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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증거: 누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가?
성경봉독: 마5:5
찬 송: 44장(통56), 280장(통338),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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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몇 주간을 - 이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보훈 중 8가지 복에 관해 함께 배우고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어떤 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아가 완전히 부서진 상태에서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란 어떤 자입니까?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서 볼 때 자기의 행위와 의는 다 찢어진 걸레조각과 같고 자신의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해 있음을 발견하면서 통곡을 하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불의와 불법 그리고 죄와 허물을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서 자기의 죄처럼 대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에는 슬픔이 있고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을 수 있는데 그 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문제보다 크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예레미야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민족을 위해서 예언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처럼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오늘은 세 번째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이 이해가 가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목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목이 있다.
이 세가지가 다 예수님은 우리와는 정반대 편에 서 계신 것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군사적인 침략과 정치적인 압제,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인 혼란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의 해방과 승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니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시대의 형편과 아주 흡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투쟁을 통해서, 민중의 힘을 통해서, 어떤 역사의 힘을 통해서 이 세상이 정복되고 변화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천국은 투쟁이나 침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웅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고
땅은 지배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온유하다는 말은 어떻습니까?
거의 욕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른들은 말합니다. 저렇게 착해빠져서 어디 밥이나 먹고 살겠어?
자기 자녀가 승부욕이 강하고 사기를 치더라도 높은 자리에 오르길 원하는거지요.
세상에는 1등만 살아남기 때문에 어떻게든 최고의 자리에 오르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온유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 아닙니까?
남에게 싫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 아닙니까?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한 사람 , 심성이 좋아서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란 어떤 자 일까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드러운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으로 가장 강한 후천적인 성품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서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심령을 애통하게 만드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온유하게 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충동을 받으면 야생마처럼 난폭해지기 쉬운 성품입니다. 제가 너무 심하게 표현 했나요? 미안 합니다. 제가 그렇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 난폭해지기 쉬운 나의 성품을 통제하시고 균형을 잡아주실 때 나타나는 것이 온유입니다.
갈5장22절-23절의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온유아닙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마음에 모시면 그 성령께서 우리의 기질을 온유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성령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 성격이 온유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성령 받았다고 속이는 격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실제로 온유했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 있을까요?
먼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을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나 순종하고 떠났습니다. 순종은 온유의 표현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과의 싸움에서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새벽 일찍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온유였습니다.
이삭의 온유한 성품을 볼까요? 이삭이 우물을 파는 곳마다 그 곳에 사는 목자들이 그 우물을 빼앗고 우물을 흙으로 막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블레셋 → 에섹 → 싯나 → 르호봇에 이르기까지 네 번이나 옮겨가며 우물을 팝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무력하고 바보 같은 인생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온유한 사람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창26장).
또 요셉을 봅시다.
그는 형들의 질투 때문에 부모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애굽으로 팔려가 그곳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모함을 받아 결국 감옥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형들과 다시 만나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
형들은 바로 이 총리대신이 자기들이 그렇게 질투했고 미워했고 죽음의 곳으로 내쫓았던 동생 요셉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무서워하고 떨었습니까.
이때 요셉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이것이 온유입니다.
욥 역시 온유한 자입니다.
그는 동방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10남매나 되는 자랑스러운 자녀들을 두었습니다. , 아내는 천하에서 미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욥이지만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서 거세게 항의하고 고개를 쳐들고 따지고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회개하는 자와 같이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의 태도입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욥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온유한 자의 기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자에게 땅을 주신 답니다.
욥은 나중에 잃은 것 보다 몇 배로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았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향해서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자신을 비난하거나 대적하거나 모함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 마음 태도가 어떠한가를 보면 온유한 자인지 아닌지 금방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를 두고 우리 자신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모세는 자기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43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던 사람들을 해방시켜서 수백 만명의 큰 무리를 이끌고 시내산에까지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지도자입니다.
그의 권위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확인된,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 권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세의 형님 아론과 누님 미리암이 결탁을 하여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모세의 나이가 80이 약간 넘었다고 하면 그의 형님과 누이는 거의 100살 가까이 된 사람들입니다.
형제 중 하나만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고 높아지자 아마 질투가 생겼나 봅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아마 이디오피아 사람의 혈통을 이어받았던가 봅니다.
성경에는 그녀를 구스인이라고 했습니다. 흑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이디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 살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인신공격을 했습니다. 벌써 결혼한지가 40년 전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 나와서 새삼스럽게 공격을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얼마나 화가 낫겠습니까?
모세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들을 입 다물게도 할 수 있고 벌을 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모세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억울함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심정으로 조용히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이런 태도를 두고 모세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져있게 되면 절대로 온유할 수 없습니다.
누구와 비교해서 교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미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어떤 오해나 무시나 경멸의 말을 해도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온유하기로 하면 예수님보다 더 온유한 분이 있을까요?
벧전 2장 21절을 보면 누구보다도 온유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천군 천사들을 통해 기적을 베풀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무참하게, 무능하게 죽었습니다.
분노를 내뿜지 않고 기다리고, 참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분노를 얼마나 잘 다스리는가, 얼마나 잘 조정하는가, 얼마나 균형을 잘 이루게 하는가에 따라서 온유한 자가 될 수도 있고, 온유하지 못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는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적당히 조절하면서 얻을 수 있는,
수양하면서 얻을 수 있는 온유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철저하게 나를 다스림으로써 나타나는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셨습니다. 온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셨습니다.
온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서 화를 내신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 저 촌놈'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경멸했을 때에도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신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 집에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할 때도 거지를 초대한 것처럼 전혀 예우를 해 주지 않고 박대를 당했지만,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신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일은 언제였습니까?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때 화를 내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경건하게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장사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경건하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보실 때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회초리를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 내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나를 위해 화를 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화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불의와 죄악을 보실 때 화를 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자리로 끌고 가는 것을 볼 때 그 불의를 참지 못하시고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온유한 자가 됩시다.
숩지 않지만 성령 충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화를 내지 마십시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화를 내십시다.
우리가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온유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온유한 자의 힘은 사랑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시작된 온유한 자, 예수님의 땅은 처음에는 자기 시신을 누이기에도 부족한 한 평도 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세기를 지나지 않아 온유하셨던 예수님은 전 로마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땅 끝을 향하여 그 영역이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주께서 재림하실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온유한 자이신 예수님의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땅은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좇아 온유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땅이 될 것입니다.
결국 시이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승리했습니다. 십자가는 칼보다 강했습니다.
무력한 것이 강력한 것보다 더 세고, 도살된 양이 사자보다 강했습니다. 온유함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함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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