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제가 섬기는 교회 회보에 투고한것인데 그때 그시절 이야기라서
빈자리도 메울겸 한번 올려봅니다.
잊을수 없는 사람들 김 종 원
6.25 사변 직후 서울에서 피난온 우리 가족은 대전에 정착하게 되었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찾아간 교회는 고아원 일부를 빌려서 예배를 보는 대전 선화성결교회였습니다. 비좁은 공간에 어른 아이 할것없이 함께 모여 박수치며 찬송부르고 소리높여 기도하던 장면들이 아직도 희미하게 기억납니다. 얼마후인지 다니던 교회가 깡통을 이어 만든 둥그런 콘셋트 모양의 가건물로 이사가게 되었습니다. 마루바닥에 앉아 예배를 보니 신발은 맨뒤 신발장에 벗어 놓게 되었고 예배가 끝나면 한꺼번에 몰려 서로 자기 신발 찾느라고 아우성이 나고 신발을 잃어버렸거나 "짝째기" 신발을 신고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깡통교회 다닌다고 놀려댔지만 저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달려 가 예배보고 선생님을 만나는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주일학교 교사들이 부족하여 중고등학생들이 반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까만 교복에 하얀 명찰을 단 남자 선생님, 곤색 쎄라복에 하얀 칼라를 단 여선생님들이 "삭개오 이야기", "집 나간 탕자 이야기" "요셉 이야기"등 성경 말씀을 열심히 들려 주셨습니다. 그때 반사로 가르치던 분중에 한 분이신 박 선생님이 목사님이 되셔서 LA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수소문하여 얼마전에 찾아 뵈었습니다. 자그마한 키에 아직도 옛날처럼 죽은깨가 많으신 목사님은 은퇴를 앞두고 후임자에게 손수 땀흘려 건축하신 교회를 물려줄 준비를 하고 계섰습니다. 당시 교회 사택에 홀어머니 밑에서 형제들과 함께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철부지 말썽꾸러기인 저희들에게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어린 심령들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생님이 대학 입학을 늦게 하시고 복학생으로 다니셔서 제가 입학 하던 해에 같은 대학 뺏지를 달고 다른 단과대학 교정에서 잠깐 뵌적이 있었는데 이제 먼 이국땅에서 함께 황혼기를 맞으며 믿음안에서 한 형제로 만나게 된것도 선생님께서 어릴때 뿌려주신 믿음의 씨앗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감사하고 감회가 깊었습니다.
또 한분 잊을수 없는 분은 어린이 찬양대를 지도하시던 유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은 한쪽 팔이 없으셔서 양복 한쪽이 덜렁거리면서도 한손으로 풍금을 치시며 틈틈이 지휘까지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양떼들아 양떼들아" "예수깨서 오실 때에"등 어린이 찬양과, 추수감사절 그리고 크리스마스때에는 특별 연습까지 밤 늦게 시키시면서 틀린곳 하나 하나를 꼼꼼히 고쳐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후 저는 성가대원으로 계속 섬기며 대학생때에는 하나님 나라 갈때까지 성가대를 계속하겠노라고 서원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성가대원 자리를 지키며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는것도 모두 선생님의 기도와 열정적인 지도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세끼 밥먹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 교회에 달려나온 철부지들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신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믿음의 주춧돌이 되어 오늘까지 믿음 안에서 살게 해주시고 또 잊을수 없는 그분들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