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십이장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다른 법
1
그곳은 불모지와 같았다.
사당은 흉물스럽게 엎드려 있었고, 그 둘레를 따라서는 키 큰 나무들이 팔짱을 끼듯 에워싸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 칙칙한 어둠을 드리우고 있는 나무숲과 불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덩치 큰 사당 언저리에는 음산한 괴기가 서려 있었다.
원래 이곳은 산을 오가는 사람들이 길목으로 삼는 긴요한 곳이었다.
때문에 주변은 발빠른 상인들이 만든 객잔과 주점이 빽빽하게 들어찼던 시기도 있었다.
그 영화롭던 시절은 끝장이 난 것은 짐승 한 마리 때문이었다.
시작은 근처에서 몸을 팔던 들병이였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선지 머리와 내장만을 남긴 채 들병이는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하루에 한두 명씩 사람들이 핏자국만 남긴 채 사라지자 견딜 재간이 없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지자 상인들도 객잔, 주점만을 휑그러니 남긴 채 떠나갔다.
소문에는 그 범은 뻣뻣한 수염에 파란 눈, 그리고 기다란 목덜미의 갈기를 가진―범은 범이로되 거대한 크기의 대호라고 했다.
관아에서도 호랑이를 잡으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파견한 엽사들이 산을 오르는 족족 죽어 나자빠지자―정확히 표현하자면 실종이었다―거의 포기하고 있는 터였다.
근처 주민들의 청원은 끊이지 않았지만 관아에서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 산신제나 지내.
* * *
산아래서 작은 객점을 하고 있는 박원유(朴原宥)는 삼년 전 호랑이가 나타난 이후 오늘처럼 웃어 본 적이 없었다.
'참 듬직하기도 하지.'
객점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무림인들을 보며 박원유는 중얼거렸다.
평소 호랑이보다 무서워하던 무림인이었다.
항상 독기 서린 눈으로 객점 안에 들어와 툭하면 칼부림에 기물 파손을 하는 자들이 아니냔 말이다.
설령 일을 벌이지 않는다 해도 살기 어린 눈을 희번덕거리는 통에 다른 손님들이 하나 둘 도망치게 만드는 자들이었다.
그뿐이랴!
한두 푼이라도 던져 주는 자는 양반이었다.
몇몇은 아예 술값과 숙박비가 뭔지 모르는 양 '야! 잘 먹었다.' 하는 말 한마디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또 일부는 칼을 내밀며 오히려 적선을 부탁하기도 했다. '나중에 갚을 게.'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무림인들이 고맙게 보였다.
그것은 박원유가 오랜 불황 때문에 결국 미쳐 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호랑이 때문이었다.
호랑이 소문이 돈 다음부턴 오가는 사람이 없어 삼년째 파리만 날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자신은 자본이 제법 있어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지만 다른 객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그도 언젠간 호랑이도 늙어 죽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겠냐는 오기를 가지고 버티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침나절, 관병 서넛이 오늘 무림인들이 호랑이를 잡아 주러 올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관병들이 공술을 마시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은 진짜였고 지금 객점은 무림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화씨세가라고 하던가?'
박원유 그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무림에선 황제와 같은 이름이라던가?
'저렇게 착한데 어떻게 황제를 하지?'
그는 의아해졌다.
대저 착한 마음을 가진 자가 최고의 위치에 도달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의 시선은 그들 중 한 명에게로 쏠렸다.
'근데 저놈은 왜 저러지?'
객점을 가득 채운 무림인 중 대다수는 몸에 검은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일반인이 그런 갑옷을 입고도 관군에게 제지받지 않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들 중 다른 자들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있는 거대한 사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사내의 거대한 덩치 탓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사내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철모를 벗지 않은 채 밥을 먹고 있었다.
한 손으로 살짝 철모를 쳐들고 다른 한 손으로 음식을 입에 넣는 모습이란…….
간혹 입술 끝만이 보일 뿐이다.
'얼굴에 보기 흉한 흉터라도 있는 걸까?'
박원유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 * *
"어떤가?"
마립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난 자네가 맘에 드네. 어때? 내 직속으로 일해 보지 않겠나?"
"나에게 철갑대를 떠나란 말씀이시오?"
호르륵! 국물을 마시고 무악이 말했다. 그는 마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무악 본인도 철갑대를 떠나기 싫은 모양이었지만 마립 역시 그가 철갑대를 떠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유사시에 쓸 수 있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여기 철갑대에 남아 있는 거고.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내가 자네의 뒤를 봐주겠다는 의미일세."
"글쎄올시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게. 자넨 철갑대의 총대장이 될 만한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네. 만일 자네가 내 사람이 된다면 내가 나중에 자네를 철갑대의 총대장으로 천거하겠다는 얘길세."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립은 실망스러웠지만 그것을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그러게. 단! 빠른 시일 내에 답변을 부탁하네."
무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뼈에 달라붙은 마지막 남은 고깃점을 뜯어냈다.
"얼굴에 상처라도 있나 보지?"
마립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것은 자신이 무악에게 관심이 많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무악은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들린 닭다리에서 기름이 떨어졌다.
그런 무악을 마립은 신기한 표정으로 살폈다. 지금 저 친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이곳 지부에 오기 전 무악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호치(虎癡) 그놈? 싸가지가 바가지인 놈이지. 그래도 덤비진 마, 개피 본다."
"쓸데없이 농담 걸지 마, 욕하는 줄 알어."
"오옷! 무악!"
정리하자면 머리는 나쁘지만, 성격은 더럽지만, 그 무용(武勇)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였다.
적과 나를 한꺼번에 위험하게 하는 양날의 칼이라는 이야기였지만 차기 가주라는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는 마립으로선 무악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 정도의 고수라면 포섭해 두는 것이 바람직했다.
철모 안에서 대답이 튀어나왔다.
낮은 저음의 목소리.
"대장이라면 무릇……."
"무릇?"
"부하들에게 신비감 있는 존재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난 부하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습니다."
말을 마치고 다시 무악은 식사에 열중했다.
마립은 그런 무악을 멍하니 바라보다 결국 그를 외면해 버렸다.
'미친놈…….'
마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하는 행동이 다른 법이지만 무악 저 친구의 생각은 지나친 데가 있었다.
마립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 * *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사당 쪽을 향해 출발했다. 서늘한 산바람이 마립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마음이 흐뭇해지는 건 깨끗한 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꼭 내가 무슨 장군 같군.'
갑옷을 입은 부하들을 뒤에 세우고 앞장서자 자신이 무림인이 아닌 군을 이끄는 장군이 된 기분이었다.
이 정도의 규모를 가진 부하들을 인솔하게 된 것은 마립의 짧지 않은 인생에서도 처음이었다.
마립은 옛날 무모한 작전으로 전쟁을 패배로 이끌었던 장군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누구랑 싸워도 자신 있을 것 같구먼.'
그냥 맨 뒤에 서서 '쳐라, 쳐라!' 소리만 지르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립이 느낀 그 느긋한 기분은 사당에 도착했을 때 끝장이 났다.
그의 기분이 더러워진 것은 관제묘를 둘러싸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고 나서였다.
온갖 병장기를 꼬나 들고 자리를 잡고 있는 흑의인들.
그들은 양각양에서 온 자들일 것이다.
어림으로 짐작해 봐도 그가 데려온 자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이런 개새끼들, 무슨 전쟁이라도 났나? 이렇게 많이 데리고 오게…….'
마립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허술한 자세로 마른 풀숲에 주저앉아 있던 보안대원들은 세가의 사람들이 접근하자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웬만한 무림세가인들도 보이기 힘든 민첩한 대응이었다.
무영일혼이 마립에게 귓속말을 걸었다.
"제법 하는 놈들이군요."
그들 사이에서 옆구리에 보석으로 치장한 장검을 찬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십객 중 검객인 유치아였다.
그가 물었다.
"어떤 분이 무영귀수, 마대협이시오?"
마립은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나요."
그는 포권을 하며 외쳤다.
"마립선생,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직접 만나 뵈니 헌앙하신 모습에서 고수의 풍도가 느껴지시는군요."
마립은 내키지 않았지만―양각양 같은 삼류 흑도문파와 말을 섞는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다―마주 포권하며 말했다.
"잘 지내셨소?"
만나서 반갑다느니, 명성은 익히 들었다느니 하는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떤 거요, 하는 질문도 싫었다.
흑도 놈이 무슨 얼어죽을 존성대명?
그거 몰라도 거래는 할 수 있다.
마립은 양각양 쪽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유상진은 어디 있소?"
유치아는 미소를 지었다.
"아! 절 책임자로 알고 계셨군요. 저희 대주와 유상진은 저기 관제묘 안에서 선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마립은 관제묘로 향했다.
당연하다는 듯 무영이십팔혼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유치아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마립은 유치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뭔가?"
유치아는 공손하게 말했다.
"부하 분들은 이곳에 남겨 두시고 혼자 들어가시죠. 저희 대주는 일 대 일로 만나길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
마립은 약간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관여하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지요."
무영혼들을 떼어놓고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부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싫어! 난 혼자선 못 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마립은 어쩔 수 없이 무영혼들을 남겨 둔 후 홀로 관제묘 안으로 향했다.
2
마립은 천천히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느릿느릿 소맷자락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이마가 차갑게 느껴졌다.
어둠침침한 묘실 안을 바라보자 왠지 겁이 났다.
천하 고수인 그에게 어울리는 감정이 아니었지만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양각양에 대한 소문은 제법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는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소문들을 생각해 보면 저 안에 홀로 들어간다는 건 마음이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마립은 안으로 걸어갔다.
'새끼들이 설마 무슨 일이야 벌리겠어?'
안은 어두웠다.
마립은 소리 높여 외쳤다.
"나 마립이오."
챠악―!
화섭자에 불 당기는 소리.
불빛은 어둠을 잠식해 들어갔다.
우선 눈에 들어온 것은 묘실 안쪽, 정중앙에 걸려 있는 관운장의 영정이었다.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그림 속에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눈에서 광채를 뿌리고 있는 관운장의 모습은 괴기스러워 보였다. 원래 죽은 사람은 다 무서워 보이기 마련이다.
마립의 시선은 영정에서 왼쪽으로 옮겨졌다.
"오셨소?"
관운장의 영정 앞에 놓인 공탁 옆에 선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더벅머리를 한 이십대 후반 정도의 남자였다.
사내 뒤에는 두 명의 장한이 화통에 불을 붙인 채 시립하고 있었다.
사내의 그림자에 가려 그 면면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마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립은 솟구치는 울화를 참기 위해 일부러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분명 이 안에서 일 대 일로 만나겠다고 들은 것 같소만."
화섭자를 품속에 넣으면서 사내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나친 걱정이오. 마립선생, 마음을 놓으시오. 이 친구들은 그냥 유상진을 감시하기 위해 있는 거요."
"글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오."
"마음놓으시오. 우리라고 싸우길 바라겠소?"
그는 포권하며 말했다.
"난 방희태라 하오. 미천하오나 양각양에서 보안대장의 중책을 담당하고 있소이다."
내가 걱정이 지나치다고? 천하의 무영귀수 마립이?
마립은 그 말이 계속 귀에 거슬렸다.
마립은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애써 참으며 쏘아붙였다. 그의 외침이 관제묘 내의 탁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좋소, 방대장. 근데 이 주변에 도대체 사람을 몇 명이나 배치한 거요? 산을 가득 메웠더군. 아예 천하에 소문을 내지 그랬소?"
방희태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많이 데려오지 않았소. 그냥 당신들이 데려온 만큼 데려온 것뿐이오. 그뿐이지."
"이……."
외마디 욕지기를 내뱉으려던 마립은 애써 참아냈다.
방희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보니 철갑대를 데려왔더군? 어디 전쟁이라도 가시오? 저런 갑옷을 들쳐 입은 자들이라니 말이오. 게다가 소문 따윈 걱정하지 마시오. 이 근처에는 호랑이가 있어서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으니 별 걱정 없소."
"좋아, 좋소. 우리가 서로 몇 명이나 데려왔는지 따져서 뭐하겠소? 빨리 유상진이나 내놓으시오."
"옳으신 말씀이오."
방희태는 옆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는 남자의 모습이 마립의 눈에 들어왔다.
마립이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잘 안보여. 고개를 들어봐."
그 말에 유상진은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마립은 웃었다.
이 안에 들어와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그는 유상진을 향해 말했다.
"자네 오랜만이군."
유상진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제 방희태 차례였다.
"자, 유상진, 본인이 확실하죠? 이제 천도서를 보여주시오."
마립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가 손을 꺼냈을 때 그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그는 책을 흔들어 보였다.
"이게……."
마립은 긴장의 고조를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천도서요."
마립은 방희태의 얼굴에 어린 탐욕을 놓치지 않았다.
마립은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선지 책을 몇 장 펼쳐 보였다.
"잘 보이죠?"
방희태는 쿵탕쿵탕 울리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저게 천도서구나.
방희태는 책을 빼앗아 들고 싶은 욕망을 억눌렀다.
그러나 눈앞에 그토록 원하던 물건이 있는데 볼 수 없다는 건 고문이었다.
방희태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확인해 봅시다. 이리 줘 봐요."
마립은 책을 품속에 갈무리하며 대꾸했다.
"농담이시겠지? 조금만 참으면 당신 것이 될 물건이오. 그때보고 싶은 만큼 보시오."
방희태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거 좀 불공평한 것 아니오? 우린 유상진을 확실히 보여줬는데 당신은 책을 몇 번 흔들다 끝내다니 말이오. 흥, 철갑대 정도로 우리를 겁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방희태는 바닥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 밑에는 화약이 수천 근 묻혀 있단 말이오."
* * *
마동출은 입맛을 다셨다.
싱그러운 풀 냄새, 기분 좋은 차가움을 안겨 주는 흙바닥.
거기다 그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 화약들까지.
임무만 아니라면 한숨 늘어지게 자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또 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그는 손에 들린 도화선을 바라보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상황을 보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되는 것이다.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왜 상대방이 애써 싸움을 걸겠는가?
책과 사람을 교환하고 그냥 헤어지면 될 것을.
그래서 마동출은 아쉬웠다.
그의 생애, 지금 만큼 큰 폭약 매설은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매설된 폭약은 그 동안 마동출이 만진 모든 폭약의 양보다도 많았다.
그뿐인가?
도화선을 감추기 위해 들인 공까지 생각해 보면 그냥 이곳을 떠날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빌어먹을, 나에게 이건 너무 괴로운 일이야.'
이런 명품을 한번 터트려 보지도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슬픈 일이었다.
옛날 어떤 사람도 그랬다지 않는가.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구.
마동출의 마음이 꼭 그와 같았다.
이 정도의 화약이 폭발하면 어떤 광경이 벌어질지 꼭 보고 싶었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도화선을 바라보았다.
꼭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차츰 거대한 폭발 장면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불은 화약이 묻힌 사당으로 타 들어갈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바보들의 발밑을 지나 화약이 묻힌 곳에 닿으면…….
쾅!
천지가 개벽하는 굉음과 함께 흙바닥이 하늘로 솟구쳐 오를 것이었다.
근처 숲으로 불이 타오를 것이고 그 불은 환하게 사방을 비출 것이었다. 마동출은 입안에 침이 한 바가지나 고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그건 정말 장관일 거야.'
그의 상상은 계속됐다.
그 다음은 폭발에 죽은 이들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보는 것이다. 마동출은 폭발뿐 아니라 이 부분도 좋아했다.
자신의 불장난으로 죽은 자들을 보는 것.
반쯤 그을린 채 여기저기 죽어 자빠져 있을 사람들.
재수 없는 자는 산산조각 나거나, 흙더미에 묻혀 버렸을 터이지만―사실 어떻게 죽든 죽음은 재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몇몇의 시체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벌거벗은 채이다.
지면에서 솟구친 충격파, 혹은 공기의 압력이 옷을 벗겨 버리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그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걸 볼 수 없다니……."
그는 슬픈 표정으로 바닥에 놓인 호리병을 집어들었다. 술병을 가볍게 흔들며 눈물을 흘렀다.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내린 거지?'
찰랑거리는 술병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카아―!"
거칠게 술병을 내려놓으며 그는 다시 입맛을 다셨다. 그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이건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야."
그의 발밑에는 빈 병 서너 개가 뒹굴었다.
* * *
"저 밖 어딘가 숨어서 내 신호만 기다리고 있소."
어느새 평정을 찾은 방희태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폭발이란 말이요! 다 죽어! 다 죽는다니까!'라고 말을 보탤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쯤으로도 효과는 충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립의 몸이 움찔거렸다.
마립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군."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대화를 듣고 있던 유상진 역시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일이 생각보다 어려워진 것이다.
'빌어먹을…….'
유상진은 마음속으로 방희태를 저주하며 한시라도 빨리 점혈을 풀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방희태는 말했다.
"힘껏 숨을 들이켜 보시오. 희미하게 화약 냄새가 날 텐데? 화약 냄새가 어떤지는 알겠지요?"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마립의 발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달리 바닥을 슬슬 파헤치고 있었다.
혹시 화약 뭉치가 조금이나마 보일까봐.
"이 동네를 당신 무덤으로 삼고 싶지 않다면. 자, 먼저 책을 주시오."
마립은 방희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허세에 불과했다.
그 역시 언제부턴가 슬금슬금 화약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마립은 부하를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부하들 앞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좋소. 그렇게 책을 보고 싶다면."
마립은 책을 꺼냈다.
방희태의 눈길이 몽롱하게 책에 가 꽂혔다.
마립의 손가락이 가볍게 책을 퉁겼다.
휘익―!
천도서는 방희태의 얼굴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날아갔다.
"흥!"
방희태는 외마디 비웃음과 함께 천도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디서 실력 자랑이라도 해보자는 건가?
그러나 책이 방희태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천도서가 방향을 바꿨다.
방희태의 손은 헛되이 허공만을 집었고…….
그의 얼굴은 붉어졌다.
책은 방희태의 주위를 한바퀴 돈 후 천천히 내려앉았다.
방희태는 이번엔 조심해서 책을 움켜잡았지만 책은 더 이상의 변화를 부리지 않았다.
"우후후! 열심히 읽어보시오."
마립의 말에 방희태의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보였다.
지금 한 수로 자신의 무공이 마립에 미치지 못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공이 모든 걸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만 해도 화약고를 안고 있는 자신이 보다 유리한 것이 아니겠는가.
방희태는 울화를 누르며 책을 잡아들었다.
호쾌한 글씨로 쓰여진 세 글자.
<天道書.>
방희태는 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했다.
반각 여나 지났을까?
그는 책의 내용에 빠져 그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마립이 소리쳤다.
"이제 그만 보고 교환을 완결 지읍시다."
넋나간 표정으로 천도서를 뒤적이던 방희태는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응? 뭐요? 아… 좀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시오."
'맞는 이야기지.'
유상진은 마음속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는 아직 혈도를 풀지 못한 상태였다.
방희태의 공력은 상상 이상이어서 혈도를 푸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마립은 투덜거렸다.
"이보시오, 우린 빨리 일을 끝내고 호랑이를 잡아야 한단 말이오! 그 핑계로 이곳 관아의 통행 허가를 받았는데……."
그러나 방희태는 고집스럽게 반각 정도 책을 더 본 후에야 입을 뗐다.
계속 읽고 싶은 모양인지 아쉬운 듯 책을 연신 힐끔거리며 말했다.
"진품이 맞군."
그는 뒤에 시립한 부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객과 유객이 무릎을 꿇고 있는 유상진을 양쪽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했다.
몸을 일으키며 유상진이 신발 틈에 숨긴 단검을 꺼내 들었음을.
그는 막힌 혈도를 모두 푼 상태였다.
탁―!
"가 봐!"
환객이 거칠게 유상진을 마립 쪽으로 밀었다.
유상진이 팔을 허우적거렸을 때 사람들은 그가 살기 위해 마지막 발버둥을 치는 줄 알았다.
방희태만이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분명 전신의 혈도를 점혈했는데…….'
그러나 그 역시 별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쉭―!
갑자기 유상진의 손끝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방희태의 손목을 그었다.
동맥을 갈랐는지 손목에선 피가 솟구쳤다.
방희태의 손이 천도서를 놓쳤다.
동시에 유상진의 신형은 그대로 마립의 가슴 사이로 파고들었다.
"우욱!"
마립은 허리를 꺾으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방희태를 벤 손으로 천도서를 움켜쥐며 유상진은 그대로 마립의 몸을 밀쳤다.
마립은 복부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고 유상진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일순간 두 명의 고수를 격퇴한 것이다.
그는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마립을 해치웠다! 공격하라!"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방희태였다.
그는 뿜어져 나오는 피를 지혈하며 소리쳤다.
"놈을 잡아!"
그의 명령에 정신을 차린 유객이 몸을 날렸다.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
펑!
한 줄기 강력한 장력이 유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윽!"
그는 날아가던 속도보다 빠르게 뒤로 날아갔다.
유객은 피거품을 흘리며 관운장의 영정에 몸을 부딪쳤다.
핏물이 튀어 관운장의 대춧빛 같은 낯빛이 더욱 붉어졌다.
방희태는 유객을 공격한 자를 찾았다.
"방희태, 이 새끼들……. 감히 날 속여?"
바로 마립이었다.
한 손으로 배에 박힌 단검을 잡으며 마립이 소리쳤다. 격렬한 언사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것 보시오! 나도 다쳤소!"
방희태는 베어진 손목을 가리키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흥, 네놈들이 짜고 벌인 일이겠지? 그렇지 않나?"
"그렇지 않소."
방희태는 당황함과 침중함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도 이미 말로 일을 해결할 단계는 지났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유상진이 갑자기 그런 움직임을 보인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기가 그런데 마립의 입장에서라면…….
"날 속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마립은 아무 말 없이 혈도를 점혈해 피를 멈추고 있었다.
곧 있을 싸움을 준비하는 태도였다.
방희태 역시 지혈을 끝내고 품속에서 철척을 꺼내 들었다.
마립은 새처럼 양팔을 벌리고 한쪽 발을 낮게 쳐들었다. 그의 절기인 무영권이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예상외로 방희태였다.
아무 준비 동작 없이 철척이 뱀처럼 마립의 목젖으로 짓쳐들었다.
꽈아앙―!
마립의 발과 철척이 부딪치자 놀랍게도 뇌성과 같은 굉음이 일었다.
공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 바닥이 부서지며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마립은 철척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다시 한 번 방희태의 머리를 향해 발을 날렸다.
방희태는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몸을 굴려 마립의 연환각을 피해냈다.
정상적인 무인이라면 죽기보다 치욕으로 생각하는 방법이 바로 나려타곤이었다.
마립 역시 어이가 없는지 잠시 멈칫거렸다. 방희태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날려 묘실 밖으로 뛰어나간 것이다.
책을 확보한 이상 더 이상 마립과 손을 맞댈 이유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유상진의 확보였다.
방희태는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환객! 놈을 맡아라!"
마립은 방희태가 대결 도중 도주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은 곧 분노로 변했고 마립은 이를 갈며 방희태를 따라 몸을 날렸다.
두어 걸음이나 내달렸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마립은 두 팔을 쳐들며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파파팍―!
십수 개의 표창이 그가 일으킨 바람 때문에 흩어져 버렸다.
그 틈에 환객의 몸이 문을 가로막았다.
마립은 바닥에 내려앉으며 소리쳤다.
"네놈이 날 방해하는 거냐?"
환객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널 죽이고 나도 유명해 보자."
* * *
방희태가 관제묘 밖으로 뛰어나갔을 때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른 후였다.
완전한 전면전이었다.
싱그러운 풀 냄새는 피비린내로 변했고 양편은 눈을 벌겋게 뜨고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것은 아마도 유상진이 부린 술수 탓일 것이다.
전세는 좋지 않았다.
그의 보안대원들은 철갑대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비슷한 인원에 정면 대결인데도 이렇게 밀린다는 것은 실력의 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방희태는 싸움의 중심부로 뛰어들었다.
쓰러진 삼뇌객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야압!"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 날이 선 창날이 방희태를 노리고 짓쳐들었다.
방희태는 살짝 창날을 피하며 상대방 가까이 파고들었다.
그의 철척이 번뜩이는 순간 철갑대원의 투구와 호심경 사이 목젖이 찢어졌다.
펑!
쓰러지는 철갑대원의 가슴을 후려치자 철갑대원은 피보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갔다.
그 덕에 그를 따라오던 철갑대원들의 진형이 흐트러졌다.
그 틈을 타 방희태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삼뇌객을 일으켜 세웠다.
삼뇌객은 어깨에 피가 흥건했다. 그는 더 이상 부채를 쥐기 힘들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삼뇌객은 창백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그게 말이죠……."
* * *
양 진영은 서로를 마주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
통성명을 나누며 인사를 할 사이도 아니었고 또 적을 앞에 두고 왁자지껄 웃고 즐길 게재도 아니었기에 장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애써 외면하며 그렇게 서 있었다.
간혹 멀리서 새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상황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무악 덕분이었다.
철갑대만이 유일하게 싸움을 기대하듯 길다란 창을 앞으로 내민 채 일렬횡대로 서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더운 날 철갑을 쓰고 서 있다는 것은 분통 터지는 일이다.
따라서 누군가 울화를 터뜨린다면 그것은 철갑대에서 나올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무악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통쾌하고 피 튀기는 싸움을 원하고 이곳에 온 그에게 이것은 일종의 고문이었다.
"썅! 이게 뭐하자는 거야?"
그는 거칠게 투구를 벗어 던졌다.
용의주도하게도 그의 얼굴은 두건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양각양에서 파견된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욕구불만이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준비해라!"
그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철갑대가 아니라 무영일혼이었다. 무영일혼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무대장. 그게 무슨 소리요?"
"일혼! 그냥 쓸어버립시다!"
그는 마립의 직속 부하이자 현재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무영일혼에게 덤비듯 소리쳤다.
제딴에는 소리를 줄인다고 줄였지만 장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무영일혼은 무악을 달랬다.
"목소리를 낮추시오, 다 들리오."
그 말에 무악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주먹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어떤 쥐새끼 같은 놈이 내 말을 엿듣는단 말이요! 또 좀 들으면 어때? 저 자식들은 내 한주먹거리도 아닌데?"
무악은 그의 말에 양각양 쪽의 분위기도 흥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소리쳤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우리 철갑대의 전통에 먹칠을 하게 되는 거란 말이오!"
"적당히 해두시오. 무대장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란 말을 듣지도 못했소?"
"흥, 그건 힘없는 문사들의 헛소리에 불과하오. 원래 저런 쥐새끼 같은 놈들은 힘을 보여주지 않으면 언젠간 다시 덤벼들기 마련이오!"
이렇듯 무악의 공로(?)로 말미암아 양쪽 진영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원래 껄렁패에 무뢰한, 불한당이었던 양각양의 보안대원들이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화씨세가라 해도.
아니, 오히려 화씨세가이기 때문에.
양각양에 속한 자들의 대부분은 과거 흑도에 몸을 담고 있던 자들이었다.
개중엔 화씨세가에 의해 멸문된 자들도 제법 있었다.
혹 그게 아니더라도 무릇 흑도 계열이라면 화씨세가에 끝없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일을 말려야 할 검객 유치아마저 이마 위의 힘줄이 불끈거릴 정도니 말 다한 것이다.
삼뇌객 정도가 불끈거리는 동료들을 달래려 애썼지만 장내는 점점 응축된 살기로 가득 찼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때 관제묘에서 한 놈이 뛰어나왔다.
양 진영은 서로에 대한 분노도 잊고 새로이 나타난 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뛰어나오는 사내.
삼뇌객은 아미를 찌푸렸다.
"저 자식은 누구지?"
그의 기억으론 묘실에 들어간 자는 대주인 방희태와 유객, 환객뿐이었다. 그리고 세가의 마립까지 네 사람.
저놈은 처음 보는 놈이었다.
그는 유상진은 사람으로 생각지 못했다.
삼뇌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그대로 내달리며 다짜고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립은 죽었다! 놈들을 쓸어버려라! 세가를 무림에서 지워 버리자!"
그 말은 그렇지 않아도 불씨가 어른거리던 화톳불에 기름을 쏟아 부은 격이었다.
무악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다 죽여라!"
무악의 벼락과 같은 외침 소리를 신호로 철갑대가 양각양 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악 역시 준비를 시작했다.
"내놔!"
그가 한 손을 내밀자 옆에 시립하고 있던 철갑대원이 끝날 길이만 해도 네 자가 넘는 장창을 내밀었다.
창을 움켜쥐고 무악은 앞으로 날려 나갔다.
양각양 쪽도 멀거니 서서 철갑대가 쳐들어오기를 기다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대장의 명령이 떨어져야 했기에 무기를 꺼내 들고 검객을 바라보았다.
유치아의 손이 검에 가 닿을 때…….
삼뇌객이 그의 손을 잡았다.
"형님,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나더러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란 말이야?"
유치아는 삼뇌객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박살내 버려!"
유치아가 외치자 대원들도 무기를 빼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첫번째 격돌이 일어날 때 무악은 관제묘에서 뛰어나온 놈을 목표로 달려들었다.
"마립은 죽었다!"라고 외친 그놈 말이다.
그가 달려나가며 창을 팔방개비처럼 휘두르자 그의 주위에 있는 자는 누구나 팔이 떨어져 나가거나 다리가 허벅지부터 잘려 나가거나 머리가 박살나서 돌멩이처럼 굴러다녔다.
마침내 그의 앞은 무인지경처럼 길이 뚫렸고,
"푸하하하! 처음으로 내 손에 죽는 영광을 주마!"
지금까지 죽인 자들은 생각지 않았는지 무악은 그렇게 외치며 뛰어올랐다.
펄쩍―!
보기와는 달리 그 육중한 체구는 무척이나 날렵했다.
미친 황소처럼 뛰어오른 그와 부딪치는 자는 백이면 백 실 끊어진 연처럼 퉁겨 나갔다.
순식간에 관제묘에서 튀어나온 사내의 앞까지 달려들며 창을 휘둘렀다.
팔방풍우의 초식으로 날아오는 두꺼운 장창을 피할 도리가 없다.
퍽―!
창신이 사내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욱!"
사내의 몸이 허공에 떴다. 무악은 사내를 완전히 요절내기 위해 창극을 뻗어냈다.
휭―!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창극.
챙!
한 자루 검날이 날아와 창날을 비켜냈다. 그 가벼운 동작으로 창은 본래의 방향을 잃고 허공을 갈랐다.
그 사이 사내의 몸은 십여 장 뒤로 날아가 수풀 속으로 떨어졌다.
"어떤 새끼야?"
무악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창을 막은 자를 노려보았다.
검객 유치아가 무악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중단세를 취한 채 무악을 노려보며 말했다.
"쥐새끼 등장이다. 한번 힘을 보여줘 보시지."
"이놈!"
유치아 덕분에 목표를 잃은 무악은 분노에 찬 외침을 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치아는 물 흐르듯 고요하게 무악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 이렇게 된 겁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저희가 밀리고 있죠."
"……."
방희태는 대답할 틈이 없었다.
한 손으론 중상을 입은 삼뇌객을 잡고 한 손으론 철갑대와 맞서 싸워야 했으니까.
슉! 슉!
철척으로 덤벼드는 철갑대원 두 명의 호심경을 찍었다.
워낙 두터운 갑옷이라 구멍을 내지는 못했지만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는 있었다.
쉴 틈이 나자 그제야 방희태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 개새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게……."
샤악―!
날아드는 칼날이 방희태의 대답을 막았다.
방희태를 두 조각 내려는 듯 좌에서 우로 대감도가 파고들었다.
빠르고 날카로운 대감도의 공격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세류표의 신법에 몸을 맡기며, 방희태는 철척으로 왼쪽 아래서 오른쪽 위를 향해 그어 올렸다.
챙!
의외의 각도로 날아간 철척은 대감도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방희태는 뒷걸음치는 상대를 그냥 두지 않았다.
스윽―!
뒷발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철척을 그어 내렸다.
잠시 동안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보였다.
대감도의 사내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대로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이마에서부터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는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둘로 갈라져 버렸다.
무영구혼의 최후였다.
"놈!"
철갑대 서넛이 달려들었다.
방희태는 옆으로 살짝 몸을 틀어 다시 시작된 철갑대의 공격을 피했다.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철갑대를 정면에서 맞아들인다는 건 바보짓이었다.
살짝 피하며 빈틈을 노린다.
방희태의 철척이 투구와 호심경 사이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쓰러지는 철갑대원을 다른 철갑대원들을 향해 걷어찼다.
그들은 차마 자신들의 동료를 찌르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 틈에 방희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보안대는 거의 괴멸 상태에 빠져들어 있었다.
흑도 계열에선 힘깨나 주고 다닌다는 신비의 단체, 양각양이었지만 천하제일가인 화씨세가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실력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보안대원 중 일부는 상황이 나빠지자 전장을 떠나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방희태는 절망하지 않았다.
"청산이 있는 한 땔감 걱정은 없는 법이지."
자기가 생각해도 상황에 맞는 고사성어였다.
천도서만 있다면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천도서가 품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가에 있는 것보단 유상진 손에 있는 게 뺏기 쉽지 않겠는가.
방희태는 쓴 입맛을 그렇게 달래며 마음을 정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삼뇌객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 말씀은……?"
방희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할 것이기에.
그냥 삼뇌객의 몸을 짓쳐오는 철갑대의 창극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리곤 우거진 수림을 향해 그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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