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1 - 후시미를 출발해 교토에서 도요쿠니 진자와 귀 무덤 이총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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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9일 교토 에서 사철 케이한 기차로 주소지마에서 환승해 우지(宇治)시 에
도착해서는 뵤도인 平等院(평등원) 절을 보고 강을 따라 걸어서 윤동주 시비 에
참배한 후에 다시 우지가미진자 宇治上神社 와 겐지모노가타리 뮤지엄 을 구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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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케이한 우지역 으로 돌아와 전철을 타고는 주소지마 中書島 역에 내려서는
오래된 마을을 통과해 강변에 사케의 명가 겟게이칸 (月桂冠 월계관) 과
사카모토 료마 가 자객에게 칼을 맞았던 데라다야 寺田屋(사전옥) 여관을 구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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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시에 속하는 후시미 옛 동네를 걸어서 택시를 타고 산을 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지은 후시미 모모야마성 伏見 桃山城 에 들어가는데 이 궁전 을 구경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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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조선인 포로 강항 이 지은 간양록 (看羊錄) 과 세키가하라 전투 시에 2천으로
이시다 미쓰나리 4만 대군의 공격에 성을 사수한 성주 도리이 모도타다 를 회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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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성을 내려와 전철로 후시미 이나리역 伏見稲荷(복견도하) 에 내려서 천개의
붉은 도리이 가 인상적인 후시미 이나리진자 (稲荷神社 도하신사) 를 구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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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에 3만개에 달한다는 이나리 신사의 본궁 인 후시미 이나리진자
稲荷神社 를 보고 내려와 후시미 이나리역 伏見稲荷 에서 전철을
타고는 3정거장 교토 케이한전철 시치조역 京阪電鉄 七条駅 에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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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걸어 교토박물관 에 도착해 담을 끼고는 북쪽으로 올라가 박물관 담이 끝나고
도요쿠니 진자 豊國神社(풍국신사) 에 도착하는데 이 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를 모시는 신사로 해마다 그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하는데.... 우리 부부가
도착한 시간이 6시 10분경으로 신사의 "신관은 금고를 챙겨서 퇴근" 하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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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히데요시를 모신다는 도요쿠니 신사 를 보고는 옆에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 를 치는 오사카성 전투 의 빌미가 된 호코지 万廣寺
(만광사) 절에 종 을 구경하고는.... 걸어서 12만(18만?) 조선과 명군 영령들 의
코와 귀를 묻은 귀무덤 耳塚 (이총) 을 보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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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봉장으로 독실한 기독교도 기리시단 에 속한 고시니 유키나가
는 흰 비단에 붉은색 십자가 가 그려진 깃발을 앞세운 채 1만 8,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했으니.... 적국을 침략할 때 십자가 깃발 을 앞세우는
것은 십자군 기사 들과 템플 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 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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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는 1584년에 영세를 받았으니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
인데, 아버지는 요나단이고 어머니는 막달라이며 처는 쥬스타이고....
대마도(對馬島) 도주인 소 요시토시(宗義智) 의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 였으니 신앙심이 독실 한 크리스찬 집안 으로 믿음의 가족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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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는 1543년 일본 큐슈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
의 전도를 받고 천주교를 허용 했는데, 사비에르는 로욜라 교황을 알현하고
교황청 중심으로 종교를 통합해야 한다는 의견을 승인받았으니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가
구태하고 부패한 천주교의 최대 경쟁자로 떠오르자 예수회는 일본을 선점 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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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창립 멤버 6인중 한 명인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는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조총(鳥銃) 을 전수했으니,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 부대 를 앞세워
일본 통일을 꾀했고... 1600년 일본인 중에는 60만명이 천주교 신자 가
있었으며 조선을 침략한 15만의 왜군 가운데는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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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의 배후에 천주교 예수회 가 있다고 보는데.... 세스페데스
(Cespedes) 신부는 조선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이미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몇몇 장수들에게 조선침략에 대한 조언 을 바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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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예수회 신부들 을 만나“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게 되면
조선과 중국 전역에 교회당 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모두 천주교인
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 하고는 드디어 1592년에 임진왜란 을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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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 의 군대에 종군한 세스페데스 신부 는 1593년 12월 27일 남해안 웅천
왜성(倭城) 으로 들어옴으로써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서양인 사제(司祭) 이며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천주교에 귀의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161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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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외에도 제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 그리고 고지마 쥰겐,
야마쿠사 다네모토, 소 요시토시 등이 모두 일본의 기리시단
(吉利支丹 Christian) 으로 잘 알려진 장수들이니 기리시단 부대는
십자가 군기(軍旗) 를 앞세우고 조총으로 무장해 조선 침략의 선봉 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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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 는 항해기 에서“임진왜란 당시의 왜 장군들은 전부
그리고 사병들도 대부분이 천주교인 이었다.”라고 썼습니다.
대영 백과사전 의 일본인 역사 편에서 블린클리 는 ‘부산에
상륙한 25만 왜군 중 최소한 10% 이상이 천주교인 이었다.’라고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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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가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조직이라는 사실을 안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임진왜란
이 끝난후 1600년 이후 일본에서 천주교인들을 씨를 말리기 시작하니... 260년간
계속된 기리시단의 박해 로 천주교인 영주와 신자 4만명이 반란 을 일으켰으나... 에도
막부시기에 조직적 학살로 이어져 박해가 끝난 19세기에 신도는 2만명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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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 는 조선인 전쟁고아 소녀“줄리아”를 규슈 우토성 (宇土城) 에 데려가
처인 쥬스타에게 맡기니... 1596년 5월 베드로 모레홍 신부에게서 세례 를 받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후궁의 시녀가 되었다가 1612년 절해 고도인 고즈시마(神津島)
에 유배 되어 죽는데.... 지금도 매년 5월 셋째주 토,일요일“줄리아 축제”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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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Luis Frois) 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를 직접 만나며...... 30여년을 왜국에서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들은 사실을
기록한 일본사(日本史) 라는 책에서 조선인 을‘이교도(異敎徒)’라고 기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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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루이스 프로이스 는 임진왜란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를 ’성모(聖母)
를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하느님이 쓰시는 칼’,‘임진왜란을 하느님의 성전(聖戰)’이라고 찬양하며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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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일본사(日本史) 에서 “히데요시는 인물됨이 하찮았지만 신부들은‘하나님의
칼과 채찍’이라 꼬드겨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 왜란 때 제1군 선봉장
고니시는 세례를 받고 예수회를 광신하는 자 였던 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때
고니시를 제1군 선봉장으로 신임한 것은 예수회 이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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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Luis Frois) 가 지은 일본사(日本史) 를
읽으면서 예수회의 조선 진출 야욕 과 맞물려 임진왜란 이 일어났다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인데.... 그리고 루이스 는 다음과 같이 일본사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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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7년에 걸친 조선 전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전쟁은 우리(왜인)
천주교도들의 커다란 노고와 비용 지출 위에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천주교도
영주 들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 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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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진실로 선하신분 이므로 성스러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 적들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승리에 관한 가장 기쁜 소식 을 이제 머지않아
접하게될 것으로 믿는다. 1598년 10월 3일 나가사키에서. 성스러운 주 하느님의 심부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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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예수회의 열렬한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쌍벽을 이루며 불구대천의 앙숙이던
가토 기요마사 는 일연종(日蓮宗) 즉 법화종(法華宗)의 신도 였으니... 제1 선봉대인
고니시의 군대가 십자가 를 내세웠다면, 제2군 가토의 군사들은 남묘호렝게교
(南無妙法蓮花經 남무묘법연화경) 라는 깃발을 앞세웠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
믿는 종교가 다른 이교(異敎)의 사상 으로 사사건건 배척하고 반목질시하면서 경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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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인 두 장수의 경쟁적 야심 을 이용해
조선의 한양 선점(先占) 과 선조의 포획을 부채질 했습니다. 제3군 수장인 구로다
나가마사 역시 천주교 신자 였으니 그는 조선에서 5천 500개의 코를 베어 일본에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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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에는 칼로 벤 머리(首級) 를 챙기기에 급급했으나 정유재란때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수급 대신 코와 귀 베기가 자행되었으니... 왜군 1명당 코 한되 씩의
책임량을 할당 받자...... 산 자와 죽은 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귀와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냈으니 심지어 산모와 갓난아기의 코 까지 베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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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의 기록입니다. “이 때에 적이 3도를 짓밟아 지나가는 곳마다 여사(廬舍)를 모두
불태우고 백성을 살육 하였으니 조선사람을 보기만 하면 코를 베어서 공(功) 으로
삼고 시위하였다.”‘왜(倭) 십자군’은 조선에서 야만적 죄악을 저질렀으니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은 군관민 6만명의 코와 귀를 벤 다음 창고에 넣어 불태워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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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광해군 6년) 이수광 이 펴낸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 (芝峯類說)에는
“조선시골 장날의 장터에는 왜병들이 산 사람의 코를 잘랐기 때문에....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코 없는 사람이 많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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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종군 승려 교낸(慶念) 의 조선 일일기 (朝鮮日日記) 입니다.“역사상 이처럼
참혹한 전쟁은 없었다. 약탈과 살육 후 이들은 집에 불을 지르니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과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조선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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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 죽은 사람, 어린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귀를 자르고
코를 베니 길바닥은 온통 피바다 가 되었다. 귀와 코를 잘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 에 산천을 진동했다. 이들은 조선 사람
들의 머리, 코, 귀를 대바구니에 담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사냥 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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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규환(阿鼻叫喚), 생지옥이 따로 없었으니, 전쟁이 끝난 뒤 왜장 오오고우치 히데모토
는 귀와 코가 잘린 자가 18만명 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한일 역사교사 공동연구팀은
코 수령증(鼻請取狀) 즉 군공증(軍功証) 을 계산한 결과 약 12만명 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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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교토역 에서 동쪽으로 히가시야마 시치죠 (東山七條) 부근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위패가 안치된 도요쿠니진자(풍국신사) 가 있으며... 정문 건너편에
조그만 봉분이 귀무덤, 즉 이총(耳塚) 이 있는데, 이 무덤은 히데요시 생전인
1597년 9월 28일 조선 출병에서 전승과 자신의 영광 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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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전쟁이 끝난 뒤 조선과 화의 를 시도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는..... 조선 통신사 가 오면 반드시 여기 이총(耳塚) 에 들러 무덤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제향(祭享) 하여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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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30주년인 1898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300주년 이 되는 해인지라
일본에서는 거국적인 축제 가 벌어졌는데..... 이 귀무덤 이총(耳塚) 은
히데요시의 혼이 깃든 전승 기념물 로서 ‘성덕(聖德) 의 유물’로 찬양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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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5천년 전쟁의 역사가 그러하듯이‘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박애(博愛)
정신과, 중생을 제도(濟度) 하려는 석가모니의 불성(佛性) 인 종교 가
전쟁의 도구로 이용됐을 때,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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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의 ‘순교’를 생각하다 보니..... D일보 ‘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
칼럼에 쓴 글 “살아있는 순교”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저
임진왜란때 보다는 300년이 지난 이후에도 조선인들의 순교는 더 많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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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와 떨어지거든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울어서 네가 살아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네가 산다. 그 울음을 주께서 들을 것이고 사람의 귀가 들을 것이고
종국에는 인정이 움직일 것이다.” 김소윤의 소설 ‘난주’에 나오는 말이다.
아이를 떼어놓는 어미는 정약현 (다산 정약용의 형) 의 딸 난주 이고, 아이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당한 천주교인 황사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살배기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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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는 백서(帛書) 사건이 단초였다. 백서는 황사영이 종교탄압과 관련하여 베이징의
천주교 주교에게 보내려고 비단(帛)에 쓴 밀서 였다. 그 사건으로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부인은 관비 가 됐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만, 역사는 관비가 된
부인에 대해서는 침묵 한다. 영웅의 자리는 남성의 몫 이었다.소설은 사실에 주목한다.
남편과 달리 부인에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순교(殉敎)는 일종의 사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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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심이 덜해서가 아니라 두살 된 아이 때문이었다. 배교(背敎), 종교를 배반해서라도
목숨을 보전해 젖먹이를 거둬야 했다. 그녀는 예수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다.
“성모 께서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예수를 기쁨으로 낳았으며 그 아들의 마지막 길
까지 묵묵히 곁을 지켜주지 않았던가.” 난주가 택한 길은...‘살아 있는 순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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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제주도로 끌려갈 때 배가 추자도에 정박하자 모래밭에 있는 소나무에 아이를
묶어놓게 했다.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양민의 삶을
살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그렇지 않으면 노비가 될 터였다. 노비는 대물림 이었다."
1618년 이지 남매 분재기(分財記) 에 보면 노비 299구를 8남매가 분할 상속하며 1570년
퇴계 이황 선생이 죽었을 때도 노비 367구 를 5남매가 나누니 조선은 노예제 사회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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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제도는 1894년 동학농민봉기후 아베 신조 총리 외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 가 서울에
진주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김홍집 친일내각 을 세우니 이노우에 공사 가
지도해 갑오개혁 을 하는데... 노비제도를 폐지 하고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를 폐하며
500년간 이어진 과부 재혼 금지 제도를 철폐 하니, 조선 스스로 개혁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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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제주도에서 37년을 관비로 살았지만, 신앙의 가르침대로 낮은 자들에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추자도에 버린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녀가 노년에 아들을 만나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게라도 그녀의 상처와
응어리를 풀어주려는 배려 에서 나온 상상이다. 이럴 때 소설은 애도의 한 형식 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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