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十六章 손발이 잘 맞는 父女
인간이 과연 이렇게 살이 찔 수가 있을까?
볼은 축 늘어져 목이 보이지 않을만치 흘러내려 있었고, 눈은 아예 살 속에 파묻혀 살덩이에 살짝 금을 그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는 앉아 있기조차 힘에 겨운 듯 보통 사람이라면 족히 열 명쯤은 잘 수 있는 침상 위에서 항상 비스듬히 누워서 지냈다.
얼음으로 만든 빙과(氷果), 설탕에 절인 밤(栗), 잘게 썰어말린 육포(肉脯) 등, 그가 끊임없이 우물거리는 음식이 수정 쟁반에 수북히 담긴 채 팔걸이 옆에 놓여 있었다.
아니, 실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미녀가 자신의 가슴 위에 받쳐 놓고 누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침상 위에는 네 명의 반라여인들이 각기 눕거나 앉은 자세로 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침상의 좌우에는 상반신을 벗고 검은 가죽띠를 비스듬히 십자로 두른 거구의 역사(力士)들이 팔장을 낀 채 우뚝 서 있었다. 용모로 보아 그들은 몽고족인 듯 했다.
이 호화롭기 그지없는 실내는 가히 황제가 기거하는 아방궁처럼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로 인해 그곳은 도무지 선실(船室)이라는 느낌을 조금도 풍기지 않았다.
[호오! 그래, 이곳에서 일을 하겠다고?]
비대한 얼굴이 묘하게 움직였다. 실은 웃는 것이었으나 두터운 살가죽으로 인해 살덩이가
그저 씰룩거리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이 비대한 육괴 덩어리의 인간이 바로 금시호(金翅昊)였다.
그는 황금선의 선주이자 대부호(大富豪)였다. 지금 그의 가느다란 눈은 한 명의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어수룩하게 생긴 청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청년은 양호의 사생아이자 쾌활림(快活林)의 인간백정으로 알려진 관풍의 옆에 서 있었는데, 우선 키가 작은데다 볼품 없는 체격이 더더욱 금시호의 성에 차지 않았다.
거금을 들여 쾌활림을 사려다가 실패한 금시호는 그나마 간신히 관풍을 비롯한 삼인을 고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관풍의 부탁이라면 거절을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쩝! 저런 보잘 것 없는 놈을 뭐에다 쓸까?)
금시호의 신통찮은 표정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검은 청년은 정중히 포권했다.
[불초는 묵삼(墨三)이라 합니다. 금대인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자넨 장기가 무엇인가?]
자칭 묵삼이라는 청년은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뭐? 힘?]
금시호의 눈꼬리가 짐짓 가소롭다는 듯이 춤을 추었다. 이어 그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우측에 서 있던 거구의 사나이가 앞으로 쓱 나섰다.
[묵무사께서 만일 나의 두 장사 중 한 명이라도 이긴다면 약정된 보수의 배를 지급 하겠소.]
그 말에 묵묵히 서 있던 관풍의 입가에 언뜻 괴상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삼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자신보다 두 배는 더 커보이는 역사를 올려다보며 바보같은 표정을 지었다.
[헤헤, 친구, 이렇게 하자. 자네가 있는 힘을 다해 날 밀어 보게. 만일 내가 한 걸음이라도 밀려난다면 자네에게 큰절을 하겠네.]
몽고역사의 눈이 대뜸 무섭게 부릅떠졌다. 가당치도 않은 묵삼의 말에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금시호도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몽고역사를 가까이 부르더니 몽고말로 뭐라고 전했다.
[우얍!]
몽고역사는 곧 분노성에 가까운 기합을 울리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슨 속셈인지 묵삼은 자세도 가다듬지 않고 두 발을 아무렇게나 벌린 채 달려드는 역사를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슉!
역사의 머리통만한 주먹이 묵삼의 가슴을 향해 마치 바윗돌 날아오듯 뻗어나갔다.
퍽!
둔탁한 음향이 일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뼈와 근육이 이지러지는 소리였다. 역사의 주먹은 묵삼의 가슴에 정확히 적중되었다.
[크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제까짓 놈이.....)
금시호는 득의해 하며 가느다랗게 실눈을 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저럴 수가?)
쿠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쓰러진 것은 뜻밖에도 묵삼이 아니라 거구의 몽고역사가 아닌가? 방금 전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던 것도 바로 그였다.
[끄르륵.....]
역사의 입에서는 연신 거품이 나오고 있었고, 그가 내친 어른 머리통만한 주먹은 으스러지기라도 했는지 푸르죽죽하게 변색된 채 뒤로 꺾여 있었다.
[아니!]
금시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알기로도 몽고역사의 힘은 맨주먹으로도 바위를 으깰 정도였다.
그런데 도무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검고 못생긴 청년은 그의 주먹을 고스란히 맞고도 뻗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몽고역사를 까무라치게 만든 것이 아닌가?
묵삼은 옷자락을 툭툭 털며 말하고 있었다.
[맞는 것이라면 이 묵삼의 특기인데, 쯧쯧! 자네가 재수가 없었어. 얌전히 밀기만 할 일이지, 공연히 힘을 쓸게 뭔가?]
그는 히죽 웃더니 금시호에게 포권했다.
[이 정도면 금대인의 녹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 그야!]
금시호의 넋나간 얼굴을 보며 관풍은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밤바람이 갑판을 스쳤다.
포구에 정박해있는 황금선은 불빛이 명멸하는 항주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 주위로는 다른 십여 척의 배들이 황금선을 에워싸듯이 포진하고 있었다.
갑판 위에서 관풍과 묵삼은 나란히 항주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풍이 먼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용형, 자네가 어떤 목적을 품고 이 황금선에 올랐는지는 모르겠네만.....]
묵삼은 바로 용소군의 변신이었다.
그는 구전신단을 복용한 이후 공력이 급증하여 이미 대이환용공(大移幻容功)이 십성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따라서 언제든지 전신을 자유자재로 이완수축할 수 있었고, 모습도 수시로 변환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이환용공을 호신강기로 사용할 수도 있었으며, 더욱 특이한 것은 극유극강(極柔極剛)의 힘을 모두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 유공(柔功)을 일으키면 몸이 솜처럼 부드러워져 천하의 어떤 신검일지라도 근육 속에 파묻히게 할 수 있었다.
반면에 강공(剛功)을 전개하면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해진다. 얼마 전 몽고역사의 주먹을 으스러지게 한 것이 바로 이러한 대이환용공의 강자결(剛字訣)을 활용한 것이었다.
관풍은 항주의 불빛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황금선의 주인인 금대인에게는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네. 내 생각으로는 필시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협박당하고 있는 것 같네.]
용소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에 오른 후 그것을 알 수 있었지. 이 황금선에만 해도 수많은 매복과 기관장치가 되어 있을 뿐더러.....]
용소군은 황금선 주위에 정박해 있는 여러 척의 배에 시선을 던졌다.
[자네 혹 저 배를 보고 느끼는 점은 없었나?]
관풍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배들의 위치는 은연 중 칠살(七煞)의 방위를 고수하고 있네. 그 뿐 아니라 잘 맡아보게, 무슨 냄새가 나는지?]
관풍은 눈썹을 쫑긋 세우더니 안색이 일변했다.
[화약?]
용소군은 빙긋 웃었다.
[맞았네. 칠살 방위에 배치된 일곱 척의 배들은 겉으로는 상선으로 보이나 실상 전선(戰船) 못지 않은 장치를 갖추고 있네.]
[으음!]
[이 냄새는 화포(火砲)에 쓰이는 화약냄새이며 또한 뇌궁노(雷弓弩)도 장치되어 있는 것 같더군.]
관풍의 눈에 일순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용형, 대체 언제 그걸 다 알아냈나?]
용소군은 대답 대신 신비한 웃음을 지었다.
(관형, 당신이 만일 내가 악령촌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것일세.)
이번에는 관풍이 입술을 열었다.
[금대인은 마치 일전을 준비하는 듯 전열을 가다듬고 있네. 그가 막대한 자금을 풀어 끌어들인 사병의 숫자만도 근 천 명에 달한다네.]
용소군은 문득 기소를 흘렸다.
[후후, 그러나 내 생각에는 설사 십만의 사병을 끌어들인다 해도 그가 상대하려는 적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네.]
[어째서지?]
[훗훗, 어쩌면 그 자신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을런지 모르지. 그래서 쾌활림을 찾아갔던 것이 아닐까?]
관풍의 안색이 미묘해지는 것을 보며 용소군이 물었다.
[그런데 자네와 함께 고용되었다는 쾌활림의 두 사람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건.....]
관풍의 얼굴에 다소 꺼리는 기색이 스쳤다. 용소군이 무심히 항주의 야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마도 그들은 금대인이 신임해마지 않는 최후의 배수진(背水陣)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그렇게 많은 자금을 단 삼인에게 풀 리가 없을 테니까.]
관풍이 놀라는 가운데 용소군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그들 두 사람 중 한 명은 필시 수중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수염라(水閻羅) 곽규(郭圭) 일테고.....]
[용형, 대체 자네는.....]
관풍의 몸이 미미한 진동을 보였다. 그를 향해 용소군은 다만 빙긋 웃을 따름이었다.
[수염라 곽규가 고용되었다면 이 일대 십리 안의 물 속으로는 고기 한 마리 들어올 수 없을 것이야. 그렇지 않은가?]
[맙소사!]
금시호의 축 늘어진 뺨이 마구 흔들거렸다.
보석상자를 어루만지고 있는 그의 가느다란 눈에는 아쉬운 빛이 흐르고 있었다.
[욕심 많은 자 같으니! 그 동안 바친 뇌물만 해도 일개 성을 살 수 있을 정도다. 쩝!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것을 받고도 도와 주지 않는다면.....]
금시호의 살찐 손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휘황한 보광(寶光)으로 인해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오! 대리국 황실 최대의 보물인 칠채금강주(七菜金剛珠)! 천하에서 오직 일곱 개밖에 없거늘.....]
금시호의 눈에 무한한 애착의 빛이 흘렀다.
과연 상자 속에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금강석이 들어 있었는데 모두 일곱 개였다.
더욱 신비한 것은 둥글게 보이는 금강석이 실제로는 무수한 면(面)으로 다듬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로 인해 그것은 선실의 궁등빛을 받아 사방으로 환상적인 무지개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흐흐, 그 자에게 내주긴 아깝다만 이 정도라면.....]
그는 일곱 개의 금강신주 중 하나를 꺼내더니 또 하나의 작은 보석상자 안에 담으며 혀를 찼다.
[쯧쯧, 이번에야말로 양심이 있다면 호위무사 백 명쯤은 보내 주겠지.]
문득 금시호는 비단옷의 소매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그것은 피처럼 붉은 혈지로, 그 혈지를 바라보는 그의 안면이 푸르르 떨리고 있었다.
(으으..... 처음에는 백첩(白帖), 두번째는 화첩(花帖), 결국 이번에는 혈첩(血帖)을 보내왔다. 이젠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는 뜻인가?)
금시호의 가늘게 째진 눈에는 공포의 기운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완강하게 저으며 중얼거렸다.
[안 돼! 나의 재산, 나의 모든 생명, 결코 뺏길 수는 없어.]
금시호는 불현듯 치를 떨었다.
[오 년, 장장 오 년 동안이나 그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숨어살았지만 이젠 더이상 그럴 수 없다. 이젠 이 단거정(段居正)도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
그는 작은 보석상자를 움켜쥐며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천하 삼대검왕의 한 명인 그가 도와준다면 가능성은 반반이다.]
금시호. 과연 그는 용소군이 그토록 찾고 있던 단거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천하삼대검왕까지 거론되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것인가? 또한 그에게 혈첩(血帖)을 보낸 인물의 정체는?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 항주부(抗州府)의 포정사사가 전격적으로 교체되었다. 전임 포정사사였던 양화춘(揚華春)이 물러가고 새로운 포정사사가 부임했는데 그는 그야말로 걸물이었다.
[위경! 아직도 그 계집애를 찾지 못했단 말이냐?]
연비청(燕飛靑)의 고함에 포정사사의 부중이 온통 뒤흔들렸다. 그의 앞에서 위경은 죽을 상을 지은 채 쩔쩔 매고 있었다.
연비청, 그는 천하 삼대검왕의 일인이자 관계의 괴물로 이번에는 항주부의 포정사사로 영전한 채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는 낙양성주에서 승급하여 반 년 전 이곳의 포정사사로 임명받고는 항주에 부임해왔다.
그야말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셈이었는데, 지금 그는 몹시 흥분한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래, 사흘을 뒤졌는데도 못찾았단 말이냐?]
[예! 그, 그것이.....]
[멍청한 놈! 그러고도 녹을 먹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위경은 코가 석자나 빠져 있었다. 그는 연비청이 이곳 포정사사로 발령이 나자 함께 온 것이었다.
그는 잠룡(潛龍)이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 해 시험귀신(試鬼)의 소동을 치루었을 때 결심한 대로 그는 북경의 대과에 응시했었다. 보아란 듯이 대과에 장원을 하여 항상 구박만 주는 연비청 앞에서 어깨에 힘을 줄 참이었다.
하지만 보기좋게 낙방하는 바람에 영원한 잠룡(?)이 되어 버린 그는 가뜩이나 기가 죽어 있는 판국에 요즘은 연옥상 때문에 더더욱 죽을 맛이었다.
[에잉, 못된 것! 일전에는 저자의 놈팽이들을 두들겨패 병신을 만들어 놓더니, 전당강에서는 소란을 피우다 배를 뒤집어 놓질 않나? 쩝! 남장을 하고 기원에 들어가 놀아나다가 기녀들의 엉덩이란 엉덩이에는 죄다 발도장을 찍어놓고.....]
연비청의 넋두리에 위경의 얼굴이 희한하게 일그러졌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자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 웃음소리라도 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그러므로 그는 잔뜩 얼굴을 쭈그러뜨린 채 이를 악물어야 했다.
연비청은 내실 쪽으로 들어가며 명령했다.
[아무튼 내일 아침까지 내 앞에 불러다 놓지 않으면 너같은 밥통은 마구간으로 좌천시킬테니 알아서 해라. 에잉!]
그의 모습은 내실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내실 쪽에서는 애간장을 녹일 듯한 여인의 교음이 흘러 나왔다.
[아이, 나으리! 호호.....]
위경의 억눌렸던 웃음기가 그나마 스르르 소멸되었다.
(빌어먹을! 툭 하면 좌천이고 파면이라니, 정작 자기는 색향(色鄕)에 부임했답시고 연일 미기란 미기는 몽땅 끌어들이면서..... 쳇! 그 아비에 그 딸이지 별수 있으려고?)
그는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걸어나왔다.
항주부중은 밤이어서 그런지 조용했다. 야천에는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떠 있어 그윽한 달빛을 후원에 가득 비춰주고 있었다.
위경은 후원을 가로질러 가며 왠지 가슴이 허전해졌다. 그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달을 보니 고향에 두고 온 아내 생각이 간절했다. 출세하여 금의환양하겠노라고 아내조차 버려둔 채 연비청을 따라 이곳저곳 임지로 떠돈 지 그 몇 해이던가?
(휴..... 이러다간 내 청춘 다 시들어 가겠군.)
위경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아름답고도 당돌한 하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燕) 아가씨.)
그러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상은 바로 연옥상이 언젠가 그에게 입맞춤을 해 달라고 안겨 들었던 그 순간이었다.
(그깟 노신들의 눈이 두려워 절호의 기회를 놓치다니.....)
위경은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왜 좀 더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끼로 발등을 콱콱 찍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랬다면 최소한 이렇게 말단으로 썩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바보같은 위인이여!]
위경은 담장 위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탄식을 토해냈다.
[딸꾹! 그래, 당신은 바보였어. 후후..... 그걸 이제야 알았어? 딸꾹!]
문득 그의 독백에 답하는 자가 있었다. 위경은 대경실색하여 소리가 들린 쪽을 응시했다.
담장 위였다. 그곳에서 막 기어오르는 중인 듯 누군가가 척 걸쳐진 채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누..... 누구냐?]
위경은 즉각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런데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패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깔깔깔! 이걸 찾아요? 이 장난감 칼?]
담장 위에서 짖궂은 교소가 들려왔다.
[아, 아가씨.....]
위경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고 말았다.
월장(越牆)을 하던 인물은 다름 아닌 연옥상이었다. 항주부 포정사사의 딸인 그녀가 한 손에는 위경의 패검을, 다른 한 손에는 술병을 든 채 흔들어대고 있었다.
[호호, 이 칼을 팔아 술이나 사먹어 버릴까 보다.]
연옥상은 패검을 들어 보였다.
[아가씨..... 엇?]
위경은 깜짝 놀라 두 팔을 벌리며 담장 아래로 달려갔다. 연옥상이 기우뚱하더니 그만 아래로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간신히 연옥상의 몸을 받아냈다. 그러자 술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개의치 않고 성의를 다하여 말했다.
[아가씨도 참, 부친께서 얼마나 찾으셨는지 아십니.....]
위경은 말을 그치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툭!
술병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연옥상은 그만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의식을 잃었는지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꿀꺽.....]
위경은 갑자기 목이 타도록 갈증이 일어나 침을 삼키고 말았다.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연옥상의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게다가 주기 탓인지 발갛게 도화빛이 된 뺨이며, 주사를 칠한 듯 붉은 입술은 정녕 유혹적이었다.
위경은 가슴이 떨리다 못해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연옥상으로 말하자면 비록 소문난 망나니에 바람둥이라지만 그녀는 또한 과거 낙양일대에서 최고로 꼽히던 미녀였다.
지금 그 절색의 미녀가 바로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었다. 더우기 술에 만취된 상태로.....
[꿀꺽!]
위경의 목구멍 속으로부터 다시 요란하게 침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흔들었다.
위경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연옥상의 가슴으로 갔다. 봉긋한 가슴이 그 속에 무르익어 있을 풍만한 과육을 연상케 하자 위경은 전신의 피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 육감적인 입술은 반쯤 벌어진 채 백옥 같은 치아를 살짝 내보이고 있었다.
(못 참겠다! 도저히.....)
위경은 마침내 자신의 입술을 아래로 숙였다. 그런데 그 순간, 연옥상이 두 팔을 그의 목에 걸며 중얼거렸다.
[음냐..... 날 침실로..... 데려다 줘요.]
(헉!)
위경은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하마터면 간이 떨어질뻔 했다. 그러나 곧 그는 구름에 실려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침실로? 아! 기회가 다시 왔다. 절호의 기회가.....)
위경은 즉시 연옥상을 안고 달려갔다. 이제는 노신이고 뭐고 아랑곳 없었다. 운우지락을 나눌 아늑한 침실만이 그의 뇌리에서 오락가락할 따름이었다.
그가 어찌 알았으랴? 정신없이 내닫는 그의 허리춤에는 어느새 패검이 제 자리를 찾고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꾸울꺽!]
벌써 몇십 번인지 모른다. 위경은 무수히 침을 삼키고 있었다.
침상 위에 큰 댓자로 널브러져 있는 연옥상을 향해 위경은 눈이 빠져라 시선을 집중하며 그녀의 온몸을 훑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풍만한 가슴 쪽에 시선이 멎을 때면 목울대가 여지없이 울컥거리곤 했다. 그는 몇 번이나 그녀를 안으려 했으나 아직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으음..... 물, 물을.....]
연옥상이 손을 저으며 중얼거렸다.
[네, 네..... 아가씨, 잠깐만.....]
황급히 찻주전자를 찾아서 탁자로 달려가려던 위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갑한 나머지 스스로 풀어헤쳤던지 연옥상의 앞섶이 활짝 벌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위경의 눈에 그녀의 붉은 속곳자락과 눈처럼 흰 살결이 조금 드러나 보였다. 그 바람에 더욱 호흡이 빨라진 그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차를 따라 연옥상에게 다가갔다.
[여기.....]
연옥상은 그가 먹여 주는 대로 한 잔의 차를 거의 다 마셨다.
[풋!]
[으읍!]
한 순간, 두 마디의 각기 다른 음향과 함께 위경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연옥상이 갑자기 입을 오무려 찻물을 뿜어낸 덕분에 그는 찻물 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위경은 찻물을 뒤집어 쓴 안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때 연옥상이 뒤로 벌렁 드러누우며 그를 잡아 당겼다.
[더워. 옷 좀 벗겨 줘.....]
위경은 찻물 세례도 금세 잊은 듯 눈을 크게 부릅떴다.
[오, 옷을..... 벗기라고요?]
[으음..... 그래, 더워 죽겠다니까? 어서.....]
[네, 네.....]
위경은 침상 위로 살금살금 기어 올라갔다.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 참으면 병신이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흘러들었다.
그윽한 달빛 아래서 위경의 손은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옷을 벗기는 일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미처 몰랐었다.
(고향에서 아내의 옷을 벗길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의 손은 정말로 수전증에라도 걸린 듯 심하게 떨렸다.
[어서! 에이, 갑갑하단 말야.....]
연옥상이 되려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위경은 그녀의 옷을 벗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겉옷일 뿐, 연옥상은 다시 안에다 붉은 색의 속옷을 받쳐입고 있었다.
속옷 위로 불룩 솟아오른 젖가슴의 형상이 위경의 심장을 두방망이질 치게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인내할 수가 없었다.
[연, 연낭자.....]
마침내 그는 연옥상을 왈칵 껴안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난데없이 이 무슨 소리인가?
[험! 옥상아, 네가 들어온 줄 이 아비는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고얀 놈 같으니! 아비에게 인사도 없이 자는 척 하느냐?]
(헉!)
위경은 삽시간에 전신이 바짝 오그라붙어 버렸다.
(이 음성은?)
더 들어볼 여지도 없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상관, 즉 포정사사 연비청의 음성이었다.
위경은 퉁기듯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투툭!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가 그의 동작에 이어졌다. 위경의 얼굴은 그만 새파래지고 말았다.
연옥상이 그의 허리춤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허리띠가 끊어지며 바지가 허벅지까지 주르르 흘러내린 것이었다.
[제, 제발..... 놓아주시오.....]
위경은 음성을 잔뜩 죽여 애원했다.
그러나 연옥상이 그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허리춤을 당기는 한편 오히려 애교 띈 음성으로 속삭였다.
[위공자님, 어딜 간다는 거예요? 나와..... 으응?]
그 말을 받는 일진의 호통이 있었다.
[옥상아! 꼭 이 아비가 먼저 들어가야 되겠느냐?]
연비청이 화난 음성과 함께 발자국 소리를 쿵쿵 울리며 문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위경은 그만 눈 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이젠 죽었다!)
문득 그는 입술을 깨물더니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그의 바지가 그만 훌러덩 벗겨져 버렸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위경은 걸음아 나 살려라는 식으로 냅다 창 밖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졸지에 하반신을 벌거벗기운 채 허둥거리는 그의 모습은 실로 볼만했다. 게다가 더더욱 재수 없는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 창 밖에는 정원석이 있었는데 다짜고짜 뛰어내린 그는 그만 꽝! 하고 머리로 그것을 받아버린 것이었다.
눈 앞에서 무수한 별들이 떠오르는 순간, 그는 그대로 기절을 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정신을 잃으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굳건한 의지(?) 덕분이었다.
[왓핫핫핫.....!]
[호호호.....!]
느닷없이 방안에서 터져나오는 부녀 합창의 폭소 소리는 또 무엇인가?
설사 깨어있다 한들 위경으로서는 도저히 그 의미를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소문난 괴물인 연비청과 그의 딸인 연옥상, 그 두 사람만이 통하는 웃음일 뿐이었다.
아무튼 위경으로서는 더럽게도 재수없는 달밤이었다. 달빛이 무안스럽게도 그의 벌거벗은 하반신을 오래도록 비추고 있었다.
연비청과 연옥상.
두 괴물 부녀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 사이의 탁자 위에는 작은 보석상자 하나가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주먹만한 보주(寶珠)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대리국에서만 나는 희귀한 금강석이다.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보석이자 그 값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다.]
연비청의 말에 연옥상이 탄성을 발했다.
[정말 아름답군요!]
[색목국(色目國)으로부터도 금강석이 가끔 들어오긴 하지만 대리국산만은 못하다. 최상품의 금강석은 은은한 붉은 빛이 돌되 지금 이것처럼 무지개가 반사되어야 한다.]
연옥상은 보석을 만져보며 아름다운 눈을 빛냈다.
[그런데 이걸 그 부호가 뇌물로 보내왔단 말이죠?]
연비청의 눈에서 기광이 번쩍 일어났다.
[그렇다. 그는 내게 호위 무사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어쩌실 거죠?]
[이곳 항주부의 안위를 맡고 있는 나로서는 관내의 어떤 인물이든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물론 그의 요청을 들어줄 셈이다. 그런데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연비청의 얼굴에 평소에는 보기드문 심각한 빛이 떠올랐다.
[내가 이곳에 부임할 당시에도 그 자는 많은 예물을 바쳤다. 그 속에도 역시 이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대리국산 금강석이 한 상자나 들어 있었다.]
[그런 일이.....]
[대리국은 이십 년 전 멸망한 관외의 작은 왕국으로 매년 명황실에 조공을 바쳐 왔었지. 황실에서도 금강석의 조공에는 특히 만족해했었다. 따라서 대리국이 갑작스럽게 멸망하자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특사를 보낸 적이 있었지. 그런데.....]
연비청의 눈 속에서 섬뜩한 광채가 일어났다.
[그 특사 일행은 돌아오지 않았다. 황실에서는 그 뒤로도 세 번에 걸쳐 특사를 파견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옥상의 아미가 상큼 치켜 올라갔다.
[그럼 모두 죽었단 말인가요?]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 이후로 황실에서는 그 일을 깨끗이 잊어버렸지. 소국의 일에 지나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대신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연비청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당시 세번째 특사로 갔던 인물이 누군지 아느냐?]
연옥상은 다소 놀랐다. 그녀로서는 부친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연비청의 눈에서는 강한 신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리항(百里恒)이다. 그는 이 애비의 동문 사제로 자질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만일 당시 그가 실종되지 않았더라면 작금에 이르러서는 천하에는 삼대검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검왕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
[백리사제는 스스로 자원하여 대리국으로 떠났었다. 그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지. 허헛..... 그때 일을 애비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의 음성에는 다소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무림에서 사제의 별호는 사자신검(獅子神劍)이었고 황실의 금위대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대내고수였다. 현재의 대영반인 초악승과는 쌍벽을 이루었었지.]
연비청은 다시금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실상 나는 그로 인해 대리국의 사건을 줄곧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금시호가 보내온 대리국산 금강옥을 보게 되자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연옥상의 눈에서 날카로운 이채가 반짝였다.
[그래서요?]
[금시호의 과거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 보았지.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연비청은 금강석을 손에 들고 무지개빛 광채를 노려보았다.
[금시호의 본명은 단거정이다. 그는 이십 년 전 대리국과 단독으로 거래를 해온 보석상인이었다. 대리국의 왕족은 대대로 용미족만이 이어왔고 단거정은 그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독점으로 보석 거래를 맡아온 자였다.]
[.....]
[그런데 대리국이 멸망할 당시 그 자는 왕궁에 있었는데 용미족이 몰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은 살아났다. 더우기 그 후에도 버젓이 십사오 년 간이나 장사를 계속해 오다가.....]
연비청은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그는 갑자기 자신의 거점인 관외에서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이 년 전 전 재산을 가지고 이곳 항주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름을 바꾼 것은 물론 황금선(黃金船)의 선주가 되어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은폐해 버렸다.]
연옥상은 가벼운 신음을 발하며 말했다.
[음, 그렇다면 결국 대리국의 멸망과 그 자와는 깊은 관련이있겠군요?]
[왜 아니겠느냐? 그것도 아주 깊은, 어쩌면 그 자는 당시 대리국의 왕족이었던 용미족을 멸망시킨 자와도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군요! 그럼 그 자가 막대한 자금으로 사병을 모으는 것은?]
[물론 신변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대리국을 멸망시킬 적에 손을 잡았던 자와 반목했거나, 혹은 그 자로부터 도망친 것이 틀림없다.]
연비청의 추리는 실로 놀라웠다. 괴물로만 통하던 그의 두뇌에서 이렇듯 날카로운 추리가 나오다니 정녕 뜻밖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별다른 가문(家門)도, 배경도 없는 그가 어찌 이렇게 빠른 출세를 할 수 있었겠는가?
연비청은 다시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백리사제의 사인(死因)을 명확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연옥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금시호는 내게 최고로 강한 무사들을 보내 달라고 했다. 즉 그가 원한 것은 백 명 정도의 최정예병이었다.]
연옥상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보내실 건가요?]
연비청은 괴이한 웃음으로 딸의 미소에 응대했다.
[후후..... 금시호, 아니 단거정은 몹시 교활한 놈이다. 놈은 내가 따로 무공을 전수시킨 강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무림의 삼대검왕의 하나인 나까지 이 일에 관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연옥상은 냉랭하게 코웃음쳤다.
[흥! 감히 아버님을 유인해 안전을 도모하려 하다니요? 그것도 이까짓 보석으로.....]
그녀는 분노한 나머지 금강석을 들어 집어던지려 했다. 그것을 본 연비청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서라! 그것은 보통 보석이 아니다.]
[네?]
연비청은 재빨리 금강석을 뺏아 보석상자에 도로 넣었다.
[일곱 개의 칠채금강신주(七彩金剛神珠)를 모으면 그것을 통해 한 가지 신화적인 비밀을 풀 수 있다는 전설(傳說)이 있다. 물론 떠도는 말이니 꼭 믿는 바는 아니다만 아무래도 단순한 보석의 가치를 뛰어 넘는 신비가 이 보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연비청은 보석상자를 소매 속에 갈무리한 후 지그시 딸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입가에는 괴상한 미소가 어렸다.
[옥상, 네가 가거라.]
[네.....?]
연옥상의 표정은 더욱 괴상해져 버렸다. 그러자 연비청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헛헛! 의외라는 거겠지? 하지만 애비는 널 안다. 아무리 망나니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네가 속이 꽉 찬 계집애라는 것을 이 아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연옥상의 얼굴이 문득 흐려졌다.
[핫핫핫! 말나온 김에 솔직히 털어놓으마. 이 아비는 육처칠첩을 두었지만 아들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그로 인해 한때 몹시 실망하고 허탈할 때가 있었다.]
연옥상의 안면은 그 말에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내 널 두고 아쉬워했던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때문에 너도 일부러 날 괴롭히려 무던히도 힘썼지 않았더냐?]
[아버님.....?]
[핫핫핫핫.....! 내 먼저 사과하마. 그리고 내 생각이 바뀌었음을 이 자리에서 말해두고 싶다. 아비는 그 동안 네가 열 놈의 사내놈도 따라가지 못할 몫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이 천주검왕(天柱劍王) 연비청의 후예로 결코 손색이 없다고 말이다.]
연옥상의 보석같은 눈에 반짝 이슬이 어렸다.
[아버님.....]
[핫핫핫! 이 녀석! 어울리지 않는다. 네 놈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 이렇게, 이렇게 하란 말이다.]
연비청은 콧등을 잔뜩 찡그려 보였다. 그것은 바로 연옥상이 전날에 부친과 마주할 때면 의례껏 지어오던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연옥상의 눈에서 급기야 눈물방울이 또르륵,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흑! 아버님.....]
[이 녀석 보게? 여전히 아비의 말을 듣지 않는구나.]
그제서야 연옥상은 주특기를 발휘해 콧등을 찡그려 보였다.
[이렇게..... 말씀인가요?]
[그렇다! 바로 그거다. 그 기개를 잃으면 내 딸이 아니다.]
[흐흑..... 호호호호홋.....]
[아하하하핫.....!]
곧 괴상한 부녀의 웃음이 떠나갈 듯이 울려 퍼졌다. 그들은 마침내 길고 오랜 전쟁(戰爭)을 이렇게 마감한 것이었다.
한편, 문 밖에서는 위경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실로 웃지 못할 모습이었다. 머리를 온통 하얀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 그는 영락없는 패잔병의 몰골이었다. 지금 위경은 한 아름의 문서를 안은 채 쩔쩔 매고 있었다.
[일이 이처럼 산더미같이 밀렸는데도 포정사사께서는 결재할 생각도 않고 계시니..... 위경, 위경아! 너는 상전을 잘못 만나도 너무 잘못 만났구나!]
푸념하는 그의 단벌 관복이 아래위가 틀린 것을 알만한 사람은 익히 알리라.
첫댓글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