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풍경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밀레(Jean François Millet)가 그린 ‘이삭줍기’나 ‘만종’과 같은 그림의 배경이 되는 풍경이다. 또 모네(Claude Monet)의 노적가리 그림이 떠오르기도 한다.
오롯한 내 기억속 시골 풍경은 어떤 것일까? 나의 조상의 조상들이 살아서 나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기라도한 듯이 그 풍경을 바라보면, 또 그 풍경을 떠올리면 내 마음이 평안해지고 나 자신을 정화시켜주는 그런 풍경 말이다.
나의 경우에는 어린 시절의 내가 살던 농촌 마을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내가 나서 자라고 뒹굴며 뛰놀던 고향 시골의 정겹고 그리운 풍경이다. 은빛 강 모래가 긴 모래톱을 만드는 강 가를 따라 펼쳐진 들판이 시작되는 곳에 너른 운동장을 가진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하나의 촌락을 이루고 있던 조용한 마을. 강과는 반대편의 북편으로 솟아있던 일곱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 쪽으로 경사진 밭 자락의 먼 언덕 위에 이따금씩 자리하고 있던 토담의 초가집들.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위쪽 언덕의 중간쯤에는 큰 느티나무 몇 그루와 흰색의 작은 교회당 하나가 서있는 풍경. 이것이 내가 떠올리는 어린시절 시골의 풍경이다.
달리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 기억 속에 나의 고향만 같은 또 다른 몇몇의 인상적인 시골 풍경이 있다. 나의 조상들이 그곳에서도 살았을까?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한 시간여 쯤의 거리에 있는 수카부미(Sukabumi)라는 농촌 지역을 방문했을 때, 어느 작은 마을에서의 풍경 모습이다. 그때는 1992년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머물게 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이국적이고도 새롭게만 느껴질 때였다. 나의 고향 마을처럼 주로 쌀농사를 하고 있던 그곳은 훨씬 더 넓은 들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때 나의 일행은 그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일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를 찾아가기 위해서 좁다란 마을길을 걷고 있었다.
그 때마침 주로 오후가 되면 한차례씩 내리고는 하는 열대성 소나기 스콜(Squall)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어느 농가의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한 뒤 먼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에는 비안개가 피어오르고 가까이로는 제법 굵은 빗방울이 줄지어 내리는데 곡괭이 하나를 어깨에 멘 농부 한 사람이 꽤 먼 거리에 있는 논둑길을 걸어 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점차 빗속 사람의 거동이 분명해지자 특이하게 눈에 들어왔던 것은 머리 위에 걸치고 있는 큼지막한 야자수 잎 새 하나. 조금도 서두름이 없이 여유 있게 비를 맞으며 논둑길을 걷고 있던 농부의 모습과 비 내리는 너른 들판의 모습이 한 폭의 이국적인 풍경화로 이제껏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내가 베트남의 중북부지방에 있는 하띤(Hatinh)성의 홍케(Hongkhe)라는 작은 도시를 방문하기 위해서 길을 가면서 아주 인상적으로 접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1997년 여름이었다. 하띤성의 성도인 하띤을 출발해서 라오스가 가까워질 만큼의 내륙 쪽으로 꽤 오랫동안 자동차를 달렸을 어느 곳에선가 나는 내가 어디에서 본 모습보다도 더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의 풍경을 접할 수 있었다.
곧게 뻗은 길 양편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에는 무성한 벼가 푸른 모습으로 한창 자라고 있었다. 들판의 끝 쪽 저편에는 풀 짚으로 지붕을 엮은 초가집들이 한층 한가로워 보이는 야자나무숲 언저리에 그 모습을 절반쯤씩 드러내고 있었다. 논 한편 멀찍하니 에는 두세 사람의 농부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반대편의 농로에는 밀짚모자 '논(Non)'을 쓴 한 소녀가 소의 등을 타고 느린 소걸음에 이끌려 길을 가고 있었다. 마치 소의 등위에 올라서서 춤을 추더라도 무겁지 않게 느껴질 만큼 가녀린 모습의 소녀는 길가에서 우리들과 마주치자 수줍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으로 우리가 지나치기만을 기다렸다.
이런 동양적인 농촌에서의 풍경이 먼저 기억나는 것은 아무래도 나의 태생이 동양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서양의 시골 풍경이라고 해서 인상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다. 내 기억에 자리하고 있는 서양에서의 농촌 풍경은 너무나 생소한 것들이었기에 어쩌면 더욱 깊게 인상에 남아있는 것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의 인상은 모두 1986년 스위스와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보았던 풍경이다. 스위스의 제네바를 떠나 베른을 거친 뒤, 인터라켄(Interlaken)이라는 시골 타운에서 기차를 내려 스위스 최고봉 중의 하나인 융 푸라우(Jung Frau) 봉우리를 향하면서 바라볼 수 있는 융프라우골짜기(Jungfraujoch)의 풍경만큼 기억에 남는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림과도 같은 곳곳의 풍경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산 중턱에서 산 정상 근처까지 오르는 궤도열차(Rack Rail Train)를 타는 위치쯤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그린델발트(Grindelwald)라는 이름의 마을 모습이었다. 마치 동화의 세계와도 같이 아름다웠다는 기억이 새롭다.
짙푸른 상록수가 자라고 있는 숲과 숲, 나무들의 무리 사이로는 한 여름을 맞아 풋풋하게 자라나고 있는 목초지의 연둣빛 풀색이 그토록 싱그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능선과 가파른 언덕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데다 주위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게 자리하고 있는 목조 주택들의 정경이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아스라히 내려다보이는 계곡 아랫녘의 모습은 참으로 맑고 깨끗하며 평화로워 보였다. 어느 구석 하나 버릴게 없는 완벽한 조화의 집합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3,000미터가 넘는 높이의 산록으로부터 내려다보이는 먼 아랫마을은 그저 아득한 계곡의 모습으로만 보였지만, 그 길을 되돌아오면서 다시 가까이에서 바라본 오후의 마을 모습은 한결 더 온화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겨주었다.
알프스의 서쪽 산록에 위치한 또 다른 관광지 샤모니(Shamonix)로 가는 길은 프랑스의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길이었다. 여행 목표는 샤모니에서 알프스의 또 다른 경치와 정취를 보고 느끼는 것이었지만, 나는 제네바에서 프랑스의 샤모니로 가는 두 시간 정도의 자동차 길에서 보다 더 인상적인 유럽 프랑스의 시골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넓고 평평해서 끝이 잘 바라다 보이지 않는 들녘도 있었지만 알프스의 산록이 먼발치로 흘러내린 왼편쪽의 모습은 역시 부드러운 선의 능선과 언덕, 전원풍의 농가주택과 가옥들이 단정하게 어울려 있는 모습들이었다. 때마침 수확기에 접어든 듯한 밀이나 호밀과 같은 농작물들이 밝은 다갈색 빛을 들판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이어지는 넓기도 하고 부드러운 능선의 들녘은 잘 가꾸어진 정원과도 같았고 아무 곳에라도 찾아들어 하루쯤의 밤을 보내고 싶을 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제네바 교외의 산촌 시골 모습 또한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우리의 구릉진 산촌 마을과 별다를 게 없는 듯한 지세였지만 그들의 마을 모습에서는 무엇인가 우리의 것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과 기분이 느껴졌다. 산이 생겨먹은 대로 구부러진 길이 그대로 나있고 경사가 진 밭 자락에는 빈 공간 없이 무엇인가가 심겨져 있었다. 우리와 크게 다른 점 하나가 있다면 그들의 굽은 길과 집의 주위에는 많은 갖가지의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또 다른 점이 있다면 완만한 경사가 진 밭떼기의 경우에도 장비를 몰고 다니며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잘 정리가 되어있었다. 역시 마을 전체가 잘 그려진 한 장의 풍경화처럼 소담스런 모습으로 이어져있었다.
나는 이들 서양 나라들의 시골 풍경을 접하기도 하고 이쪽 동양 나라들의 농촌 모습을 접하기도 하면서 양쪽의 모습에서 각기 갖게 되는 그 분명한 느낌의 차이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를 쉽게 찾아낼 수 없었다. 모두 아름답지만 보다 부드럽고 유려하게 느껴지는 유럽의 시골 풍경과 조금은 딱딱하고 직선적인 감을 주는 우리와 동양의 다른 나라들의 농촌 풍경. 물론 지세의 바탕이나 그 형세가 서로 많이 다른데 그 원인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가 분명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그들과 우리가 경작하는 농작물의 근본적인 생태와 재배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밀이나 보리와 같은 밭작물을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데 반해 우리는 쌀이라는 물 농사를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의 경우 물을 가두어서 벼를 키워야하는 만큼 경사가 진 곳이라 하더라도 이를 계단식으로라도 평평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논과 밭의 지세는 보다 확연히 구분되었고 논과 밭이 만나는 곳에서는 직선과 곡선의 만남, 부드러움의 일탈이 일어났다.
이에 비해 주로 밀을 재배하는 서양의 들녘은 구태여 곡선의 교란을 일으키면서까지 지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부드러운 언덕과 능선으로 이어지는 농토의 곡선의 유지와 그 연장이 가능했고 곳곳에 푸른 나무와 숲을 보기 좋게 가꿀 수 있었다.
나는 어찌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내 나름대로의 이런 해석을 놓고 우리의 풍경과 서양의 풍경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버릇을 갖게 됐다. 하지만 역시 보다 부드럽고 넉넉하게 느껴지는 것은 선이 살아있고 나무와 숲이 잘 어우러진 유럽의 시골 정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시골 풍경이 정겹기는 하지만 유럽의 시골 풍경은 보다 평화롭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보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의 시골 정경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논을 모두 밭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 그러나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서양 사람들의 섬세한 손길보다는 많이 거칠고 조악하게 대접을 받고 있다고 보여지는 우리의 산하도 좀더 애정 어린 우리 모두의 관심의 손길을 더 많이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3. 9. 1.)
첫댓글 세계는 넓고 시골풍경도 다양하군요. 나에게는 충북 제천 동현동과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산촌 갈현마을 외에는 그리 세밀한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지요. 국내외 여행을 더러 다녔지만 관심이 다르다 보니 지배적 인상은 다른 분야로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순우의 글을 읽으며, 현재 내가 사는 곳과 마을에 관심을 가지고 개선할 점이 없는가를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동서양의 시골 풍경에 대해 재미 있게 대 비해주셨네요. 스위스 독일의 농촌
풍경에서 획일적이긴 해도 자연과 조화속에 질서있는 개발에 호감을 가졌죠. 우리 농촌은 너무 무질서한 난개발에 보기 흉한 건물이 여기저기 난무하니 ㅡ '자유'의난개발이 아쉽네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골의 인심은 자연만큼이나 순박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자연이 베푸는 환경 영향 때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시대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옛날만큼 순박함도 옅어지고 있어 아쉽습니다. 몇 해 전 나의 동향 친구가 서울에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텃세가 대단한 것을 경험하였답니다. 투박했던 시골의 풍경이 사라지고 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