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30
12월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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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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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7I8zz0Cijm4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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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맑은 정신으로 늘 깨어 기도했던 광야의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
예언자로 사는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듯해 보입니다. ‘있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 많은 사람이 내 앞으로 몰려들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세례자 요한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 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 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 옷에 가죽 띠입니다. 그는 대체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 귀 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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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직립(直立)입니다!>
딱 1년 전 작년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폭설이 내렸습니다. 다른 곳은 괜찮은데, 마을 입구 진입로의 경사가 걱정되었습니다. 대충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내려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쌓인 눈이 얼어붙어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다들 연로한 어르신들이라 그나마 마을에서 제일 젊은 청년격인 제가 나섰습니다. 바닥에 딱 달라 붙어버린 눈을 일일이 삽으로 긁어냈습니다. 그래도 부족해 도롯가에 비치되어 있던 염화칼슘 푸대 자루를 가지고 와서 경사로에 뿌렸습니다.
자루가 꽤 무거웠는데, 그래서 한 번에 하나씩 들고 와야 했었는데, 급한 성격에 양손에 하나씩 들고 오던 어느 순간, 허리 쪽에서 뚝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저는 순식간에 허리에 큰 문제가 온 것을 직감했습니다. 거의 기다시피 해서 제 침대에 누웠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에 문제가 생기니 삶 자체가 고역이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았습니다. 사흘 밤낮을 꼼짝달싹도 못 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었습니다. 걷는 것을 물론 양말 한 짝 신는 것, 계단 오르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크게 깨달았습니다. 비장애인 처지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장애인들 처지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높은 장벽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뒤로는 어디를 가나 장애인 관점에서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게 되었는데, 아직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너무나 소홀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의 경우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병세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그 환우는 걷기는커녕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으로 이동되어왔습니다.
연민의 예수님, 측은지심의 예수님, 해방자이신 예수님, 우리 모두의 자유와 구원만을 바라시는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중풍 병자를 그냥 돌려보내실 수 없었습니다. 그 가련한 중풍 병자를 향해 이렇게 외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루카 복음 5장 24절)
인류학상 인간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직립(直立)입니다. 자신의 두 발로 바로 서는 것입니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일어섬으로 자신의 생명을 발현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참된 생명은 바로 일어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풍 병자는 오랜 세월 그냥 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는 살아있었지만 사실 죽어있었습니다. 목숨은 붙어있었지만 사실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중풍 병자가 오늘 예수님의 자비로 인해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그는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사람, 숨은 붙어있지만, 영혼이 다 빠져나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 스스로 일어서지 못해 늘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남자들처럼 자신의 힘으로 꼼짝달싹 못 하는 그들에게 다가서야겠습니다. 우리의 힘과 에너지를 보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겠습니다. 주님 손에 그들을 맡겨드리며 치유를 부탁드려야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웃들의 일어섬에 동참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삶의 본질은 일어섬입니다. 사실 참된 신앙이란 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떨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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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집’ 만들기>
예전 본당 신부님께서 외국에서 사목하실 때 마귀 들린 사람이 있다고 본당 신자들이 쫓아왔다고 합니다. 그 신부님은 자신이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이끌려 마귀 들린 사람에게 가서 구마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신부님을 비웃기만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신자들의 힘을 빌리기로 하고 그 사람을 가운데 눕혀 놓은 다음에 빙 둘러서 묵주기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시키는 대로 그 병자를 중앙에 놓고 둥글게 앉아서 묵주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엔 비웃기만 하던 그 병자는 조금씩 목소리도 약해지고 식은땀을 흘리다가 결국엔 아무 힘도 없이 그 사람을 떠나갔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네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중풍 병자란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영적인 병자를 의미합니다.
그를 들것에 들고 온 네 사람은 그리스도께만 데려가면 그를 치유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 깊은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병자를 데려가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를 들고 예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들것과 함께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당시 육체적 병도 죄로 인해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기에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심으로써 당신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고 그를 용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다시 일어설 힘이 없을 때는 주위 사람들의 믿음 때문에라도 주님은 그 사람을 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액션영화에서 보면 주인공 혼자 맨손으로 수십 명을 날려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 두 사람만 함께 악을 쓰고 달려들면 아무리 잘 싸우는 사람도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 쓰러지는 이유는 한 명씩 덤비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생으로 로마에 있을 때도 한 성지순례 단체에 20년간 냉담한 자매가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극성에 못 이겨 고해성사를 보고 냉담을 푼 일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들고 온 사람 수가 정확히 ‘네 명’이라고 나옵니다. 숫자 ‘4’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완전한 숫자이고 그 사람들이 혼자는 일어설 힘도 없는 사람을 지붕 위까지 끌고 올라가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았던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협동하면 못할 일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금 본당에 와보니 축구 선교회에 비신자로 가입하여 축구를 하다가 입교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성당 축구 선교회이기 때문에 처음엔 축구가 좋아서 나오지만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다른 사람들처럼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면 그 아이들과의 우정을 끊지 않고서는 그들의 행동방식을 쫓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의 힘을 우리가 사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둑에서 상대방의 한 알을 네 알로 둘러싸면 그것이 숨 쉴 곳이 없어 죽게 됩니다. 이것을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혼자 힘으로 안 될 때는 여럿이 둘러싸 ‘집’을 지어 그 사람을 그 안으로 데리고 오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 사람은 주위 사람들의 믿음 덕분으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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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달라스에 홍보를 갔을 때입니다. 예전에 2달 남짓 지냈기 때문에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홍보가 목적이기도 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므로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온 것을 알고 제게 연락을 주신 분들과 만났습니다. 만남 중에 한 형제님의 ‘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어린 시절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항공대에 가려고 했는데 그만 자전거를 타다 큰 사고를 당했고, 군대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심한 다쳤다고 합니다. 조종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미국에 넘어와서 항공사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였다고 합니다. 정년퇴임을 한 후에 ‘스쿨버스’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딸이 아빠를 응원하면서 비행기를 운전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을 안전하게 등교시키는 스쿨버스 운전사가 되는 것을 축하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3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세계일주 여행을 하겠다고 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 ‘꿈’이 있었습니다. 군인이 되거나 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의 모습이 멋져 보였습니다. 사촌 형님이 장교가 되어서 왔는데 그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같은 선생님이 담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모든 과목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린 저의 눈에 선생님은 만물박사처럼 보였습니다.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성당의 친구 중에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저는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저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의 영향이 컸습니다. 31년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군복은 아니지만 성직자복과 제의를 입으면서 영적인 싸움에 임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강론과 교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미국 대륙횡단을 한번 하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참으로 멋진 꿈입니다. 절망과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는 꿈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위선과 가식을 버려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를 없애야 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자비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지금 이곳에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이웃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10년 이상 자리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들도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함께 할 때, 중풍병자는 힘을 얻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중풍병자’인 아내를 위해서 헌신 하시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말도 하고,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함께하니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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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17-26: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모습을 본다. 중풍 병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과 희생으로 예수께 인도되었고, 은총을 받는다.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천사가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환자를 침상에 달아 당신 앞으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0절) 하신다. 예수님은 환자의 영을 먼저 고쳐주신다. 그냥 걷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그를 내적으로 먼저 치유하신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1절)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단죄하며 판단한다. 이 판단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나의 이웃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나의 잣대로 재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23-24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를 용서하는 것과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쉬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두 행위 모두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밝혀주신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고 두려움에 싸이지만,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26절). 오늘이란 루카가 구원의 미래가 아닌 현재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지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구원을 체험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께 갔던 친구들의 희생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받은 만큼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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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중풍 병자의 치유에 관한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알려 주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카 4,14─9,50 참조)에 속합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 기적(5,12-16 참조)에 이어 소개되는 이 중풍 병자의 치유 기적은, 루카 복음에서 적대자들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논쟁은 평상에 누워 있는 중풍 병자의 죄를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일로 시작됩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 말씀에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부여받으신 권한으로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중풍 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을 지켜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만 유보된 권한을 침범하셨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규정에 따르면,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는 사형을 받는 중대한 범죄입니다(레위 24,10-16 참조). 적대자들의 눈에 예수님께서는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사형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였던 것입니다.(마태 26,65; 마르 14,64 참조)
대림 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회개하며 간절히 기다린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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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17-26)
당시 사람들은 질병은 죄로 인한 결과라 생각했습니다. 중한 병에 걸린 것은 그만큼 죄가 크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지요. 따라서 병이 나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만 했습니다. 죄는 누가 용서해 줍니까? 율법 교사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체도 잘 모르는 예수님께서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시니, 도저히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예수님께서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시니, 도저히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병자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반면 병이 치유된 것은 그 병자가 일어나 걸음으로써 증명이 되지요.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먼저 고쳐 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의 죄까지도 씻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위가 예수님 안에 계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임을 이 세상 곳곳에 널리 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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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손현기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왔고 올 때는 평상에 누워서 왔던 병자가 갈 때는 일어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복음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바리사이와 율법교사들이 나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마땅해한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그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었지만 지붕의 구멍을 뚫어서까지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다.
믿음은 아니더라도 예수님께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일을 보고 놀라 하느님을 찬양한 많은 사람이 나온다.
그들은 말하기를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아마 병자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찬양하였을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하느님의 일을 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 중에는 고해성사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고해성사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부끄럽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제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야 한다는 인간적인 마음이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의 일을 너무 인간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신기한 일, 기쁘고 감사한 일이고 지금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모든 일들 하나하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오늘 독서 말씀처럼,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 냇물이 흐르고 눈먼 이가 보고, 귀먹은 이가 듣고,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는, 다시 말하면, 우리 일상의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보고 기뻐 감사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정화해야 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게 될 것이다.”(마태5,8)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보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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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재현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 한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 사건에서 특히 눈에 띄는 한 대목이 있는데요, 루카복음 5장 20절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몸을 가눌 수 없는 중풍병자를 남자 몇 사람이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낫게 해주십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병자를 포함하여, 병자를 데리고 가면 주님께서 낫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그 남자들입니다.
저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병자를 주님께 데리고 간 그 남자들을 통해서 ‘중재기도의 중요성’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많은 기도를 하지만, 주로 개인적인 차원이나 개인적인 바람들 혹은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범위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병자를 데리고 온 남자들은 이 기도의 범위를 이웃을 위해 좀 더 넓혀보자는 권고를 하는 듯합니다.
복음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하시면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오늘은 병자의 말과 믿음을 확인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낫게 해주십니다.
중재기도와 이웃을 향한 움직임이 주님 마음을 움직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중재기도를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중재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의 내용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기도는 사랑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예수님이 온 것을 알고는 먼저 병자를 데리러 그 집에 갑니다.
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이 계신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자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그를 내려보냅니다.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인 것 같지만 병자를 위해 위험까지 감수하였습니다.
남자들은 이웃을 위해 기도했던 사람이고 그 기도를 행동으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믿음과 기도와 행동을 보시고 병자를 낫게 해주십니다.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웃을 위해 행동하지 않거나 이웃의 아픔을 모른 체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움직임이 많은 이에게 주님 은총이 전해지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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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친구들은 단순히 한 친구의 질병을 치유받게 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천장을 뚫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중풍 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 장면은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무엇이든 들어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마태 18,19 참조)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실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신적 권위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질병과 불행은 원죄의 결과이며 진정한 치유는 죄의 용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사막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과 같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으로 우리는 원죄가 빚어낸 온갖 불행과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구세주께서 머무르시면 우리의 마음은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겁게 기쁨의 환호성을 올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구원의 단비가 내려 우리의 잘못과 죄악이 없어지면 우리 영혼에 기쁨의 꽃이 핍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완고한 우리 마음을 풀고 부드럽게 합시다. 우리 마음에 ‘거룩한 길’을 내기 위해 마땅한 준비를 합시다. 우리의 탄식과 슬픔이 사라지도록 우리 죄를 고백하고 주님께 용서받는 길을 마련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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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루카 5,17-26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믿음>
너를 살리고픈
그분을 향한
나의 믿음
나를 살리고픈
그분을 향한
너의 믿음
그분께는
갈림 없는
하나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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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좋은 이웃이 되어라>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 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복을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5,20).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 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는 군중이라는 장벽과 지붕이라는 걸림돌을 넘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넘어야 할 산을 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병자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그리된 것이라 여겼으니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하시는 데 사람은 용서보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심판하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판단과 심판에 앞서서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많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었고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큰 믿음에 바탕을 둔 행동에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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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지 안에 모과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에서 가을이면 많은 모과가 주렁주렁 달립니다. 그리고 하나둘씩 익어 떨어지면 검게 썩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썩으면서도 방향제로 써도 충분한 향기를 내뿜습니다. 이런 모과를 소재로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바로 정호승 시인의 ‘모과’라는 시입니다.
가을 창가에 노란 모과를 두고 바라는 일이/ 내 인생의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자 시커멓게 썩어가는 모과를 보며/ 내 인생도 차차 썩어가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모과의 고요한 침묵을 보며/ 나도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고통을 견디는 모과의 인내를 보며/ 나도 고통을 견디는 인내의 힘을 생각했다
모과는 썩어가면서도 침묵의 향기가 더 향기로웠다/ 나는 썩어갈수록 더 더러운 분노의 냄새가 났다
가을이 끝나고 창가에 첫눈이 올 무렵/ 모과 향기가 가장 향기로울 때/ 내 인생에서는 악취가 났다
나이 듦이 어쩌면 썩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내게는 썩어가면서 어떤 냄새를 낼까요? 향기로움일까요? 아니면 악취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향기인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향기가 풍겨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 향기는 믿음, 사랑, 희망을 통해 세상 끝까지 뻗어갑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향기를 가리는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남자 몇이 중풍 걸린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 지붕의 기와를 벗겨내서 예수님 한가운데로 내려보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닌, 병자를 내린 남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을 무효화시키려고 방해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을 모독한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향기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저주의 악취로 가리고 있습니다.
좋은 향기는 어떤 악취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좋음이 진하면 진할수록 향기로움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병자를 당당하게 고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향기를 품고 있나요? 세상의 어떤 악을 물리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강한 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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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관상 타령>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느닷없이 ‘관상’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관상 타령을 할까 합니다.
관상은 하느님 관상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하느님뿐 아니라 나도 보고, 이웃도 보고, 다른 자연도 보는 것이라고 저는 자주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주장합니다.
나를 보더라도 나의 고통을, 욕망을, 갈망을, 나의 고통을 보면서도 고통만 보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도 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도 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고, 나의 고통만 보지 않고 이웃의 고통까지 사랑으로 보는 것, 뭐 이런 것이, 관상이고 진정한 관상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관상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는 것이 관상이라고도 얘기합니다.
나의 고통만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 고통에 나의 시선을 빼앗긴 것이고, 두려움으로 보는 것도 실은 관상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관상도 하느님을 보는 것이지만 하느님만 보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사로잡힘이지 진정한 관상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얼마 동안 완전히 하느님께 몰입되고 성인들이 탈혼 상태에 있듯이 하느님께 사로잡힐 수는 있어도 계속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런 관상을 진정한 관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느님 관상은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라고 제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오늘 관상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 때문입니다.
Say to those whose hearts are frightened:
Be strong, fear not!
Here is your God.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러므로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보면/관상하면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 병자와 동료들은 바로 이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마음에 들어오셨을 때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서 어쩌시나 보려고 왔지만, 이들은 치유를 받기 위해 옵니다.
중풍 병에 맥없이 주저앉아있지 않고 어떻게서든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왜? 물론 치유 받기 위해서지만 그 이전에 주님의 능력을 보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이들이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고, 그런 주님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치유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관상이 치유와 구원에까지 이르는 것을 본 오늘 우리입니다.
어제 강론이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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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치유와 찬양>
- 믿음이 답이다 -
세계 장애인의 날을 아시나요? 엊그제 12월3일은 제30차 세계 장애인의 날이었고 교황님도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두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상처받은 인간성의 부분이다.” 잘 들여다 보면 인간 모두가 정도의 차이일뿐 장애인입니다. “행복은 혼자 먹을 수 없는 빵이다”, 행복 역시 혼자가 아닌 빵처럼 더불어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의 행복입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나눌 때 비로소 행복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이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슬픈 인생이요 연민의 대상인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모두가 치유받아야 할 장애인 인생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삼종기도 강론 서두 제목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바로 만나야 할 궁극의 분은 주님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 역시 주님과 살아 있는 만남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요 방향이자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해 치유받고 더불어 많은 은총의 선물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힐링의 집이라 부르고, 수도원을, 미사를 치유가 일어나는 힐링 센타라 부릅니다. 치유보다는 힐링이라는 영어 단어가 많이 회자됩니다. 왜 힐링의 천주교를 놔두고 엉뚱한 밖에서 힐링을 찾느냐고 말하곤 합니다. 어제 나눴던 행복기도 중 한 대목이 다시 생각납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 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다음 이사야서 말씀대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용기의 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이게 말하여라. ‘굳세어 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위로와 격려의 주님이시며 이런 주님을 닮아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리입니다. 주님은 또한 기쁨의 샘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기쁨입니다. 이사야서 서두가 주님을 만날때의 기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이 상징하는 바, 힘든 광야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상징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고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오늘 제1독서 이사야처럼 아름답고 고무적인 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야 말로 대 신비가인 영성가요 하느님의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만날 때 영육의 온전한 치유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치유과정이 은혜롭습니다. 새삼 주님과 만남의 치유에 믿음이 궁극의 답임을, 공동체 형제들의 믿음이 치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중풍병자 동료를 치유하려는 도반 형제들의 지극 정성의 사랑과 믿음이 놀랍습니다. 궁즉통, 간절한 믿음에 눈이 열린 동료들은 군중 때문에 주님을 뵈올수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이들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선 죄를 용서받음으로 영혼이 치유되는 중풍병자입니다. 몸과 마음은, 육신과 영혼은 하나입니다. 온갖 죄들은 육신을 통해 병으로 들어나기 마련입니다. 죄가 많기에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이래서 영육의 건강에 고백성사가 우선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치유받은 중풍병자를 생각하면 미사 시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전 주례 사제의 다음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주님의 교회와 하나될 때 비로소 진정한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부족해도 교회의 믿음은 부족함이 없이 강합니다. 교회공동체의 믿음에 뿌리내릴 때 좋은 믿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임을 제1독서의 이사야가 감동깊고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 오시어 너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그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대로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의 치유를 통해 실현되고 이 은총의 대림시기,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요, 무지의 병으로부터의 치유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참 고무적이고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동료들 덕분에 죄를 용서받아 영혼이 치유된 중풍병자는 이어 육신의 치유를 통해 전인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치유받은 중풍병자의 찬양의 반응도 주목됩니다. 찬양으로 표현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완전히 부활하여 피스카의 기쁨을 살게 된 중풍병자요, 평생 잊지 못할 치유와 찬양의 추억이 되었을 것이며 선종의 죽음도 맞이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주님과 만남을 통한 치유와 찬양보다 더 좋은 선종의 죽음 준비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마지막 주님과 만남이 됩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평생 주님과 만남의 여정, 치유의 여정, 찬양의 여정임을 봅니다. 치유의 기적을 목격한 이들도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하느님 찬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요, 믿음과 찬양은 함께 갑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우리 믿음을 날로 북돋웁니다. 새삼 찬양과 감사의 공동전례 은총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말씀이 치유받은 중풍병자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그대로 주님을 만나 치유 받은 이들의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만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육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어 우리 모두 기쁨과 찬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알렐루야 환호송이 바로 대림시기 은총을 상징합니다.
“보라, 세상의 주인이신 임금님이 오시어, 사로잡힌 우리의 멍에를 몸소 벗겨 주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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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5,20)
<그들의 믿음!'>
오늘 복음(루카5,17-26)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중풍 병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남자 몇이 평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께 내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5,21)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 앞에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5,24c)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5,26)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예수님께로 데려가야 할 '또 하나의 중풍 병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이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힘으로 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우리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복음화의 커다란 병폐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인 무관심을 버리고, '내 주변에 있는 또 하나의 중풍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갑시다!'
날마다 우리 안에서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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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 5, 26)
우리는 오늘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지를
성찰합니다.
사방이 꽉 막혀
있으면
지붕의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중풍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내면 됩니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참되고 건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믿음을 통해
죄를 용서받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힘들어하는
중풍 환자와
중풍 환자를
내려보낸
이웃들의 마음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믿음은 마음과
실천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천을
판단하는
마음의 죄에서
먼저
벗어나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더 근원적인 용서가
덜 근원적인 생각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더 근원적인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쉽습니다.
더 어려운 것을
선택하고
더 힘든 것을
요구하는
비뚤어진 우리의
신앙입니다.
남들이 잘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중풍환자는
일어나 집으로
걸어갑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권한은
구체적인 변화로
드러납니다.
용서는
우리 모두의
변화이며
가장 아픈
이들의 즉각적인
치유입니다.
치유는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믿음과 치유로
이어지는 신기한
오늘입니다.
믿음과 치유를
떠날 수 없는
주님의 오늘입니다.
크게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오늘입니다.
많은 일을
체험하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 믿음입니다.
평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듯
믿음으로
돌아가야 할
믿음과 치유의
대림시기입니다.
믿음을 보고
치유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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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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