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옛날 천문학
-하늘의 현상을 살피고 땅의 사물을 관찰한다1)-
고대에서 ‘하늘天’은 극히 복잡한 개념의 하나이다. 글자의 형태로 보면, ‘天’은 ‘一’와 ‘大’, 두 개 글자로 구성되었다. 제1장에서 제기한 것처럼, ‘一’은 우주 시초의 혼돈과 부분의 상징이다. 그것은 하늘을 땅 위의 부분으로 명확히 구분하였고, 하늘과 대응하게 되었다.
‘하늘’을 보면, 옛날 사람은 세상에서 세 가지 물건만이 ‘大’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곧 하늘 ‧ 땅 ‧ 사람 ‘삼재’이다. 그러므로 ‘一’과 ‘大’의 조합이 ‘天’이란 복잡한 문화의 내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이런 문화의 내적 의미의 구체적 형태가 즉 고대의 ‘천문학’ 즉 수술의 한 가지이다.
인용 부호를 사용하는 까닭은 이런 ‘천문학’과 우리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천문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일치하지 않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천문학과 점성술
고대에 천문 관측이 시작된 시기는 매우 이르다. 각종 별자리의 숫자 ‧ 위치 ‧ 크기 ‧ 명암(밝기와 어둡기)과 그 변통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과 서로 관계된 해석을 천문학이라 부르기보다는 별점 혹은 별점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적어도 별점술을 고대 천문학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별점술은 당연히 별의 현상에 근거하여 인사길흉을 점치는 술수 활동이고 고대에서는 정치 활동과 밀접히 연관된다.
《한서》2)<예문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문이라는 것은 28 별자리3) 서열이 있고 5별과 해와 달의 운행이 있으며 이로서 길흉의 그림의 실마리가 있으니 성왕은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4)
살펴보면, 28 별자리의 위치와 출몰 순서가 확정되고 5별과 해와 달의 운행 궤도 ‧ 속도와 주기 등이 추산된다. 이것은 본래 오늘날 말하는 천문학의 내용에 속하지만, 고대에서는 ‘길흉의 그림을 나타내는 실마리’로 사용되던 데에서 별점 활동으로 방향이 바꾸었다. 더 나아가서 ‘길흉의 그림’은 통치자에 의하여 사회적 쇠약함을 부흥시키고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것으로 관찰되고, 정치를 행함에 있어서 방략의 득실을 가늠하도록 되었다. 여러 역사 서적에 보이는 명확한 기재는 비교적 집중적으로 고대인들의 ‘천문’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당연히 별점술 혹은 고대 천문학의 정치화는 하나의 과정이다. 여러 가지 현상으로 보면 원시시대의 성점은 비교적 간단하다. 선민들이 별자리에 이름을 부여할 때 대다수는 생산과 생활 중의 가장 익숙한 사물 혹은 신화전설에서 취한 것이다. 점치려는 내용도 대다수가 일부 일상의 구체적 사실에만 제한된 것이다.
《시경》5)<소아 대동>에 ‘남쪽 하늘에는 삼태기가 있으나 곡물을 모을 수 없고, 북쪽 하늘에는 술 푸는 자루가 있으나 술을 뜰 수 없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삼태기는 기수6)을 가리키고 네 별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삼태기와 같다는 뜻이다. 주두는 두수7)을 가리키고 그 모습이 마치 술 푸는 자루와 같다는 뜻이다. 이족8)은 기수를 ‘사파沙巴’라 부른다. 그 뜻은 ‘표범이 완전하게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수 앞의 성수에 각각 표범의 머리 ‧ 표범의 눈 ‧ 표범의 입구 ‧ 표법의 허리 ‧ 표범의 가슴 ‧ 표범의 꼬리라 부르니 기수가 표범의 온 신체를 이른다는 뜻이다. 이족의 필마畢摩9)의 설법에 의하면, 달이 표범과 관련된 별자리를 만나면 제사용품 비축에 불리하고, 또한 곰이 있는 별자리를 만나면 사람에 불리하고, 어미 무소의 날에 종자를 심으면 좋고, 큰 무소의 날에 목욕하고 강을 건너면 좋다고 한다. 이러한 성자리의 이름과 별점 내용은 선민들의 천진하고 순박한 마음의 상태를 역동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상 나라와 주 나라 시기에 와서 이미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전 선민들이 점을 치려했던 중요한 것은 생산과 생활 문제였지만, 이 시기에 와서 주요한 것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통치자의 길흉화복에 대한 관찰이었다. 상주 시기의 점에 나타난 말들과《주례》10)의 기록으로 보면, 상나라 왕과 ‧ 주나라 왕이 성점을 할 때는 이미 여민백성의 생산 ‧ 생활문제에 대해 흥미가 거의 없었다. 그들이 주요한 관심사는 자신들의 정치운명이었다. 하늘에 일식 ‧ 월식이 발생하거나 혹은 새로운 별이 나타나면, 상나라 왕은 그것이 자신에 대하여 화인지 복인지를 물었을 뿐이다. 주 나라 왕은 관리를 임명하고 별자리의 변화를 기록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하늘의 기밀’를 엿보고 추측하여 왕실과 제후 각국의 길흉을 미리 알아내려는 데 있었다. 물론 물의 재앙 ‧ 가문의 재앙과 풍작 ‧ 흉작도 점을 처야 했다. 그러나 착안점은 그래도 천하가 평온할 것인가 평온하지 못할 것인가, 자신의 통치에 위태로운 훼방을 놓는가 놓지 않는가에 있었다. 성점의 정치 내용과 정치 목적이 서로 연관된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될 수 있는 한, 별점 활동을 독점하려 하였다. 별점을 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국가에서 임명한 관원이었다.《사기》따위의 옛날 서적 기록에 의하면, 하 나라 왕조, 심지어 하 나라 왕조 이전에 이미 별점의 관원이 있었다. 이런 기록은 전설에 가까워 그 상세한 정황을 확실히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은 나라와 상 나라의 무함巫咸11)은 갑골문의 기록에 의거하면, 확실히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지위가 제일 높았던 별점을 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비록《무함성경巫咸星經》이 후인의 위작에 불과하지만, 그중 어떤 내용은 당시의 별점 기록에서 나왔을 수 있다. 주 나라 왕 신변의 ‘보장씨保章氏’는 전문적 직책인 별점의 관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광범하게 각종 항성 ‧ 유성 ‧ 혜성의 나타남과 사라짐 및 그 이상 변화를 기록하고 관찰하여 주 나라 왕실과 제후 나라의 흥망성쇠의 길흉을 미리 점치는 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밖에도 해무리도 별점 임무의 일부분이었다. 그들의 주요한 일은 해 주변의 불꽃를 관찰하여 주 나라 왕의 화복에 어떤 징조를 나타내는가 주목하는 것이었다.
춘추시기 주 나라 왕실과 각국 제후들은 모두 일부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 혹은 대부를 자신들의 별점을 치는 관원으로 임명했다. 예를 들면 왕실의 사일史佚 ‧ 장홍萇弘 ‧ 노魯[BC 1055~BC 246 주의 제후국] 나라의 상신梓愼, 송宋[연대 미상 주의 제후국] 나라의 자위子韋, 정鄭[BC?~BC376 주의 제후국] 나라의 비조裨灶, 진晋[BC ?~BC 376 주의 제후국] 나라의 복언卜偃, 초楚[미상 주의 제후국] 나라의 감공甘公, 조趙[BC 404~BC 222] 나라의 이고伊皐, 위魏[BC 403~BC 225] 나라의 석신石申 등이다.《좌전》12)‧《국어》 따위의 옛날 서적 가운데 그들의 성점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모두 하늘의 현상을 우러러 봄으로써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그들을 매우 존중했다. 매번 별자리에 이상한 변화가 있으면 모두 이 관원들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진한 시기 별점은 태사太史의 중요한 직능 가운데 하나였다. 사마담司馬談 ‧ 사마천司馬遷13) 부자 모두가 서한西漢의 유명한 <태사령太史令>이었다. 그들이 편집한 《사기》14) <천관서>에 의하면, 매양 하나의 성좌를 기록하는 동시에 반드시 그것의 별점 가운데의 지위와 의의를 설명해야 한다. 후에 태사太史를 중심으로 역대 왕조에서 모두 태사감太史監 ‧ 태사원太史院 ‧ 사천감司天監 ‧ 흠천감欽天監 따위의 기구가 세워졌고 그들은 똑같이 모두 천문 관측과 별점 두 가지 임무를 맡았다.
바로 천문 별점이 제왕의 ‘하늘이 내린 운명’ 즉 그 흥망의 ‘하늘의 기밀’15)에 언급하기 때문에 그것은 왕왕 일종의 비밀 학문으로 보았다. 전문적인 관원을 제외하고 보통 백성들은 물어봐서는 안 된다. 더욱이 태사감太史監 ‧ 사천대司天臺 ‧ 관상대觀象臺따위는 황실의 통행 금지 구역이기에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고 안의 관원들도 외부인 들과 함부로 왕래하지 못했다. 만약 고대 천문학의 신비한 수술특징 및 그 정치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 한다면, 이런 사실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2. ‘하늘과 인간은 교감한다’16)
앞장에서《사기》의 천문 별자리 부분이 있었는데 그 제목이 <천관서>였다. ‘천관’17)은 즉 하늘의 별자리 관리이다. 이것은 고대 천문 별점의 특유한 개념의 하나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별자리에 귀함과 비천함이 있다. 만약 사람의 벼슬자리에 들면, 옛날에는 말하기를 천관이라 했다’ 이 때문에 일정한 별자리 관리에 의하여 일정한 관원에게 점을 쳐줄 수 있다. ‘천관’이란 개념은 고대천문학 가운데의 하늘의 현상과 인간의 문자 사이 모종의 밀접한 관념을 대략 엿볼 수 있다. 사실상, 이런 관련은 고대 천문 별점 활동을 전제하여 구성된 것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보통 이런 관련을 ‘천인감응’18)이라 불렀다. 그러나 선진 시기 별점가들은 ‘천인감응’에 대해 이론상 해명을 하지 않았고, 서한西漢의 큰 학자인 동중서董仲舒(BC 1
79 ~BC 104)19)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다.
동중서는 “하늘과 사람이 ‘수’에서만 일치성을 갖고[표 3] 있
[표 3] 동중서董仲舒의 천인지수天人之數
인수人數 | 천수天數 |
사지四肢 | 사시四時 |
매지유삼개관절每肢有三個關節 | 매시유삼개월每時有三個月 |
사지공유십이개관절四肢共有十二個關節 | 사시공유십이개월四时共有十二個月 |
인시월이생人十月而生 | 천도시월이성天道十月而成 |
수이십진위数以十进位 | 천수위십天数为十 |
인목불능이시人目不能二视, 이불능이은耳不能二听, 수불능이사手不能二事 (불능일수화원不能一手画圆,일수화방一手画方) | 천도무이天道无二 |
인유삼백육십개골절人有三百六十六個骨节 | 일년유삼백육십육일一年有三百六十六日 |
인유십이개대골절人有十二個大骨节 | 천유십이월天有十二月 |
인유오장人有五脏 | 천유오행天有五行 |
을 뿐만 아니라 또 ‘현상’에서도 유사성을 갖고[표 4] 있어 하늘과 사람은 바로 수와 현상을 통하여 서로 연관된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표 4] 동중서의 천인지‘상’天人之‘象’
인상人象 | 천지지상天地之象 |
두시원형头是圆形 | 천시원형天是圆形 |
두발头发 | 성신星辰 |
이목耳目 | 일월日月 |
호흡呼吸 | 풍기風氣 |
지사知事 | 신명神明 |
사시사명乍视乍瞑 | 주야昼夜 |
유강柔刚 | 하동夏冬 |
애락哀乐 | 음양阴阳 |
골육骨肉 | 지후地厚 |
혈맥血脈 | 산천山川 |
복강腹腔 | 만물萬物 |
족시방형足是方形 | 지시방형地是方形 |
동중서는 더 나아가서 하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현상과 수의 관련이 하늘과 사람이 같은 ‘부류’라는 것을 설명했다. 같은 부류 사이는 서로 감응할 수 있고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말 무리중의 한 말이 울면 기타 말이 응하는 것처럼 하늘의 현상과 사람의 사물 사이 서로 감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표 5]
[표5] 동중서의 ‘천인감응天人感應’
감응感应 | 인응人应 |
천강미상天降美祥 | 제왕흥帝王兴 |
천강요얼天降妖孽 | 제왕망帝王亡 |
천장음우天将阴雨 | 인욕수와人欲睡卧 |
하다풍폭夏多风暴 | 군신무례君臣无礼 |
추다벽력秋多霹雳 | 왕불종간王不从谏 |
추다전화秋多电火 | 왕불명찰王不明察 |
춘하다풍우春夏多暴雨 | 왕불총명王不聪明 |
장가불성庄稼不成 | 왕불용인王不容人 |
천강우석天降雨石 | 가정苛政 |
충완춘한秋暖春寒 | 요역과중徭役过重 |
동완하한冬暖夏寒 | 선악불명善恶不明 |
풍상오곡风伤五谷 | 상하실경上下失敬 |
동습다무冬湿多雾 | 형법과중刑法过重 |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동중서의 ‘천인감응’ 학설이 전문적인 천문 별점을 위해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객관적으로 비교적 전면적으로 천문 별성점의 이론적 논거를 제공했다. 게다가 이 이론과 동중서가 제시한 ‘크게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학설과 ‘제자백가를 빼어내면, 오직 유가 학술만 존재한다’는 사상이 동시에 한무제(BC154~BC 87 재위 기간 BC 140~BC 87)20)에 의해 수용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종의 수술 활동으로써 천문 별점이 당당히 역대 왕조의 상층 구축과 사회의식 형태로의 진입했던 것이다. 이로써 국가의 정치활동에서부터 사람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대략 설명하겠다.
3. 별자리 순서 분야21)
‘분야’는 고대 별점학상 제일 중요한 학설의 하나이다. 그것은 별자리를 나눈 기초 상에서 하늘의 성좌를 땅 위의 어느 지역 ‧ 행정 주의 지역 혹은 국가에 분배해주는 것이다. 별자리에 변화가 생겼을 때 그것과 상응되는 지역에 감응하는 일정한 증상을 표시한다.
옛날 책의 기록에 의하면, 분야 관념은 서주西周 시기에 이미 출현하였고 이후 점차 유행되었고 그 방법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것이 십이차 계열十二次系列과 이십팔수 계열二十八宿系列이 있다.
‘십이차’는 사실 일종의 세성22) 기년법23)이다. 춘추 시기 예의가 무너지고 음악이 붕괴24)되어 주 나라 천자의 지위가 부단히 내려올 때 각 제후국은 본국 군주가 재위한 연수를 빈번히 채용하여 기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혼란이 생겼다. 별점가가 별점치는 것은 수요에 의해서 세성이 12 년에 하늘을 한 바퀴 도는 주기를 12 등분한 것이다. 세성은 매년 차례씩 1 등분을 통과하여 12 년에 일주를 운행하기에 ‘십이차’라 부른 것이다. 다시 ‘십이차’를 차례로 땅 위의 각 제후국과 대응시키면 일종의 분야 계열이 형성된다.[표 6]
[표 6] 12성차十二星次 분야계열分野系列
-《주례周禮》주인注引의 정사농설鄭司農說]
十二星次 | 星纪 | 玄枵 | 趣訾 | 降娄 | 大梁 | 实沈 | 鹑首 | 鹑火 | 鹑尾 | 寿星 | 大火 | 析木 |
分野 | 吴越 | 齐 | 卫 | 鲁 | 赵 | 晋 | 秦 | 周 | 楚 | 郑 | 宋 | 燕 |
이십팔수 계열도 이와 흡사하다.[표 7]
[표 7] 28수二十八宿 분야계열分野系列
-《사기史記》<천관서天官書>,《회남자淮南子》<천문훈례天文訓禮>
(1)각角․항亢―兖州,郑 | (2)저氐―兖州,宋 |
(3)방房․심心―豫州,宋 | (4)미尾․기萁―幽州,燕 |
(5)두斗―江湖, 越 | (6)우牛―扬州,越 |
(7)여女―扬州,吴 | (8)허虚․위危―青州,齐 |
(9)실室․벽壁―并州,卫 | (10)규奎․루娄―徐州,鲁 |
(11)위胃―徐州,魏 | (12)묘昂․필毕―冀州,魏 |
(13)자觜․삼参―益州,赵 | (14)정井․귀鬼―雍州,秦 |
(15)유柳․성星․장张―三河,周 | (16)익翼․진轸―荆州,楚 |
물론 왕조의 변천 ‧ 행정 구분의 부단한 조정 및 별점가의 문호를 스승에게 전승받는 데에 따라 하늘에 나누어진 별자리와 땅 위의 분야의 구체적 대응도 오차가 있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에서 볼 때 그들은 본질적인 차별이 없다.
그럼 별점가들은 도대체 이런 대응관계를 어떻게 운용하여 인사의 길흉화복을 해설했던 것일까? 십이차 계열을 들어서 대략적으로 설명하겠다.
십이차분야 계열은 세성의 운행 주기에 근거하여 확립되었다. 그런데 세성은 고대에서 복록의 별 관리를 경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때문에 매번 세성이 어떤 제후국 또는 행정 주의 지역에 속하는 별의 순서가 왔을 때 그 지역만 하늘이 내려주는 보호와 복을 받게 되어 다른 나라는 그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처벌을 받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성이 고대에서 ‘복별’이라고도 불렸다. 소위 ‘복별이 높이 비친다’는 별점 관념의 배경을 이룬 것이다.
《좌전》의 기록에 의하면, 노 나라 소공昭公[재위 BC 542 ~BC511] 32년(BC 512), 오 나라가 월 나라를 공격할 때 별점가인 사묵史墨25)이 “올해 세성이 월 나라에 왕림했는데, 오 나라가 월 나라를 공격하니 이는 불길한 일이다. 40년을 못 넘어서 월 나라가 오 나라를 멸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사묵의 추단은 바로 세성의 별점학 속성을 운용하였던 것이다. ‘40년을 못 지나서’란 말은 즉 ‘존재하고 멸망하는 일이 세 번의 기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한 번의 기년이 12년이므로 36년 후 과연 월 나라가 오 나라를 멸하였다.
별점가들은 “세성의 운행 주기로 추정할 때, 만약 한 사람이 하늘의 이치를 위반하는 일을 하면 12년 후 꼭 처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좌전》중에서 이 방면에 대해 많이 기록하였다. 예를 들면 노 나라 소공 11년[BC 532], 주 나라 경왕景王[재위 BC 545~BC 520]이 장홍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각 제후국이 어디가 길하고 어디가 흉험한가?” 장홍이 말하기를
“채 나라가 흉험합니다. 그것은 십이 년 전에 채 나라 자반子般이 군왕을 살해했는데, 현재 세성이 또 십이차의 돈위豕韋의 구간에 있기 때문에 채후의 운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습니다. 초 나라가 채 나라를 공격한 것은 채후가 군왕을 살해한 처벌입니다. 그러나 세성이 대양大梁의 구간에 도착했을 때 채 나라는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초 나라는 또한 흉험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그 전번 세성이 대양에 위치했을 때 초군도 군왕을 살해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길입니다.”
얼마 안 지나 초 나라 왕이 과연 채후를 살해하고 채 나라를 멸하였다. 또 세성이 대양에 도착 했을 때 즉 소공 13년에 초 나라 사람 자비子比가 진晋 나라에서 돌아와 초 나라 영왕靈王[재위 BC 541~BC 529]을 살해하였다. 그 후 자비는 또 비질棄疾에 의해 살해되었다. 같은 해 채 나라도 다시 일어섰다.
이런 점의 보기 중에서 분야 학설과 천문 별점의 일부를 대략은 엿볼 수 있다. 고대의 별점가가 보기에는 하늘의 별자리는 국가의 정치생활과 밀접히 상관 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운명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아래에서 설명하려는 ‘별자리 명리술26)’ 관념이다.
4. 별자리 명리술
‘분야’ 학설 중에서 이미 별자리와 개인 운명의 관계를 볼 수 있었다. 명확히 말하자면 두 관계를 연결시킨 것은 그래도 ‘별자리 명리술’ 관념인 것이다. 별자리 명리술 관념은 주요하게 천문 별점에 의해 산생되어 한漢 나라에 와서야 활약하기 시작하였고 후에 또 점차 별점의 궤도를 벗어나 일종 추명술推命術로 변이되었다. 천문 별점의 역사와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별자리 명리술 관점의 산생과 연변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양한兩漢 시기 참위학설27)이 세상에 성행되었다. ‘참’은 예언의 뜻이고 ‘위’는 ‘경’에 대립하여 말하면, 유가경전에 대한 해석이다. 참위의 내용은 대다수가 신비한 색채로 채워졌다. 고대 여러 제왕의 출생을 놓고 말하면, 참위의 기승은 자못 위태로웠다. 예를 들면 위서에서 말하기를, 황제黃帝가 막 출생할 때 거대한 전광이 북두를 둘러싸 교외의 넓은 들판을 밝게 비추고 그 어머니의 보귀한 몸을 접하였기에 황제를 낳았다고 한다. 백제白帝가 출생하기 전 그 어머니가 하늘에 무지개와 같은 큰 별이 화저華渚에 흘러내리는 것을 보더니 임신했음을 느꼈다. 흑제黑帝의 출생도 이와 흡사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에 무지개와 같은 아름다운 빛이 달을 꿰뚫고 규방 가운데에 여추女樞를 느끼게 하여 흑제를 낳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황제 ‧ 백제 ‧ 흑제가 별신星神이 땅에서의 화신으로 되었다. 참위 가운데의 이런 사상을 별자리 명리학 관념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참위학설의 영향 하에서 어떤 천문학자와 철학자도 천문 별점을 빌어 별자리 명리술 관념을 이론화하였다. 예를 들면 동한東漢 큰 사상가인 왕충王充(27~?)28)이 그의《논형》29)에 의하면, 매개 사람의 생명은 모두 하늘의 많은 별자리의 정화에서 온 것이다. 매개 사람이 받은 정기 본신에 두께와 강온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의 운명에 빈부 ‧ 귀천 ‧ 강약 ‧ 수요(장수와 요절) 따위 차이가 있는 것이다.
위진魏晋 시기에 이르러 도교 사상가인 갈홍葛洪30)이 또 왕충王充의 별자리 명리관을 발휘하였다.
갈홍은《포박자抱朴子》31)<내편 ‧ 색이>에서 쓰기를 ‘매개 사람의 생명과 운명은 실제상에서 그 모친이 임신했을 때 이미 만난 별자리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명리는 별자리의 생성에 속한다.’, 즉 사람이 신선의 길을 배우기 좋아하고 또 스스로 신선의 길을 배운 후에 얻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즉 ‘명리는 별자리의 죽음에 속한다’ 즉 이런 사람은 필연코 신선의 길을 믿지 않고 또한 스스로 신선의 길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별자리의 생성’ ‧ ‘별자리의 꾸밈’의 구체적인 가리킴은 갈홍이 명백히 설명하지 않았다. 이밖에 갈홍은 또 소위 ‘성스러운 별자리’ ‧ ‘어진 별자리’ ‧ ‘문인인 별자리’ ‧ ‘무인인 별자리’ ‧ ‘귀인인 별자리’ ‧ ‘부자인 별자리’ ‧ ‘천격인 별자리’ ‧ ‘빈한한 별자리’ 따위를 제기하였는데 모두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별자리의 명리술 이론을 행술로 변화시킨 것은 대략 당唐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인물은 마땅히 중당中唐의 이허중李虛中32)을 추천해야 할 것이다. 문학가인 한유韓愈(768~824)33)가 이허중을 위해 쓴 묘지명에 의하면 그 별자리 명리술은 사람의 출생 시일의 간지34)를 사용하고 오행의 왕생 ‧ 상생과 상극35)의 이치로 인사의 길흉화복을 예측하였다. 이는 후세의 팔자 추명술과 매우 비슷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술은 현묘하고 복잡하여 ‘100은 2를 잃어도 1가 아닌 것이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의 많은 추종을 받았다. 오대五代 시기 행술가인 서자평徐子平36)이 명확히 사주팔자37) 이론으로 운명을 추단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간지干支는 부호로 사용하고 별자리와 이미 관계를 잃었다.
후세의 추명술 가운데 천문 별점과 관계가 비교적 밀접한 것은 소위 ‘신살’38) 관념이다. 신살은 신의 특성을 갖춘 각종의 별자리를 가리킨다. 그것들은 간지의 순서로 배열되어 순환하며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출생할 때, 그때 마침 어떤 신살이 찾아온다. 즉 소위 ‘명이 비침’ ‧ ‘명에 들어섬’이다. 이 신살이 이 사람의 일생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면, 천덕성天德星을 만나면 귀인의 명으로 일생이 길하고 영화부귀를 누리게 된다. 월덕성月德星도 좋은 명이어서 크게 길하고 크게 이롭다. 천사성天赦星도 괜찮아서 일생 동안 처세하는 데 근심이 없다. 삼기성三奇星을 만나면 남보다 뛰어나고 학문이 넓다. 문창성文昌星을 만나면 매우 총명하고 문장 구성이 매우 훌륭하다. 화개성華蓋星을 만나면 중애나 도사가 될 명이다…… 만약한 사람이 계속 재수가 없다면, 그것은 10가지 악은 용서될 수 없다(죄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다) ‧ 육갑이 비어 있다 ‧ 하늘이 펼치고 땅이 망을 쳐서 피할 수 없다39) ‧ 죽을 신 ‧ 6 가지 액 따위의 재성災星을 만났을 것이다. 장성將星 ‧ 괴성魁星 따위를 만나면 조심하기만 하면 그래도 일생은 괜찮다. 만약 ‘도화의 살이 명에 들어오면’ 즉 그 사람은 술과 색에 미치게 된다. 이런 따위이다. 그러나 많은 신살은 천문 별점의 그림에 그 이름과 그 위목을 표현하지 않았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언제 출몰하는지를 관계치 않았다. 별자리의 신살설은 대부분 허구에서 비롯되고 그와 상관되는 추명술도 천문 별점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당唐 나라 시대는 불교가 매우 흥성하였다. 불경의 수입과 번역에 따라 옛날 인도의 별점술과 별자리 명리술도 중국에 전해 들어왔다. 이런 외래의 별점술은 별자리와 직접 관계가 있으나, 중국에서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상은 고대 천문성점의 기본 관념과 형태에 대한 간략하게 소개해 본 것이다. 비록 이런 관념과 형태가 고대에서 모두 ‘하늘의 글자’이란 이름으로 쓰였다. 만약 현대 천문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부분 내용이 거의 모두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 천문학이 주목하는 것은 ‘이십팔 별자리에 서열이 있고 다섯 별·해·달이 운행한다’는 것이다. 소위 ‘길흉의 상을 가르켜주는 단서’ 즉 길흉의 상을 기본으로 하고 ‘성왕이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유는 현대 천문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대 천문학은 현대인이 말하는 소위 ‘과학’과 ‘미신’이 공존하고 있어서, 이들 양자가 구별하기 어렵다. 고금 천문학의 차별 그 대의가 여기에 있다. 수술의 기타 형태의 소개에 있어서 종류가 서로 유사한 현상들이 출현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