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각양(兩脚羊) 제2권
지은이: 고월·한상운
- 차례 -
제 십 장 납치(拉致)
제십일장 선택(選擇)
제십이장 전야(前夜)
제십삼장 음주(飮酒)
제십사장 혈전(血戰) -1-
제십오장 혈전(血戰) -2-
제십육장 전환(轉換)
제십칠장 계획(計劃)
제십팔장 탈출(脫出)
제십장 납치(拉致)
1
태양은 동녘 하늘에 붉게 이글거렸다.
싱그러운 풀 냄새가 숲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짹, 짹, 짹…….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며 산중에 울려 퍼졌다. 새들은 하나의 대형을 이루며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다지 높게 뜨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근처의 풀숲에서 날아오른 모양이었다.
새들이 날고 있는 방향으로는 숲이 한결 깊어졌다. 새들을 놀라게 한 것은 사람들이었다.
일단의 사내들이 오르막진 산굽이 길을 민첩하게 걸어 오르고 있었다. 산길은 다시 구불구불 아래로 흘러내렸다. 험상궂은 얼굴에 무기로 불룩한 옆구리는 그들이 무림인임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휘이익―!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쳤다. 사내들의 펄럭이는 장삼 자락 사이로 방희태의 얼굴이 보였다. 방희태는 건들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휴우―!"
힘이 드는지 한소리 길게 내뱉은 뒤 그는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좀 쉬었다 가지."
"예."
사내들 역시 부산을 떨며 여기저기에 주저앉았다.
"산이 참 험하군. 날씨도 덥고 말이야."
방희태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주위 산세를 훑어보았다.
"그래도 풍경이 멋지니 보람은 있구먼."
그는 눈을 감고 가만히 시를 읊조렸다.
왜
산에 사느냐기에
그저 빙긋이
웃을 수밖에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분명 여기는
별천지인 것을.
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두 눈을 감고 시의 흥취를 음미하는 듯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정말 듣기 좋지 않나? 당나라 때 대시인인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란 시일세."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내 중 하나가 대답했다.
"시를 읽는 대주의 낭랑한 음성은 정말로 고아하십니다."
그의 심복이자 보안대의 십대(十隊)를 지휘하는 십객(十客) 중 도객(刀客), 추혼도(追魂刀) 유당(劉唐)이었다.
다른 자가 덧붙였다.
"역시 대주께서는 남달리 학식이 있으시다니까요."
콩 심는 시늉을 하면서 대답하는 그들을 보며 방희태는 웃음을 띠었다. 방희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긍정을 표시했다.
"내 목소리가 좀 좋긴 하지."
그리곤 바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단한 바위도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는 못하는 법.
바위는 세월에 의해 풍화되어 있었다. 방희태는 가만히 이끼가 잔뜩 낀 바위를 바라보다 문득 말을 던졌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광석에 불과한 바위가 생각이 있을 리 없다. 당연히 방희태의 물음에 아무 말도 없었다. 일행은 바위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행 중엔 직속상관인 방희태에게 그 사실을 따지고 들 용기를 가진 자는 없었다.
그렇다고 방희태의 행동을 멀뚱히 구경하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
사내들은 바위 안에 뭔가 있다고 믿기로 결심하고 너도나도 무기를 꺼내 들어 바위를 겨누었다. 일부는 멍청히 있다가 다른 이들이 무기를 꺼내자, 뒤늦게 무기를 꺼내 들었다. 몇몇은 방희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버럭 소리까지 질렀다.
"왜 대답을 안해!"
"역시 속된 자에겐 산에 사는 마음을 말해 봐야 소용이 없구만. 시에서 말하듯 그저 빙긋이 웃어야만 하나?"
방희태는 말을 끝내며 혀를 끌끌 찼다.
눈까지 감고 고개를 저어대는 그의 모습은 혼탁해지는 세상을 정말로 걱정하는 듯했다.
갑자기 그의 손이 섬전처럼 바위 위로 폭사되어 갔다. 바위가 푹 꺼지며 피가 튀었다.
그리고 억눌린 듯한 신음성.
그것은 바위로 위장하고 숨어 있던 은신자의 것이었다.
"으……."
바위 안에서도 손이 튀어나와 방희태의 목젖을 쥐려 했다. 손끝에는 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강철이 달려 있었다.
탁―!
방희태의 왼손이 허공에서 빙그르 돌며 은신자의 손목을 타고 올랐다. 방희태는 상대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은신자의 맥문을 쥔 채 방희태는 입을 바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입을 열어 조그맣게 속삭였다.
"맥이 불규칙한 걸 보니 몸이 좋지 않나 보군."
말과 동시에 바위 안으로 찔러 넣은 팔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손목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불규칙하던 맥박은 완전히 멈췄다.
방희태는 바위, 아니 바위로 위장한 은형막에 쑤셔 넣었던 손을 빼냈다. 품속에서 하얀 무명천을 꺼내 피로 범벅이 된 손을 닦아내며 말했다.
"거치적거리는 놈들이 꽤 많군."
삭―! 삭―!
커다란 대감도로 바위를 채를 썰 듯 쪼개고 있는―확인 사살 중이었다―유당을 보며 물었다.
"범천사까진 얼마나 남았나?"
핏물이 튀는 것도 아랑곳없이 유당은 계속 대감도를 내리치며 대답했다.
"거의 다 왔을 겁니다. 일각 정도면……."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
* * *
황산오귀 중 하나인 살귀(殺鬼) 봉하명(鳳遐鳴)이 그들을 주시한 것은 약 이각 정도 전부터였다.
산등성이를 타지 않고 기를 쓰고 험한 계곡 쪽으로 오르는 것도 수상쩍었고, 그들이 향하는 곳이 범천사 방향이라는 점도 수상쩍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이 무림인이란 사실이 수상쩍었다. 그 의심은 그들이 범천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은신자 중 하나를 죽였을 때 확신으로 변했다.
그 깨끗한 수법으로 보아 한 놈은 굉장한 고수였다. 그리고 보면 밥 때가 다되었음에도 산 곳곳에 숨어 있는 은신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그들의 짓일지 몰랐다.
그는 짧게 중얼거렸다.
"막아!"
"예."
뒤에서 더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당분간은 그의 수족인 십이은형단(十二隱形團)이 그들을 막아 줄 것이다. 그는 범천사 쪽으로 뛰었다.
빨리 다른 형제들을 만나 상의를 해야 했다.
* * *
범천사의 조그만 대웅전 건물 뒤쪽으로는 오랜 세월 빗물이 흘러 이제는 제법 커다래진 시내가 있었다. 범천사의 스님들은 그 시내를 주요한 식수원이자 빨래터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굽이굽이 흐르는 시내를 따라 고산(孤山)의 후미진 골짜기로 들어가면 원치 않는 산 생활을 하고 있는 다섯 명의 남자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명을 받고 이곳에서 한 사람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도, 술도 없는 산 속에서 언제 올지 모를 적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선다는 것은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들이 지켜야 할 사람은 손에 흉기를 든 건달이 자기 곁에 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곁에서 보호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 황산오귀는 다섯 명이 번갈아 가며 한 명씩 범천사 근처를 감시하고 나머지 넷은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도박을 벌이거나 했다.
봉하명이 상황을 설명하자, 황산오귀 중 대형이자 그 자신만으로도 유명한 도객인 무귀(武鬼) 유선명(劉宣命)은 물기 없이 바삭거리는 흙담 벽이 흔들리도록 큰소리로 반문했다.
"뭐? 고수들?"
"예."
"휴우―! 역시 세상에 공짜란 없지. 아우들아! 일어나라. 드디어 밥값을 할 때가 왔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남은 삼귀도 엉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즉시 범천사로 향했다.
황산오귀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범천사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냐는 지객승의 정중한 물음에도 아랑곳없이 오인은 성큼성큼 걸어 한 선방(禪房) 앞에 섰다.
"아가씨! 큰 일입니다."
유선명이 한걸음 앞으로 나가며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지만 유선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수십 명의 무림인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그 저의가 심상치 않습니다. 잠시 몸을 피하시는 것이……."
"전 평범한 비구니에 불과합니다. 그냥 돌아가 주시지요."
안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
그러나 유선명의 입장에선 짜증나는 대답이었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냥 두지를 않지요. 소주께서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시더라도 저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
문재(文才)와는 거리가 먼 유선명으로선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설득이었다. 그러나 안에서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유선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쌍년! 누가 제년이 이뻐서 이러는 줄 아나? 어디서 똥고집을 부려.'
대가로 받는 돈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저희도 소주의 뜻을 존중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명을 받은 것이 있는지라……."
동시에 아우들에게 눈짓을 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탁―!
이귀인 색귀(色鬼) 증분(曾粉)과 오귀인 독귀(毒鬼) 마철(馬鐵)이 문고리를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선방에는 여승 한 명만이 앉아 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파르라히 깎은 머리와 길다란 속눈썹이 묘한 부조화를 느끼게 하는 여승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년 그거 묘하게 색감을 자극한다니까.'
색귀라는 별명에 걸맞게 증분은 입맛을 다시며 여승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쁘기만 한가? 집에 돈도 많잖아?
증분은 힘이나 약으로 여자를 잡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끔 여승을 만날 때마다 증분은 자신의 남성적 매력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증분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그럼 실례를 범하겠습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러나 증분은 그다지 섭섭하지 않았다. 안아 일으킨다는 구실 아래 그녀의 탄력 있는 몸을 마음껏 만진다는 두 번째 계획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흐흐흐! 환장하겠군.'
그가 침을 삼키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을 때, 그녀가 갑자기 눈을 떴다.
"좋아요. 따라가겠어요."
나직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정말 김 빠지게 만드네.'
실수를 가장해 그녀의 가슴도 더듬어 볼 생각을 가지고 있던 증분으로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 *
일행은 계속해서 걸었다.
쏘아오는 햇살을 바라보던 방희태는 눈앞의 숲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챘다. 움직임은 미세한 것이었지만 그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숲은 바람에 흔들리듯 움직였다.
그러나 바람은 없었다.
방희태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숲의 입구 양쪽엔 급한 경사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듯했다. 매복하기엔 정말 절묘한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유당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조그맣게 속삭였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간다. 모두들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해."
기습은 갑작스러웠다. 땅 속에서, 나무 위에서 그들은 무기를 들고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미 매복 사실을 알고 있는 방희태 일행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살수에겐 두 번의 기회란 없는 법.
그들의 공격은 자신의 생사를 도외시하는 일격필살의 그것이었다. 피가 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피의 대부분은 은신자의 것이었다.
"빌어먹을!"
은형십이단의 단주 형간(荊幹)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것은 상대가 그의 기습을 너무나도 손쉽게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약간의 충격도 없는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대로 구절연편을 창처럼 찔러오다니.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창!
대감도로 간신히 구절연편을 쳐냈다. 연편은 도에 맞아 밑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연편은 떨어지는 각도 그대로 형간의 다리를 휘감았다.
"이런!"
형간은 대경실색해 구절연편을 쳐내려 했지만 어느새 연편은 그의 다리를 꽉 조이고 있었다.
"욱!"
사금파리를 박아 넣은 연편이라 단지 감은 것인데도 다리가 찢어지는 듯했다. 상대가 그대로 연편을 잡아당기자, 그는 균형을 잃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지이익―!
몸이 상대 쪽으로 끌려갔다.
푹!
대감도를 힘껏 바닥에 박았다.
그 덕분에 다행히 더 이상 상대 쪽으로 끌려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채찍을 팽팽하게 끌어당겼다.
다리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버틸 수는 없었다. 형간은 대감도로 몸을 지탱하면서 다른 손으로 품속의 유성환(流星丸)을 꺼냈다.
손위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쇠구슬.
강철로 만든 쇠구슬은 웬만한 물건은 그대로 뚫고 지나갈 정도로 단단했다.
형간은 몸을 뒤틀며 유성환을 주위를 향해 폭사시켰다.
"욱!"
"악!"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
주위의 비명으로 미루어 최소한 서너 명 이상에게는 적중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채찍을 든 자도 유성환을 피하고 있는지 연편이 약간 느슨해졌다.
형간은 몸을 뒤틀며 대감도로 연편을 내리쳤다.
팍!
연편의 끝이 끊어졌다. 형간은 바닥을 굴려 연편을 든 사내에게 접근했다. 지당도법으로 연편을 든 사내의 다리를 베어 갔다.
상대가 대경실색해 몸을 날려 도를 피해내자, 형간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허공에 도를 뿌려 떨어지는 상대의 목을 벨 생각이었다.
푹!
무언가 단단한 이물질이 형간의 목을 꿰뚫었다.
방희태는 형간의 몸에서 손을 빼냈다. 피가 솟구치며 형간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방희태는 산 위를 힐끔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감돌았다.
"이 정도로 시끄럽게 싸웠으면 들켜도 이미 예전에 들켰겠군."
퍽―!
"이런 불쌍노므 자식."
유당은 씩씩거리며 형간의 시신을 마구 걷어차고―확인 사살 중이었다―있었다. 어깨에서 흘러 나오는 피로 보아 유성환에 의해 조금이나마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툴툴거리는 유당을 보며 방희태가 물었다.
"사상자는 어느 정도지?"
"사망 둘에 부상 다섯입니다."
방희태는 얼굴을 찌푸렸다.
"부상자는 남아서 시체를 지킨다. 나머지만 간다. 그리고……."
방희태는 다시 산 위를 바라보며 말을 멈췄다.
"유당, 너의 삼대는 그대로 범천사로 간다."
이어서 구절연편을 쓰던 사내, 장사귀를 보며 말했다. 장사귀는 조금 전의 험악했던 상황 때문인지 아직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너희 사대는 서쪽 능선을 살피고. 산세가 험하긴 하지만 허점을 노린다고 그쪽으로 도망갔을 수도 있으니까."
장사귀는 단목우와의 싸움 이후 상처가 아물자 보안대 한 대의 대장으로 특채되었다. 얼마 전 전염병으로 죽은 십객 중 하나를 대신해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십객 중 수장(首長)인 검객(劍客) 유치아(兪稚兒)가 검은 자신을 나타내는 별호라고 고집을 부려 장사귀는 연검을 포기하고 연편을 사용하고 있었다.
"난 반대쪽 산길로 나가 보겠다. 그럼 모두 움직여라!"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 유당만이 잠시 멍청히 있었을 뿐이다.
"뭐야?"
방희태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넌 왜 안 움직여?"
"저도 어깨를 다쳤는데… 여기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해서요……."
* * *
여승의 입이 몇 번 움찔거렸다.
'아니야. 안돼.'
그러나 그녀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몸을 피한다면서 왜 사찰 안쪽으로 들어가는 거죠?"
황산오귀는 그녀를 데리고 더 깊숙한 경내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유선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년 알고 싶은 것도 많네. 아까는 도(道)라도 깨우친 것처럼 느끼하게 굴더니 말이야.'
하지만 남에게 매어 사는 입장에서 그런 원색적인 표현을 쓸 순 없는 일. 최대한 점잖게 대꾸해 주었다.
"이미 놈들의 눈에 띄지 않고 빠져 나가기엔 늦었습니다. 이미 주위에는 천라지망이 깔렸을 겁니다."
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여덟 칸 대웅전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은은한 미소의 늙은 여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고 있었다.
"스승님!"
여승은 부끄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늙은 여승은 범천사의 주지승이자 여승의 스승이기도 한 무아대사(無我大師)였다. 무아대사는 자애로운 얼굴로 여승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그래, 옥청(玉淸)아."
포권을 하는 황산오귀를 보며 물었다.
"이 아이의 몸에 위험이 닥쳤습니까?"
유선명이 나서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사. 약속대로 비밀 통로를 사용해야 되겠습니다."
"비밀 통로라뇨?"
젊은 여승, 옥청은 놀란 어조로 물었다.
무아대사가 보살 같은 미소와 함께 대답해 주었다.
"너도 알다시피 요즘 사정이 말이 아니지 않니. 속세는 혼란스럽고, 나라에서는 불법(佛法)보다는 도술(道術)이나 방술(房術)에 관심이 많고… 시주 들어오는 게 많이 줄었단다. 거기다 절이 너무 외진 곳에 있으니, 정말로 사는 것이 힘들었는데… 그런데 너의 아버님께서 엄청난 양의 시주를 해주시지 않았겠니. 정말 부처님의 가호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그 대신……."
유선명이 말을 막았다.
"대사님. 지금 사정이 몹시 급합니다."
"아! 예."
무아대사는 다시 한 번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야,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무아대사는 서둘러 대웅전 정면의 금불상으로 다가갔다. 대사가 무언가를 조작하자 금불상 밑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여깁니다."
수신위는 여승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놀랍도록 넓었다.
한구석에 놓인 작은 항아리 안에는 물과 고기 말린 것이 들어 있었다.
증분은 재빨리 가장 아늑한 구석 자리로 뛰었다. 색귀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선 몸을 아낄 줄 알아야 했다. 그래야 필요할 때 힘을 쓸 수 있으니까.
증분은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오호? 제법 아늑하구먼."
다른 세 명도 구석 자리를 아쉬워하며 각자 차선이라고 생각되는 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는 그들을 보며 유선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봉하명, 마철, 증분, 좌대괴를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 너, 너, 너 지금 뭘 하는 거냐!"
"왜요?"
유선명은 벌써 항아리 속의 말린 고기를 꺼내 씹고 있는 봉하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는 빨리 나가서 놈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야 할 것이 아니냐!"
말인즉 옳은 말이었지만 사인의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 완연했다. 왜 '우리'가 아니라 '너희'란 말인가.
"쟤랑, 쟤랑, 쟤랑, 제가 놈들을 유인하는 동안 형님은 뭘 하실려구요?"
"너랑, 쟤랑, 쟤랑, 쟤랑 놈들을 유인하는 동안 난 아가씨를 지켜야지."
유선명의 당당한 대답에 사인은 툴툴거리며 엉기적엉기적 밖으로 나갔다.
2
유당은 그가 이끄는 삼대, 총 이십여 명의 인원과 함께 범천사에 당도했다.
그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가 싸움을 즐기는 성격인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피와 땀이 튀고, 무림인으로서의 본분이 살아 숨쉬는 싸움을 좋아했다. 그러나 싸움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싸움의 결과로 얻어지는 과실을 좋아했다. 지금 그가 느끼는 즐거움처럼 말이다.
'으흐흐! 째지는군.'
놈들이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조금 전의 싸움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니, 조금 전의 공격 자체가 자신들의 이동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범천사에 그들의 목표가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따라서 방희태가 그에게 범천사를 맡긴 것도 그가 그 동안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보답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여승만 있는 절이라…….
유당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취향은 머리가 짧은 여성이었다. 정사(情事) 도중 상대의 머리를 꽉 잡으면…….
그 매끈한 머리를 만지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이어서 내리는 명령은 그런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강간해라!"
"우와!"
"우악!"
부하들의 환호성.
환호성 사이로 째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너무 좋아서 그러나?
유당은 고개를 들어 비명이 난 곳을 쳐다보았다.
"저런 바보 같은 놈이!"
유당의 말이 떨어지자 환장한 얼굴로 앞장서던 녀석이 문 앞에서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들고 있던 이낭도(二郎刀)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한 채 절명해 버렸다.
범천사의 정문 앞에 서너 명의 사내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유당 일행을 보며 잠시 주춤거리다가 빠르게 물러서기 시작했다. 한 사내의 등에는 여승이 업혀 있었다. 그것을 보자 유당의 눈이 뒤집혔다.
"잡, 잡아라!"
유당 일행은 상대를 뒤쫓기 시작했다.
비조(飛爪)가 하늘을 날았다.
길다란 강철 손톱이 번쩍이는 손 모양의 무기.
천잠사로 연결된 두 개의 비조는 번갈아 가며 날아왔다.
"깍!"
비명과 함께 앞장서서 달리던 보안대원의 어깨 살이 찢어져 나갔다. 벌써 두 명째 그 무기에 당한 터였다. 놈들은 도망치면서도 벌써 암기와 저런 장병(長兵)을 통해 계속 반격을 꾀하고 있었다.
"이놈들!"
비조가 또다시 날아오자 유당은 몸을 날려 대감도로 날아오는 비조를 쳐냈다.
챙!
도에 맞아 비켜 날아가던 비조는 거짓말처럼 상대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무기에 부딪쳐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비조를 숙련된 솜씨로 다시 받아내는 솜씨란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에 당하는 게 자신의 부하들인 유당의 입장으로는 감탄할 수 없었다. 상대는 천잠사를 감아 돌리며 다른 쪽 비조를 날렸다.
"욱!"
부하 한 놈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다시 쓰러졌다. 허벅지에 박힌 추혼전(追魂箭)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유당 일행이 비조를 든 사내에게 신경을 쓰는 사이 다른 놈이 던진 암기였다.
몇 명이 낙오되고, 몇 명이 날아오는 암기를 피하는 사이 그들의 진형은 점점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놈들……."
유당이 다시 발작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유당의 얼굴에 나타난 발작 증세가 나타났을 때보다 더욱 빨리 사라졌다.
그의 얼굴은 득의의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길을 막고 나타난 장사귀의 모습을 본 것이다.
증분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녀석들은 숲을 까뭉개며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슬슬 유인하다가 살짝 빠질 생각이었는데 녀석들은 예상보다 끈질겼다.
특히 앞장서서 달리는 저놈. 대감도를 휘두르는 저놈은 아버지라도 죽었는지 가공할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다.
증분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다시 그가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이다.
휘리릭―!
길다란 채찍이 증분의 앞을 가로막았다. 채찍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증분의 몸을 감아 돌고 있었다.
증분은 몸을 날려 채찍을 피해냈다.
채찍은 헛되이 흙바닥을 후려쳐 모래 바람을 일으켰다. 뒤따라오던 삼귀도 분분히 몸을 날려 채찍을 피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은 잠시 둔화되었고 그 사이 추적자들과의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그리고 정면은 조금 전 채찍을 날린 장사귀와 그의 부하인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막고 있었다.
포위망이 완성된다면 끝장이었다.
"돌파!"
증분은 짧게 소리치며 품속의 혈리표(血痢 )를 날렸다. 수십 개의 표창이 허공을 갈랐다.
장사귀의 채찍이 하늘을 날았다.
휙―!
"회선편(回旋鞭)!"
구절연편의 강력한 회전.
그 강렬한 회전에 주위로 먼지가 피어 올랐다.
날아가던 혈리표 역시 그 회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혈리표가 완전히 회전의 일부가 되자 채찍의 움직임에 변화가 있었다. 회전으로 만들어낸 소용돌이를 오귀가 있는 쪽으로 쳐낸 것이다.
"출룡편(出龍鞭)!"
연편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혈리표가 다시 수신위를 향해 날았다. 오귀가 몸을 날려 혈리표를 피했을 땐 뒤를 쫓던 자들이 완전히 따라붙은 후였다.
"이놈!"
유당이 그대로 하늘을 날아와 비조를 들고 있던 봉하명의 어깨를 대감도로 내려치며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되었다.
* * *
"윽―!"
유당은 한걸음 물러섰다.
그의 어깨 살은 한움큼 뜯겨져 나간 후였다.
힘을 다한 공격을 빗겨 맞으면서 비조를 날리다니.
상대가 비조를 다루는 것이 제법 능숙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좁은 장소에서도 이 정도로 수발이 자유로울 줄은 몰랐다.
그러나 봉하명 역시 멀쩡하진 못했다. 그의 가슴엔 유당의 대감도가 만들어낸 길다란 자상이 생겼다.
"애송이, 제법이구나."
유당은 씹어먹듯이 한마디 내뱉으며 대감도로 중단세(中段勢)를 취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 지금 성급함은 금물이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장사귀가 구환도(九環刀)를 든 마철과 대치하고 있었다. 마철이 가볍게 손목을 흔들자 구환도가 따라 흔들리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도에 달린 아홉 개의 고리가 맞부딪치며 내는 소리였다. 연편은 든 장사귀는 그런 상대의 동작을 흥미롭다는 듯이 살펴보고 있었다.
연검을 쓰기 시작한 지 십오 년.
무기를 연편으로 바꾸긴 했지만 자신의 무기를 그렇게 쉽게 쳐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는 그가 펼쳐낸 연편을 구환도를 찍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여승 하나를 업은 채.
아마도 그 여승이 자신들이 목표로 하는 여자일 것이다. 장사귀는 여승을 힐끔거리다 입을 열었다.
"난 광동의 장사귀다. 네 이름은?"
"마철(馬鐵)."
'입이 무거운 새끼군.'
다시 한 번 말을 걸려 했을 때, 갑자기 구환도가 날카롭게 짓쳐들었다. 날카로운 도세를 살피며 장사귀 역시 구절연편을 날렸다.
휙―!
증분은 수전을 날려 덤벼드는 상대를 견제했다.
그의 암기술을 본 보안대원들은 그를 포위한 채 슬금슬금 접근할 뿐이었다. 그가 날리는 수전은 손이 아닌 기관으로 날리는 것이라 너무나 빨라 보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간혹 공명심에 사로잡혀 몸을 날리는 자도 있었지만 백이면 백 그의 수전에 맞아 바닥을 굴렀다. 혹 가까이 접근하더라도 그의 옆에 있는 오귀의 막내인 염귀(殮鬼) 좌대괴(左大塊)를 뚫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의 수는 너무 많았고 그들은 차츰 지쳐 갔다.
* * *
병기가 맞부딪치는 소리.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기합성.
남쪽의 대로를 수색하고 있던 방희태 일행은 그 소리를 따라 뛰었다.
* * *
챠아악―!
강철 손톱이 맹수가 입을 벌리듯 벌어졌다. 비조는 유당의 얼굴을 찢어내려는 듯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챙―!
유당은 대감도를 휘둘러 비조를 쳐내며 봉하명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다른 쪽 비조가 다시 한 번 날아왔고, 유당은 고개를 숙여 비조를 피했다.
싸악―!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비조는 머리를 스쳐 지났다.
고개를 숙이는 그의 눈앞에 반대쪽 비조가 짓쳐들었다.
유당은 질겁하여 몸을 뒤로 젖혔다. 가슴이 찢어지며 피보라가 쳤다. 유당은 다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야 했다.
'이런 젠장할.'
달군 쇠로 지진 듯한 가슴의 아픔보다는 주위에 부하들이 보고 있다는 창피함이 더 컸다.
몇 번째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녀석은 도대체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진 않았다.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가까이 가기도 전에 지쳐 버릴 것이다. 그는 숨겨 두었던 비장의 절초를 쓰기로 했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밑천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여주마!"
유당의 눈에 혈광이 어른거렸다. 유당은 어깨 위로 대감도를 쳐든 채 왼손으로 도신을 잡았다. 그런 식으로 도를 잡아선 제 속도가 날 리 없다.
그러나 봉하명은 그의 자세에서 흉험함을 느꼈다. 상대의 자세를 흩트리기 위해 비조를 날렸다.
"이미 늦었다. 비도회(飛刀回)―!"
유당은 힘껏 대감도를 집어던졌다.
콰콰콰―!
대감도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을 일으키며 봉하명에게로 날아갔다. 비도회는 유당의 독문 절기인 무이도법(武易刀法)의 최절초였다. 일종의 비도술로 근거리에서 무기를 던지는 것이다. 실패한다면 그 위험 또한 큰 초식이었다.
팽―!
맞서 날아온 비조를 간단히 쳐내고서 대감도는 계속 날아갔다. 그 가공할 기세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듯이 보였다.
봉하명은 이를 깨물며 비조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천잠사를 창 돌리듯 회전시켰다.
비조는 바람을 가르며 창 돌아가듯 회전했다.
파파팍―!
양쪽 끝에 달린 비조가 흙바닥에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갑자기 봉하명은 천잠사를 잡고 있는 손을 놓았다. 원심력 때문에 비조는 회전을 계속하며 날아오던 대감도와 부딪쳤다.
패― 앵!
주변이 날아갈 듯한 굉음과 함께 비조와 대감도가 격돌했다.
비조는 대감도를 감아 돌렸고, 둘은 회전을 멈춘 채 옆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반대쪽으로 날아가는 대감도.
동시에 유당과 봉하명이 각자의 무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유당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지만, 봉하명의 위치가 조금 더 유리했다.
탁―!
유당의 손이 대감도의 도신을 잡았다.
손잡이를 잡지 않고 도신을 잡아 생긴 찰나의 차이.
그것은 생각보다 컸다. 유당은 도신을 잡은 채 힘껏 위로 휘둘렀다.
퍽―!
대감도의 손잡이가 때늦게 비조를 잡아든 봉하명의 턱을 가격했다. 봉하명의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의 강렬한 일격이었다.
아찔한 가운데 봉하명은 언뜻 유당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오랜 싸움 경험으로 봉하명은 유당이 대감도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베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봉하명은 반사적으로 발을 들어 대감도가 있을 만한 곳을 후려쳤다.
우두둑―!
다행히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고, 유당은 손목이 부러져 대감도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만든 기회.
뒤로 무너지려는 몸을 힘껏 앞으로 내밀며 봉하명은 주먹을 유당의 옆구리에 박아 넣었다.
팍―!
유당은 팔꿈치로 봉하명의 주먹을 막았다. 인간의 몸에서 가장 단단한 것 중 하나가 팔꿈치.
순간 봉하명의 손가락이 박살났다. 안색이 변하는 봉하명의 얼굴을 향해 유당은 힘껏 박치기를 날렸다.
퍽―!
잘 익은 수박 깨지는 소리를 내며 봉하명은 뒤로 넘어갔다.
그의 머리는 벌건 핏물이 배어 나왔다.
"이 새끼!"
유당 역시 봉하명과 뒤엉켜 쓰러지며 크게 소리쳤다.
두어 번 몸을 굴려 마침내 유당은 봉하명의 몸 위에 올라탔다. 손을 등뒤로 뻗어 숨겨 놓았던 비수를 꺼내 들었다.
오른손으로 봉하명의 얼굴을 잡은 채 비수로 상대의 목을 노렸다.
봉하명은 고개를 흔들어 비수를 피하려 했지만 유당의 손이 그런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았다.
절대 절명의 순간, 봉하명은 입을 벌렸다. 얼굴을 잡고 있던 유당의 손가락 중 일부가 입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봉하명은 있는 힘을 다해 깨물었다.
"우악―!"
봉하명의 이빨에 유당의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유당은 괴성(魁星)을 지르며 비수로 봉하명의 목을 쳤다.
장사귀와 마철의 싸움은 좀더 수준이 높았다.
슈슈슉―!
그들이 뿌려대는 도광과 채찍이 일으키는 환영으로 인해 사람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뒤로 물러섰다. 장사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
그에 비해 마철은 담담한 표정으로 장사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몸 어느 곳에도 상처는 없었다.
장사귀는 짧게 물었다.
"그녀는?"
마철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떠났소이다."
장사귀는 마철이 업고 있는 여승을 응시했다. 여승의 머리는 깊게 패어져 있었다. 바로 장사귀 본인의 연편 자국이었다.
"이 여자는 범천사의 주지승인 무아대사요."
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마철이 말해 주었다. 장사귀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마철의 무공이 강하기는 했지만 그가 당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전 일전에서 장사귀의 연편은 마철의 머리를 가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철은 몸을 비틀어 등에 업고 있는 여승으로 연편을 막았고 그 틈에 구환도로 장사귀의 어깨를 베어낸 것이다.
마침내 장사귀는 생각을 정리했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속았군."
마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장사귀의 구절연편이 하늘을 갈랐다.
휘익―!
마철은 등뒤로 구환도를 감추며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구환도가 여승을 묶어 둔 천을 잘라내자 여승의 시체는 장사귀를 향해 날아갔다. 쏘아가던 연편은 애꿎은 여승의 시체를 후려쳤다.
그 틈에 마철의 몸이 장사귀의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잡았다!"
마철의 구환도가 장사귀의 옆구리를 가르기 직전이다.
챙!
갑자기 짧은 철척 한 자루가 구환도를 가로막았다.
곱슬머리를 한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마철은 구환도를 잡아당겨 다시 한 번 공격을 하려 했지만, 철척에서 뿜어 나오는 기이한 흡인력 때문에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
"자철(磁鐵: 자석)이구나!"
마철의 놀란 외침 사이로 철척이 파고들었다. 철척은 마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마철은 뒤로 몸을 날려 철척을 피하려 했다.
푸악―!
철척은 뒤로 몸을 날리는 마철의 목을 그대로 꿰뚫었다. 순간적으로 그 길이가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진짜로 길이가 늘어난 것이다. 마철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관통하고 있는 철척을 바라보았다.
마철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여의척(如意尺)이라고 하지. 세 단계로 길이를 늘렸다 줄일 수 있거든."
방희태는 손목을 비틀어 마철의 목에서 철척을 빼내며 말했다. 마철은 방희태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미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철척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방희태는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허약한 녀석도 못 이기나?"
장사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희태는 주변을 훼훼 돌아보았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증분과 좌대괴의 저항을 보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공격해! 공격 안하고 뭐하는 거야!"
보안대원들은 증분의 암기를 두려워했지만 방희태의 철척을 더 두려워했다.
보안대원들은 이를 악 물고 증분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좌대괴는 혼전 중에 목숨을 잃었다. 시세를 파악하는데 능한 증분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 * *
"이것들 도대체 뭐야?"
죽은 세 명의 시체를 일렬로 늘어놓은 채 방희태는 물었다.
아니, 무아대사의 시체까지 하면 네 명의 시체를.
시체 옆에는 증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염소 수염의 사내는 방희태의 말에 시신을 살폈다.
사내는 양각양의 호남 지부에서 파견되어 나온 자로 그 일신의 능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무림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제법 많은 자였다.
마침내 고개를 들더니 놀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황산오귀인 듯합니다."
그의 말에 방희태의 얼굴에도 놀람의 빛이 스쳤다.
"황산오귀?"
황산오귀라면 호남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방희태가 놀란 것은 그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한 고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때 사천 지방에선 전설처럼 존재하던 자의 이름이…….
한 지방에서 쩌렁쩌렁한 명성을 날리는 고수라도 다른 지방에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산오귀는 사천 지방에서 주로 활동하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호남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을 부리는 그 고수 때문이었다.
"놈도 황부자의 밑에 있었나?"
방희태는 놀란 어조로 중얼거렸다. 방희태의 시선이 증분에게로 향했다.
"야, 너 진짜 황산오귀 맞어?"
"예. 쟤가 독귀 마철이고요, 쟤가 살귀 봉하명, 쟤가 염귀 좌대괸데요. 전 색귀 증분이구요."
"유선명은?"
황산오귀 중 대형인 무귀 유선명을 말하는 것이다. 세간의 황산오귀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 개중 무귀 유선명만 쓸 만하고, 나머지는 밥을 먹으니 밥통
이요, 옷을 입으니 옷걸이일 뿐이다.
증분은 눈길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여승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제 어쩌죠?"
창백한 안색을 한 채 부하 한 놈이 유상진에게 다가와 물었다. 보안대의 십객 중 하나인 겸객 혈겸(血鎌) 설영(薛英)이었다.
황부자의 딸을 사로잡아 황부자를 끌어내겠다는 방희태의 계획은 실패한 것이다. 반대편으로 도망쳤을 황산오귀 중 남은 하나와 그 딸년을 추격할 수도 있지만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이미 그들이 황부자에게로 돌아갔다면 오히려 황부자가 보낸 추격자들에게 공격당할 염려까지 있었다. 이 주변은 황부자의 안마당이나 다름없었다. 빨리 철수하는 것이 옳았다.
'빌어먹을, 좀더 데려왔어야 했는데…….'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십객 중 일곱 명을 호남 지부에 두고 온 것이 실수였다. 방희태는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모두 돌아간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