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北京으로 가는 길에는
파율은 광기가 흐르는 눈으로 감운지를 내려다보았다.
비운의 소녀 감운지는 혼절한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몸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인간과 성성이의 사이에서 태어난 파율에 의해 순결이 파괴됨은 물론 전신에 온통 멍이 들어 있었다.
파율은 아직도 욕정을 다 채우지 못한 듯 두 눈에 음탕한 빛을 띄운 채 이번에는 몸을 돌려 희수빈에게 향했다.
[하아.....]
희수빈의 젖가슴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열기가 가득 번져 올라 선홍빛을 보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손으로 젖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희대의 요부(妖婦)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는 입술을 반쯤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오고 있는 파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율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크크..... 네 년은 확실히 특이해.]
그의 손이 희수빈의 가슴을 떡 주무르듯 함부로 움켜쥐었다.
[크크! 노부가 보기에 네 년은 누구에겐가 길들여졌다. 그것도 아주 변태적으로 말이야.]
파율의 시선이 희수빈의 나신을 핥듯이 더듬어 내렸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눈은 점차 더욱 광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문득 파율은 희수빈의 다리를 잡고 크게 벌렸다.
[으으음.....]
희수빈의 입에서는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파율의 눈은 그녀의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에 못박히고 있었다.
그곳에도 역시 젖가슴과 마찬가지로 두 마리의 붉은 독거미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파율은 손가락으로 그 문신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흐흐..... 이 문신도 그 놈이 새긴 것이겠지.]
희수빈의 얼굴에 얼핏 고통이 떠올랐다.
그녀의 이성(理性)은 결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파율의 말은 그녀의 내부에 존재하던 고통과 수치심을 불러 일으켰다.
[안..... 돼.....]
그녀는 다리를 한껏 오므리려 했다. 그러나 파율이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는 더욱 세게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그의 시선은 방초가 우거진 그녀의 비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흐으윽.....]
희수빈은 다시 전신을 경련했다. 이성보다 강한 본능의 쾌감이 전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흐흐흐..... 좋아, 아주 좋아.]
마침내 파율은 희수빈의 몸 위로 올라갔다.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희수빈의 미끈한 팔이 반사적으로 그의 굵은 목을 휘감았다. 그때였다.
[파율!]
와장창.....!
문득 문이 부서져 나가며 무서운 기세로 한 인영이 쇄도해 왔다. 동시에 인영은 파율의 등을 향해 무시무시한 장력을 뻗었다.
펑!
[우욱!]
둔탁한 폭음과 함께 비명이 터졌다. 파율은 벌렁 뒤집어 지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의 입에서 울컥 피가 뿜어져 나왔다. 도검(刀劍)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그였으나 졸지에 떨어진 이번 일장은 가공할 위력이 있었던 것이다.
파율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신형을 비틀거렸다. 나타난 인영에게 시선을 돌린 그는 경악해마지 않았다. 상대방이 뜻밖에도 약관에 불과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용소군이었다.
[크으..... 네 놈은 누구냐?]
파율의 말에 용소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분노가 이미 극에 달한 터인지라 그의 말은 귀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이 더러운 놈! 너같은 짐승은 세상을 위해 사라져 주어야 한다.]
용소군은 준엄하게 외치고는 다시 쌍장을 날렸다. 파율은 방금 전에 혼줄이 난 터라 기겁을 하여 급급히 양손을 들어 막았다.
꽝.....!
석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과 함께 파율은 양손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부르짖었다.
(대체 이 놈은 누구란 말인가? 젊은 놈의 무공이 이렇게 강하다니!)
그는 비록 외견상으로는 우둔하게 생겼지만 계산은 빨랐다.
(도망가자! 그것이 상책이다.)
파율은 즉시 신형을 뽑아 올렸다.
휙! 하고 그는 꽁무니가 빠져라 밖을 항해 달아났다.
[서라!]
용소군은 노성을 발하며 그를 뒤쫓아갔다. 그러나 막상 밖으로 나간 그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엇다. 파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용소군은 무작정 앞으로 신형을 날리려다 말고 우뚝 멈추었다.
희수빈이 생각난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는 방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희수빈을 본 순간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지난번보다 더 심하군.....)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뜨인 것은 역시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사지를 비틀고 있는 희수빈의 모습이었다.
[희소저.]
용소군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엇!]
용소군은 일순 당황성을 터뜨렸다. 갑자기 희수빈이 암사자인 양 그를 덮친 것이다. 용소군은 미처 방비하지 않았던 터라 그만 희수빈에게 잡히고 말았다.
희수빈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뿐만 아니라 온몸을 뱀처럼 칭칭 휘감아 버렸다. 그녀는 열에 들뜬 얼굴을 그의 얼굴에 마구 비비며 뜨거움 입김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하아아..... 날 어떻게 좀.....]
희수빈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닌 듯 했다. 그녀는 불덩어리같이 달아오른 입술을 용소군의 얼굴에 마구 비벼댔다.
[희소저! 정신 차리시오.]
용소군은 크게 외쳤다. 당황도 잠시일 뿐, 처음 당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제발.....]
용소군은 힘껏 그녀의 따귀를 쳤다.
[악!]
희수빈은 곧바로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그녀의 입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제서야 그녀는 조용해졌다. 희수빈은 바닥에 쓰러진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용소군은 그녀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비로소 약력이 전신에 돈 것이었다. 희수빈은 절망적인 표정을 짓더니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었다. 그것은 소녀 감운지가 벗어놓은 옷이었다. 그녀의 옷은 이미 걸레처럼 조각나 입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용소군은 탄식을 발하고 있었다. 침상 위에 늘어져 있는 감운지 때문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어 있었다.
불행한 소녀 감운지는 채 피어나지도 못한 나이에 처참하게 능욕을 당한 채 자결한 것이다.
용소군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다시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새 희수빈의 모습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로 갔을까?)
용소군은 감운지의 몸을 천으로 덮어준 뒤 얼른 그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밖에서도 희수빈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전으로 통하는 입구에는 두 마리의 설인이 목에 가느다란 유엽도(柳葉刀)가 꽂힌 채 죽어 있었다.
설인들은 조금도 반항한 흔적이 없었다. 그들은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암벽에 기댄 채 죽어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상대방의 존재를 느끼지도 못한 채 유엽도를 맞고 즉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용소군은 설인의 목에서 유엽도를 뽑아 냈다. 그것은 마치 매미껍질처럼 얇아 바람만 불어도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는 의혹을 느끼며 내심 중얼거렸다.
(대체 누굴까?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라면.....)
용소군은 침중해지는 심경을 애써 억누르며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희수빈을 구한 후 다시 자신이 들어갔던 자리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런데 마의 대법을 펼치던 설인들이 누군가에 의해 죽어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대전 안에 벌어져 있는 광경이었다. 그곳은 얼마 전 탈정환골대법이 벌어졌던 곳이다.
[.....!]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의당 바닥에 누워있어야 할 열 명의 나체소녀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종적을 감추어버린 것이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온몸이 쭈글쭈글해진 채 죽어있는 청년들의 밀랍같은 시신들뿐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용소군의 안색을 핼쓱해지게 만드는 사태는 또 있었다.
파율. 그가 대전의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흉흉한 안광을 발하며 전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연한 것은 이미 그가 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실상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의 유엽도에 의해 벽에 박혀 있었다.
유엽도는 파율의 팔과 다리를 관통한 채 기둥에 박혀 있었다. 치명적인 사인(死因)은 한 자루의 유엽도가 그의 목을 꿰뚫은 것이었다.
용소군은 그 광경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다!)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파율의 무공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어찌 이자를 이렇게 간단히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악마의 대법을 시행하던 소녀들은 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용소군은 문득 대전 안에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난초의 향기였다. 은은한 난초향이 대전 안에 엷게 깔려 있었다.
용소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난초향은..... 범인에게서 남겨진 것일까? 그렇다면 범인이 남자가 아닌 여자란 말인가? 남자가 난초향을 사용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대전을 둘러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쨌든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이곳의 모든 것을 탈취해 갔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용소군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해 강한 의혹을 느꼈다. 그러나 더 이상 추론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난초 향기 외에는 아무런 단서도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곳에서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셈이군.)
그는 찜찜한 느낌을 버리지 못한 채 동굴을 벗어났다. 그곳을 빠져나오려면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중동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연못 밖으로 나왔다.
밖은 다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용소군은 시선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잔뜩 뿌옇기만한 하늘에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바로 희수빈이었다.
(아무튼 기이한 여인이었다.)
용소군은 여러 가지 상념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이내 고개를 흔들어 버렸다. 이어 그의 신형이 허공을 솟구치고 있었다.
지난밤에는 연못에 꽃잎 떨어지는 것을 꿈꾸었는데.....
봄도 거의 지나갔으나 집에 못 가는 신세,
강물은 봄을 흘려 보내어 이 봄도 가려 하네.....
강물에 저문 달도 서쪽 하늘로 사라져 가고
고요히 깊은 바다 안개 속에 숨어 버리네.
북쪽 갈석에서 남쪽 소상까지 떠도는 나그네 길,
그 중 이 달빛을 따라 사람들 집에 가겠으나.....
나는 나무 사이로 지는 달을 보며 고향을 그리네.....
낭랑한 음성이 한 그루 소나무 쪽에서 흘러나왔다.
이곳은 북경(北京)에서 백여 리 떨어져 있는 한가한 강촌(江村)이었다.
이른 봄.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스치는 바람은 차갑기만 했다. 그러나 글(文)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가의 정자(亭子)에 모여 담론을 벌이고 있었다. 달빛을 벗삼아 시문답(詩問答)을 주고 받으며 한껏 정취에 잠겨 있었다.
용소군은 강변을 거닐며 시 한수를 읊었다. 실로 오랜만에 한껏 시흥에 젖은 것이었다.
[하하하.....]
저만치 떨어진 정자로부터 문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여섯 명의 서생들이 달빛 아래 담론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이었다.
용소군은 강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북경이 멀지 않은 이 마을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며칠째 그는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걸어가던 그는 불현듯 한 인물과 마주치게 되었다.
백삼노인이었다. 그는 강변에 우뚝 선 채 달빛 아래 유유히 흘러내리는 강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
용소군은 백삼노인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노인에게서는 절대무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백삼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반사되고 있었다. 간간이 부는 바람이 옷자락을 가볍게 나부끼게 할 뿐,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용소군은 걸음을 멈추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단아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귀밑 머리카락이 유난히 길었으며 수염도 근사하게 자라 있었다. 그래서인지 노인에게서는 은은한 기품과 위엄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오순에서 육순 사이로 보였다. 손에는 옥선(玉扇)을 가볍게 쥐고 있었는데, 이 또한 노인의 분위기와 묘한 조화를 이루어 왠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지세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필시 범상치 않은 노인이다.)
용소군은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노인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순간 한 가닥 전광같은 시선이 용소군의 폐부를 찌르는 듯 했다. 착각이었을까? 용소군은 마치 한 마리의 용이 그를 향해 노려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용소군은 내심 알 수 없는 충격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정중히 노인에게 포권했다.
[한적함을 즐기시는 듯 한데 감히 결례를 하였습니다.]
노인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어보였다.
[상관 없네. 너무 조용해서 고적감이 일던 참이었으니까.]
용소군은 솔직하게 심경을 털어놓았다.
[어르신의 뛰어난 풍모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결례했습니다. 감히 대화를 청할까 하여.....]
노인은 힐끗 정자 쪽을 바라보았다.
[허허..... 정자 위의 젊은 선비들의 말소리에 노부도 무척 가보고 싶었네. 하지만 노부가 끼게 되면 흥이 깨질까 싶어 포기했었지. 그런데 자네가 찾아주니 노부로선 더없이 고마운 일일세.]
용소군은 노인의 현기어린 말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공손히 포권했다.
[소생의 이름은 용소군이라 합니다.]
[용소군?]
노인의 얼굴에서 이채가 일어났다. 그는 입 속으로 몇 번인가 용소군이라는 이름을 되뇌였다. 이어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담담히 대꾸했다.
[미안하네만 노부는 이름을 잊은 지 오래이네. 단지 해경(海鏡)이란 호(號)를 사용할 따름이네.]
(해경.....)
용소군 역시 그 호를 입 속으로 되뇌였다. 짚여지는 것은 없었으나 몹시 특이한 호인 것 같았다.
수인사가 끝나자 해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보기에 용공자는 학문에 조예가 깊은 선비같군.]
용소군은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드리웠다.
[그저 천박한 학문을 약간 익혔을 뿐입니다. 글이나 조금 읽었을 정도입니다.]
그 말에 해경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겸양하지 말게. 노부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용공자의 실력은 필시 대단할 것이네.]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생은 단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해경은 문득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올봄의 대과(大科)에 응시할 생각인가?]
용소군은 잠시 침묵했으나 곧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만 요즘 들어서는 그 생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니, 왜?]
용소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그래야 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서 입니다.]
[허어!]
해경의 얼굴에 의혹과 경탄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한가로이 강변을 거닐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은 서로간에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용소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해경노인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함 때문이었다. 해경의 학문과 담론은 그가 이제껏 만났던 인물 중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용소군은 그때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賢者)를 꼽으라면 단연 우문사를 떠올렸었다. 그런데 그의 그런 관념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해경노인이야말로 천하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기인(奇人)이었다.
용소군은 그를 대하면서 줄곧 자신의 지식이 짧다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정말 부끄럽구나. 한적한 곳에서 우연히 만난 일개 노인보다도 학문과 경륜이 미천하거늘..... 이같은 실력으로 감히 세상을 오시했었다니.....)
그것은 용소군에게 있어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강호에 나온 이래 그는 이렇듯 지독한 열패감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해경노인은 사실 그보다 더욱 크게 놀라고 있었다.
(기재(奇才)다! 내 일찍이 이같은 젊은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주위의 많은 학자들이 있으나 이 젊은이만한 자는 본 적이 없구나.)
해경노인은 경이에 가까운 심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용소군에게 점점 관심이 기우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며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용공자, 초면에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용소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문득 그는 기침을 했다.
[쿨룩쿨룩.....]
심상치 않은 기침이었다. 해경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며 용소군은 얼른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말씀하십시오. 제 힘이 닿는 일이라면 들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사의를 표하고 나서 해경노인의 시선은 곧장 하늘로 향했다. 그의 눈에는 얼핏 회한이 서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언제고 시간이 나면 산서성(山西省)의 여량산(呂梁山)을 들러 주게. 그곳에 있는 벽운소축(碧雲小築)에 가서 주인에게 한 마디만 전해주면 좋겠군.]
[.....]
[허허! 내 딸을 더 이상 구속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말이네. 그 말만 전하면 되네.]
말을 마치고 나서 해경노인은 다시 심한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용소군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그를 부축했다.
[어른, 몹시 편찮으신 듯 한데.....]
해경노인은 자조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평생을 부귀(富貴) 속에 파묻힌 채 피가 썩는 줄을 몰라 이렇게 된 것이네.]
[옛?]
[모두가 자업자득이지. 노부는 평생을 야망을 안은 채 살아왔지만 지금에 와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만 하네.]
노인의 얼굴에 감도는 쓸쓸한 빛을 대하자 용소군은 의혹이 크게 일어났다.
(정말 기이한 노인이다. 이 노인은 결코 나약한 분이 아니다. 군왕(君王)의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패도적(覇道的)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지금은 회한에 차 있는 것 같구나.)
이때 해경노인이 그의 상념을 깨뜨리며 물었다.
[어떤가? 노부의 부탁을 들어 주겠는가?]
용소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때, 강 저편으로부터 한 척의 배가 다가오는 것이 용소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 배가 해경노인과 연관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척 화려해 보이는 배를 바라보며 노인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변화를 보였다. 그것은 깊은 수심이었다.
해경노인은 손을 뻗어 용소군의 어깨를 잡았다.
[용공자.]
용소군은 대답 대신 노인을 바라보았다. 해경노인은 담담하나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늙은이를 위해서라도 이번 대과에 꼭 응시해 줄 수 없겠나?]
용소군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서는 노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게 왜 이런 말을?)
배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따라 해경노인의 음성은 더욱 허탈해지고 있었다.
[노부는 그만 가보아야 할 것 같네.]
이어 그는 다시 말했다.
[아까 얘기한 벽운소축의 일은 부디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용소군은 염려말라는 듯이 빙긋 웃었다. 그러자 노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벽운소축의 주인에게 한 마디만 더 전해 주게나.]
용소군은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해경노인의 음울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노부 해경이 십팔 년(十八年) 전의 그 비극(悲劇)을 후회하고 있다고..... 반드시 그 말을 전해 주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용소군의 진중한 태도에 노인은 흡족한 듯 수중의 옥섭선(玉攝扇)을 내밀었다.
[내 이것을 자네와 내가 재회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자네에게 주겠네. 물론 그보다 먼저 우리가 만난 기념이기도 하지.]
용소군은 은은한 가슴의 진동을 느끼며 당황해마지 않았다.
[해경어른.....]
[받게.]
용소군은 두 말 하지 않고 노인이 내미는 섭선을 받았다. 거절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것은 왜였을까?
해경노인은 그에게 섭선을 준 다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의 뒷모습은 몹시도 처량해 보였다.
그러나 이는 그저 범인(凡人)이 느낄 수 있는 한계일 뿐, 그 전에 이미 용소군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배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노인의 눈에서 한 가닥 무서울 정도로 위엄이 가득한 안광이 번쩍이는 것을.....
용소군은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고 말았다.
(오오! 저 눈은 제왕(帝王)의 그것이다.)
그의 시선이 망연히 해경노인을 따라갔다. 노인은 연신 기침을 하며 배가 있는 곳을 향해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배 안으로부터 일단의 비단 금포(金布)를 걸친 무사들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노인의 앞에 이르더니 일제히 바닥에 오체복지(五體伏地) 하는 것이었다.
해경노인은 말없이 배에 올랐다. 그리고 배는 떠났다. 강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배를 바라보는 용소군의 가슴 속에서는 격랑이 일고 있었다.
(과연.....!)
그는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 해경노인에게서 받은 섭선을 펼쳐 보았다. 다음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그의 몸이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섭선의 한가운데에는 용(龍)의 그림이 생생히 그려져 있었다. 더구나 그 중심에는 놀랍게도 금색(金色)의 글씨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영락(永樂)>
용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영락!]
그의 얼굴이 극도의 혼란으로 인해 마구 일렁였다.
(그렇다면 그 노인이 바로 대명(大明)의 황제(皇帝) 영락대제(永樂大帝)였단 말인가?)
지금으로부터 이십이 년 전(二十二年前).
혜제(惠帝)를 치고 황제의 위에 스스로 올랐던 대명제국의 풍운아(風雲兒), 그 이후 대명을 반석에 올려놓아 자신의 기반을 철통같이 구축한 강철같은 성격의 소유자!
세인들에게 철(鐵)의 제왕이라는 칭호로 불리우는 영락대제가 바로 해경노인이었단 말인가?
휘이이..... 잉!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달이 기울고 있었다.
척산현(斥山縣).
이곳은 북경에 인접해서인지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특히 객점마다 만원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북경으로 입성하기 전 음식이나 술을 찾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다래객점(多來客店)은 척산현에서 가장 큰 객점이었다.
마침 점심 무렵이라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음에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용소군은 창가에 혼자 앉아 식사하고 있었다.
그의 바로 옆 자리에는 건장해 보이는 다섯 명의 장한들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들은 복장으로 미루어 표국의 표사들로 보였다. 그러나 용소군은 그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표사의 얘기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콧등에 점이 박힌 그 표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이번 일은 심상치 않단 말이야.]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무림십자맹(武林十字盟)의 맹주이신 남궁대협께서 다가오는 오월을 기해 십자맹의 십대수반(十大首班)을 소집했네.]
다른 표사가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십대수반을 모두 소집했단 말인가?]
[그렇다니까.]
그 말에 표사들은 한결같이 탄성을 발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건 근 십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점박이 표사는 은근히 자신이 소식통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오직 남궁대협만이 아실테니 말일세. 다만.....]
그가 뜸을 들이자 다른 표사가 재촉했다.
[다만 뭔가?]
[무림의 일각에서 떠도는 은밀한 소문에 의하면 십대수반의 한 분이신 무당(武當)의 공작진인(孔雀眞人)께서 모종의 이유가 있어 십대수반을 소집해 달라고 남궁맹주께 요청했다네.]
[허어! 그런 내막이 있었군.]
듣고 있던 용소군은 내심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도 무림십자맹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무림십자맹은 정도무림(正道武林)을 움직이는 열 개의 문파가 모여 결성된 무림 최대의 단체였다.
즉, 오파일방(五派一幇)인 소림(少林), 무당(武當), 아미(峨嵋), 화산(華山), 궁가방(窮家幇)을 비롯하여 정도의 사천상(四天象)이라 불리우는 사개문파가 연합한 것이었다.
그들을 따로 열거하자면 각기 숭양철가(嵩陽鐵家), 사천독문(四川毒門), 관씨검각(關氏劍閣), 청도음가장(靑島陰家莊) 등으로 이들을 포함한 십자맹은 곧 당금무림의 기둥이랄 수 있었다.
십자맹의 맹주인 남궁력(南宮歷)은 청도음가장의 노장주인 태백성수(太白聖手) 음시형(飮時形)의 사위로서 불세출의 기재였다.
그러나 그 외의 그에 대한 모든 것은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이십 년 전 오파일방과 정도사천상의 전폭적인 지지로 무림십자맹을 창설함으로써 갑작스럽게 대두된 인물이었다.
그동안 그가 무림을 위해 한 일은 가히 신화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면 무림최강의 사도단체인 제인성(帝刃城)의 힘을 억제한데 있었다. 그는 완벽한 책략과 능력으로 제인성의 활동을 거의 마비시켜 놓기까지 했다.
이에 제인성주 축무종은 크게 분노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무림십자맹이 내세우는 규약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비로소 정사(正邪)는 협약에 의해 공존하게 되었다.
그 이전 까지만 해도 십만의 조직을 자랑하며 천하무림을 오시하던 제인성이 그 이후로 지난 이십 년간이나 강북 쪽으로는 감히 힘을 뻗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남궁력은 당금무림의 태양과도 같은 존재였다.
용소군은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무림십자맹의 십대수반들이라면 정도를 대표하는 십대세력의 영수들을 말한다. 그런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일 정도라면 무엇인지는 몰라도 필시 대단한 사건임에 분명할 것이다.)
예의 표사의 음성이 또 들려왔다.
[이번 일에는 제인성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네. 오죽하면 전 마도에 비상령을 하달했다는 소문이 있네.]
문득 표사의 음성은 낮아지고 있었다. 자랑삼아 떠들다가 갑자기 경계심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잘 떠벌이더니 새삼스럽기는.....)
용소군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객점의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인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용소군은 흠칫했다. 그들의 모습이 워낙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마 한가운데에 동전 크기만한 금빛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용소군은 그것을 보자 짚이는 것이 있었다.
(금륜교(金輪敎)의 신도(信徒)들이군.)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그런 표식을 하고 있는 자들을 몇 번인가 마주친 적도 있었다.
금륜교는 근래 들어 생겨난 일종의 신흥종교로 비록 아직까지 그다지 널리 전파되어지지는 않았지만 태양과 불의 신인 축융신(祝融神)을 숭배한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금륜교주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최근 들어 갑자기 신도들이 급증하고 있어 곳곳에서 금빛 종이를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인물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용소군은 금륜교도들을 관찰해 보았다.
그들은 자리를 정하더니 음식을 주문했고 음식이 나오자 조용히 식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동에는 절제가 있었으며, 표정 또한 지극히 부드러워 보였다.
(온건한 교인가 보군.)
용소군은 그렇게 생각하며 식사를 마쳤다. 그는 더 이상 객점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가 막 계산을 치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는 안으로 들어오려는 어떤 인물과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용소군은 급히 고개를 숙여 먼저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대꾸조차 없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청년이었는데 몹시 특이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각이 진 얼굴에 피부는 갈색을 띄고 있어 강인해 보였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그의 두 눈으로, 짙은 눈썹 아래 자리한 그의 눈에는 은은한 자광(紫光)이 어려 있었다. 청년은 대체로 준수하면서도 패도적인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청년은 용소군을 힐끗 바라보고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용소군은 청년의 무례한 행동이 기분에 거슬렀으나 굳이 시비할 마음이 일지 않아 역시 그냥 지나쳐 버렸다.
용소군은 객점을 나선 후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척 심란한 심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칭 해경이라 말했던 노인 때문이었다.
(그 노인은 영락제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내게 대과(大科)에 응시하라고 했다. 황제인 그가.....)
용소군은 왠지 씁쓸한 기분이었다.
사실 그는 신분으로 치자면 당금의 황제인 영락대제에 비해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비록 몰락한 왕조였으나 송조의 황족이었으므로 영락제와 대등한 입장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가 강호에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우문사의 염원대로라면 몰락한 송조(宋朝)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송조를 재건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대리국(代理國)을 부활시키는 것. 그것이 그에게 부여된 명제였다.
그러나 용소군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강호에 나온 이래 줄곧 이 두 가지 의무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
송조는 이미 잊혀진 제국이었다. 송조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당금의 명조를 무너뜨려야 했다.
다시 말해 평화로운 대륙에 무서운 전운(戰雲)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용소군은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해 흔들리고 있었다. 더구나 영락대제를 만난 이후 더욱 그 회의가 짙어지고 있었다.
용소군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차라리 황제의 자리에 대해 야심을 느낄 수만 있어도 이렇게 흔들리지는 않을텐데.....)
영락대제와의 짧은 만남은 그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지상최고의 권능을 지닌 영락대제가 그에게 보여준 모습은 야망과 권위에 찬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해경이라 말했던 영락대제는 늙고 초라한 한 명의 노인에 불과했다. 그에게서는 영고성쇠(榮枯盛衰)에 대한 허무감이 진하게 느껴졌었다.
용소군은 그를 통해 야망의 끝을 보았다.
(결국 모든 것을 얻는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는 황제였으나 그것은 허울좋은 껍데기일 뿐, 그가 보여준 자아(自我)는 단지 외롭고 허망한 한 노인에 다름 아니었다.)
용소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품속에서 섭선을 꺼내 보았다. 그것은 해경이 기념으로 그에게 선사한 물건이었다.
(천하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지위도 그에게는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했단 말인가?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고독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용소군의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더구나 처음 본 내게 그런 부탁까지 하다니..... 그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인 것 같았는데 수천만의 부하를 거느린 그가 결국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조자도 없단 뜻이란 말인가?)
용소군은 머리가 복잡해 졌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결론을 내렸다.
(일단 북경으로 가 보자.)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았다. 그 산을 넘으면 북경이었다.
[.....!]
용소군은 멈칫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한 마리의 기이한 짐승과 딱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것은 난생 처음 보는 짐승으로 언뜻 보면 표범과 흡사했다. 그러나 털이 온통 눈처럼 희었으며, 눈동자는 마치 두 개의 불꽃을 보는 것처럼 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크르르릉.....!
괴수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용소군을 보자 낮게 울부짖었다. 마침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지나치려면 괴수를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용소군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짐승을 쫓기 위해 손을 내저었다.
캬아오!
갑자기 짐승이 이빨을 드러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엇!)
용소군은 깜짝 놀랐다. 동시에 한 가닥 분노를 느껴 몸을 피함과 동시에 일장을 날렸다. 그런데 괴수는 교묘하게 몸을 허공에서 회전하더니 그의 장력을 가볍게 피해내고는 더욱 포악하게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용소군은 다급히 신형을 날려 피했다. 괴수의 발톱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단한 짐승이군!)
용소군은 놀란 시선으로 괴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괴수는 몸을 웅크렸다가 재차 그를 향해 공격해 왔다. 발톱을 뻗으며 날아오는 동작은 쾌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용소군은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손바닥을 갈라쳤다.
쩌적!
그의 장심에서 푸른 번갯불이 쏘아져 나갔다. 급기야 천뢰신공을 펼친 것이었다. 천뢰신공은 정확히 괴수의 정수리에 적중되었다.
캬아아옥!
괴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바닥에 나뒹굴었던 괴수는 한동안 못 일어났으나 잠시 후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나 단단히 겁을 먹은 듯 용소군의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용소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뢰신공에 적중 당하고도 털 하나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야차성의 설인조차도 천뢰신공만은 감당해내지 못했거늘, 이 괴수는 정말 보통 짐승이 아니구나.)
이때, 갑자기 날카로운 음성이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어떤 놈이 내 귀여운 백아를 못 살게 구는 것이냐?]
그와 동시에 등뒤에서 강한 경풍이 밀어닥치는 것을 느끼며 용소군은 빙글 몸을 돌렸다.
쐐액!
무엇인가 예리한 물체가 그의 허리를 살짝 비껴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나타난 인영을 본 순간의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 명의 소녀, 그것도 나이라야 십오륙 세 정도 되어 보였다.
팔다리가 드러나는 짧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피부는 연한 갈색으로 몹시 건강한 느낌을 주었다. 짙은 눈썹에 얼굴의 반을 차지한 듯한 커다란 눈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마치 설익은 풋과일같은 분위기랄까? 그야말로 야성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였다.
소녀는 사납게 눈을 부릅뜬 채 왼손에 날이 시퍼렇게 선 반월도(半月刀)를 쥐고 용소군을 노려 보고 있었다.
용소군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짓이오? 갑자기 공격하다니?]
쐐애액!
그러나 소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반월도를 악랄하게 휘두르며 용소군을 향해 단숨에 십여 초를 공격했다. 그것도 하나같이 치명적인 살수였다.
용소군은 그만 가슴이 섬뜩했다.
(무슨 꼬마의 손속이 이다지도 악독한가?)
그는 몇 차례 반월도의 공격을 피했으나 아차하면 당할 뻔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자 은근히 분노가 치밀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귀문팔로행으로 그녀의 공격을 모두 피해낸 다음 대수미력으로 그녀의 칼을 내려쳤다.
쨍!
하는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소녀의 손에서 칼이 날아갔다.
[악!]
소녀는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손목이 떨어져 나갈듯한 충격에 칼을 놓친 것은 물론 충격으로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소녀는 발딱 일어나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허벅지까지 드러난 짧은 차림 덕분에 무릎이 까져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용소군을 노려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도 욕설인 것 같았다.
용소군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재빨리 땅에 떨어진 칼을 줍더니 다시 그를 공격했다. 그녀의 공격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역시 잔랄하기만 했다.
용소군은 그녀의 막무가내인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독수를 쓸 수도 없어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자 소녀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허탕을 치자 그만 약이 오를대로 올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리 발악을 하고 덤벼 봐야 용소군의 옷깃 하나 자를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소녀는 수중의 칼을 내동댕이치고는 씩씩대며 용소군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그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으와악!]
(맙소사!)
봉변이 따로 없었다. 용소군은 너무나 기가 막혀 일시지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소녀의 울음은 더욱 더 커지고 있었다. 아니, 나중에는 아예 땅바닥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용소군은 난처해지고 말았다. 동시에 마치 자신이 몹쓸 짓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는 소녀의 눈치를 살피며 염두를 굴렸다.
(정말 골치 아픈 소녀다. 이럴 땐 그저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그는 마음이 정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한 마장쯤 달린 뒤 귀를 기울여 보니 그때까지도 소녀의 통곡(?)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용소군은 그만 고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살다 보니 별 고약한 일도 다 당하는군.....)
첫댓글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잼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