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康陵(명종과 인순왕후릉)
위치 :서울 노원구 화랑로 681능의 형식 :쌍릉능의 조성 :1567년(선조 즉위), 1575년(선조 8)능의 구성
강릉은 조선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강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명종, 오른쪽이 인순왕후의 능이다. 전체적인 능침은 문정왕후의 태릉과 같은 형태로 조성하여,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고,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석마, 문무석인 등을 배치하였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향·어로, 정자각, 비각이 있고, 정자각 왼편에는 둥근 어정(御井)이 있다. 어정이란 왕이 마실 물을 위해 판 우물을 말한다. 광릉, 숭릉 등지에서도 볼 수 있다.
능의 역사
명종은 모후 문정왕후의 3년 상을 마친 후 며칠이 지난 1567년(명종 22)에 세상을 떠나, 태릉 동쪽 언덕에 먼저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강릉 좌측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명종(明宗) 이야기
명종(재세 : 1534년 음력 5월 22일 ~ 1567년 음력 6월 28일, 재위 : 1545년 음력 7월 6일 ~ 1567년 음력 6월 28일)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로 1534년(중종 29)에 태어났다. 1539년(중종 34)에 경원대군에 책봉되었고, 1545년(인종 9개월)에 이복형 인종의 유명(遺命)으로 왕위에 올랐다.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수렴청정 기간 중에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등을 계기로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은 실추되고 외척 일족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하여 사회가 불안하였으며,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런 상황에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553년(명종 8)에 친정 선포 후, 외척을 견제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보려 하였으나, 소윤과 문정왕후의 권세에 눌려 뜻을 펴보지 못하였다. 1563년(명종 18)에 외아들 순회세자의 급서와 1565년(명종 22)에 문정왕후의 장례를 치른 후 1567년(명종 22)에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을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으로 꼽았다. 이 중 임꺽정은 16세기 중반 명종 재위 시에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자신의 천한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다가 훔친 곡식 등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줘 의적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명종 대에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이 이어지는데다, 관리들의 타락과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하자, 세력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며 의적 행각을 벌였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등 과감하게 행동반경을 넓혔다가 참모와 가족들이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임꺽정 일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신의 평이 『명종실록』에 실려 있다.
【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고 교화가 밝혀지지 않아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延命)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
인순왕후(仁順王后) 이야기
인순왕후 심씨(재세 : 1532년 ~ 1575년 음력 1월 2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릉부원군 심강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32년(중종 27)에 태어났다. 1542년(중종 27)에 경원대군과 결혼하여 부부인(府夫人)에 되었으며,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명종 6)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563년(명종 18)에 어린 나이로 급서하는 비운을 겪었다.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후사가 없어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선조)을 양자로 입적시켜 대통을 잇게 하였다. 선조가 16세에 즉위하자 계승상 모후가 되는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8개월만에 물러났다. 그 후 1575년(선조 8)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의 결정권은 형식적으로나마 대비에게로 이양된다. 대비는 사적으로는 새로 왕이 될 자의 어머니이며, 선왕의 부인이다. 비록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이지만 대비는 국모로서의 권한과 함께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는 것이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임종을 맞을 당시 양심당의 소침 병풍 뒤에서 명종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명종과 인순왕후 둘 사이에는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탓에 명종의 뒤를 이을 자가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명종은 자신의 이복형인 덕흥군(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의 아들 하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명종의 의중을 알고 있었던 인순왕후는 당시 16세이던 하성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가 조선의 14대 왕 선조이다.
홍살문
두 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지며 문짝을 달지 않는 상징적인 문이다. 일주문과 다른 점은 지붕이 없다는 것이다. 또 기둥이 가늘기 때문에 일주문처럼 자력으로 서있지 못하고 기둥하부 양쪽에 지주석을 세워 쐐기를 박아 고정시킨다. 기둥 상부에는 가로대를 길게 건너지르고 그 위에는 세로 살대를 촘촘히 박아 구성한다. 세로살대 중간은 태극문양 등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두 붉은색 주칠(朱漆)을 하는데, 그래서 홍살문(紅箭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붉은색은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다. 우리 풍속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쑤어 먹거나 대문에 뿌리는 것 등은 붉은색을 귀신이 꺼리는 색이라 하여 악귀를 물리치고 집안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홍살문의 붉은색도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살문은 서원이나 향교를 비롯해 능 앞에 설치된다. 그리고 홍살문 앞에는 대개 하마비(下馬碑)를 세운다.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도 홍살문 앞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란 뜻이다. 홍살문부터는 청정하고 신령스런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살문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2007. 4. 10., 김왕직)
정자각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있고, 향어로 맨 앞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준비는 홍살문 밖에 있는 재실에서 이루어진다. 조선왕릉 정자각의 연원은 고려시대에서 찾을 수 있으나 그 이전의 정자각 형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자각 [丁字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은 조선왕릉을 크게 세 부분으로 분류합니다
1) 외부에서 왕릉으로 들어가는 진입공간
2) 생자인 왕과 망자亡者인 선왕이나 왕후가 만나는 공간인 제향공간
3) 망자의 혼령이 머무는 능침공간으로 구분하는데
그 진입공간에 금천교를 놓았다.
禁川橋
1) 풍수지리에 입각하고
2) 능역을 들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잡귀를 쫓아낸다는 의미와 더불어
3) 배수로 역할을 하는
작은 개천들을 사초지 좌우로 조성했는데,
이것을 금천 禁川이라고 하고 건너는 다리를 금천교 禁川橋 라 한다.
첫댓글 오마야...강원도 강릉에 있는 능인줄 알았는디
왕릉 이름이 강릉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