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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향하여 (2)
행 27:33-38, 42-44
성경을 보면 풍랑이 심하게 일어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신구약에 한군데씩 나옵니다.
1) 요나
하나님은 요나에게 원수의 도시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사명을 주시지만 요나는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들이 혹시라도 회개하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예정된 심판을 최소할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 땅을 떠나 멀리 피하고자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가 있는 동쪽으로 가는 대신에 서쪽으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가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다에 대풍을 일으키십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심하게 쳐서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니 선원들이 두려워합니다(1:4). 강풍이 몰아치는 소리, 파도가 사정없이 배를 때리는 소리. 배가 깨어지는 소리, 선원들이 자기 신들의 이름을 악을 쓰며 부르는 소리로 인하여 배안은 온통 수라장입니다.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던 짐들을 내따 던집니다(1:5). 짐을 던져도 소용이 없으니 나중에는 배에 탄 사람들 중에 제비를 뽑아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니 요나가 뽑힙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집니다(1:15). 하나님이 풍랑을 일으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풍랑 사건을 통하여 선원들이 깨달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풍랑이 일자 각각 자기의 신에게 기도하고 짐을 바다에 던졌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신이요, 여호와만이 참신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는 히브리 사람들만의 신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도 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나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그런 상황도 이용하셔서 선원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이방인의 구원이 싫어서 도망쳤는데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 노를 저어 가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며 파도가 치기 시작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과 좁은 골짜기 때문에 자주 돌풍이 붑니다. 그러나 그때 몰아치는 바람은 갈릴리 호수에서 오랫동안 어부로 살아온 제자들조차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광풍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를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제자들의 말에는 공포에 질리고 곤경에 빠진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 주님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신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호수를 건너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제자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풍랑은 있었지만 제자들은 호수 저편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풍랑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이 깨달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 앞에서 무서워한 것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풍랑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확신하였기에 평안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사도행전에 나타난 풍랑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파선하였다가 극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어떻게 잘 묘사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나중에 자기의 체험을 말해주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7장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우리가” 일인칭 복수입니다. “we passage"로 알려진 우리라는 표현이 사도행전에 여러 번 나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바울의 여행에 여러 번 동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가 이 여행의 증인이었기에 모든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조언을 듣지 않습니다.
바울이 로마황제에게 상소를 하였기에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호송책임자는 “아구사도대”에 소속된 백부장 율리오입니다.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하는 아드라뭇데노 배를 타고 떠납니다. 첫 기항지는 시돈인데 백부장이 호의를 베풀어 친구들을 만나 대접받는 것을 허락합니다. 시돈을 떠나 구브로 해안을 지나 길리기아 밤빌리아 연안을 따라 행선하다가 무라성에 기항합니다. 거기서 백부장은 이탈리아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바울 일행을 옮겨 태웠습니다. 이집트는 로마 제국에게 아주 중요한 곡창지대였기에 이집트와 로마 사이에 곡물을 운반하는 선단이 있었습니다. 아마 알렉산드리아 배는 그 선단에 속했을 것입니다. 무라항을 떠났는데 강력한 북서풍으로 인하여 어려운 항해를 하였습니다. 이럴 때 두 가지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데 하나는 니도 항에 머물러 바람이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계속 항해하여 크레데 섬의 동쪽까지 가는 것입니다. 선주는 후자를 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작은 항구에 도착합니다. 만약이 미항에 정박하기로 작정한다면 가까이 있는 라새아에서 충분히 겨울을 보내고 갈 수 있었습니다.
지중해는 겨울 동안 풍랑이 심하여 항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탈이아까지 항해하려면 속죄일 전까지 항해를 마쳐야 했는데 바울이 항해를 떠났을 때는 이미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다고 합니다. 금식하는 때가 요즈음 달력으로 하면 9월말에서 10월초이니까 10월 중순 경에 항해를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바다에서 난파를 당한 경험이 이미 있었기에 겨울 시즌에 미항을 떠나 항해하려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면서 겨울 동안 미항에 머물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미항이 겨울을 지내기에 작고 불편하니까 서쪽에 위치한 피닉스로 가서 겨울을 보내자고 주장합니다. 피닉스는 남서쪽과 북서쪽을 향하여 열려진 두 개의 입구를 가진 크레테 섬의 큰 항구였습니다. 백부장이 로마 관리이니까 최종 결정은 백부장에 달렸던 것 같습니다. 결국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따라 미항을 떠나 계속 항해할 것을 결정합니다.
죄수 중의 한 사람으로 끌려가던 바울이 배에 탄 사람들을 위하여 한 마디 하였지만 백부장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이 선주와 선장의 말을 듣고 바울의 말을 무시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그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경험과 사람을 의지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바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도 때로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보다 너무 쉽게 나의 생각이나 경험만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한 풍랑을 만납니다.
피닉스로 가기로 결정하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립니다. 남풍이 부드럽게 불자 자기들의 뜻대로 되는 줄 알고 득의만만하였을 것이요 미항에 머물자고 하던 바울을 우습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닻을 감아 올리고 미항을 떠나 그레데 해변을 끼고 서쪽으로 항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섬 가운데 있는 Ida라는 산으로부터 강력한 북동풍이 불어옵니다. 선원들은 이 바람이 유라굴로라는 광풍인 것을 알았습니다. 배가 광풍에 휘말리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피닉스로 가기는커녕 배가 바람에 휩쓸려 더 나아가지 못하고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남쪽까지 밀려왔을 때 세 가지 예방 조치를 취합니다. 먼저 배 뒤에 끌고 다니던 거룻배를 잡아끌어 올립니다. 그리고 나서 밧줄로 선체를 둘러 감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풍랑에 배가 부서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은 또한 스르디스라는 모래톱에 배가 걸려 좌초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연장을 내리고 바람에 밀려 다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배의 저항을 가능한 크게 하여 배가 빨리 밀려가지 않게 합니다. 이튿날이 되어도 풍랑이 잠잠하여지지 않으니 선원들이 배에 있던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으니 배의 기구를 또 던져버립니다. 심한 풍랑에 시달리며 11일을 보냈는데 낮에도 해가 보이지 않고 밤에도 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일기가 험악하였습니다. 배가 여러 군데 깨어졌을 것이요 침수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항해 장비가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자기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배가 흔들리는 대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보니 멀미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탈진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배에 탄 어느 누구도 살아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기들의 상식과 경험을 따라 항해했던 뱃사람들은 풍랑을 만나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됩니다. 풍랑 속에서 한계를 느끼며 배에 있던 짐과 기구까지도 다 버립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삶에서도 흔히 일어나지 않습니까? 지혜로운 충고를 마다하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따라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다가 어려움에 빠져 절망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 나에게도 얼마든지 닥칠 수 있습니다. 매사에 기도로써 임하여 지혜로운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이 배에 탄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식욕이 있었겠습니까? 설령 있다한들 그 상황에서 음식을 준비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의 상당 부분은 바닷물에 젖었을 것입니다. 아마 양식에 쓰려고 실었던 양이나 돼지나 닭들도 파도에 휩쓸려갔을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풍랑에 시달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탈진하였을 때에 바울이 사람들 가운데 서서 격려합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묵살한 선주나 선원들을 향하여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너희들 때문이야 하면서 빈정대거나 비난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을 격려하고 소망을 주는 말입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단순히 소망 사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레테를 떠나기 전 바울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만일 미항을 떠난다면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배는 상하겠지만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약간 말을 바꿉니다. 지난밤에 바울이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 곁에 서서 말한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바울은 자기가 들은 말씀을 믿고 배에 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에게는 발걸음이 닿는 곳 어디나 다 전도의 현장입니다. 입을 열면 전도합니다. 위기의 상황도 예외가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의 마음이 불안할 때 그들의 마음이 열려질 좋은 기회입니다. 바울과 같이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 구원을 얻습니다.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바울이 탄 배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선원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깊이를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배가 나아가다가 암초에 걸려 좌초할 수 있기에 배 후미에서 닻 넷을 내리고 배를 정박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선수에서 닻을 내리는 것처럼 하면서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고 자기들만 도망치려고 합니다. 이를 눈치 챈 바울은 선원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립니다.
날이 밝자 바울은 배에 탄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유합니다. 지난 14일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어느 정도 잔잔해져서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만간 상륙해야 하는데 허기진 몸으로 감당할 수 없기에 음식을 먹고 힘을 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켜 줍니다. 바울이 먼저 음식을 듭니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다 들었습니다. 떡을 떼다, 축사하다 어디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입니까? 성찬식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물론 배 안에 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성찬을 베풀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포도주가 그 식사에 포함되었다는 언급도 없습니다. 어쨌든 배에 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여 준 계시를 들었고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빵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도 안심하고 보름 만에 식사를 들기 시작합니다. 누가는 그때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276명이었다고 보고합니다. 아마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려면 어느 정도 필요한지 알아야겠기에 숫자를 세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힘을 얻고 배에 싣고 있던 밀을 바다에 던져 버리면서 배를 가볍게 하였습니다. 배가 침수되는 것을 최소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곡물 운반선에서 곡물을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음식을 먹어야만했는데 비해 배 자체의 안전을 위하여 먹을 음식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또한 암초에 배를 부딪치지 않으려면 닻을 내릴 필요가 있지만 배를 육지로 가기 위하여 닻을 끊어버려야 했습니다(40). 음식이나 닻이 다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들이 경험한 항해와도 같아 풍랑을 만나게 되는데 먹을 때는 먹고 버려야 할 때는 버리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며, 인간의 닻을 의지할 때는 의지하지만 과감히 끊어버릴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 삶이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밀을 버리듯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날이 새면서 밝아지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지만 아직 자기들이 있는 곳이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때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기에 배를 거기에 대기로 결정하고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갑니다. 그런데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서 배가 좌초됩니다. 선수가 박혀 있으니 배가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배의 후미가 큰 물결에 깨어져 갑니다. 군인들은 죄수를 목적지까지 호송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난파되고 보니 자칫하면 죄수들이 도망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죄수들을 죽이자고 제안합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죄를 호송하는 군인이 그 죄수를 놓치면 그 죄수가 당해야 할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막습니다. 죄수들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륙하도록 합니다.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들은 물에 뛰어 헤엄을 쳤을 것이요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널빤지나 물에 뜰 수 있는 것들을 붙잡고 물가로 나왔을 것입니다. 어쨌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상륙하였습니다. 풍랑으로 가장 힘들어 하던 때에 바울에게 주어진 천사의 계시가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배와 화물은 잃었지만 배에 탄 사람은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1) 하나님이 상황을 주관하십니다.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책임이 백부장인 율리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주도권은 바울에게 있었고 더 정확하게는 바울을 로마까지 보내시려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 항해에서 바울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바울은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주님의 뜻을 따라 이 항해를 주관하게 됩니다. 계속되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바울이 로마에 가야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였는데 살아났습니다. 간신히 육지 근처에 도달했는데 이번에는 죄수들이 도망칠 까봐 군인들이 바울을 포함한 죄수들을 죽이자는 제안을 했으나 백부장이 만류함으로 살아났습니다. 간신히 말타 섬에 상륙하였는데 몸이 물에 젖었기에 불을 쬐다가 나뭇가지 속에 있던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살았지만 독사의 독을 인하여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바울은 살아났습니다. 매번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바울을 지켜주셨습니다.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사명자를 지키십니다.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대 전면에 나서시는 배후에 계시든 역사를 주관하시며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여집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자되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뿐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 주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의 병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항해는 평범한 일 가운데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평범하게 보이는 작은 일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 과정에 우리가 참여할 부분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2) 주님과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배가 위기에 있을 때 배에서 SOS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까? 풍랑으로 인하여 배에 탄 사람들이 고생하는 동안 바울은 하나님과 교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이 안전하리라는 계시를 받고 모든 사람에게 그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의 확신에 찬 말은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바울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 교회, 더 나아가서 국가적인 위기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확신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평소에 하나님과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내 곁에 서서 말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과 더욱 깊이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벽기도, 말씀 묵상, 중보기도, 목장모임 시간이 좋은 기회입니다.
3) 성도들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심한 풍랑을 만나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바울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담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탄 배에서 실질적으로 항해를 이끄는 사람은 선주나 뱃사람이나 백부장이 아니라 바울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바울은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구원자로 비춰집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경건한 바울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그들은 조난을 당하여 다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사람을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위기 속에서 배에 탄 사람들은 바울을 통하여 바울이 믿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감사해야 했습니다. 풍랑에 요동치는 배조차도 바울에게는 훌륭한 전도지가 되었습니다.
경제침체로 현재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성도들의 역할이 큽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2)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 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주시는 약속입니다. 갈 3:9,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기업을 함께 나눕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수혜자요 하나님의 복의 전달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받습니다. 다른 형제나 자매를 이용하고 시기나 불평이나 원망을 늘어놓는 대신에 복을 비는 말, 위로하는 말, 격려하는 말을 하게 되면 우리가 한 말이 씨가 되어 하나님의 복, 위로, 격려가 우리가 받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산위의 도성’으로 표현합니다. 이 세 개의 그림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 즉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써 사명을 잘 감당하며 누구나 볼 수 있는 산 위에 있는 도성이 될 때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빛을 비추게 하라.(마 5:16) 빛을 비추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도의 한 부분입니다. 이 빛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선한 일입니다. 믿는 자들이 죄악이나 육의 욕심을 버리고 거룩한 삶, 깨끗하고 양심적인 삶,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모습이 그대로 세상에 빛과 같이 비칩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주목하게 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소망이 없지만 성도들의 삶을 보니 무엇인가 자기들과 다른 모습, 무엇인가 활기가 있고 삶의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욕하는 사람조차도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를 보고 하나님을 칭찬하게 되고 또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을 자기들도 믿고 싶어집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자들이 의롭고 사랑이 넘치고 정직하고 화목하게 살면서 산 위에 세워진 도성 노릇을 하게 될 때 선포된 복음이 설득력을 가지고 되고 복음을 인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성도들 때문에 그 이름이 높아지고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살아가노라면 여러 가지 위기를 당합니다. 위기관리의 비결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자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고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살아있는 간증이 됩니다. 바울과 함께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살아난 것을 볼 때 그들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믿음 생활 잘하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뿐 아니라 나누어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 때문에 세상이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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