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 [고영민]
자면서 그대가 나에게 다리를 올려놓는 시간 내가 이불을 당겨 그대의
배를 덮어주는 시간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자는 시간
밤새 무거운 머리를 들고 있는 베개처럼, 읽다가 머리맡에 엎어놓은
책처럼 죽은 그대가 뜬눈으로 내 옆에 일 년을 앉아 있는 시간
자다 말고 일어나 그대가 몇 모금 목을 축이는 시간
습관처럼 자는 척하는 시간
또 저물듯 시간이 몸을 지나고
구들이 식고
그대 잠 속으로 다시 천천히 숨어드는 시간
문득 내 살던 집의 팽나무가 보고 싶은 시간 병든 아버지의 이마를 짚어
주는 시간 산란을 위해 옴두꺼비가 느리게 국도를 건너는 시간
내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간 이유 없이 등 뒤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
공기가 빙긋이 웃는 시간
지구가 천천히 돌아가는 시간
- 사슴공원에서, 창비, 2012
흰 [이은규]
섬에 도착한 직후
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바다조차 힙하지 않으면
반짝반짝 펠롱펠롱 별 대신 바다 뷰 카페의 필라멘트
전구들이 눈을 감았다 잘도 떴다 힙하다, 라는 말의 뜻을
나는 잘 몰랐지만 아 그렇구나
바람구두를 즐겨 신었던 랭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게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가 무기상이 되어 떠돌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아직 믿을 수 없고
알고 있지 이 섬에 바람, 돌, 여자가 많다는 거 아 그렇
구나 다시 태어나면 정물이 되고 싶다던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지만 금세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매진, 구좌 당근 케이크 먹기에 실패한 네가
팽하고 토라진 것과 무관하게
다음 여정인 신당의 팽나무 한 그루 앞에 도착했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나무에는
가지마다 흰 종이들이 묶여 있고
오래전 글 모르는 이들이 저 흰 종이를 가슴에 대고 소
원을 빌었다는데, 왜 모든 소원에는 지울 수 없는 이름이
숨겨져 있을까
추운 바람이 불어오면
나뭇가지 어디쯤 매달려 있는 한 사람의 소원이
밤마다 웅―웅 울 것만 같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문득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내가 엉뚱해, 처음 와본 바다 풍경을 오랫동안 그리워할
수 있다니
저기 붉은 동백숲은 싫고
흰 까멜리아는 좋아
샤넬 미니백을 검색하던 네가 투명하게 웃을 때
오늘의 마지막 여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람구두도 없이
해 저무는
- 무해한 복숭아, 아침달, 2023
후두염 [김수우]
겨울 내내 소리가 갇혔다
지독하게 목쉰 굴참나무
봄볕 쬐고서야 잠겼던 음성이 새어나온다
부은 목청 빠작빠작 앓고서야
이끼 푸른 아우성이 환히 들린다
값싼 필연에 삯을 팔던 어미들 얼마나 먼 구렁을 걸었는가
갯돌 같은 새끼들 어디서 꼬리연을 잃었는가
산동네 골목인 듯 수미산 가는 굽이인듯
흘깃, 늙은 팽나무 뒷모습을 본 듯도 아닌 듯도 했다
어느 해골이 꾸던 해묵은 꿈을 물려받은 것처럼
알 듯 말 듯 한 마을들이 차례로 열린다
공중전화 옆 붕어빵 수레는 닫힌 날이 더 많았다
붕어 틀 어깻숨, 몰래 들썩인다
낱말과 낱말 속에서 잊힌 것들 품삯이 얼마인가
소리는 절벽이 되었다
한번도 근육질이 되지 못한 꿈
목뼈를 세우고 어둑시근한 길 걸어 걸어
목젖 엉긴 소리는 저만치서 뿌리가 된다
보이지 않는 물방울로 거목을 기른 안개처럼
대지의 물관을 감아 도는 쉰 울림
어느것도 잊지 않았다 잊지 않으려 목을 앓는다
- 뿌리주의자, 창비, 2021
팽나무 청과상회 [박성우]
팽팽하던 팽나무가 한여름 땡볕에
어깨를 축축 늘어뜨리는 한낮이다
잘나가던 한때는
한때 지나가기 마련이라고
이제는 쪼글쪼글 늙어 션찮아진
팽나무 골목 청과상회, 색이 누렇게 바랜
차일의 다리는 자꾸만 바깥으로 휘어진다
그렇다고는 해도
흥성흥성하던 시절이나
마냥 떠올리고 있을 수는 없어
팽나무 골목 청과상회 늙은 안주인은
머리 맞대어 수박을 놓고 그 옆으로
각양각색 뻥튀기까지 들였지만
김이 빠지기는 매한가지다
일없이 부채질이나 하던
팽나무 골목 청과상회 늙은 안주인이
바가지로 물을 그득그득 퍼서 쫙쫙 찌큰다
화들짝 정신 차린 팽나무가
뙤약볕에 오그라든 그늘을
최대한 팽팽하게 잡아 펴서 할매들이
노닥노닥 노는 평상 위로 추슬러올린다
여그 잘 여문 수박 한덩이 줘보소,
평상에서 쉬던 할매들이 수박을 사가자
뻥튀기 봉다리가 들뜰 대로 들뜬다
열무는 처진 몸을 돌려세우고
연분홍 소쿠리에 든 연분홍 복숭아는
자리를 바꿔 앉으며 엉덩이를 들썩인다
- 웃는 연습, 창비, 2017
기수급고독원 [이경림]
흘러가는 구름을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산비탈 공터에 홀로 울울한 팽나무를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우듬지 근처, 위태롭게 얹혀 있는 까치 둥지의 검고 성근 속을,
담장을 뒤덮은 개나리덩굴 아래 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검은 줄무늬 돌멩이를,
엄동에 종일 생선 리어카에 붙어 서서 떨고 있는 반백의 저 사내를,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거두절미하면,
'급 고독'
헐벗고 고독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이천년 전 어느 장자(長者)의 전설과는 상관없이
속으로 급히 꽂히는 말, 급 고독(孤獨)……
급! 고독(高獨)
급전 쓰는 마음처럼 급(急)
쓸쓸,
쓸쓸함의 최고봉
쓸쓸함의 낭떠러지!
발치에 차이는빈 깡통을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이녁으로 몸 들이밀기 무섭게 얼어붙은 저 빨간 장미를,
입 헤―벌리고 종일 떨어지기 기다리는 창백한 저 변기를,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가
천지에 널린 고독 사이를 흘러다니다
급(給), 고독(孤獨)하여
급(急), 고독(高獨)이 된 그를, 나를,
기수급수도원이라 불러도 좋겠저녁이 이녁에게
급! 고독습니까
노을이 벌겋게 산등성이를 먹어치우는 저녁은
고독을 나눠주기 알맞을 때
저녁이 이녁에게
급! 고독
전보라도 날리기 좋은 때
저녁의 장지문 안에서 한 그림자가 오래 먹을 갈아 천천히 쓰기를,
이녁은 비록 협개(挾塏)하나 천림(泉林)은 번울(繁鬱)하고 인벽(人壁)이 사방 구만리(九萬里)니 가히 고독(高獨)의 가람(伽藍)을 지을 만하지 않은가*
*기원정사(기수급고독원)의 건립 비화에서 빌려옴.
- 급! 고독,창비, 2019
팽나무를 포구나무라고 부른 까닭 [고두현]
―물건방조어부림 3
어떻게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을까
오래된 일이지만 예전부터 궁금했지.
이 숲 속 팽나무를 우린 포구나무라고 배우며 자랐지.
소금기에 강해 포구(浦口)에서 쑥쑥 큰다고.
포구 열매에선 늘 풋내가 났지.
푸조나무는 어때? 오래오래 푸근하고 넉넉하고
편안한 그늘 드리워 준다고 그렇게 불렸대.
이팝나무 꽃은 입하 무렵에 피지. 흰 쌀밥 닮은 이팝 꽃잎.
고봉밥처럼 풍성히 피어야 풍년 든다고 아버진 말씀하셨지.
아 보리밥나무도 있네. 씨 모양이 보리밥 같아 그렇게 부르는
보리수나무,보리똥나무, 볼레나무…………
그러고 보니 모두 먹는 타령이군.
비바람 해일 풍랑 다 막아 주고
긴 숲 그림자로 물고기까지 불러들이는
물건방조어부림에 와 보면 왜 그런지 알게 되지.
그 숲 참느릅나무 그늘 아래 숨죽이고 앉아
손가락 걸어 본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말이야.
- 달의 뒷면을 보다, 민음사, 2015
개가 사라진 쪽 [고영민]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불붙은 개는 저쪽에서 달려올 테지
댓잎이 나오는 지금 쯤
어린 장어는 강에 오르고
열 세 명이나 들어가던 늙은 팽나무엔 연초록 새잎이 돋고
발목에 가락지를 채워 보낸 새는
다시 돌아오고
누가 개에게 불을 붙였나
달려도 달려도 불은 떨어지지 않고 개는
무작정 또, 달리고
나는 언제부터 지루해졌을까
차량정비소로 뛰어 든 개는
결국 건물 한 동을 홀라당 다 태울 텐데
그 사이 봄은 여름에게, 저녁은
밤에게 몸을 내어주고
개가 전속력으로
개로부터 빠져나가는 저녁
아무리 도망쳐도 너를 위한 몸은 없다고
모든 그림자는 가장 길게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데
나는 우두커니
개가 사라진 쪽을
- 시와편견, 실천, 2021가을호
민물새우는 된장을 좋아한다 [이재무]
민물새우는 된장을 좋아한다 소문난 악동들 따라 나도 소쿠리에 된장주머니 달아놓고 저수지 가생이에 담가놓는다 미역 즐기다 해거름 출출해지면 소쿠리 건져 올린다 된장주머니 둘레에 새까맣게 민물새우떼가 매달려 있다 그걸 담은 주전자가 제법 묵직하다 집으로 돌아오다 남의 집 담장 위 더운 땀 흘리는 앴된 애호박 푸른 웃음 꼭지 비틀어 딴 후 사립에 들어선다 막 밭일 마치고 돌아와 뜰팡에서 몸에 묻은 흙먼지 맨수건으로 터는 엄니는, 한 손에 든 주전자와 또 한 손에든 애호박 담긴 소쿠리 번갈아 바라보다가 지청구 한 마디 빼지 않는다 "저런 호로자식을 봤나, 싹수 노란 것이 애시당초 큰일 하긴 글렀다, 간뎅이가 부어도 유만부동이지 남의 농사 집어오면 워찍한다냐 워찍하길" 그런데도 얼굴 표정 켜놓은 박속 같다 아들은 눈치가 빠르다 다음날, 또 다음날도 서리는 계속된다 된장 밝히다 죽은 새우는 애호박과 함께 된장국에 끓여져 식구들 입맛 돋우곤 하엿다 그런 날 할머니의 트림 소리는 냇물 너머까지 들리고 달은 우물 옆 팽나무 가지 휘청하도록 크게 열렸다
- 위대한 식사, 세계사, 2002
당신 [유하]
오늘밤 나는 비 맞는 여치처럼 고통스럽다
라고 쓰다가, 너무 엄살 같아서 지운다
하지만 고통이여, 무심한 대지에서 칭얼대는 억새풀
마침내 푸른빛을 얻어내듯, 내 엄살이 없었다면
넌 아마 날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열매의 엄살인 꽃봉오리와
내 삶의 엄살인 당신,
난 오늘밤, 우주의 거대한 엄살인 별빛을 보며
피마자는 왜 제 몸을 쥐어짜 기름이 되는지
호박잎은 왜 넓은 가슴인지를 생각한다
입술을 달싹여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그만두는 밑둥만 남은 팽나무 하나
얼마나 많은 엄살의 강을 건넌 것일까
-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1993
그믐달 [천양희]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 벌새가 사는 법,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첫댓글 고향 중학교 교정에 한 여름의 그늘이 되어주어
어머니 품안같은
팽나무 숲
그때는 포구나무라 불렀습니다
이제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니
명절에도 고향을 찾지않는
많은 추억이 살아있는 고향의 팽나무가 그립습니다
주페님
갑진년 설날을 맞이하여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네.동송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남해에 가면 물건리에 팽나무들이 많더라구요.
그곳에서 팽나무를 보았습니다.
아마 포구나무라고 불리는게 그럴만 했던거겠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