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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4:1-7 | |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는 스캔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점잖고 경건한 이야기만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늘 경건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속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추하든, 어렵든, 힘들든, 인간적이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믿고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오늘 본문 말씀의 뉘앙스가 디나를 탓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세겜이라는 남자입니다. 디나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입니다. 세상이 여성들에게 갖는 차별은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여성을 탓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좀 더 조신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 아니냐, 네가 품행이 단정치 못했으니 이런 일이 생긴 것 아니냐, 네가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느냐’ 이런 식으로. 그러다보니 불미스러운 일의 피해자가 된 것도 가슴이 아픈데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자기 잘못인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 같은 비난을 받음으로 두 번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전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탓하는 것과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교회를 빠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교회를 나가지 않은 주에 어떤 사고가 발생했다면 교회를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빠진 것이,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것이 나를 영적으로 허술하게 만들어서 시험으로부터 취약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네델란드 소년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네델란드의 제방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바닷물이 졸졸 새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소년이 밤새도록 손가락으로 그 구멍을 막아서 그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소년이 막지 않았다면 둑이 무너졌을 것이고 그 동네가 물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둑이 있습니다. 세파로부터, 시험으로부터,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줄 수 있는 둑, 제방이 있는데 여기에 구멍이 뚫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물이 샙니다. 우리는 그 둑을 관리해야 됩니다. 만약 둑에 구멍이 뚫렸는데 방치하면 결국은 그 둑이 무너져버리게 되고 큰 환란이 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네델란드 사람들은 바다의 위협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네델란드는 땅이 바다보다 낮았습니다. 네델란드라는 이름 자체가 ‘낮은 땅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 국민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둑을 쌓고 제방을 쌓고 그렇게 생존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풍차도 그런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재앙, 위협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 안됩니다. ‘어찌 그럴수가...’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어찌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전제하고 그 가운데서 우리가 망하지 않고 안연히 거하고 살 길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찬송가 중에 ‘이 세상에 괴로운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괴로운 일이 많고 죽을 일이 쌓였습니다. 참 무서운 표현입니다마는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가 망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지켜주심 덕분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액션 영화 같은 것을 보면서 출연 배우가 어떤 시련을 당할 때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어찌 이런 일이 내게 발생하는가’하는 그런 표정으로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제발 현실을 받아들여서 영화가 끝날 때가지 ‘어찌 이런 일이’ 이런 표정으로 연기를 하지 말고 그 일의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극복하는 법을 빨리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의 전환을 해야지 끝까지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하고, 힘들어 하고, 불평해서는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것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모고라를 멸망시키실 때 빨리 산으로 뛰어가라고 했습니다.「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했는데 왜 롯의 아내가 빨리 뛰어가지 않고 뒤를 돌아봤을까요? 새로운 상황, 새로운 하나님의 인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 마음이 쉽게 소돔을 떠나지 못하고 자꾸 마음이 뒤로 끌렸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빨리 산으로 도망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옛날에 통금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밤 12시 이후에는 길거리에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방범대원들이 있어서 통금이 되고 나면 두 개의 긴 막대기를 서로 부딪쳐서 ‘딱, 딱’ 소리를 내면서 순찰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의 두 가지 일이 인상에 남아있습니다. 밤이 되면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찹쌀 떡~’ 하고 외치는 소리와 방범대원들이 ‘딱, 딱’ 소리를 내면서 거리를 순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막대기로 소리를 내는지 아십니까? 도둑이 듣고 오지 말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리는 것입니다. 방범대원이 있으니까 도둑이 이 소리를 들으면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파수꾼이 파수를 서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도적이 있습니다. 마귀가 도적과 같아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려고 합니다. 도적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때문에 파수꾼이 깨어 있어서 기도로, 말씀으로, 예배로, 믿음으로 막대기를 두드려야 됩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 믿음의 사람이 여기에 있다, 이 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집이다, 여기는 하나님의 교회다 하면서 막대기를 딱딱 두드려야 도적이 들어오려고 하다가도 들어오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소리, 우리의 예배, 경건, 순종, 이런 모든 것이 파수꾼의 경성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파수꾼이 잠이 들면 그때 도적이 몰래 들어옵니다. 우리가 늘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in the world-세상에서 살지만 그러나 not of the world-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으면 안됩니다. 세상에서 학교도 다니고, 직장생활도 하고, 친구도 있고 세상에서 가정을 이루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지, 세상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우리가 늘 유념해야 합니다. 외국에 사는 교포들과 같습니다. 지난 2006년 월드컵 때 외국 교포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TV를 보면서 전부 빨간 색의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한국팀을 응원하던데 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도 있고, 거기서 태어나 그 나라 말도 유창하게 하고 문화적으로도 동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나는 코리안’이라는 Identity가 있어서 한국과 외국이 시합을 할 때 한국을 응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삽니다. 세상에 동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공부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돈도 벌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원래 거룩함이라는 헬라어의 단어 자체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구별되었다는 데에서 거룩함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디나의 실수는 1절에 있는 것처럼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간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 땅이라는 것은 이방 민족이 사는 땅을 말합니다. 디나가 그 땅의 남자들을 보러 나간 것이 아닙니다. 여자들을 보러 나갔습니다. 저는 여성들이 예쁜 옷을 입고 치장을 하는 것이 남자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여성을 의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옷이 요즘에 유행하는 옷인지, 어느 브랜드인지, 얼마짜리인지, 유행에 앞서가는지 뒤처지는지 이것을 따지는 사람들은 여자들입니다. 남자들은 여성의 옷이 무슨 브랜드인지, 얼마인지, 유행에 뒤진 것인지 앞선 것인지보다 예쁜지, 예쁘지 않은지 한 가지만 따집니다. 그 외에 저 가방이 얼마짜리이고, 저 구두가 얼마짜리인지 남자들은 상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런 것을 따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요즘에 어떤 옷이 유행하는지, 어떤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헤어스타일은 어떠한지, 여자들이 사는 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애교로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을 알려고 한다든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 그들의 성윤리, 물질관 등을 보기 시작하면 세상을 흉내 내기 시작하게 됩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지 않는 사람과 사귀면, 믿고, 믿지 않고는 둘째 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사람을 사귀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사귀는지,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전도할지 아니면 그 사람이 나를 전도할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친구를 사귀어야 그들을 전도할게 아니냐고 하는데 이론적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친구가 믿는 친구를 전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누군가와 사귀는데 그 친구가 기회만 되면 기독교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해도 그래도 내가 같이 있어줘야 전도하지 않겠는가 생각하지만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죽은 사람이 일어나도 ‘원래 죽지 않았어’라고 말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세가 잘못 돼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같이 있다 보면 여러분의 신앙도 손해를 보게 됩니다. 믿을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믿을 사람은 아예 신앙에 대해서 평소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도 교회에 가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교회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 사람은 백년, 이백년이 지나도 진정한 회개 한번 하기 힘듭니다. 처음부터 성경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교만이 깨져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러면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지 내가 친절하게 대한다고해서 회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냉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려서 이런 식으로 투정을 부려서 되는 것이 아니구나, 투정부려도 받아줄 사람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도 투정을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이 투정을 받아줍니까. 투정을 받아주어서 회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투정을 받아줄지 모르지만 그 외의 이 세상에 투정을 받아 줄 사람 없습니다. 철이 들어야 됩니다. 깨어나야 됩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신중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해야 될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투정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미국의 펜실베니아주에 가면 Amish라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있습니다. 영화 증인에 잠깐 소개가 됐었는데 이 사람들은 기독교 교파의 일종입니다. 이들은 옛날에 살던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마차를 타고 다니고 그들이 사는 집이든 마차든 직접 손으로 만듭니다. 여자는 긴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수건을 씁니다. 성경에 여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머리를 가려야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수염을 기르고 검정색 정장을 입고 검정색 모자를 씁니다. 이십 일 세기에는 좀 우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세상에 동화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선택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대조적으로, 세상에 섞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이 입는 옷이든, 그들이 사는 방법이든, 하는 행동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니 거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밤에 집을 지켜줄 파수꾼이 없습니다. 도둑이 들어와서 송두리째 털어가도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왜 마음에 기쁨이 없을까요? 왜 마음에 평강이 없을까요? 왜 우리 집은 늘 다툴까요? 많이 버는 것 같은데 왜 늘 부족할까요? 왜 늘 시험이 끊이지 않을까요? 도적이 와서 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내 것을, 우리의 것을 원수가 털어가고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 그 사실 조차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과 딸을 더 이상 차별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는데 요즘에는 둘도 낳지 않습니다. 그러나 딸을 키우는 것이 아들을 키우는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제가 가부장적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디나가 이방 여자들이 사는 것을 보러 나갔다가 욕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이스라엘이 교회를 뜻한다고 보면 교회에서 부끄러운 일,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딸을 키우는 부모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분들, 자매님들은 하나님의 딸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세상이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그대로 좇아가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지켜보던 눈을 돌려야 됩니다. 거기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방황했던 것입니다. 얼굴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