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summary
생명이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한 콘텐츠를 통해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요약할 수 없을까?
바로 이러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욕심이 이 글을 쓰게 하였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 제목의 글을 요약한다는 자체가 어렵고, 분량이 짧지 않기에 인내를 요합니다.
생명현상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자체가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동안 학자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까 합니다.
생명을 이해하려면 죽음 또한 이해하여야 하므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느 누구도 생명의 의미나 목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나,
만약 이 글이 여러분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 삶을 바라보는 관점
우리는 생명현상의 본질을 알고자 열망합니다.
마찬가지로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면 죽음 또한 마찬가지의 범주이므로
죽음을 이해해야 생명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므로
이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과학이 매우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 풀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 풀 수 없는 가장 미스터리한 문제가
바로 죽음 이후의 문제, 그리고 외계인 문제, 영적 세계, 사차원 공간, 불가사의 등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은데요,
특히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매우 핫(hot) 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죽음이 이렇게 핫 한 문제로 떠오른 이유는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 또한 멀지 않은 시기에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대야말로 현시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1) 오늘날 과학자들이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이고
(2) 오늘날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3) 현재의 삶을 보다 가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4) 생명현상이나 죽음의 본질에 대한 문제는 자신의 삶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기 때문에 삶이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生命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살아있게 하는 그 힘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대상입니다.
이 질문은 너무나 고전적이고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온 주제이며
아직까지도 또렷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적 사고방식이 모든 사고를 주도하고 있지만,
아마도 이러한 문제는 전통적인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자체가 이 세상을 설명하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현상에 대해 과학적인 입장을 살펴보고,
또한 반대로 비과학적으로 신봉되어온 이원적인 개념인 영혼과 육체라는 개념도
동시에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감안한다면 그것이 아마도 공평하겠지요.
(1) 생명의 기초는 細胞
오늘날 생명과학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밝혀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생명현상과 관련된 많은 증거들을 축적해 가고 있습니다.
특히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전기적 반응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세포는 생물의 기초를 이루는 원자와 같은 것이며,
모든 생명체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늙고 죽는 것도 결과적으로 세포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세포를 분석해 보면, 가장 큰 구조로 세포소기관이 있고,
그중에 세포 핵은 세포의 지휘소이고, 그 안에 염색체가 있고, 그 염색체 속에 유전자 명령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세포 속에 들어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세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발전소 역할을 한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작용들은 전하를 띠는 많은 종류의 원자들이 교모하게 집합되어
생화학적인 반응을 통해, 진화적으로 많은 시간을 거치며
스스로 자율 조직하는, 목적의식을 갖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전자가 세포의 발현양식을 조정하고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 현상도 결과적으로 화학적인 반응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현대 뇌 과학에서도 의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두고 탐구하고 있는데요,
의식도 결과적으로 물질의 생화학적인 작용의 결과로 보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유전자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멘델의 유전법칙을 토대로 유전학이 탄생된 이후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DNA가 유전물질로 부모와 자식 간의 정보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모든 생물은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세포분열과 복제가 일어나게 하는 전체적인 시스템을 조정하는 것이 바로 세포주기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러한 제포 주기는 바로 화학반응에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화학반응이 아니라 새로운 세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수 백가지 반응들이 조화를 이루어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는 전체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그때 비로소 생명현상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현대 생물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이 진화론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폴 너스 교수는 그의 최근 저서에서(생명이란 무엇인가. 이한음역)
생명현상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생명현상을 정의하는 내용은 학자들마다 다르나,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특히 뇌과학자나 물리학자들)이
물리적, 화학적 법칙을 통해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듯합니다.
(1) 진화는 초자연적인 창조자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다양하면서 체계를 갖추고 목적을 지닌 생명체를 생성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2) 생명체는 경계를 지닌 물리적 실체이며 자신의 환경과 분리되어 있지만, 그 환경과 소통한다.
(3) 살아있는 실체가 화학적, 물리적, 정보적 기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이른 과정에 대해 저자는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으나 이를 모두 표현하기는 어렵고,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생명은 자연발생적이고, 기계적인 존재이므로
기계가 고장 나면 고철로 돌아가듯이 생명현상은 끝이겠지요.
그러나 이 이론도 진화론을 바탕으로 도출된 결론이므로
개체가 죽어도 유전자를 통해 새로운 개체에게로 전달된다는 것은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하는 존재를 뜻하므로
개체적 삶은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상에 있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기계적 존재라 할지라도 의식의 탑재가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AI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와 같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가능한지, 또는 너스의 주장이 타당한지는 운영자도 잘 모르겠습니다.
(2) 유전물질 DNA
개체는 죽어도 자식을 생산하는 한 그의 경험이나
의식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유전자에 암호화되어 후대로 연결됩니다.
이와 같은 DNA의 기능을 과학이 아닌,
영혼과 육체라는 비과학적인 개념으로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전자(물질)는 기계적 존재가 목적을 갖는다는 것이고,
후자(영혼)는 물질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비물질 개념이 목적을 지향한다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물질이니 영혼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가 우리가 사용하기로 정한 개념일 뿐이며,
기존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을 넘어 실제적으로 물질이나 영혼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대 양자이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양자적 세계에서 물질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물질로 나타난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물질이니, 에너지이니라고 구분해야 할까요? 기존의 개념을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러한 화학적, 물리적 입장을 고수한다면,
삶이 매우 건조하고 의미가 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윤리적 문제는 생명이 물질적 메커니즘에 의하든,
영혼의 개념을 도입하든 상관없이 생명의 종국적인 목표에 편입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계적이고 화학적인 존재가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쳐도 왠지 좀 씁쓸한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질과 영혼을 구분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지요.
DNA가 우리의 삶을 조정한다고 생각하면 서운하게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여러분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며
우리와 같은 비전문가들이 쉽게 이해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니기 때문에 열려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이 개념을 넘어서면 우리가 새로운 무엇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 죽음의 設計
만약 인간의 생명이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육체가 죽으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DNA라는 정보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체적인 육체라는 물질현상이 사라져도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생명을 정보적이라는 의미에서,
DNA 속에 유전정보가 들어있다면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정보는 후대로 계속 유전될 테니까요.
하지만 DNA를 통해 유전정보가 전달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DNA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유전정보가 후대에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조차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유전자 프로파일링을 통해 유전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예측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이론일 뿐, 과학적으로, 윤리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아래 항목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영혼이나 환생, 카르마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면
많은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현대 생명과학은 진화론(進化論)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각종 생명현상이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부합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진화론은 최초에 생명이 태어난 후에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다루는 것이며
최초에 생명이 누가, 어떻게 설계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생명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생각입니다.
우주자연이 생명을 설계했는지, 아니면 신(神)이 설계했는지는 현대 과학으로서는 확정할 수 없지만,
누가 설계를 했든 진화적으로 본다면, 죽음이 없으면 진화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
즉 자연선택이 일어나기 때문에, 만약 태어난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면
유전자가 고정되어 있으므로 유전자 변이, 즉 진화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죽음이 개체적인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면이 있으나 종이라는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유전자 변이를 통해 새로운 진화적 적응력을 키워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윈 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화론을 수용한다면
죽음은 필수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육체를 가진 개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이나 의식들에 관한 정보들은 죽는 것이 아니라
DNA에 함축되어 자식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육체는 죽을지라도 DNA에 암호화되어 있는
정보(의식)는 죽는 것이 아니므로 죽음은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는 아래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비과학적인 문제와 다소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4) 本能과 죽음
그리고 죽음을 심리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본능이란 경험이나 학습 등을 통해 후천적으로 터득한 것이 아닌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질이나 능력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능 중에는 종족보존의 욕구, 살아남고자 하는 욕구,
개체 유지의 본능, 권력의 욕구, 소유의 욕구 등 다양한 욕구가 있으나
이와 같은 삶의 욕구가 있는 반면에 타나토스적인 죽음의 본능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있었는데요,
바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일어난 프로이트와 융의 논쟁으로 너무나 유명합니다.
프로이트는 종족보존의 본능, 즉 성이 무의식에 가장 기본적인 본능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융은 그것 외에도 죽음(파괴적 본능)도 무의식적 본능에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는데요,
프로이트는 융의 생각을 거부했으나 죽기 전 생의 말년에 가서 융의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영화,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데인저러스 메소드"라는 영화에서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를 자세히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파괴적인 본능은 오늘날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러한 파괴적인 본능은 실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다양한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왜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지, 선과 악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으며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근거를 통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3. 죽음이란 무엇인가?
(1) Thanatology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면 죽음을 동시에 이해하여야 합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금기시되어 왔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죽음을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사고가 사회적으로 팽배해져 있고,
죽음 학(Thanatology)이라는 별도의 학문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죽음학 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죽음의 구현을 뜻하는
타나토스(thanatos)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죽음의 원인, 조건, 이론 등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가 핵심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도외시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 중의 바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현생에서 자신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타조가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땅속으로 묻어버리는 행동과 같이 어리석은 행동일 뿐입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윤회라는 미지의 세계를 논하는 자체가 세계를 앞서가는 특권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면 과학자는 필요 없을 것이며 과거의 하나의 추억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2) 죽음의 原因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사람이 죽는 과정은 무엇일까?
바로 세포(細胞)의 죽음입니다.
세포는 생물학에서는 원자와 같은 것으로서 세포가 죽으면
그 세포가 소속되어 있는 장기가 원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여 결국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죽음이란 체세포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몸속에는 약 37조 개의 세포가 있는데요,
세포에도 마찬가지로 죽음이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히 증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포가 죽는 경우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요, 하나는 사고사이고 또 하나는 자살입니다.
외상이나 영양 부족, 병에 의한 경우 등은 외부적 요인에 의한 사고사로 볼 수 있고,
자살은 세포 스스로가 죽는 기작을 말합니다.
인체에는 하루에 약 3~4천억 개의 세포가 죽고,
죽은 만큼의 세포가 새롭게 태어나 보충되어 활력을 유지합니다.
즉 한 개의 수정란에서 세포분열을 반복하여 성인의 세포를 이루게 되는데,
인간의 세포는 대부분 분열할 수 있는 횟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으로 분열하는 것은 아니며
약 50~60회가 상한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료기술을 통해 노화를 늦출 수는 있지만 노화현상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事故
사고란 우리가 바라보기에 우연히 당하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일을 말합니다.
만약 어떤 무속인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앞날에 우연한 사고가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면 당사자는 그것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성격이 급하여 앞뒤를 가리지 못하거나,
진중한 태도를 갖지 못하고 주의력이나 관찰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들은 생후 학습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지만
일부는 DNA에 잠재되어 있는 유전적 성향들도 함께 작용한다고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화적인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유전자에 암호화되어 있는 경향성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思考)와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화적 요인과 학습을 통해 현실을 꾸준히 변화시키는 존재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하여 얻은 결과가 DNA를 통해 다음 세대(자식)로 연결되겠지요.
그래서 자유의지란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환경 여건을 넘어서 자신을 실행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4) 疾病
질병도 마찬가지로 유전적 요인과 현재를 통해
삶을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자연의 질서와 일치시키는데 실패하였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유전적으로 처음부터 취약한 부분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는 더욱 조심해야 하겠지만,
행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유전적인 경향성이나
현재의 의지를 충분히 살펴서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대표적으로 스트레스, 방사능이나 각종 화학물질에 노출, 에너지의 과도한 사용 등 무수히 많은 예를 들 수 있지요.
이러한 부정적인 환경에 노출되는 이유는
사회 환경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끌고 갈 수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사회 환경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기에 다양한 질병이 발생된다고 생각됩니다.
사회를 믿고 살아가야 할 운명이지만, 우리가 좀 더 깨어있다면,
욕심 버리기, 스트레스 감소, 가공식품보다는 자연식품, 과도한 당분 섭취 금지,
중용적인 마음자세, 집착하지 않는 자세 등 수없이 들 수 있으나,
이미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실 터이니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5) 老化
그렇다면 죽음의 원인이 되는 노화라는 것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요?
위에서 설명한 죽음의 설계란 뜻은 삶에 주어진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개념이므로
노화를 궁극적으로 멈출 수는 없지만,
개별적으로 노화의 원인에 관여하는 요소들을 감안한다면 노화를 늦추거나 당기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현대 노화생물학에서는 DNA 손상을 노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데요,
이 이론 또한 한계가 있기에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DNA는 세포가 분열되는 방향을 지시하는 명령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부분적으로 노화나 기능의 이상은 결과적으로
DNA의 손상으로 인해 정확한 용도의 단백질을 생산하거나 기능을 지시하는 행위에 오류가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화의 원인이 DNA 손상이라면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진화란 환경에 적응하여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유전자가 변하지 않으면 진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위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돌연변이는 진화의 필수적인 요건인 동시에 새로운 도전입니다.
따라서 유전자는 일정 빈도로 복제 오류가 발생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는 것이며
장수하면 복제 오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전자의 손상이란 기존의 유전자 질서가 변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므로
당초에 유지하고 있던 유전체와는 다른 속성으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DNA의 부분적인 변이들이 축적되어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화란, 유전자의 유지와 변화라는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적응이라는 효율점을 찾는 것입니다.
유전자에 오류가 생기면 이를 복구하는 기능이 자체적으로 있으나 복구하지 못한 손상은 축적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수할수록 손상의 축적이 커지므로 이를 장기간 방치하면
멸종이라는 문제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설계하여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손상이 많은 늙은 개체는 죽음으로 제거되고 새로운 개체로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생물은 자체적으로 유전자의 손상을 복구하는 기능이 있지만,
손상이 전혀 생기지 않으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DNA 손상이 암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가끔씩 몇 가지 변화가 겹쳐 오히려 생존에 유리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니까요.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진화를 이끌어왔다는 것입니다.
즉 복제 실수가 없다면 진화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DNA 손상 과정이 생물학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지,
또는 손상시키는 물질이 과연 무엇인지를 다양하게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4. 삶과 죽음의 境界
(1) 醫學的인 죽음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할 때에 죽음의 시점을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있고,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한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는데요,
18세기에는 심장과 호흡의 정지를 죽음의 판정 기준으로 삼았고
19세기에는 청진기가 발견되어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심장박동 정지, 호흡정지, 동공 반응 소실이라는 세 가지의 기준을 적용해 왔습니다.
의사들은 이러한 기준으로 판정한 결과가 일정 시간 지속하면 죽음으로 판정합니다.
동공 반응이 추가된 이유는 빛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동공이 반응하는데
이는 바로 뇌간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공의 반응이 없으면 뇌간이 기능을 상실하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뇌가 기능을 상실한 후에도 인공호흡기나 기타 방법을 통해
일정 기간 장기를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도 장기는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타인에게 이식하면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1999년에 장기이식 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이 법에서는 뇌사한 사람이나 심장이 정지된 사람의 장기를
장기이식용으로 사용코자 할 경우에는 적출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죽음의 시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는 바로 개체가 죽어도 장기는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보관상 문제로 시간이 중요하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심장을 이식하여 정상적으로 박동하고 있다면
당초의 심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죽은 것이 맞는 것일까요?
죽음이란 참으로 애매합니다.
특이한 점은 유전물질이 단백질을 통해 세포분열을 일으키는데,
그 명령에 의해 생산된 세포도 마찬가지로 정보 저장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포나 세포로 구성된 장기가 죽으면 그 속에 유전정보가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현대 과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기준이 확고한 과학적 기준에 맞는가를 의심하여
법률에서는 특별한 경우(감염병 등의 위험이 있는 경우) 외에
죽음의 판정 뒤 24시간 이내에 사체를 매장이나 화장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불교문화에 따라 일정 기간(49일)의 영혼의 안정 기간이 필요하다는 사고와 맞물려 있기도 하지만,
죽음을 규정하는데 시간적 요인도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증상 외에도 체온이 소실되어 차가워지거나,
피부에 변색이 일어나거나, 몸이 경직되거나 등 다양한 반응이 죽음을 뒷받침해 준다는 것입니다.
(2) 法醫學的 죽음
그렇다면 법의학적으로 사망 시점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그것은 바로 의사가 사망진단서에 사망자의 신원을 적고,
사망원인과 사망시간을 기록하고 날짜를 적고 사인(Sign) 하는 것이 바로 사망 시점이 되겠지요.
만약 죽음이 사건으로 의심될 경우에는 법의관의 부검으로 죽음의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를 검시와 부검이라 합니다.
그래서 법의학적인 해석은 사회적 과정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죽음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의사가 사인(死因)을 옳게 판단하지 못하거나 오기(誤記)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바로 의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증언하고, 기록에 사인(Sign) 하는지에 따라 죽음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5. 죽음 이후
우리는 지금까지 생명과 죽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과학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영혼이 있다면 물질적인 개념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죽음 이후에 나타나는 비과학적(非科學的)인 주장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비과학적인 개념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은 바로 육체와 영혼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죽음의 개념도 달라진다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대시대부터 생명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해 왔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현대 과학에 부합되는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쓸모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오늘날에도 영적 개념은 우리의 사고의 많은 부분들을 지배하고 있고,
특히 죽음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은 영적 개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유전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영혼이라 해석할 수도 있으나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정보는 물질이라는 개념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영혼이라는 개념과는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설명은
주로 꿈, 최면, 임사체험, 종교적 체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되는 선지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가르치는 진리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지만,
죽음 이후에 나타나는 임사체험은 의학적으로 죽음을 선언 받고
수분(약 5분~15분 정도) 내에 살아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내용들이기 때문에 좀 더 현실적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신비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우리의 육체 외부에는
오라체, 아스트랄체, 정신체, 인과체로 에너지체가 존재한다고 주장되어 왔으며,
육체는 우리가 물질적 환경과 가장 잘 상호작용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며,
이 육체에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진동을 갖는 에너지 장(場)들이 침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높은 차원의 에너지체는 특별한 투시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다고 주장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도 마찬가지로 매우 개인적인 체험들이고,
물리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은 이를 해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나타나는 윤회나 카르마 사상은
오랜 시간을 거쳐 오면서 형성된 개념들이기 때문에 더욱 과학에서는 해명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는 과학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쿤이 이야기하였듯이 과학은 끝나는 것이 아니며 지속될 것이고,
비과학적인 부분이 과학 속으로 들어오면 도 다른 미스터리가 과학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생명현상에 대해 기대해야 할 일은, 과학은 물론이고
비과학적인 철학이나 인문학도 동시에 열어두고 광범위한 지적 탐색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1) 臨死體驗
임사체험이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과정과,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중간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이 보고되었는데요, 이들 중에 약 25% 정도가 임사체험을 증언한다고 합니다.
공통적인 내용은, 자신의 의식이 자신의 육체를 떠나 천정 어디선가에서 그 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바라보고,
바라본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함으로써 그 방안에 있던 사람이나 의사들이 깜짝 놀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빛을 보았다는 증언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감사와 사랑, 배려 같은 감정들을 많이 느끼고 현실로 돌아와 가치관이 전혀 다르게 바뀌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언들은 매우 개인적이고 재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에서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2) 輪廻의 개념
윤회라는 개념은 삶이 반복된다는 의미이며 이는 카르마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카르마 이론은 대단히 복잡하여 아래에서 별도의 항목에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윤회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거부할 수도 있으나
불교인들은 대부분 믿는 것 같고,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윤회를 언급한 것은 없으나
기독교 초기에 발생된 기독교 신비주의(그노시스)나 유대교 신비주의(카발라)에서는 윤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윤회는 환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으나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윤회란 어떤 개체가 다시 환생(還生) 한다는 개념과는 다르며,
개별적인 육체는 죽는 것이므로 그동안 육체 속에 깃들어 있던 영혼(의식)이 다른 개체를 통해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육체를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의식)이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론입니다.
이러한 영혼을 영체, 에너지체, 의식체, 영인(靈人), 영적의식체 등 다양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3) 輪廻 사상의 紀元
윤회를 이해하려면 동양 사상의 배경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동양신비가들이 바라보는 현상세계는 끝없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므로 역동적이라는 사고가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 끝없이 이어지는 탄생과 죽음을 삼사라(윤회)라고 합니다.
붓다는 가르치기를,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이 세계가 움직이고 변화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정된 형상에 집착하는데 그 원인 있다고 가르칩니다.
현대 이원자 물리학에서도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절대 존재(공)로부터 나오는
순간적인 현현에 불과하므로 근본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물체의 본질적인 속성을 부정하거나 자신의 지속적인 경험을 겪는
변치 않는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망상(妄想. 幻像. maya)이라 말합니다.
신비 사상에 의하면 창조세계(현상세계)는 절대 세계로부터 나온 파형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 세계는 원인 인자로서 영원불변하며 무한한 창조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창조세계는 변화하는 것을 그 근본 속성으로 하며
변화하면서도 절대 세계의 본질이 각각의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이 현상계로 태어날 때에 물질세계의 배후에
하나의 통일된 기반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복잡한 상호 간섭의 영향으로 인해 인간의 물리학으로서는 도저히 그 원인 인자 모두를 추적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변하는 상태에 있으며
많은 별들조차도 생성과 붕괴,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천문학에서도 이미 밝혀져 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은 절대 존재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서
영원히 생성과 소멸함이 그 본질적인 성질이며 인도 힌두교의 춤의 신인 시바 Shiva의 춤은
끊임없이 윤회를 계속하는 영원한 생사의 율동(창조와 파괴)을 상징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역동적인 세계 속에서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단순하게 우연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인도의 베단타 철학의 가르침입니다.
현대 심층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에 의해 확립된 집단 무의식은
사람이 태어날 때에 함께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집단 무의식이란 인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의식 깊이 저장된 행위의 결과들을 말하는데
인도에서는 공통적인 경험이나 개인적인 경험을 모두 합쳐 이를 카르마(業)라 부릅니다.
이는 바로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는 DNA를 구성하는 존재의 속성 속에 녹아들어 있다가
다시 현생의 육체 속에 깃들어 그 특성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DNA가 같으므로 그 DNA가 특정 질병에 취약한 경우
부모가 가지고 있던 질병이 자식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 또는 할아버지 간에 비교적 가까운 조상일 경우에는
개인적 특성들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먼 조상일 경우,
예를 들면 기독교 신비주의자인 샤르댕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모든 성질을 종합하고 거기서부터 전체 속에서 이질적인 것을 조금씩 빼낸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개인적 혼에도 소속되지 않고, 모든 혼 전체에 소속하는 가장 선명한 잔유물이 남을 것입니다.
그 잔유물의 성격이란 바로, 인간을 통합하고,
그리고 보다 높은 의식 상태로 진화하게 하는 에너지라고 샤르댕은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 진화를 의미하며 진화는 과거와 연결되는 그 무엇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동일한 속성이기 때문에 타인과 비교해
어떤 특성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인류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요소로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생명체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현상세계에서의 죽음은 존재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며 새로운 시작일 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윤회사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 사상이 명료한 형태로 설명된 것은 인도의 우파니샤드 시대(베단타 철학)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왕족 국가에서 왕족만의 가르침인 오와 설(五火說)에 근거한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五火說 은 사자가 화장되면 그 영혼이 달에 도착하고, 비가 되어 지상으로 떨어져 식물이 되고,
그것이 인간에게 먹혀 정자가 되고, 이것이 모태로 들어가 태아로 재생한다는 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론은 사자가 죽은 다음가는 길은 신도(神道)와 조도(祖道)로 나뉘고,
어느 길을 지나는가는 생전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 합니다.
神道를 지나면 최종적으로 브라흐만에 도달하지만, 祖道를 지나면 오와 설과 마찬가지의 재생 과정을 거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이론이 합쳐져 오 화 이도설(五火二道說)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윤회설은 오 화 이도설에 의해 개념이 확립되었는데
그렇다면 윤회를 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파니샤드는 이것을 業(Karman)이라 불렀습니다.
업이란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말합니다.
우파니샤드에 있어서는 이러한 윤회로부터의 자유, 즉 해탈이 궁극의 목표입니다.
우파니샤드에 있어 해탈은 브라흐만과 아트만(개체적 자아)의 본질을 깨닫고
범아 일여(梵我一如)의 진리를 직관하여 브라흐만과 합일되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인도 사상의 역사. 早島鏡正. 高崎直道. 민족사)
이와 같이 업(業)에 의한 윤회와 그로부터의 해탈의 가르침은
우파니샤드뿐 아니라 인도의 주요 종교(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의 기반이 되고 있음은 물론
세계의 많은 종교들에 대해서도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영혼의 진화를 뜻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낮은 단계에서 보다 높은 단계,
즉 물질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정신으로, 정신에서 초월적 정신(신비체험)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점차적으로 유구한 세월을 거치며
죽음과 환생을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고 종국적으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사상은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이나 유교에 의해
사대부 계층에서 일시적으로 부정되기도 했으나 평민들의 사고에 꾸준히 영양을 미쳐왔습니다.
(4) Karma 理論
카르마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먼저 동양적인 사고방식의 형태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과론적인 사고와 상관론 적인 사고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인과론적인 사고는 우리의 모든 인생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내용이며
대표적으로 종교적인 교리를 들 수 있습니다.
인과론적인 사고방식은 이 세상이 하나의 궁극적인 원인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사실들이 유출(流出) 되거나 생산(生産) 되었다고 생각하는 논리를 말합니다.
일신론(一神論)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종교가 이러한 형태를 지지하고 있고
철학적으로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idea) 이론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범주(範疇)에 속합니다.
그러나 상관론 적인 사고에서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상호 관계를 통해 사물이 존재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비가역적(非可逆的)이라는 개념을 포함하여 창조(創造)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후자는 사물을 있게 하는 근원이 가역적임을 의미하며,
반대적인 개념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므로 상호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노자(老者)가 주장하는 유물 사상이며 불교철학과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유무, 앞뒤, 선악, 장단, 선후, 진위 등 모든 것이 상호 관계를 통해 사고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르마란 자신이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한 모든 것이 우주에 기록되어,
그 파동이나 성향들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결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카르마 이론에서 말하는 인과는 위에서 설명한 인과론적 사고(결정론)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상관론적 사고 속에서 인과적(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대에 와서도 중요시하는 DNA 개념과도 일치합니다.
DNA는 삶이나 의식에 관한 하나의 연속된 정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현생에서 얻은 경험이나 사고방식은 내가 죽을지라도 DNA로 암호화되어 자식에게 전달됩니다.
인간이 출현한 이후 모든 경험이나 의식들이 DNA에 축적되어 왔으며
그것이 현재의 개체적인 삶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르마 이론은 단순히 업보(業)나 잉과 응보라는 개념을 넘어
윤리적으로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심오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과거(전생)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야 하는 이유는 삶의 설계라는 항목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냥 동일한 육체로 태어난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화적으로 과거보다는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는 능력을 선택해 왔기에 보다 성숙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테야르 드 샤르뎅은
인간의 의식이 진화하여 그리스도 의식을 성취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진화적인 사고는 부정적인 사고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하면서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최종 목적지를 니르바나라고 이야기합니다.
(5) 自由意志
카르마 이론과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나”라는 자아의식이 주어진 것은 아마도 유인원 시절이라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지구에 최초로 생명체가 발생된 때가 될지도 모릅니다.
자아의식은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외부의 환경과 구분하고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을 규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 자율조직한다는 뜻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진화나 영혼의 성장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자유의지가 다른 동물과 인간을 구분되는 유일한 기준이 되었고,
그 기준을 이용해 인간은 매우 다양한 방면으로 문화를 진화시켜 왔습니다.
그 결과 자유의지라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넓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류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욕심이나 이기적 개념으로서 설명하지만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란 원래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목적과 책임이 동반되고 그 과정에서 성장이라는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카르마라는 개념을 운영자도 자세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유의지가 적정한 진화의 목표대로 작용하여
카르마가 가져오는 경향성을 넘어설때에 새로운 성장을 이룩한다고 해석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유를 두고,
생명을 자연이 설계했든 신(神)이 설계했든 상관없이 자유의지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진화론도 그렇고 영혼의 성장이라는 이론도 마찬가지로 지구에 태어난다는 자체가 그러한 기회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지구상에 태어난 존재가 누리는 유일한 기회이며,
영적 세상에서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자신의 의식수준에 따라 고정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에서 설명하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이야기도 바로 이러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생을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카르마를 소멸시키고 삶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기회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전 우주적으로 확대할 수도 있겠지요.
(6) 進化的 目標
그렇다면 이러한 진화적 방향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의식이나 진화적 목표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나타났듯이
사랑, 감사, 남을 돕거나 배려하는 마음의 자세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를 위해서 지혜를 배우고 터득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가르침, 신비적 가르침, 비교적(秘敎的) 가르침, 선지자들의 가르침 등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왜 이러한 개념들이 목표가 되었을까요?
운영자도 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모든 가르침들이 사랑이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를 두고 오랫동안 의심해 왔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지금은 넓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가르치는 사랑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념을 넘어 사랑이라는 뜻의 본질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가령 예를 들면 그 사람의 의식수준에 따라 도적적인 개념들은 달라지기 때문에
무엇이 사랑인지를 알려면 자신의 의식수준을 고차원으로 유지해야
진정으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남을 도와주기 위해서 한 행위가 오히려 악이 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어로 표시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개념일 뿐이며 직접적으로 사랑을 느겼다면
그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냥 오묘할 뿐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의식 수준에 따라 도덕적인 기준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언어적인 개념을 넘어서 사랑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친 사랑이라는 말은 “내가 누구를 사랑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아(我)가없는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만족적인 도덕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본질을 보려면 이해가 아니라 언어를 넘어서는 일이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전생을 기억할 수 없는 이유는,
만약 전생을 기억하게 된다면 혼란이 올 것이므로
현생에 집중하여 새로운 성장을 유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 시절(2~3살까지)에는 전생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나,
나이가 들면서 현생에 매달리기 때문에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단계를 부여하여 심판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현실적인 삶을 통해 스스로 성장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환생에 대한 문제를 두고 이안 스티븐슨이라는 학자는
약 2000명의 어린이를 통해 사례를 들어 설명한 바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과학적으로 환생이라는 문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삶의 설계자가 우주이든 신이든, 인간의 한계를 지우는 이러한 봉함 이론은 언제 개봉될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개봉된다면 인간은 새로운 존재가 됨은 물론이고, 인간 스스로 신(神)이 될지도 모릅니다.
참고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의식의 수준이 높다거나
특수한 수련을 통해 전생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 외에도 에드가 케이시처럼 아무런 수련이나 노력 없이
나타나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능력들은 우리의 사고능력을 넘어서 있습니다.
어떤 이는 태어나자마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수많은 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는 설명 이외는 어떤 설명도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사후세계를 보고한 내용들이 매우 많고, 우리는 과학적으로 이를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제든지 열린 마음으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찌라도 그렇게 준비하는 것이 불필요한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6) 死者의 書
그래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교과서적인 책인 "티베트 사자의 서"
(에번스 웬츠 편집. 류시화 역. 정신 세계사)에서도 육체를 떠난 영혼의 여행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후(死後)에 바르도(죽은 후 영적 세계에 도달하는 과정의 기간) 기간 중에
살아 있을 때 경험하지 못한 많은 두려움과 고통이 뒤따른다.
그러나 사후에 보게 되는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된 환영(幻影)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들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삶도 죽음도 우리의 환영이고, 모습도, 색깔도, 마음까지도 실체(實體) 없는 환영의 세계이다.
삶도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세계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죽음은 환영에 불과한 것이며 삶까지도 그림자일 뿐이니 그것들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은 티베트의 성전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서구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동양의 명상 과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세계적인 관심을 촉발 시켰고,
사후 세계는 물론 인간 정신의 비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간직하고 있어
종교와 믿음을 초월한 모든 구도자들에게 기본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무섭고 공포스러운 어떤 광경이 보일지라도,
그것들이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환영임을 알라.
네 환각을 벗어나면 사자들의 심판관도 악마도
모두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형상이니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수많은 경전들과 종교를 닦았을지라도 붓다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하나의 중요한 기술이나 말 한마디로
그대의 마음을 깨닫는다면, 그 순간 그대는 붓다의 경지에 이르리라.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임을 깨닫고 자유를 얻으라! "
.........티베트 사자의 서...........
현대 뇌과학처럼 실체를 인식하는 과정이 뇌라고 한다면
생각 또한 뇌의 산물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간들에게 커튼으로 가려진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뇌는 본질적인 존재와 연결하는 다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육체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일으킨 영혼은 죽음으로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육체가 생성된 후에 영혼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먼저 있기에 육체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서 살아있을 때에 이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후에 나타나는 환영들이 살아있을 때에 정신의 투영 물이라면 살아 있을 때에 그것을 깨우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영의 세계는 잠시 머무는 세계로서 살아 있을 때 느끼는 수준이나 파동의 한계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며
살아있을 때 느끼는 모든 것이 사후세계에 그대로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그 환경을 변형하는 일은 오직 살아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삶은 축복이자 기회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가르침의 핵심이라 생각됩니다.
죽으면 자신의 의식을 수정할 수가 없으니까요.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기 전에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도 본질을 깨달을 수가 있지만 놓쳐 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죽음 직후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지혜의 무한한 확장은
현생의 이기적인 과오를 후해하게 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임사체험자들의 증언입니다.
이러한 급격한 체험 변화는 적응의 어려움을 야기하겠지요.
오직 살아있을 때에 한해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주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사후(死後)에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음 이후에 무엇을 보거나 어디로 간다면
그것은 살아 있을 때 준비된 상황에 따라, 알고 있는 내용에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지혜(智慧)가 가르치는 중요한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사자를 위하여 사후 세계에서 만나는 각종 신들이나 악마(천국과 지옥) 와 같은 영적 존재들은
어떤 개별적인 실체를 지닌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인식 시키고 죽은 자를 안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있는 인간 존재도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의 "나" 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러한 생각 또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존재 세계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같은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다시 영원한 바다의 존재로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티베트 불교의 심오한 사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오묘하여 쉽게 논할 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6. 죽음의 기술
자!~ 지금까지 생명현상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이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언젠가는 통합의 시대가 오겠지요.
그렇다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 항목의 글이 바로 본 콘텐츠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긴 여행을 했으니, 귀하의 인내력에 존경을 표합니다.^^^
운영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우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미리 준비하는 것이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과학적인 결과가 어떻게 튀어 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살아 있으면서, 특히 젊은 시절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 중의 바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죽음의 기술에 대한 책은 이미 넘쳐나지만
우리나라에서 죽음학에 대한 최고 권위자인 최준식 교수님이 쓴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김영사)는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어 누구든지 한번 읽어보시기 권합니다.
당하는 죽음이 아니고 맞이하는 죽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결국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을 직시하고 잘 맞이하려고 노력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바로 섭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을 생각할 때 완성됩니다. 삶 하나로 만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음도 삶의 내용이나 질이 제대로 받쳐줄 때 완성되는 법입니다."
~~미상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