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룡전설 8권- 第三章

[고향설*]

남해검문에는 보수각이라고 하는 조직이 있다. 주유성은
보수각의 각주와 실무 협의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야, 파무준. 보수각이 뭐 하는 데냐?"
  주유성의 말에 지은 죄가 꽤 큰 파무준이 즉시 대답했다.
  "보수각은 우리 검문의 각종 시설을 보수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주유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그런 각이 있어? 건물 보수는 개판이던데? 그리고
남해검문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걸 위해서 각이 하나 따로
존재해?"
  "물론이다. 우리 검문은 보수할 것이 아주 많다."
  "흐음. 그래? 역시 수상해."
  주유성이 파무준을 한번 째려봐 주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유성이 만난 이는 건장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선이 굵은
외모를 가졌고 활기 넘치는 기운을 사방에 발산하고 있었다.
  중년인이 주유성을 보고 말했다.
  "중원의 육절서생이 기관진법이 대단하다 소문이 나더니
너무 어린 감이 있군. 이래서야 믿고 일을 맡길 수가 있나.
내가 보수각주인 현승금이오."

  주유성이 즉시 삐딱하게 나왔다.
  "어린 놈 도움이나 받아야 하는 보수각주시군. 주유성이외
다."
  현승금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성질대로라면 즉시 주먹이
튀어나가야 옳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끄응! 육절서생의 무공이 그리 낮지 않다고 하니 나보다
는 세겠지. 이거 두들겨 팰 수도 없고.'

  현승금이 즉시 도면을 넓은 탁자 위에 쫙 펼치며 말했다.
  "길게 말해 무엇 할까? 장인은 실력으로 말하는 법. 곧바로
실무 협의로 들어가지?"
  "말하쇼. 듣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현승금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지만 주유성은 콧방귀만
뀌고 있었다.
  어쨌든 상황 파악을 위해서 주유성은 도면들을 훑어보았
다. 그는 갑자기 펄쩍 뛰었다.
  "이게 뭐야! 이거 대규모 토목공사잖아!"

  이번에는 현승금이 콧방귀를 귀었다.
  "흥! 그래도 도면은 볼 줄 아는군. 당연히 대규모 공사 도
면이지. 이건 우리 검문을 지키는 '해신의 방패' 보수공사니
까."
  주유성이 인상을 마구 썼다.
  "설마 당신네 그 해신의 방패를 전부 보수하자는 소리는
아니겠지?"

  현승금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이보시게, 육절서생.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
닌가? 우리가 해신의 방패가 어떤 구조인지 그 비밀을 당신에
게 넘겨줄 것 같아?"

  주유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전부 다 보수하라고 했으면 지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돌아가 버리려고 했다고."

  현승금이 비웃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군. 그건 설사 자료를 제공한다고
해도 육절서생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런
식으로 나를 자극한다고 해서 내가 기밀 도면을 넘겨줄 것 같
은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도면들은 개략적인 것들이라고."
  "귀찮아지니까 제발 그런 것 내놓지 마. 그나저나 그럼 왜
내가 필요한지 이야기나 들어볼까?"

  현승금은 주유성을 보다가 도면 중 하나를 제일 위로 올려
놓았다.
  "이것은 해신의 방패의 중추에 해당하는 곳의 개략적인 도
면이다. 우리는 여기를 제일도라고 부르지."
  "젠장! 개략도면이 왜 이리 복잡해?"

  "해신의 방패가 만들어진 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났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수백 년은 훨씬 넘었다. 그런데 약 삼백
년 전부터 해신의 방패에 결함이 발생했다."

  주유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백 년? 그놈의 삼백 년 전에는 천지 사방에 참 별의별
일이 다 있었군. 무슨 결함인데?"
  "그때 이후로 해신의 방패를 총괄하는 제일도가 조금씩 노
후화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삼백 년 전부터 낡았으면 지금쯤 썩어 문드러졌어야지 어
떻게 멀쩡히 돌아가?"
  "그런 것은 남아 있는 기록이 확실하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리 검문은 해신의 방패를 보수하기 위해
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오호라. 그래서 보수각이라는 곳이 따로 존재하는 거군?
해신의 방패를 보수하기 위해서?"
  "그렇다. 특히 우리의 보수는 바로 이곳, 제일도에 집중되
어 있다. 이곳은 해신의 방패 전체의 중심이 되는 곳. 이곳을
조정함으로써 전체 해신의 방패의 상태를 조절하는 것이 가
능하다."

  주유성이 탁자를 톡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가만, 이상하잖아. 내가 여기 들어오면서 구경한 바에 의
하면 해신의 방패라고 하는 것은 바다 위에 펼쳐진 광역기후
통제진법의 일종 같은데? 아무리 천재가 나타나도 그런 것을
겨우 섬 하나에 설치된 진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하지. 연계 동
작을 하는 연결진들이 바다 여기저기 있을 텐데?"

  현승금이 조금 놀라는 얼굴로 말했다.
  "육절서생의 명성이 완전히 과장된 것은 아닌가 보군. 그
말이 맞다. 해신의 방패는 제일도에서부터 제이십도까지 스
무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중추가 되는 곳이라고 해도 한군데만 보수
해도 돼?"

  "기록에 의하면 나머지 열아홉 개의 섬은 아주 견고하게
진이 설치되어 있다. 그 구조 역시 간단하여 망가질 일이 없
다. 더구나 우리는 제일도를 수리하는 것만으로도 해신의 방
패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다."
  "응? 기록에 의하면? 가본 게 아냐?"

  현승금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제이도부터 제이십도 주변의 바다에는 외부의 접근
을 차단하는 살진이 펼쳐져 있다. 애초에 한 번 설치하면 다
시 보수할 필요가 없는 진이라서 그렇다."

  바다 위에 펼쳐진 살진이라는 말에 주유성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북해에서의 그 어마어마한 살진 같은 건 다시 겪고
싶지 않아. 어차피 일감은 줄이는 게 좋겠지.'

  주유성이 즉시 태도를 바꿨다.
  "좋아. 제일도. 거기서 끝내지 뭐. 그래서 이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뭐야?"
  "제일도의 중심에는 복잡한 기관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그것이 전체 진의 움직임을 총괄하는 핵심이지. 그동안 낡은
상태에서도 보강재를 덧붙여 수리를 했다. 하지만 슬슬 그것
이 한계에 달했다."

  "그걸 고쳐 달라? 그래서 기관과 진법 둘 다 잘하는 내가
필요했군?"
  "그렇다. 그것은 진법을 움직이는 기관. 당연히 기관 장치
의 수리를 하면서 진법을 고려해야 하니까."

  주유성이 손뼉을 딱 쳤다.
  "좋았어. 그것만 고쳐 주면 된다 그거지?"
  "그것의 크기는 그리 작지 않다. 상당한 대공사다."
  주유성이 환히 웃었다.
  "괜찮아. 어차피 힘쓰는 일은 니들이 할 거잖아? 나는 입으
로 시키기만 할 거야."


  접객당으로 돌아온 주유성은 파무준을 불러다 놓고 질문
했다.
  "야, 파무준. 이야기가 꽤 다르다? 너네가 워낙 부자라서
황금 이십 관쯤은 쉽게 줄 수 있다며?"
  주유성은 남해검문이 북해빙궁 같은 곳인 줄 알고 이십 관
의 황금을 받는 문제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여기는 북해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파무준이 뜨끔해서 말했다.
  "그, 그것이, 그래도 부수 과정에서 나오는 보물은 모두 네
가 가지도록 했지 않은가? 그 정도면 충분... 케엑!"
  주유성에게 걷어차인 파무준이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이게 어디서 사기를 쳐? 죽을래?"

  주유성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파무준이 꼬리를 말고 구석에
서 떨었다. 한 대 걷어차였을 뿐인데 뼛속까지 시렸다.
  '이놈의 사람 패는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예전에
맞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파무준을 구해준 것은 남궁서린이었다.
  "주 공자님, 하지만 무림맹에 대한 지지는 꽤나 중요한 문
제잖아요."
  남궁서린은 명색이 남궁세가 가주의 손녀다. 무림의 정세
를 잘 알지는 못해도 이번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정도는
안다.

  주유성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게 아니었으면 보수공사고 자시고 신경 쓰지 않고
벌써 돌아갔어요. 파무준, 너 여하튼 일 끝나고 두고 보자."
  "아, 알았다."
  "그리고, 니네 왜 이리 가난해? 규모로 봐서는, 그리고 해
신의 방패란 절진의 규모로 봐서는 옛날에는 돈이 썩어 넘쳤
던 것 같은데?"

  파무준이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사실 우리 남해검문의 수입은 적지 않다."
  "그런데 왜 건물 보수도 제대로 못해?"
  "해신의 방패를 보수하는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가서 그렇
다."

  "계속 고장나냐?"
  "전해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지난 삼백 년 동안 끝없이 수
리해 왔다고 한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반복되기 때문에 거기
들어가는 자금이 만만치 않다."
  "아하! 돈이 생기면 전부 해신의 방패 수리비로 들어간다?"
  "그렇다."

  "니들 미친 거 아냐? 무슨 무인이 그런 것에 의존해서 문파
를 지켜? 차라리 해신의 방패 다 없애 버리고 그 돈으로 무사
들 수련이나 힘쓰는 게 낫지 않아?"
  "그럴 수가 없다. 제일도가 무너지면 해신의 방패를 통제
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 검문은 고립된다."

  주유성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
  '하긴. 북해에 있던 그 절진도 생문이 무너져서 죽음의 진
이 된 거니까. 여기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겠군.'
  "그럼 나머지 섬부터 부숴 버리면?"

  "각 섬에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설사 그 일이 가능
하다고 해도 우리가 자진해서 해신의 방패를 부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주유성이 혀를 찼다.
  "쳇. 알았다. 나는 맡은 일만 하면 되는 거니까."


  주유성 일행은 보수각의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제일도
를 향해 출발했다.
  제일도는 남해검문이 있는 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또한
거기까지 가는 바다도 조용한 편이었다.

  섬에 도착한 주유성은 시설의 거대함에 입을 떡 벌렸다.
  "우와아! 이 정도면 완전히 성이네, 성."
  시설의 크기는 전각 수십 채를 모아놓은 것만큼 거대했다.

  현승금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초거대 기관이지."
  "크기가 이렇게 크니 수리비가 그렇게 많이 들지. 사방에
땜방 자국이네."

  "커흠. 어쩔 수 없다. 내부에 이곳 전체를 움직이는 기관
장치가 있다. 하도 거대한 것이라 그것을 움직일 때마다 여기
저기가 조금씩 부서져 나간다."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내가 왔으니 걱정 말라고.
일단 문제가 된 부분을 좀 들여다보자고."

  그들은 거대한 건축물 속으로 들어갔다.
  현승금은 그들을 중심부로 안내했다. 주유성은 그 뒤를 따
라가며 중얼거렸다.
  "와아! 이 구조물들, 전체가 다 움직이는 구조네? 이런 규
모가 움직이니 당연히 쉽게 무너지지. 하긴, 해신의 방패가
감당하는 바다의 넓이를 생각하면 이 정도 구조물은 당연한
건가? 그래서 만년한철이 필요했구나?"

  그들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중심부로 들어섰다.
  건물의 중심부는 거대한 둥근 공간이었다. 지름이 삼십 장
은 족히 될 것 같은 넓이였으며 천장도 대단히 높았다.
  주유성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우와아! 이게 안 무너지고 있다니. 옛날에는 남해검문이
정말 돈이 많았구나. 이거 지으려면 정말 황금을 퍼부어야 했
겠는데?"

  현승금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다. 대단한 건축물이지.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과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멋진 방이다."
  "동의해. 이거 정말 보통 사람은 못해. 최고의 건축가들을
잔뜩 모아야 가능할 거야. 그런 부자 검문이 지금 이렇게 가
난해지다니. 내 마음이 다 아파."

  "크흠. 여하튼 문제는 바로 이곳이다. 이곳은 그동안 큰 문
제 없이 작동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곳에 설치된 기관
들이 말썽을 부리고 있다. 우리는 고민한 끝에 이 기관이 고
장나기 직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주유성의 얼굴이 굳었다.
  "이 큰 걸 고쳐 달라고?"
  "아직 고장나지는 않았다. 튼튼하게 보수해 주기 바란다."
  주유성이 방을 돌아다니며 사방에 설치된 기관들을 조사
했다. 여기저기 설치된 거대한 톱니바퀴 따위를 대충 점점했
다. 그리고 현승금에게 돌아왔다.

  "도면 없인 못해."
  현승금이 즉시 화를 냈다.
  "뭣이! 이제 와서 못하다는 소리를 하다니!"
  "어, 못해. 겉만 보고 해결하기에는 너무 구조가 복잡해.
이 거대한 구조물을 통째로 움직이는 부분이잖아. 여기가 그
핵심이잖아. 도면 없이 건드렸다 망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
라는 거야?"

  "이, 이... 할 수 있다 자신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제 못
하다니. 한입으로 두말을 하는 것이 사나이 대장부란 말이냐!"
  "나 대장부 안 할래. 닥치고 상세 도면이나 내놔. 아니면
관둘 거야."

  현승금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주유성이 일단 배를 째
기 시작하자 그도 어쩔 수 없었다.
  "크으. 아, 알았다. 이 방의 도면만 공개하겠다. 하지만 베
껴 그리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미쳤어? 이걸 베껴가서 어따 써먹으라고. 하지만 이 방만
가지고는 안 돼. 도면 다 가져와."

  "뭐가 어쩌고 어째?"
  "싫으면 마! 아 정말 여러 번 하게 하네. 내가 아무리 잘
난 놈이라고 해도 이걸 어떻게 도면 없이 처리해? 때려 부수
는 거라면 즉시 해줄 수 있어. 하지만 보수공사라며? 이건 내
가 아니라 중원의 누구를 데려와도 안 돼. 배 째!"

  주유성은 제일도에서 놀고먹으며 하루를 뒹굴었다. 다음날
이 되자 검문의 문주가 장로들을 끌고 찾아왔다.
  문주가 험한 얼굴로 말했다.
  "육절서생, 못한다고 했는가?"
  "도면 없이는 못해요. 도면 없이 할 수 있는 사람 찾아내면
내 손에 장을 지져 드리죠."

  "그러나 해신의 방패는 우리 검문의 보물이다. 그 도면을
함부로 공개할 수는 없다."
  "그럼 수리 못하는 거죠 뭐."
  "뭔가 다른 방법은 없겠는가?"
  주유성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문주 할아버지, 뭔가 잘못 생각하고 계시네요?"
  "잘못 생각해?"

  "생각해 보라고요. 도면 없이 이 구조물을 완벽하게 수리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그 사람은 이
걸 보기만 해도 동작 원리에서 내부 구조까지 다 파악했다는
뜻이지요? 그럼 그 사람은 도면이 없어도 도면을 본 것이나
다름없지 않아요?"

  문주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뒤따라온 현승금을 돌아보며
말했다.
  "현가야, 육절서생의 말이 사실이냐?"
  옆에서 장로 하나가 현승금을 다그쳤다.
  "어서 아뢰지 못하고 뭐 하느냐!"
  그 말투가 마치 머슴이라도 대하는 듯한 하대였다.

  주유성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저 사람 명색이 각주 아녔어? 이 사람들 관계가 이상한
데?'
  현승금이 쩔쩔매며 말했다.
  "소인이 듣기로는 타당한 말이옵니다."

  문주가 다시 주유성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는 말은 결국 누가 와도 도면을 봐야 한다는 소리
인가? 보지 않고 안다면 본 것과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것은
우리 검문의 비밀. 외부인에게 보여주기는 곤란한데......"
  "그럼 내부인이 연구해서 고쳐 보던가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벌써 했다. 하지만 검문은 그런 인재
를 키우지 못했다.
  "그럼 육절서생이 우리 검문에 들어오는 것이 어떤가? 좋
은 대우를 약속하지."
  주유성에게는 얼토당토않은 제의다.
  "일하지 말고 그냥 돌아갈까요?"

  문주는 살짝 살심이 솟는 것을 느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일이 끝난 후 살인멸구가 최선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자는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육절서생. 더구나 무림맹에
서 보낸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파가 아니지.'
  "좀 더 생각을 해보고 결정하겠다."


  검문의 수뇌부는 그 문제로 하루를 더 토론했다. 하지만 어
차피 방법은 없었다. 수리는 현실 과제였고 그 일에 최고로
적절한 인물은 다름 아닌 주유성이다. 도면 역시 기관가나 진
법가 여럿 고용해서 보여주는 것보다 주유성 단 한 명에게만
공개하는 것이 그나마 낫다.
  문주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가 도면을 다 외워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공개하도록
하겠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현승금이 불쾌한 얼굴로 주유성에게 다가왔다. 그의 뒤에
는 커다란 종이 뭉치를 가진 사람들이 몇 명 따라붙어 있었다.
  "문주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나 도면을 보는 것은 당
신 하나로 끝이다. 다른 자들은 볼 수 없다."

  주유성이 끄덕였다.
  "어차피 내 일행은 이쪽으로 몰라. 봐도 소용없어."
  "그리고 만약 이 내용이 유출됐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우리
검문은 추살대를 보내 육절서생 당신에게 책임을 묻겠다."
  주유성이 턱을 긁었다.
  "이거 좀 기분 나쁜 소리네. 하지만 내가 남해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니까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주겠어."


  주유성은 오랜만에 작정하고 공부를 했다. 그는 며칠 동안
도면을 팠다. 분량이 워낙 많고 도면 사이사이의 상호 반응 관
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거기다 약간의 게으름까지 피우면
서 도면을 연구하자 며칠 정도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며칠 후 도면을 덮으며 주유성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복잡하기가 장난이 아니네? 뭐가 그리 무서워서 이
리 엄청난 돈을 썼대?"
  그를 구경하던 현승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했다.
  "실마리는 좀 잡았나?"

  "대충 답은 찾은 것 같은데 문제가 좀 있네."
  "헉! 실마리가 아니라 답을 찾아? 겨우 며칠 만에?"
  주유성이 기지개를 크게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이라니까. 이제 실제로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 좀
하자. 정말로 도면대로 되어 있는지 알아야지."


  남해검문 보수각의 인원들은 대부분 무림인이 아니다. 그
들은 주로 보수공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기초적인 내공심법과 무공 초식이 전수
되기는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수련할 시간이 없는 그들에
게 그것은 단지 건달들 정도나 상대할 만큼의 최소한의 호신
술일 뿐이다.

  그 보수각의 사람들 중 간부급의 인물들이 주유성의 뒤에
우르르 달라붙었다. 본업이 이런 기관과 건물 수리인 사람들
은 중원에서 명성을 날리는 육절서생에게서 뭔가 배울 것이
없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유성에게서 뭘 배워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접근이다. 그는 애초에 일반인
과 사고방식이 틀려먹은 인간이다. 실수로라도 그의 생활 태
도를 배우려고 들었다가는 멀쩡한 사람 폐인 되는 것은 순식
간이다.

  직접 움직이기 귀찮은 주유성은 보수각 사람들에게 바닥
과 벽 곳곳을 뜯어내게 하고 그 안쪽을 확인했다. 보수각 사
람들은 항상 하던 일이라 불평이 없었지만 오히려 주유성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그렇게 두어 시진이 지나자 주유성이 마침내 한숨을 크게
쉬었다.
  "휴우. 대단하네."

  보수각주 현승금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지? 우리 선조들이 만든 것이고, 지난 삼백 년
동안 우리 보수각에서 직접 수리해 온 결과물이다. 이제는 손
대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지. 제일도는 그야말로 우리
보수각에서 다시 만들었다고 해도 좋다."

  주유성이 목을 한바퀴 돌리며 말했다.
  "끄응! 그러니까 이걸 보수각에서 다시 만들었다는 거지?"
  "그런 것이나 다름없지. 어떠냐, 육절서생? 우리 보수각의
능력을 본 소감이?"

  주유성이 인상을 쓰며 한마디 던졌다.
  "수리할 때 도면도 안 봤어?"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도면 없이 어떻게 수리한다는 말이
냐?"
  "그런데 왜 이렇게 개판으로 해놨어?"

  현승금의 안색이 확 굳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뒤따르던 보
수각의 사람들의 얼굴도 나빠졌다.
  현승금이 따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개판이라니? 육절서생,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주유성은 도면들을 들도 뒤따르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방금 주유성이 확인한 기관에 대한 도면을 펴놓고 간
단한 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주유성이 그 도면을 턱 짚으며 말했다.
  "여기 봐. 톱니바퀴의 크기가 조금 다르잖아."
  눈썰미 하면 주유성이다. 적어도 한번 보고 똑같이 복제해
내는 능력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그의 눈썰미에 톱
니의 크기 이상이 잡혔다.

  현승금이 도면을 보고 다시 기관으로 가서 해당 톱니의 크
기를 간단히 측정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흥! 오차가 채 일 푼도 나지 않는군. 그 정도는 허용오차
범위 이내이다. 문제가 되지 않아. 육절서생, 엉뚱한 것을 걸
고넘어지지 마라.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 솔직히 그렇
다고 말을 해야지."

  주유성이 다시 도면의 다른 부분을 짚었다.
  "재질이 동일하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 도면에는 분명히
저 톱니를 만들 때는 만년한철을 일 푼 섞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고. 내가 듣기로 만년한철이 일 푼이라도 섞이면 쇠가 묵
빛을 띠고 쉽게 녹이 슬지 않으며 그 강도가 훨씬 강해진다고
했어. 그런데 저 톱니는 뭐야? 그냥 쇠 같은데?"

  현승금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만년한철같은 귀한 쇠를 어찌 쉽게 구한다는 말이냐? 그
렇게 적힌 도면이 한두 장인 줄 아느냐? 모든 도면에 적힌 만
년한철을 구하려면 우리 검문이 파산해도 부족해!"

  "무슨 미친 소리야? 원래 있던 톱니를 녹이면 만년한철을
추출해 낼 수 있잖아? 만년한철이 무슨 시간 지난다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도 아니고."
  "그, 그건......"
  "그건 뭐?"

  현승금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년한철이 섞인 쇠가 나오면 그것은 모두 본 문에서 가
져간다."
  "왜? 검이라도 만들려고?"
  "그렇다. 거기서 만년한철을 추출해 검을 만드는 데 보태
지. 그래서 우리 검문에는 보검이 많다."

  주유성이 뒷목을 잡았다.
  "어이구, 죽겠네. 남해검문이 검술이 뛰어나서 검문이 아
니라 보검이 많아서 검문이야?"
  "그럴 리가 있느냐? 우리 검문은 분명히 검술이 뛰어난 검
문이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당신들은 자부심도 없어? 아무리
같은 문파라지만 다른 사람들이 당신네 보수각이 관리하는
시설에서 알맹이만 쏙쏙 뽑아가는데 구경만 했어?"

  현승금의 인상이 더 나빠졌다. 다른 보수각 사람들도 마찬
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배어 있는 것은 기분 나쁨이
아니라 처량함이었다.
  현승금은 잠시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창피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만년한철이 더 이상 없음
을 알아야 육절서생도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계속 도면만
따지고 있다가는 답이 없다.'

  "우리 보수각은 기관과 건물을 수리하는 일을 전담한다."
  "알아."
  "그래서 우리는 무공을 몰라도 맡은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지. 할 일은 많고 수련 시간은 모자라니 우리는 사실 무공
을 잘하지 못한다."
  "잉?"

  "애초에 무공의 자질을 보고 뽑힌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수리 업무를 전담하기 위해서 뽑혔다."
  "우이씨, 그래서?"
  "우리 검문은 무림문파다. 무림문파에서 무공을 쓰지 못한
다는 말은 발언권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주유성은 검문의 문주와 장로들, 그리고 보수각주를 함께
만났을 때를 되새겼다.
  '젠장. 확실히 그때 명색이 일각의 각주인 이자가 다른 장
로들에게 완전히 아랫것 취급을 당했지.'
  "이봐, 그럼 당신들 위치가 검문에서 어떻게 되는 거야?"

  현승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우리는 사실 잡일꾼 대접을 받고 있다."
  "일꾼? 당신들이 아니면 해신의 방패는 유지되지 않잖아?
그런 중요한 일을 하는데 잡일꾼이라고?"

  "하지만 무림 단체에서 무공이 약한 자는 대접받지 못하는
법이지. 사실 내가 각주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다 허울 좋은
직위다. 내가 일반 무사에게도 무시당하는 위치이니 내 부하
들은 말할 것도 없지."

  주유성은 입을 떡 벌렸다.
  "나한테는 그렇게 당당했잖아?"
  "비록 그런 취급을 받지만 우리의 자부심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니까. 네가 비록 육절서생이라 불리지만 우리가 하
는 일도 너에 못지않아."

  주유성이 짜증을 냈다.
  "젠장, 망할 놈의 검문이네. 뭐 이따위야? 그러니까 소속원
이 문파에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
공 배우는 사람이 무조건 더 가치있는 거네?"
  "무림문파라면 당연히 그러한 것. 할 수 없지."

  "아, 진짜 어이가 없네. 그래서 순순히 당하고 살았다?"
  "지난 삼백 년간 이어져 온 일이다. 어쩔 수 있나? 좋은 무
공을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익힌 무사들이 우리보다 더 강하
니까."

  주유성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아주 당연하다? 미치겠군. 하여간 그건 나주엥 해결하기
로 하고. 이거 말이야, 어쨌든 도면대로 하지 않은 거잖아? 그
동안 제일도 기관에 사용된 만년한철 다 빼앗기고... 응? 만년
한철 다 빼앗기고? 가만가만, 여기 기관 전부 다 보수했다고?"

  "물론이다. 지난 삼백 년 동안 보수하지 않은 곳이 없다시
피 하다. 같은 곳을 여러 차례 보수한 곳도 많지."
  주유성이 이를 갈았다.
  "으으득! 그럼 만년한철도 없겠네?"

  "거의 모든 곳을 갈아 치웠으니까. 더구나 만년한철이 나
오는 곳은 드물어. 여기서도 보다시피 양이 작고. 더구나 도
면을 뒤져 만년한철이 들어 있다고 되어 있는 곳은 멀쩡한 곳
도 부품을 갈아놓았으니 제일도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
다고 보아야지."

  주유성이 입을 떡 벌렸다.
  "확실해?"
  "마지막으로 만년한철을 회수한 것이 수십 년 전이다. 내
가 검문에 몸을 담기 전이다. 그 후로는 없다."
  주유성이 부르르 떨었다.
  "당했다."

  해신의 방패라고 부르는 광역기후제어진법의 중앙 통제 장
치가 있는 곳이 제일도다. 주유성은 이곳을 뒤져서 최소한
황금 한 관어치 정도의 만년한철을 회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여기서 얻어갈 것은 하나도
없다.

  "제기랄! 좋아, 치사하게 나온다는 거지? 그럼 나도 곱게
처리 못하지."
  주유성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현승금은 그 모습을 보고 뜨
끔함을 느꼈다.

  주유성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럼 기존에 만년한철이 사용된 부품들은 뭐로 대체했어?"
  현승금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보수각의 쇠 다루는 실력은 결코 낮지 않다. 비록 이
기술이 검을 만들기에 적당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톱니바퀴
같은 것을 튼튼히 만드는 데는 아주 제격이지. 지난 삼백 년
동안 발전시켜 온 것이니까."

  "하지만 만년한철을 섞은 쇠에 비하면 약하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게 문제야."
  "무슨 소리냐?"

  "만년한철을 사용했다고 되어 있는 부분들은 동작할 때 힘
을 집중적으로 받아. 그 말은 만년한철을 쓸 수밖에 없어서
썼다는 소리야. 옛날에 검문이 얼마나 돈이 많았는지 몰라도
만년한철 사는 돈은 부담이 됐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
청나네 썼거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새로 만든 것들은 원래 것들과 그 크기에서 약간
씩 오차가 나. 전체적으로 그래."
  "하지만 허용오차 이내다."

  "그 허용오차는 만년한철이 섞인 부품을 썼을 때의 이야
기지."
  "그래도 지난 삼백 년 동안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잘 돌
아갔다. 육절서생, 억지 부리지 마라."

  "억지가 아니야. 재질이 약해졌으면 허용오차도 더 줄였어
야지."
  "하지만 지금도 해신의 방패는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정상? 계속 말썽을 부려서 유지 보수를 끝없이 했다며? 그
리고 이제 드디어 한계에 도달해서 나까지 불러왔잖아?"
  "그, 그건......"
  "이건 총체적인 난국이야. 이건 삼백 년 동안의 오차가 누
적돼서 드디어 터질 때가 된 거야."

  못 고친다는 말에 현승금이 흥분해서 말했다.
  "육절서생, 그런 말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라. 앞으로 어떻
게 해야 한다는 것이냐?"
  주유성이 주변을 죽 둘러보더니 말했다.
  "이건 나도 못 고쳐."

  현승금의 얼굴이 굳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장내에 있던 모
든 사람들이 긴장했다.
  이야기를 듣던 남궁서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 공자님, 이걸 고쳐 줘야 검문이 무림맹을 지지한다면
서요?"
  "네. 하지만 못하는 건 못하는 거예요."

  현승금이 소리쳤다.
  "육절서생, 도면을 며칠 만에 파악했다며! 우리가 가능하
던 수리다! 조금 더 어려워졌을 뿐인데 어째서 명성 자자한
육절서생이 못한다는 것이냐? 육절서생의 능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느냐?"
  "시끄러 못하는 건 못하는 거야."

  "어째서냐?"
  "이걸 고치려면 삼백 년 동안 누적된 잘못을 모조리 수정
해야 해. 다시 말해서 그동안 만년한철을 빼먹은 부분들을 전
부 원상 복구해야 한다고. 그런데 만년한철을 그렇게 많이 내
놓을 수 있어? 검문은 돈 없어 보이는데?"

  "그, 그런 엄청난 돈이 있을 리가......"
  "있어도 그렇지. 해당 부분들을 다 다시 만든다니. 하나 손
대면 거기 물리는 주변 장치들도 다 뜯어고쳐야 할 텐데. 이
미 있는 걸 개보수하는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아?
그러느니 차라리 새로 만드는 게 훨씬 싸게 먹혀."
  "허억!"

  현승금은 기술자다. 수리라고 하는 것도 부품을 적당히 교
체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물의 경우, 구성물 대
부분을 교체하는 것은 새로 만드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더 많
이 든다. 그는 그것을 너무 잘 안다.

  "육절서생, 그 말 책임질 수 있는가?"
  "책임져야 돼?"
  "뭐, 뭣이?"
  "내 판단은 그래. 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
면 그 사람이 직접 수리하면 돼. 하지만 나는 못한다고 결론
을 내렸어. 따라서 나를 시켜서 수리할 수는 없어. 이렇게 명
확한데 무슨 말에 책임을 져?"

  현승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보, 보고를 해야겠다."
  "그러라고. 문주 할아버지랑 장로 할아버지들 모조리 불러
들이라고."


  혀승금이 허겁지겁 떠난 후 주유성 일행만 남게 되자 검옥
월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주 공자, 정말인가요?"
  "뭐가요?"
  "정말로 주 공자도 수리할 수 없나요? 나는 주 공자가 뭘
못한다는 건 처음 봤어요."
  "수리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비용이 새로 만드는 것보다
더 드는 것. 이건 아무리 나라도 못 뒤집어요. 그리고 검문에
그럴 만한 돈이 없음도 명확하고요."


  검문의 수뇌부가 달려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
은 전서구를 받자마자 가장 빠른 배를 잡아타고 제일도로 달
려왔다.
  검문 문주가 주유성을 보자마자 급히 질문했다.
  "육절서생, 정말인가? 그대가 할 수 없다는 말이?"
  "같은 말 자꾸 반복하게 하시네. 배를 째도 안 돼요."

  문주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어, 육절서생 정도의 능력으로도 안 되다니. 그럼 누구
를 불러야 이걸 수리할 수 있단 말인가. 큰일이군, 큰일이
야."

  다른 장로들도 아우성을 쳤다.
  "애초에 더 연륜이 있는 사람을 부렀어야 했습니다."
  "싼 맛에 불렀더니 영 싸구려네. 에이."
  "에이. 보수각 놈들도 쓸모없고, 중원에서 초빙해 온 육절
서생도 쓸모없네. 아무래도 돈을 많이 주고 더 비싼 사람을
데려와야 하려나?"

  그들은 주유성을 대놓고 무시했다. 하지만 주유성도 노리
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사실 주유성은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다. 그냥 물러서면
이 먼 곳까지 와서 한 푼도 못 챙기게 된다. 더구나 그는 남해
검문이 무림맹을 지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목적이 아니
라면 단순히 돈만 보고 여기까지 오지도 않는다.

  주유성이 분위기를 보다가 잠시 조용해지는 틈을 타 슬며
시 한마디 흘렸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사람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검문 문주가 엄한 얼굴로 분위기 잡으며 말했다.
  "방법이 있다?"
  "있지요. 간단한 방법이 있지요."
  이제 사람들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가득하다.
  "그것이 무엇이지?"
  "다 때려 부수면 되지요."

  상식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이해를 못했다.
  "때려 부수다니? 뭘?"
  "해신의 방패. 때려 부숴 버리면 말썽을 부릴 일도 없잖아
요."

  사람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장로들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육절서생! 미쳤소?"

  "우리 검문을, 지켜주는 해신의 방패를 부수자고? 그대가
사파나 마교의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망발을 할 수 있
소?"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를 해? 허명만 가득했던 육절서생이군! 허명이었어!"

  주유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유지비도 없잖아요?"
  사람들의 안색이 더 나빠졌다.
  "그, 그런 모욕적인 말을......"

  주유성이 팔짱까지 끼고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모욕은 무슨. 남해검문은 건물들이 낡아빠져서 금간 벽도
제대로 보수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돈이란 돈은 모조리 해신
의 방패를 보수하는 데 쏟아 붓고 있고."

  장로 하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육절서생, 수리할 능력이 없으니 얼토당토않은 말로
우리를 기만하려 하는군. 우리는 그대보다 더 실력이 좋은 자
를 찾겠다."

  주유성이 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말했다.
  "내가 해서 안 되는 거, 다른 사람이 하면 되려나......"
  "흥흥! 육절서생은 설마 자신이 중원 최고의 기관가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손에 꼽히는 실력을 가
지고 있다고 보는데 말예요. 나보다 실력 좋은 사람들도 그
격차가 그렇게 크지는 않을걸요? 내가 이래 봬도 육절서생인
데 말예요."

  실제로 그런지 어떤지는 주유성도 모른다. 애초에 자기 실
력이 정확히 어느 만큼인지 비교하기가 마땅치 않다. 다만 중
원에서 기관으로 명성깨나 떨치던 망우지를 깔끔하게 누른
경험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실력이 중원에서
손꼽히는 경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사실인지가 아니다. 검문의 사
람들이 그의 말을 믿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잠시 대꾸할 말이 없어졌다. 그들은 중원의 기관
가들이 이 일에 적합한 사람 몇 명을 꼽으면서 그중에 육절서
생 주유성을 넣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 정말 다른 기관가를 불러와도 안 된다는 건가?"
  "뭐, 최고의 기관가를 불러온다면 조금 절약은 될지도..."
  "어, 얼마나 절약할 수 있는가?"
  "일 할 정도?"

  사람들이 다시 핼쑥해졌다.
  문주가 탄식했다.
  "허어, 일 할이라니. 육절서생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겨우 일 할 절약해서는 소용없지 않은가? 어차피
우리에게는 그리 큰돈이 없으니."

  주유성이 한마디 거들었다.
  "게다가 수리 기간도 길지요. 이거 다시 다 만들려면 몇 년
은 걸릴 텐데. 그동안 해신의 방패는 남해검문을 완전히 봉쇄
할걸요?"

  "커윽! 몇 년이나? 그랬다간 우리 검문은 모두 말라죽고 말
아."
  "그러니까 다 부숴버리자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문주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네."
  "왜요?"
  "그야 해신의 방패는 우리 검문을 지켜주는 성벽과 같은
것이니까."

  주유성이 문주를 꼬나보았다. 여기 와서 받은 대접들이 다
시 생각났다.
  '그러게 내 돈을 사기 쳐서 떼먹으려고 하지 말았어야지.
난 확실히 내 몫을 챙겨갈 거야. 피도 눈물도 없이 할 거야.
두고 보라지.'

  "검문은 무가 아녜요?"
  "물론이지. 우리는 남해 최강의 문파. 또한 중원의 그 어느
문파보다도 강력하다."

  "과장이 심하시네. 어쨌든 그런 강력한 문파, 그것도 검을
쓰는 문파가 적이 쳐들어오는 것이 두려워요?"
  "두려울 리가 있는가? 우리는 설사 마교가 공격해 온다고
하더라도 물러서지 않는다."

  주유성이 입을 떡 벌렸다.
  '이 할아버지 이거 너무 뻥이 심한 거 아냐? 아무리 남해검
문이 대단해도 일개 문파로 어떻게 마교를 상대해? 에이, 뻥
장군.'

  하지만 그는 생각을 곧바로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자부심이 강하다면 그걸 더 건드려 주지.'
  "그렇게 강한 문파가 왜 해신의 방패 뒤에 숨어 있어요? 당
당하게 문을 열어놓고, 쳐들어오는 적은 박살을 내면 되지.
그런 것이 진정한 무인이지요. 방패 뒤에 숨어 있으면서 어찌
진정한 무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진정한 무인의 마음가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 감
히 무인론을 펼쳤다.
  그러싸한 명분을 걸고 들어오자 문주는 잠시 할 말이 없어
졌다. 그러나 이 정도로 넘어갈 만큼 녹록하다면 그가 남해검
문의 문주씩이나 되는 자리에 앉았을 리가 없다.

  "당연히 쓸데없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지. 우리는 적의
공격을 걱정하지 않아. 그러나 하룻강아지들은 그 사실을 모
르지. 우리는 그저 하룻강아지들이 딴마음 먹지 않도록 해신
의 방패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걸 위해서 남해검문은 거지꼴이 되고 있는데도요?"

  "물론이다."
  "그걸 위해서 남해검문이 봉문당해도요?"
  검문 문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봉문? 감히 봉문이라고 했는가?"

  주유성은 자기 일이 아니라 여유만만하다.
  "그럼요. 봉문이지요. 그것도 철저한 봉문. 그 누구도 남해
검문에 들어갈 수 없고, 남해검문의 어떠한 사람도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완벽한 봉문."

  문주가 호통을 쳤다.
  "육절서생,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감히 누가 우리
검문을 봉문시킨다는 말인가? 마교 따위가 그럴 수 있다는 말
인가?"
  "아뇨. 마교가 왜 세외까지 와서 그런 일을 해요?"

  "그럼 도대체 누가? 사황성? 무림맹?"
  "다 틀렸어요. 해신의 방패가 검문을 봉문할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육절서생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
다!"
  "믿기 싫으면 관두던가. 하지만 이건 알아두는 게 좋을 거
예요.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해신의 방패는 수명이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럴 리가 없다. 해신의 방패는 꾸준히 수리되어져 왔다.
보수각이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 수리 과정에서 당신들이 만년한철을 모조리 빼먹었죠.
해신의 방패 보수에 사용되어야 할 만년한철이 전부 빠져나
와 남해검문의 칼이 됐죠."

  "그, 그거야 당연하지. 검을 익히는 자가 만년한철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무기의 질로 승부를 보려는 거 보니 남해검문의 무공도
생각만큼 높은 건 아닌가 보네요?"

  "뭐, 뭣이?"
  "듣기나 해요. 만년한철 없이 보수된 해신의 방패, 정확히
말하면 제일도는 지금 완전히 내구 한계에 도달했어요. 이제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낳을 정도예요."

  남해검문의 수뇌부들이 일제히 현승금을 노려보았다.
  현승금이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유, 육절서생의 이론을 들어보면 꽤 그럴듯한 소리입니다."
  장로 하나가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일 처리를 어찌했기에 사태가 그런 지경에 이를
때까지 구경만 했느냐!"

  주유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요!"
  젊은 주유성의 호통 소리에 남해검문 장로들은 어이가 없
어서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 틈에 주유성이 재빨리 말을 시
작했다.

  "일은 자기들이 다 저지르고, 문제가 생기면 실무자한테
책임이나 떠넘기고. 창피하지도 않아요?"
  "무엇이라?"
  "잘 들어요. 나는 육절서생이에요. 기관과 진법에 조예가
깊지요. 그래서 남해검문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거잖아요.
더구나 나는 무림맹에서 보낸 사람. 무림맹주 할아버지가 나
를 보니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까지 왔을 것 같아요?"

  주유성의 말에 틀린 것은 없다. 그들은 정말로 주유성의 능
력이 자기들 것보다 나아서 그를 불렀다.
  거기다 주유성은 무림맹주까지 팔아먹었다. 문주가 큰소리
는 팡팡 쳤지만 무림맹을 우습게보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특히나 검의 최고수라는 검성에 대해서는 작은 존경심까지
가지고 있다.

  검성을 팔아 사람들이 입을 다물게 만든 주유성이 눈을 빛
내며 말했다.
  "그런 내가 철저히 분석하고 내린 결론이에요. 제일도의
수명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사실 내일 당장 부서져 버
린다고 해도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운이 좋아
도 일 년이에요."

  주유성은 제일도가 그것보다는 훨씬 더 긴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리 비용이 더 든다는 그의 말 역
시 사실이다. 그는 이 기회에 다 엎어버릴 셈이다.
  "그, 그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니......"

  주유성이 손을 들어 검문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일도가 무너지면 해신의 방패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져요. 생문이 완전히 사라지는 거지요. 나는 예전에 생문
이 사라진 절진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본 적이 있어요. 여기
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남해검문은 완전히 고립, 당신들은
비참하게 굶어 죽을 거예요."

  꽤나 안전한 삶을 살아왔던 남해검문의 사람들은 주유성이
다 죽는다는 소리를 하자 모두 찔끔했다.
  문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그걸 피할 방법이......"
  "어차피 곧 망가질 해신의 방패. 어차피 수리할 돈이 없어
서 못 고치는 해신의 방패. 어차피 발등을 찍을 해신의 방패.
그 해신의 방패를 미리 부숴 버리자고요. 그럼 모든 문제 해
결, 모두 깔끔하게 해결되지요."

  남해검문의 사람들은 모두 죽을상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
끼리 모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차라리 해신의 방패를 걷어
내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설마. 그는 그래도 무림에 명성이 높고 무림맹에서 직접
보낸 사람인데......"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법이지요. 다짜고짜 믿기에는 우리
가 내놓아야 하는 것이 너무 큽니다."

  한참을 싸우던 그들은 일단 임시 결론은 내렸다 문주가 직
접 주유성에게 다가와 통보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가볍게 처리할 수 없소. 육절서생의 말
이 사실인지 조사를 좀 해봐야겠군."

  주유성은 느긋하다. 어차피 지금 급한 건 자신이 아니다.
  "마음대로. 하지만 서두르세요. 내일, 아니지, 오늘 당장
제일도의 기관이 완전히 고장날 수 있어요. 그럼 아무도 못
고쳐요. 제일도는 완전히 고립되고요. 다 죽는 거지요. 그것
도 굶어 죽는 거."
  주유성의 협박에 사람들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김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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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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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바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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