 이몽령의 실제 모델인 성이성(成以性)
봉화에 생가가 있다는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인물 계서 성이성(溪西 成以性)은 어떤 사람인가.
성이성의 아버지는 창녕성씨 16대손인 부용당 성안의(芙蓉堂 成安義)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녕에 내려 가서 의병을 1,000명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운 의병장이다. 성이성은 세 아들 중 둘째로 경북 순흥부(영주시) 동면 문단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봉화읍에서 차로 약 20분정도 떨어져 있는 지금의 봉화군 물야면 가평1리로 이사 와서 여기기서 성장했다. 아버지 성안의 처가가 지금의 영주에 있어서, 그의 장인이 땅이 봉화에 있으니 와서 살라고 하여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성사정 아버지 성안의가 남원부사에서 광주목사로 승진하여 남원를 떠나게 되는데 그때 성이성의 나이가 16세 무렵이었다. 진사(進士)였던 성이성은 33세 때인 인조 때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어사화’를 받았다.
성이성은 청렴결백하고 성격이 강직하여 직언을 일삼는 바람에 승진이 순조롭지는 못하였다. 외직으로 진주 강계 등 네 고을을 다스리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나라에 선정 되었고, 영남ㆍ호서ㆍ호남 등지에 암행어사로 4번이나 지방을 순회하였다.
호남어사 시절 두차례나 남원에 내려왔다. .
첫 번째에는 스승인 진사 조경남과 광한루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순천에서 암행어사로 출두의 암행을 끝내고 두 번째로 남원에 갔을 때는 스승이 돌아가신 후여서, 그곳에서 성이성은 늙은 기생 여진과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져서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며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서리와 함께 난간에 앉으니 눈빛이 뜰에 하얗게 깔려있고 대나무숲이 희었다. 나는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하여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 소년 시절의 일을 춘향과 연관시켜서 생각한다면, 이상의 예만으로도 성이성의 행동 반경이 거의 춘향전과 일치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성이성이 이몽룡이란 근거는 어사 출도 시에 쓴 한시가 그가 친필로 쓴 '암행일지' 원본과 인조실록의 '어사파견기록'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교와문고'와 그의 스승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도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성이성이 이몽룡인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왜 성몽룡이라 하지 않고 이몽룡이라고 한 것일까?
-이때 전라도 남원부의 월매라 하는 기생이 있으되 삼남의 명기로서 일찍 퇴기하여 성가라하는 양반을 다리고 세월을 보내되 연장 사순의 당하여 일점 혈육이 없어 일로 한이 되어 장탄수심의 병이 되것구나
-'열녀춘향수절가'에서
위 글에서 보듯이 천인 계습인 춘향 모는 '월매'라는 이름을 쓰고 춘향의 아버지는 '성가라는 양반'으로 성(姓)만을 밝히고 있지 않은가. 이를 보면 당시 계서 성이성은 후세에 성씨 문중에서 계서공파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분인데 이런 분을 기생의 딸과 남녀상열(男女相悅)의 주인공으로 설정 한다는 것은 성씨 문중에서 반대하기 이전에 춘향전을 쓴 광대에게도 필화사건(筆禍事件)에 해당하는 중대한 일이 될 수도 있으므로 이를 피했을 것이라는 유추다.
즉, 당시 사히상으로 보면 그 후손 성씨 문중이 기생과 사랑놀음에 빠진 조상을 부끄럽게 여겨 공개를 막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도령을 이도령이라 하고 그 대신 춘향이를 성춘항이라고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 계서당(溪西堂)과 성이성 묘
'성이성의 생가'나
이몽룡의 생가'라는 안내 이졍표를 따라 가면서 "생가"라고 쓴 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생가(生家)란 무엇인가. '본생가'의 준말로 '양가(養家)'의 반댓말이 '생가(生家)'다. 원래는 양자(養子)가 된 사람이 본디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집을 생가(生家)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현대 사람들이 생가(生家)가 한자 뜻 그대로 출생지인 줄로 착각하여 잘못 쓰고 있는 말이다.
필자는 앞에서 성이성의 출생지는 경북 순흥부(영주시) 동면 문단에서 태어났다고 하였고 현지 계서당(溪西堂)의 소개 간판글의 내용도 '성이성 선생이 살던 집'으로 나온다.
현명한 사람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발견하면 즉시 고치는 사람임을 생각하고 '생가'란 이정표를 서둘러 바꿔야 할 것이다. 생가라는 말의 뉴앙스가 태어난 집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바꿔야 할까. "춘향전의 실존인물이 살았던 이몽룡집으로'가 좋겠다.
아니면 국어원에서 생가의 뜻을 확대해야 할 것 같다. 구미의 박정희 대통령이나, 거제도의 김영삼 대통령의 집도 그 이정표를 '생가'라고 쓰고 있으니 사전식으로 말한다면 두 대통령이 다 양자가 되고 만다.
'生'이란 한자의 또 다른 뜻이 '생활'(生活)이란 뜻이 있으니 생가의 뜻을 확대해야 한다. 언어도 신생 성장 사멸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찾아간 성이성이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溪西堂'은 성이성이 살던 집으로 봉화군 물야면 가평1리 산 기슭의 한적한 마을에 있는 여러 채 기와집인데 오른 쪽에 신주를 모신 사당이 있었다. 이를 창녕성씨의 27대 종손인 성기호씨가 관리하고 있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같은 일가끼리라 그 많은 사람들에게 차로 바카스로 대접이 후하여 고향에 온 것 같다.
우리 창녕성씨 계당공파 종원들은 이분의 설명을 듣고 단체사진으로 오늘을 기념하였다.
27대 종손 성기호 설명
우리들 16대 할아버지 성이성니 춘향전 이몽용의 모델이셨다고 생각하니 우리들은 그 분의 부인의 이름이 긍금해진다. 그 부인은 금씨로 두분 사이에서 6남 3녀를 두고 향년 70세에 돌아가셨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