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양념 [권애숙]
수십 년 묵은 여자의 적정량은 알아서 대충인걸요. 간장
도 대충, 고춧가루도 대충, 마늘 생강 설탕도 대충, 대충이
란 말보다 더 적당한 양념이 있을까. 세련된 셰프의 반짝
거리는 스푼이나 저울보다 손맛 구수하게 들어오는 소리.
이것저것 대충 집어넣고 보글보글 끓여낸 뚝배기 된장처
럼, 눈대중 마름질로 대충 만든 엄마의 옷처럼, 맛나고 속
편안한 대충. 그리 살아보아요. 틈 없이 재단하던 자의 눈
금도 희미해지고 빡빡하던 저울의 눈매도 헐렁해졌어요.
때 끼게 계량을 따지지 말고 사랑도 미움도 헐렁하게 대
충, 텅 빈 대나무처럼 속속들이 충만하게 대충, 대충.
- 당신 너머 모르는 이름들, 달아실, 2020
부절符節 [금시아]
1
두 마을 경계에 무당집이 있었다. 남자 같은 무당을 장타랑이라 불렀는데, 사립문을 들어서면 마른 대나무가 먼저 바스스 몸을 떨며 아는 척을 했다. 예쁜 신딸은 대나무와의 사이에서 얻은 친딸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래서인지 한 번도 엄마라고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했다. 목소리조차 가진 적이 없는 아이일지도 모른다 했다. 신딸이 대나무 밑을 지날 때면 대나무가 자꾸 바스락거렸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에게는 바람이 가득하다고 수근대는 이야기가 무성했다.
이상하게도, 남자아이들은 무당집을 돌아 먼 곳으로 돌아다니다가도 예쁜 신딸이 들락거릴 무렵이면 주술에 홀린 듯 그 대문 앞을 얼쩡거렸는데, 그런 날이면 동네 여자들의 고함이 여기저기에서 터지곤 했다. 장타랑이 죽었다. 신딸이 사라졌다. 신딸이 사라진 날, 사람들은 무당이 죽던 날보다 더 섧게 몸을 떨던 대나무를 보았다고 했다. 장타랑은 엄마라는 소리를 들었을까. 엄마로 죽었을까. 엄마라는 이름을 내려놓았을까. 무당이 죽은 이후로는 어떤 수근거림에도 대문이 열린 적이 없다. 신딸은 올까. 마른 대나무만이 긴 목을 내밀고 담장 밖을 기웃거릴 뿐이다.
2
자식이 있었던 흔적이 마음에 있었다면 엄마가 있었던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이름만 남은 엄마의 체온은 바람이 아닐까.
기이하게도,
부절符節을 지참하고 다닐 때도 안절按節은 어디에서 또 다른 부절을 찾는다. 모든 마지막은 직전들과 짝이어서 죽음은 생과 맞붙어 있고 앞 없는 뒤는 없어 짝 없는 마지막이란 죽음이 아니라 고백이다.
묘하게도,
마른 대나무처럼 바스락거리는 기억의 존재는 무섭지 않고 신딸의 운명은 시시해도 좋다.
- 입술을 줍다, 달아실, 2020
내 마음 기우는 곳 [박경희]
안녕리에 가보면 맥없이 솟아 있는 기둥이 여러개
모두 이별한 것이다
만남도 헤어짐도 안녕리에서는
뽀얗게 먼지 뒤집어쓰고
쓸쓸히 엉덩이를 기다리는 툇마루이다
무거운 발걸음 속 달라붙는 그림자
깨진 기왓장이 끌어안고 있는 빛 잃은 알전구와
덩그러니 빈집 마당을 지키는
구멍 환한 항아리
버석거리는 나무 기둥이 나이테를 놓은 곳이다 때론,
사선으로 잘려나간 대나무 끝에
가슴을 다치기도 한다
내 마음 한 자리 빗금으로 내려앉아 우는 사내
대숲이 일렁이는 곳에서 바람 부는 쪽으로
내 마음 기우는 것도
짧은 대나무 마디로 살다 간 사내의 빈 곳이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리에 가보면
처마 끝 밑구멍 환한 목어가
바람가는 곳으로 몸통을 두드리고 있다
뽀얗게 먼지 뒤집어쓰고
쓸쓸히 엉덩이를 기다리는 툇마루가 있다
- 그늘을 걷어내는 사람, 창비, 2019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 [유홍준]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가 먼 데를 바라보고 있다
대나무 우듬지가 요렇게 살짝 휘어져 있다
저렇게 조그만 것이 앉아도 휘어지는 것이 있다 저렇게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것이 있다
새는 보름달 속에 들어가 있다
머리가 둥글고, 부리가 쫑긋하고, 날개를 다 접은 새다 몸집이 작고 검은 새다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창문 앞에 앉아
나는 외톨이가 된 까닭을 생각한다
캄캄하다, 대나무 꼭대기를 거머쥐고 있던 발가락을 펴고 날아가는 새
-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시인동네, 2020
참빗 하나의 시 [유하]
지금 식으로 따진다면
자신이 내놓은 물건 값보다
더 신세를 지고 가던 사람이 있었다
검정 고무신 찰박찰박 장마 끝물로 와서
거시기 모다 있어라우, 찰옥수수 같은 잇속 드러내며 웃던
담바우 방물장수 아짐
대나무 참빗 달랑 하나 풀어놓고는
골방 아랫목 드러렁 고랑내 밤새 풀어놓으며
새비젓 무시너물 쩍국에 척척 식은 밥 한술 말아먹고
보리쌀 반 되 챙겨서 싸묵싸묵 새벽길 떠나가던
염치도 바우 같은 담바우 방물장수 아짐
그것만이면 진짜 양반이게
담바우 아짐 자고 간 날 이후론 온 식구 머릿속엔
영락없이 이가 바글바글 들끓었다
그 예편네 욕 직사허니 퍼대다가
그 빗살 촘촘한 참빗으로 득득 빗어내리면 와따
후두둑 후두둑 민경 위로 새까맣게
떨어져내리던 가랑이 서카래떼
장마 걷힌 하늘처럼 맑아오던 머릿속
그날은 온 식구 한데 모여 그놈 서카래 손톱으로 똑똑
장단 맞춰 터뜨려가며 곤시랑댔다
허허참, 그래도 담바우 아짐 참빗이
참말로 짱짱한 참빗이랑게
-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1991
귤중옥橘中屋* 서신 [박후기]
― 추사가 아내를 생각함
바람 타는 섬에는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뭍에는 없는 것들이 섬에 있어
나인 양 여기며
그나마 위안을 얻고 지냅니다
귤이 그중 하나입니다
속은 희며 푸른 문채를 가진
귤이 나와 같기로서니,
어느덧
뭍에서 가슴에 품고 지냈던
매화, 대나무, 연꽃, 국화가
시들해진 것을 느낍니다
세상에 절개는 흔하네
살림은 어둡기만 합니다
흔한 절개에 쫓겨 내려와
굴원屈原**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며 자책하고 있습니다
`세상 흐린데 나 홀로 맑고,
모든 사람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에
그래서 쫓겨난 것이라오`***
육백 리 제주 그 어디에도
당신을 대신할 것은 없습니다
망극한 성은과 당신,
소중한 것은 여전히
먼 육지에 있습니다
사랑은 발견입니다
돌과 파도와 비바람 속에서
문득문득
당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 추사거 유배당했던 제주 적소(謫所)의 당호.
** 중국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 전국시대 혼란기에 개혁을 추구 했으나 모함과 배척으로 유배를 반복하다 돌을 안고 강물에 투신.
*** 擧世皆濁 거세개탁 我獨淸아독청 衆人중인 皆醉개취 我獨醒아득성 是以見放시이견방. 굴원의 시 어부사(漁父辭)에서 인용.
- 사랑의 발견 , gasse가쎄, 2017
연에 대하여 [이성복]
처음엔 바람을 마주하고 뛰다가 연이 바람을 타면 조금씩 실을 풀어주지요 신문지 찢어 붙인 꼬리 흔들며 대나무 살을 붙인 태극무늬 방패연이 솟아오르면, 갈라터진 아이의 손에는 일렁이는 실의 느낌만 전해오지요 마침내 실감개의 실이 다 풀리고 까마득한 하늘 높이 까박까박 조는 연에서 흘러내린 실은 제 무게 이기지 못해 무너지듯 휘어지지요 그 한심하고 가슴 미어지는 線은 그러나, 참 한심하고 가슴 미어진다는 기색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만 흘러내리고, 그때부터 울렁거리는 가슴엔 지워지지 않는 기울기 하나 남게 되지요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가졌지만 의지가지없는 이들에겐 더욱 뚜렷한 線, 언젠가 우리 세상 떠날 때 두고 가야 할 기울기, 왜냐하면 그것은 온전히 이 세상 것이니까요
-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대꽃 [손택수]
꽃을
참는다
다들 피우고 싶어 안달인 꽃을
아무 때나 팔아먹지 않는다
참고 있는 꽃이 꽃을 더 예민하게 한다면
피골이 상접한 저 금욕을 이해하리라
필생의 묵언정진 끝에 임종게 하나만 달랑 남긴 채
서서 입적에 드는 선승처럼 깡마른 대나무들
꽃이 피면 죽는 게 아니라
죽음까지가 꽃이다
억누른 꽃이 숲을 들어올리고 있다
생의 끝 간 데까지 뻗어올린 마디 위에서 팡 터져나오는 대꽃
-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창비, 2014
누가 말했을까요 [천양희]
누가 말했을까요
살아 있는 것처럼 완벽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생명일 때 기쁘고 기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를 속삭인다는 것을
여린 잎 속의 푸른 벌레와 생각난 듯이 날리는 눈발과
훌쩍거리며 내리는 비가
얼마나 기막힌 눈<目>이라는 것을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읽었다는 것을
누가 말했을까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자연일 때 편하고 편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뒤꼍의 대나무숲 바람소리와 소리 없이 피는 꽃잎과
추위에 잠 깬 부엉이 소리가
얼마나 기막힌 소리인가를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는 것을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 제10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95
께냐 [김인자]
마추픽추를 돌아 쿠스코 난장에서 께냐* 하나를 샀다
안데스음악을 좋아하는 그를 위한 선물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살아서 함께 부르는 노래가 많을수록
죽은 후에도 잊히지 않는다는 걸 아는 듯
사랑하는 사람의 정강이뼈로 만들었다는
잉카의 전설을 익히 아는 그가 밤마다 께냐를 불었다
곁에 있으면 그리움이 될 수 없다는 말은 거짓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도 새빨간 거짓말
저릿저릿 흘러가는 강물도 말라
웃어도 저리 애끓는 가락이 되었구나
바람 속 먼지처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구멍마다 흘러나와 어깨를 도닥여주는 노랫말
괜찮아 다 괜찮아 영혼을 위무하는 피리소리
한 생을 달려간다 해도 다시 못 볼 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야 탄생하는 악기
오늘, 살아서 불어주는 그대의 께냐
* 께냐(quena) : 사랑하는 사람의 뼈로 만들었다는 전설을 가진 잉카인들이 즐겨 부는 피리. 페루에
서 짐승의 뼈로 만든 께냐를 보긴 했지만 현재는 대부분 대나무나 ‘마데라’라는 나무로 만든다.
-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2020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14
어느 대나무의 고백 [복효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하건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 뻐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개치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을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달아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