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저자 김 원입니다. 부족한 글을 너무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이번에 초판을 상당부분 고친 <개정판>이 곧 출판됩니다. 관심있으신 독자들을 위해 '개정판' 서문을 올려드립니다.
개정판 서문
먼저 ꡔ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ꡕ에 관심을 가져준 모든 독자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지나치게 두꺼우며 방대한 과거와 현재 지배적 담론과 익명적 지식들의 실타래를 복잡하게 얽어놓은 ꡔ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ꡕ를 읽어주신 많은 분들에게 이 글이 ‘다시 쓰여지는 텍스트’가 될 수 있도록 계속 수정과 보완을 약속드린다. 특히 2006년 ꡔ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ꡕ는 한국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위해 기여하셨던 고 김진균 선생을 기념하는 제1회 김진균상 학술부문을 수상하게 되었다. 부족한 글에 과분한 상을 주신 김진균 기념사업회에 개정판을 내면서 감사의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또한 여러 사정으로 출판 자체가 어려워졌던 이 책의 출판을 맡아준 도서출판 이매진 정철수 대표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개정판에서나마 건네고 싶다.
굳이 개정판을 내면서 다시 ‘개정판 서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것은 그간의 관심과 이것을 반영했던 여러 서평과 비판 등을 부족하나마 개정판에서 담아내려고 했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 책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에게 이 책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과 반론을 소개함으로써, 이 글이 좀더 논쟁적으로 읽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러 언론 지상, 인터넷 매체 그리고 잡지 등에 ꡔ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ꡕ에 대한 소개가 실렸지만, 여기서는 그 가운데 몇 편의 구체적인 서평을 선택해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개정판에 이런 평가들을 일부 반영했음을 밝히고자 한다.1) 주제별로 제기된 문제에 대해 하나씩 언급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민주노조 담론의 모순과 균열 문제를 살펴보자. 이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2005년 11월 서강대학교 정치철학연구회 2005년 학술발표회에서 ‘담론 분석의 방법들’이라는 주제로 김익경이 처음 문제를 제기했다. 구체적으로 김익경(2005)은 민주노조 담론의 균열과 모순에 대한 내용과 관련, 다음과 같이 비판을 가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중요한 부분을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강조는 인용자).
“……김원의 글은 이렇게 역사적 내용을 도구로 하여 기존 서사를 뒤집는다. 기존 서사가 또 다른 서사를 억압하고 성립한 사후적으로 구성된 담론임을 익명적 지식을 통해 드러내며(푸코의 계보학적 방법), 더 나아가 익명적 지식을 이용해 새로운 서사를 구축한다(미시사의 방법). 즉 계보학과 미시사를 결합하여 텍스트의 서사성이 가진 이중의 위협에 대응한다. ……(그러나 ― 인용자) ……청계천 피복노조(청계피복 노조를 지칭 ― 인용자)와 동일방직 노조를 기술할 때와는 달리 YH 노조를 기술할 때는 노조가 선택의 주체였다는 점이 강조된다. 즉 YH 여성노동자들은 ‘부차적이고 비자율적인 주체’가 아니었던 셈이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주체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YH 노조를 주체로 만드는 이와 같은 서사는 약간 당혹스럽다. 이전 두 노조의 신화화를 익명적 지식을 통해 비판하는 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전복의 힘을 상실한 것 같아서이다. ……YH 노조 이야기는 차라리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노조에 관한 서사처럼 읽히는데, 청계천 피복노조와 동일합성 노조에서처럼 ‘노조’와 주도하는 주체(지식인의 담론 혹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위치가 분열되어 있지 않고 일치하기 때문이다. 소급하여 앞의 두 노조에 대한 서사도 다시 구성할 수 있다. 그 서술에서 김원은 노동조합의 기본 기능을 지적하고 이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구성한 기존 서사를 비판하였다. 그 노조들은 자신의 본질적 기능과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진정한 주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YH 노조는 자신의 현실적 위치와 일치하는 진정한 주체였으므로 YH 노조는 행위할 수 있었다. ……”
김익경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초판 7장의 YH 노조에 대한 부분은 민주노조를 둘러싼 지배적 담론(혹은 서사)을 비판하는 방향과는 틀어져 있었다. 바로 ‘진정한 주체’로서 YH 노조가 하나의 모델이자 행위자처럼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텍스트의 모순은 내가 은연중에 지냈던 ‘주체에 대한 강박증’과 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나는 김익경의 반론을 받아들여서, 개정판에서는 민주노조 담론의 균열 부분에서 YH 노조 부분을 삭제했고, 교회단체와 여성노동자 사이의 균열을 다루었던 초판(8장)을 같은 장으로 합쳐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둘러싼 지배적인 해석을 둘러싼 익명적 지식의 드러내기 효과를 강화시켰다.
두 번째, 남성성과 폭력성을 둘러싼 화두다. 나는 초판에서 프롤로그 가운데 일부(「여성전사」)와 초판 4장에서, 작업장 폭력에서 그간 부각되지 않았던 남성노동자들에 의한 무의식적인 작업장 폭력을 남성지배 공동체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다. 이 문제에 대해 ‘남성성=폭력성’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구체적인 쟁점으로 제기된 점은 남성 노동계급이 중산층 남성에 비해 남성다움에 대한 강조가 강하고, 이것은 남성 노동계급이 계급적으로 무시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남성의 폭력성을 일반화했다는 것이다. 바로 남성 노동계급이 중산계급에 비해 남성성에 집착한다는 근거도 없거니와, 주요 논지로 제시되는 것은 폴 윌리스(P. Willis)의 연구 등 외국 사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또한 여성성이 하나로 규정될 수 없듯이, 남성성도 단일하지 않으며, 단적으로 여성노동자가 여성노동자에 대해 작업장 안팎에서 가하는 폭력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폭력성=남성성’으로 등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김준 2005).
이재성·김혜영(2005)도 ‘남성성=폭력성’이라는 비판과 흡사한 맥락에서, “……‘자매애’는, 운동의 구호로는 사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남성성을 이성, 정신, 폭력성, 전쟁지향 등으로, 여성성을 감성, 육체, 비폭력성, 평화지향 등으로 정의하는 오래된 근대적 이분법을 수용함으로써 고정된 여성성을 정당화 혹은 강화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여성을 ‘남성적 질서 속에서 호전적 전사’로 만드는 것도 분명 문제가 있지만, ‘여성성=평화·탈전쟁으로 읽어야 한다’(91쪽)는 주장은 더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여성을 산업전사로, 희생양으로, 투사로 만드는 것이 여성을 특정한 담론 속으로 밀어 넣어 담론생산 주체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마찬가지로 여성을 ‘평화·탈전쟁’의 맥락에서 읽어내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지배적 담론의 내용만 바꾸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논박하고 있다.
일단 나는 초판 텍스트 가운데 일부분이 ‘남성성=폭력성’ 혹은 ‘여성성=평화, 비폭력’으로 독해될 수 있는 여지에 대해 인정한다. 프롤로그와 글의 일부를 다시 검토해 본 결과, 문제가 있는 부분을 수정했다. 다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단일하게 환원될 수 없는 복합성 혹은 환원 불가성을 지니지만, 그렇다고 남성공동체의 지배의 욕망이 관철되는 장으로서 작업장이 지니는 위치에 대한 해석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이러한 남성지배, 남성공동체로서 작업장을 유지하기 위한 의례적 실천이 남성노동자들의 작업장 폭력과 여성다움을 여성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었다. 특히 남성들에게 집단적 폭력이나 학살 등의 기억은 스스로 ‘망각’되어진 기억이며, 여성들에게도 ‘감추기를 강요당한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경험적인 논거나 사례’라는 차원으로 논의될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싶다.
세 번째 화두는 ‘자매애(femal solidarity 혹은 sisterhood)’를 둘러싼 문제다. ꡔ여공 1970ꡕ과 관련된 평가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자매애’라는 여성노동자들 간의 연대의 문화를 둘러싼 문제였다. 바로 여성노동자들 사이의 관계, 문화를 ‘자매애’라는 개념어로 규정하는 것이 지배적 담론을 뒤집는 책 전체의 흐름을 거스르거나, 혹은 여성노동자간의 차이, 균열 등을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우선 이재성·김혜영(2005)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강조는 인용자).
“……‘자매애’는 여성주의 진영에서 적지 않게 논쟁을 불러왔던 개념이다. 여성운동사의 맥락에서 ‘자매애’는 단순히 ‘여성들 간의 친밀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 전체 여성의 공통된 이해’임을 주장함으로써 여성들에게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연대할 것’을 촉구하는 개념이다. 오늘날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그러한 ‘자매애’ 개념이 여성들 간의 ‘차이’를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하여 매우 신중하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을 사용하는 저자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지 않으려면 기존 용법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석하고, 저자 자신의 관점에 대해서 밝혀주어야 한다. ……저자는 여성노동자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견하려 노력했고, 특히 이를 비공식적 영역과 주변적 범주(수다 등)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통해 달성하려 했다. 그러나 제목과 본문을 보면 여성노동자들의 문화가 ‘자매애’로 규정되는 듯 보이다가(636쪽), 다른 부분에서는 이를 단순히 노동자문화와 연대의 ‘기초’라고 정의하는 등(639쪽) 일관되지 못한 개념 구사를 하고 있다. 저자는 남성중심주의에 대항해 온 ‘자매애’ 개념 속에 담긴 많은 이들의 고민을 더 진지하게 다루었어야 했고, 새롭게 재정의하여 ‘자매애’ 개념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연구 과정에서 이 개념을 보다 일관성 있게 적용했어야 했다.”
비슷한 논지로 정지영(2005)도 초판에서 사용된 자매애에 대해, “……여성 노동자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자매애’의 문제에 대해 좀더 치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여성노동자의 문화를 자매애로 쉽게 설명하기보다는, 여성노동자의 ‘자매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또 다른 담론으로 분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 강조한 불연속성과 익명적 지식을 고민할 때, 기숙사 안에서 형성한 친밀한 관계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게 된다. 친밀한 관계가 있었던 만큼 그 안에 갈등과 배신, 타협과 협상이 존재했을 것이다. 기존의 노동사가 ‘노동자’ 내부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이를 보지 못한 것처럼, 김원의 여성노동사는 ‘여성노동자’ 내부의 불균질성을 간과하는 것 같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내가 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매애’에 대한 문제다. 두 개의 서평이 정당하게 지적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자매애 자체가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자매애는 여성노동자들 간의 차이, 균열 등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는 데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초판 9장에서 자매애로 규정한 여공들의 소모임 부분을 삭제하고, 개정판 7장의 ‘여공의 문화’의 일부분으로 처리했다. 또한 개정판에서는 7장에서 자매애 자체에 대한 초보적인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제기되었던 문제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자 했다. 하지만 ‘연대의 문화’ 수준으로 모호하게 처리된 여성노동자들 사이의 문화 그리고 내부적 차이에 대한 규명은 좀더 시간을 가지고 탐구해야 할 과제로 남겨두었다.
다음으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둘러싼 담론에 대한 쟁점이 제기되었다. 나는 1970년대 여성 민주노조운동을 경제주의, 조합주의, 낮은 의식성 등으로 규정한 것은 남성 노동사가와 활동가들이며, 이것은 여성노동자들을 부차적이고 낮은 수준의 주체로 전락시켰음을, 또한 여성노동자들의 주체적 구성을 은폐했음을 주장했다.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이 조합주의라는 지배적 해석에 대한 ‘반비판’과 연관해서 제기된 문제는 1970년대 여성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남성 노동사가들의 편견으로 돌릴 수 있느냐는 문제다. 비판의 요지는, (1) 1980년대 혁명적 노동운동은 1984년 대우자동차 파업에서 중공업 남성노동자의 진출을 환호하는 동시에, 이 운동의 성격을 조합-경제주의로 규정했으며, (2) 1970년대 여성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기존의 평가가 특정 지식을 은폐함으로써 편향된 담론을 생산했지만, 마찬가지로 ꡔ여공 1970ꡕ도 여성주의적 담론에 기초, 70년대 기존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를 난폭하게 재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김준 2005, 292).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 가지 해명과 한 가지 반론으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일단 내가 여성주의적 담론 ― 정확하게는 방법론 ― 만을 통해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둘러싼 지배적 담론을 비판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배적인 담론과 공식적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있어서 푸코의 계보학을 매우 매력적인 틀로 사고했다. 바로 과거에 사료로 전혀 인정되지 않았던 하찮고 잡스러운 자료를 가지고 역사를 비틀어 보는 것은 공식적인 서사/흔적을 남길 수 없었던 주변부 집단을 드러내고, 동시에 지배적 담론을 전복시키는 데서도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남성주의적 노동사 해석과 반대편 입장에 있는 여성주의 입장과 ‘친화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성주의 인식론을 지니신 독자들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글이 초지일관 ‘여성주의적 담론’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일부분은 이미 여성주의 연구에서 제기해온 것들이다. 더불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푸코 자신의 ‘몰성적인’ 면은 여성주의에 의해 비판의 대상 혹은 불편함을 주었으며, 푸코의 방법론이 여성주의와 결합하는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편 나는 ꡔ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ꡕ에 대한 전복성, 해체적 성격 혹은 불편함 등의 ‘언어’ 혹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일정한 입장, 다시 말해서 남성중심적인 지배적 담론에서 쉽게 탈출하지 못하는 ‘주저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물론 나는 내 인식론이나 방법론을 강요할 생각이 없으며, 다만 여공을 둘러싼 자명하다고 여겨졌던 담론을 뒤집고, 흔히 과학적 해석, 이분법적 인식에 기초해서 정통으로 간주되어온 역사라는 문제 틀을 반박할 하나의 서사를 구성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마도 아래 글이 좀더 정확한 반론이 되지 않을까 싶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를 둘러싼 조합주의, 경제주의, 민주화 담론 등 지배적인 담론은 아직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내가 계보학을 선택한 이유는 이런 지배적인 담론이 형성되어온 역사와 이것을 구성해온 힘들의 역사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바꾸어 말해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개념, 이제는 보편화된 혹은 사라진 단어, 언어가 가진 신비성, 물신성物神性, commodity fetishism을 벗겨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고고학자가 근대의 지층을 발굴하며, 근대 담론의 기원을 탐색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이다. 나는 1970년대 여성노동에 대한 기존 연구들이 지녔던 과학, 인과관계에 대한 지나친 집착, 운동사의 전통에 대한 무비판적인 인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 연구들은 ‘이론에 대한 맹목’ 혹은 ‘실증에 대한 과도한 애정’ 탓에 역사적 현상을 협소화·도구화시키는 경향이 강했다. 오히려 나는 익명적 지식과 담론에 관한 연구에서는 ‘내러티브’, 바로 ‘서사’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공장 동경과 실질적 가장으로서 여공을 둘러싼 문제다. ꡔ여공 1970ꡕ에서 나는 희생양 담론을 비판하면서 여공이 희생양이나 생계보조적 노동력이 아닌 실질적인 가장임을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은 ‘경험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있지 않은가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구체적인 논거로, (1)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남성의 이분의 일에 머물렀으며, 최대한 가계보조를 했다고 해도 수입의 절반 이상을 넘지 않았으며, (2) 통념과 달리 가족에 대한 송금보다 자신을 위한 저축과 소비에 사용했던 노동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주체적 자아로서 여성노동자들의 자기정립은 실질적 가장이었다는 무리한 주장보다, 여성노동자들의 가계에 대한 기여와 도시체험이 여성노동자들과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지적이다(김준 2005).
물론 위에서 지적한 실질적 가장으로서의 기여도, 자신을 위한 수입의 사용 등에 대해 나도 인정할 수 있다. 다만 내가 희생양 담론과 다락방 담론이라는 한 쌍의 지배적 해석을 비판한 맥락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것이 ‘경험적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젠더 불평등이 관철되어온 가족질서 아래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지배 담론이 강조하듯이 자신을 버린 ‘희생적인 주체’도 아니었으며, 다락방 담론이나 ꡔ전태일 평전ꡕ에서 서술되는 것같이 보호의 대상도, 성별이 삭제된 중성적 주체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여공을 둘러싼 지배적 담론과 역사 해석을 뒤집기 위해 ‘공장 동경’이라는 ‘익명적 지식’을 드러냈던 것이다. 어쩌면 ‘경험적인 논증’의 차원으로 이 문제를 귀착시킬 때, 여공들은 다시 지배적 담론의 세계 혹은 과학적 역사 서술이라는 타래로 빨려들지도 모르겠다.
정치학, 그리고 한국정치를 전공으로 한 나는 늘 ‘과연 나의 학문적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하곤 한다. 정치학, 역사학, 사회학 그리고 여성학, 문학 등에 걸쳐 있는 나의 연구는 주류 학계의 흐름이나 질서와는 한 걸음 떨어져 있고, 지배적인 해석과도 거리를 두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할 때도 많다. 하지만 이제 막 연구에 첫발을 뗀 한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글쓰기, 그리고 주류적인 것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내가 나름대로 ‘세상에 말을 거는 방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전히 내가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내 연구가 공식적이며 주류적인 역사 해석으로부터 배제되고 타자화되어, 결국 잊혀져버린 개인과 집단들을 ‘불러내는’,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세상이 잊어버린 그들과 세상이 ‘대화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다.
끝으로 앞으로 쓰고 싶은 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너무 긴 서문을 맺고자 한다. ꡔ여공 1970ꡕ에서도 스치듯 말했지만 나는 이야기체 역사를 다시 복원하고 싶다. 과학적인 역사가 폄하한 ‘서사의 부활’을 통해 또 다른 실험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이 다음 목표다. 그래서 요즘은 한동안 손에서 놓았던 소설들을 보는 중이다.
2006년 3월 25일
김원
*각주1) 여기서 거명하는 서평은 김준, 「남성주의적 한국 노동사 인식과 서술에 대한 해체적 폭로」, ꡔ민주사회와 정책연구ꡕ 통권 9호, 2005; 이재성·김혜영, 「“당신에게 나, 은혜 입은 거 없어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서평」, ꡔ진보평론ꡕ 겨울호 2005; 정지영,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서평」, ꡔ한국여성학」 21권 3호 2005; 김익경, 「흔적, 서사, 담론분석의 방법들」, ꡔ역사읽기의 새로운 모색ꡕ 서강대학교 정치철학연구회 2005년 학술발표회(2005년 11월 18일)이다. 그 밖에 신문, 잡지 그리고 인터넷 매체 등에서 좋은 비평과 지적을 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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