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는 어디에서
하늘 아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장소가 있다.
바로 항주(杭州)의 서호(西湖).
무수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그곳의 풍경을 찬미하기 위해 정혈을 짜내었으나, 그곳의 절경을 그대로 그려 낸 이는 없었다.
평호추월(平湖秋月)
소제춘효(蘇 春曉)
단교잔설(斷橋殘雪)
뇌봉석조(雷峯夕照)
인간의 상상이 추구하는 극한세계를 초월한 절경이 바로 항주의 절경이었다.
남병만종(南屛晩鐘), 곡원풍하(曲院風荷), 화항관어(花港觀魚), 유흔문앵(柳痕聞鶯), 삼담인월(三潭印月), 쌍봉압운(雙峯押雲)…….
서호십경(西湖十景)은 대륙이 자랑하는 절경이었다.
잔설이 희끗희끗 뿌려진 서호의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나 다름이 없었다. 저 멀리 연무(煙霧)에 잠긴 서호가 보이며, 육교(六橋)라 불리는 여섯 개의 다리 가운데 영파교(映波橋)와 망산교(望山橋)의 모습이 안개를 가르며 나타나고 있었다.
검푸른 하늘에는 도장 찍은 듯한 편월이 떠 있으며, 뼛속으로 스며드는 삭풍이 아니라고는 하나 두툼한 털옷을 입는다 하더라도 몸을 움찔하게 할 한랭한 바람이 안개를 휘말아 올리고 있었다.
전당강(錢唐江)의 물이 굽이쳐 흘러드는 곳이다. 메마른 갈대들이 물 속에 허리를 담근 채 바람에 휘청이고 있고, 강기슭에는 며칠 전 퍼부었던 눈의 잔해가 흩어져 있다.
강남(江南) 깊은 곳, 한겨울이라 하더라도 눈이 오지 않을 때가 태반이다. 그러나 이번 겨울에는 꽤 많은 눈이 내렸다.
휘어진 길을 따라 갈지자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자가 하나 보였다. 어깨에 달빛을 그득 담고서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디는 자.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하며 눈빛은 흐리멍텅하다.
항주성에서는 천 명도 더 볼 수 있는 서생풍(書生風)의 젊은이. 꽤나 단정한 용모이나 뚜렷한 특징이 없어 남에게 인상을 남기지 못할 자이다.
다만 콧날이 매우 우뚝한 것과 귀 끝으로 치솟아 오른 검미(劍眉)가 그에게는 아깝다 할 정도의 준미함을 이루고 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걸어가는 청년은 세 겹의 털옷을 끼어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느끼는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달빛을 훔쳐먹은 죄로 전당강의 물살은 은빛의 앙금을 무수히 토해내고, 그 자잘한 편린으로 인해 일대는 또 하나의 화려강산으로 화했다.
청년은 가끔 기침 소리를 뱉어냈다.
그는 매우 평범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 자였다.
나이는 스물다섯에서 여섯 정도. 급제한다는 구실로 가산을 탕진해 가며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에 심취한 나머지 폐(肺)에 병을 얻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은 있는지 어느 정도의 유산을 물려받아 여생을 평온하게 지낼 수 있게 된 자이다.
자신의 우주를 만들 수 있는 아담한 장원을 갖고 있는 자.
한 명의 아내가 있고, 이제 막 재롱을 떨기 시작하는 어린 딸아이가 있었다.
며칠에 한 번씩 서림(書林)에 가서 고서(古書)를 빌려 보며, 해수병을 치유하기 위해 간간이 의원을 찾아가 단약(丹藥)을 사서 복용했다.
백검산(白劍山).
기이한 우주의 그늘을 두르고 있는 자였다.
말수가 거의 없어 그가 항주에 이사한 지 반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으며, 장원에서 나오는 날이 드물었다. 어쩌다 항주 시내를 나올 일이 있으면 호주머니 돈을 털어 진품 용정차(龍井茶) 한 잔을 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혼자 걷고 있었다.
"달빛이 좋군."
특징이 없는 목소리였다. 매우 나직하며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의 눈빛 마냥 특색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매우 평범한 두 눈.
흔히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그저 그런 사람들의 눈이었다.
그는 달빛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의 기나긴 그림자를 밟아 가며 항주 시내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간혹 체격이 장대한 자가 기녀를 데리고 달맞이를 나왔다가 그를 바라보고는 그의 나약함에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럴 때마다 백검산이란 자의 입가에는 수줍은 미소가 맴돌았다.
하여간 그는 전혀 특징이 없는 자였다.
▼
항주 시내.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항주는 해륙(海陸)의 중심지답게 모든 것이 풍요로웠다. 사해(四海)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진귀한 비단옷으로 자신의 부를 자랑하여 거들먹거리며 다니고, 항주의 절경을 완성하기 위해 먼 곳으로부터 온 시인묵객들은 세상의 부패함을 한탄한다는 구실로 오장육부 가득 말술을 채워 넣는었다.
기녀들은 돈이 많은 자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미태를 떨며 창가에서 웃음을 흘리며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갖가지 인생이 다 모인 항주 깊은 곳, 굳이 세상 구경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모든 것들이 모여 있었다.
서호서림(西湖書林).
오른쪽에는 객잔(客棧)을 끼고 있고, 왼쪽에는 약포(藥鋪)를 끼고 있는 조금은 시끄러운 곳이다. 꽤 오래 전에 세워진 서점으로 가난한 서생들이 주로 애용하고 있었다.
백검산은 느릿느릿 걸어 서호서림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골목길을 돌아설 무렵에야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항주객잔(杭州客棧)의 점소이 왕오랑(王五郞).
콧물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조금은 모자라는 녀석이었다. 그는 백검산의 헌칠한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헤헤……, 저 나이가 되도록 서점 출입을 하는 것을 보면 머릿속이 텅 비어 있음에 틀림이 없단 말이야. 게다가 책을 살 돈도 없어 바꿔 보기만 하니, 저 사람의 아내는 얼마나 불행할까?"
왕오랑은 입술을 히죽 벌리며 떠벌리다가는 바람이 옷 사이로 스미어 들자 몸을 움츠리며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백검산이 그의 말을 들은 것일까.
그의 무표정하던 얼굴에는 일순 웃음이 번졌다.
"녀석, 네 말도 맞는 말이다!"
그는 씨익 웃어 본 다음, 서호서림 안으로 성큼 접어들었다.
일점서생(一點書生).
두 눈썹 가운데 큰 점이 하나 있기에 그렇게 불리는 사람이다. 독비인(獨臂人)이며 나이는 사십 정도였다. 묘한 냉기(冷氣)를 흘리고 있는 인물이며, 그로 인해 그의 서림은 언제나 한산하기만 하였다.
백검산이 서림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 뒤에 앉아 파본(破本)을 홍사(紅絲)로 꿰매고 있던 일점서생 무(武) 대인은 힐끗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일점서생 무 대인은 매우 괴팍한 자로 그가 좋아하는 것은 고서와 독주(毒酒), 두 가지에 불과했다. 젊었을 때 거래에서 많은 사람에게 속았기에 사람을 믿지 않는다던가.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백검산을 쓸어 보며 입술을 떼었다.
"닷새 만이군, 백 서생?"
"그런 듯하오."
백검산은 희미한 목소리를 토해 내며 무 대인 쪽으로 다가갔다. 상하체가 따로 노는 듯한 걸음걸이, 바람이 세게 불기라도 하면 몸이 꺾어져 버릴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창백기가 완연한 손, 한 번 돌려 말아 쥔 고서 한 권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책은 느릿느릿한 손길에 의해 책상에 놓여졌다.
"잘 보았소이다!"
백검산의 입가에는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에는 야릇한 느낌이 스며 있었다.
기이한 증오라 할까.
하여간 백검산의 두 눈에서는 전에 없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권할 책이 또 있는지 모르겠군요?"
백검산의 얼굴 반쪽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뒤덮여 있었다.
전형적인 낙척서생의 모습. 그의 옷자락에서는 묵향(墨香)이 흘러나왔다.
"세 권이 있네, 백 서생!"
"아……!"
백검산은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무 대인이 무감각한 자세로 책상 서랍을 하나 끌어냈다. 이어 그는 귀퉁이가 너덜너덜한 고서 세 권을 꺼냈다.
"얇은 책 두 권은 백 서생에게 권하고 싶으며, 빛이 붉은 표지의 책은 백(白) 부인에게 권하고 싶소이다."
무 대인의 목소리는 매우 무뚝뚝했다.
그는 백검산만큼이나 말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여간 두 사람 모두 별다른 특징은 갖고 있지 않았다. 시정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이들이 행하고 있는 일에도 특징이 없었다.
서생이 서점에 와서 책을 빌리는 일, 그 일보다 전형적인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무 대인은 고개도 쳐들지 않았다. 그는 실로 책을 꿰매는 일을 계속하며 이렇게 말했다.
"좌원외(左員外)가 한번 오라더군?"
"좌, 좌원외가?"
백검산의 상체가 흔들렸다.
"백 서생의 고질병에 좋은 약이 입수되었다던가."
"으음……!"
"내일 새벽쯤에 보고 싶다더군. 그리고 이 말을 자네에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네!"
무 대인은 희미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좌 노인이 나를 보고자 하다니…….'
백검산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호홉 소리가 약간 거칠어지고, 바로 그 순간 그의 뇌리로 야릇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찌나 가는 목소리인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들리는 듯했다.
"수양이 부족하군! 호흡과 맥박의 조종을 더욱 치밀히 하게! 추적자들은 여전하니까!"
실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서릿발 같은 한기를 품고 있는 목소리는 전음입밀에 의해 들려 온 목소리인 듯했다.
설마……?
▼
달빛은 더욱 교교해졌다. 백검산은 어깨에 화려한 달빛을 맞으며 집 근처로 다가서고 있었다.
서호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세워진 단아한 장원이었다. 만들어진 지 백여 년이 됐으며, 사계를 번갈아 매란국죽(梅蘭菊竹)이 고운 자태와 굳은 절개를 자랑하고 있는 세외의 선경이었다.
거산장(巨山莊)이라 불리는 곳, 바로 백검산의 거처였다.
그는 반년 전, 아내와 딸과 더불어 서호의 거산장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달빛에 반짝이고 있는 뜨락 주변에는 잔설(殘雪)이 흩어져 있었다. 얼어죽은 국화 줄기가 서 있고, 비로 쓸어서 모은 눈더미가 다섯 군데나 있었다. 가산(假山)이라고 하기에 부족한 석경(石景)이 하나 떨어져 있으며, 회랑의 길이가 이십 보도 되지 않는 목조건물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회랑 아래, 얼굴이 파리한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뜨락에 나와 있었을까? 여인의 입술은 병적이라 할 정도로 파리했으며, 은은한 자색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일찍 다녀오시는군요?"
여인은 백검산을 향해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산화랑(山花娘).
근처 사람도 얼굴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외부 출입이 적은 요조숙녀였다. 백검산의 내자(內子)로, 지난 가을 내내 국화를 기르며 규방의 권태로움을 씻어 내던 여인이었다.
아주 희고 가는 손가락을 지니고 있으며, 전신에서는 퇴폐적이라 할 정도로 대단한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매우 뾰족한 콧날, 그리고 유난히도 발달이 된 앞가슴, 여인치고는 꽤나 큰 키였다.
허리는 부러질 듯 가늘며, 둔부는 풍만히 발달되어 꽤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관능미를 자아내게 했다.
"취옥(翠玉)은?"
백검산이 묻자,
"태태(太太)의 품에 안겨 잠들었습니다!"
산화랑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두 사람은 부부지간.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산화랑은 백검산을 힐끗 쓸어본 다음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취옥에게는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으음……!"
"무도(武道)는 무정도(無情道)입니다. 머릿속에 정감을 채워 두면 손이 느려지게 됩니다. 손이 느려지면 검이 무디어지지요."
"혹독하군!"
백검산의 검미가 찌푸려졌으나 산화랑은 자신의 고집을 숙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정했다.
"그대는 전 무림의 운명을 거머쥐고 있는 존재입니다. 아십니까? 그대는 그대의 천재성을 오직 하나의 길, 무도 완성에 쏟아 부어야만 합니다!"
실로 야릇한 말이다. 병든 서생에게 무도의 완성이며, 중원의 운명이라니?
"취옥은 위장을 위한 여아(女兒)일 뿐입니다. 너무 자주 대하면 진짜 정이 들지 모릅니다. 취옥에 대한 것은 모두 제게 맡겨 주십시오!"
위장이라니?
그렇다면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닌 타인들이란 말인가?
"또한 저에 대해서도 어떠한 정념을 가지시면 아니 됩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이니, 우리 두 사람은 정해(情海)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산화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기에 그녀의 냉요(冷妖)함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돋보이게 했다.
"저는 천예교방(天藝敎坊)의 총사(總師)로, 임시로 그대와 연수한 것뿐입니다. 복수를 위해! 그리고, 복수가 끝나면 남남이 되는 것이지요."
산화랑이 차게 말할 때,
"훗훗……, 그대 같은 빙녀(氷女)와 사랑에 빠질 정도의 바보는 아니지!"
백검산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리고 가난뱅이 무사 처지에 여인은 너무 과분하지."
야릇한 조소의 웃음 가운데, 그의 머리카락이 불어닥치는 마파람 속에 흐트러지고 있었다.
아아,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여!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산화랑보다도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내 비록 바라지 않은 상태에서 대륙방(大陸 )에 선택되어서 무도자가 되었고, 항차 피로 대지를 씻어야 하는 대륙혼(大陸魂)의 처지이나 개처럼 끌려 다니지는 않소! 내게도 고집은 있소."
백검산!
그의 두 눈에서는 일순 푸른 섬망(閃芒)이 뿜어져 나왔다. 적어도 팔십 년 수위의 내공은 있어야 쏟아낼 수 있는 가공할 안광이었다.
낙척서생 백검산!
설마 그가 진정 대륙의 마지막 운명이라는 대륙혼이란 말인가.
"피의 빚을 피로 갚아 주는 데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검을 쥐지는 않았을 것이오. 내 비록 검공망 노야(老爺)에게 반 강제로 납치되어 삼십삼은자류(三十三隱者流)의 공동전인 겸 십팔세가(十八世家)의 공동 후계자가 되기는 하였으되, 나 자신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니오! 나는…… 나요. 그뿐이오."
백검산은 차갑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소책자 한 권이 들려 있었다.
"……!"
"……!"
두 사람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한 권의 책이 전달되었다.
서리를 머금은 듯한 한 떨기 살아 있는 꽃. 그녀를 눈앞에 두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사내라 불리지 못할 것이다.
백검산의 두 눈은 너무도 담담하였다. 그는 미인을 눈앞에 두고도 어떠한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듯했다.
백검산은 휘청이는 뒷모습을 보이며 서재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으며, 산화랑은 문이 닫히며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아아, 내 마음이 어이해 이리 흔들린단 말인가!"
산화랑의 이마에는 가는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녀는 술 취한 듯 휘청거렸으며, 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무는지 핏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무사가 되면 누구든 달라지거늘, 백검산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떠돌이 낭인서생 때와 마찬가지이다. 백검산 저 자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산화랑은 숨을 깊이 빨아들였다. 차가운 공기를 폐부 가득 담지 않는다면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기 때문이었다.
깊고 깊은 밤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가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
거산장 지하.
그곳에는 철옹성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지하 석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미줄 가득한 석도(石道)를 따라갈 경우 녹이 슨 철갑문을 보게 되며, 그 문을 지나가게 되면 지하로 향해 뚫린 계단을 디디게 된다.
계단을 아흔아홉 개 디딜 경우 실로 거대한 지하 궁전에 도달하게 된다.
천연적인 동부를 손질해 만든 거대한 동부. 만여 명이 동시에 들어찬다 해도 비좁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만겁열화갱(萬劫熱火坑).
송조(宋朝)에 세워진 지하 뇌옥 가운데 하나였다.
황실의 대역죄인들을 가두는 곳으로 간신히 사형만을 면한 자들이 죽을 때까지 갇혀 지냈던 곳이다. 그 이름과 장소가 비밀로 전해졌기에, 송조의 멸망과 더불어 세인들의 뇌리에는 영원히 망각된 장소였다.
그곳은 원의 침입 가운데 붕괴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만겁열화갱 안에 갇혀 있던 오천여 명의 수인(囚人)들은 떼주검으로 화하고 말았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이 널려 있으며, 녹이 붉게 슨 쇠사슬이 기둥에 칭칭 감겨져 있었다. 지극히 혼탁한 공기가 호흡을 방해하며 곳곳에서 스물스물 기어다니는 독충(毒蟲)들이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가히 현실세계의 지옥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백검산의 연무관이었다. 거산장에 은둔처를 정한 이유는 바로 거산장 지하에 만겁열화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곧 무너져 버릴 듯한 천장, 균열이 가 있는 청석(靑石)의 기둥들, 그리고, 사방에 널리어 있는 골편(骨片)들.
백검산은 이곳에서 거의 반년을 보낸 것이다. 그가 의지견정하지 않았다면 반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좌 노야(左 老爺)는 나를 말려 죽이고자 함에 틀림이 없다. 훗훗……, 그렇지 않다면 어이해 썩은 독장(毒 )이 가득한 곳에서 연검을 하라고 한단 말인가?"
백검산은 만겁열화갱 가운데 서 있었다.
지옥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 눈길을 둘 마땅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백검산은 그러한 풍경에 이미 익숙한 처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가에 고졸한 미소를 만들었다.
'여기 올 때마다 나를 선택한 운명을 증오한다. 그러나 이 길이 나의 길이라면 피하지 않겠다.'
그는 천천히 상의를 벗는데…… 아아, 이럴 수가? 그의 앞가슴에는 무수한 상흔(傷痕)이 그어져 있지 않은가?
핏빛의 뱀이 달라붙어 있는 듯이, 그의 앞가슴에는 수백 개의 검흔(劍痕)이 그어져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의 허리에는 몸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강철대환(强鐵大環) 세 개가 둘러져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한가하게 돌아다니는 시각에도 무공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무공에 입문한 시기는 너무 늦다.
절정의 고수 반열에 들기 위해서라면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검을 잡아야 했다. 검의 냉혹함을 친근하게 여겨야 하며, 내외공(內外功)을 부단히 연마해 무사의 감각을 항시 견지해야 했다.
강호명파들의 훈련법이 혹독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백검산은 이미 뼈가 다 굳은 후에야 무사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하기에 그는 속성의 방법을 택했으며, 불철주야 무공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대륙의 혼으로 자라나는 백검산, 그는 묘한 구석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천애고아로 알려졌으며, 묵향에 취해 낭인서생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종남산(終南山), 태백산(太白山), 낭산(狼山), 모산(茅山)의 사대서고(四大書庫)를 주유하며 글을 읽었으며,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지난 봄날까지 계속했었다.
운명이 궤적이 바뀌지 않았다면 떠돌이 낭인서생으로 일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번뇌가 생기지. 크크……, 내가 미친 듯이 글을 외우는 이유는 그 때문일 뿐, 다른 것은 없어.
백검산은 야릇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라면 그의 지혜가 초인적이라는 것이었다. 십지마련에 붕괴되어 버린 대륙무도계(大陸武道界)의 마지막 은자들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좌백충(左伯忠) 노야는 반 강제로 나를 납치했다. 훗훗…… 나는 그가 무림의 숨은 천하제일인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경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를 위해 이 차가운 녀석을 쥘 수밖에 없었다! 존경하지는 않지만 같은 남자로, 그의 집념을 좋아하기에!"
백검산의 손에는 철검(鐵劍)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실로 무거운 장검(長劍)이었다. 그 무게는 가히 이백 관에 달하며, 그로 인해 실전용 장검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백검산은 그 육죽한 장검으로 하루에 수백 차례씩 발검연습을 해왔다.
처음에는 검집에서 검을 끄집어내기도 어려웠으나 지금은 어린아이가 공깃돌 던지듯 가볍게 검을 끄집어내었다.
"꼭두각시놀음이다. 가진 자와 빼앗긴 자들의 지루한 도박은! 훗훗……, 그리고 나는 멍청한 꼭두각시가 되고 만 것이다!"
백검산의 두 눈에서 정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하여간 문도(文道)에 이어 무도(武道)에 든 이상, 무도에서도 고금제일인이 되겠다!'
번쩍―!
두 눈에서 새파란 광망이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그의 손이 곡선을 그렸으며, 무거운 장검은 호선(弧線)을 끌며 철벽을 향해 폭사되어 나아갔다.
파파팟―!
철벽에서 불똥이 튀며 거미줄 같은 파흔이 새겨졌다.
철벽에는 무수한 파흔들이 새겨져 있으며, 파흔이 새겨질 때마다 그 깊이가 깊어졌다.
그가 검강(劍 )을 뽑아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철벽은 종잇장 마냥 갈라질 것이다.
"핫!"
백검산은 가벼운 기합 소리를 내며 신검합일(身劍合一)하며 위로 날아올랐다.
한 마리 용이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듯, 백검산은 표풍무형(飄風無影)의 신법으로 수직으로 날아오르며 신형을 팽이처럼 돌리기 시작했다.
보라! 그의 손에 쥐어진 철검이 무수한 은파(銀波)를 뿜어내는 것을.
파팟― 팟―!
나비 떼가 날아오르는 듯이, 수없이 많은 꽃잎이 태풍에 날아오르듯이, 무수한 검날이 잔영을 만들며 드넓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교(巧)와 정(靜), 쾌(快)와 급(急)…….
섬전이 대지를 가르듯 수천 개의 검파가 휘몰아치다가는, 어느 순간에는 봄날의 화사한 햇살 마냥 부드럽게 변했다.
백검산은 수백 가지의 검초를 잇달아 사용하며 돌기둥 사이를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찌나 빨리 신형을 움직이는지 한 줄기 연기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소림(少林)의 복호나한검(伏虎羅漢劍),
곤륜(崑崙)의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
공동( )의 복마대구식(伏魔大九式)과 복마소구식(伏魔小九式) 연환십팔검초(連環十八劍招),
화산(華山)의 매화검류(梅花劍流) 옥매산화십절식(玉梅散花十絶式),
점창(點蒼)의 사일백팔검(射日百八劍),
개방의 풍운용호검(風雲龍虎劍),
…….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각대방파의 절예들.
백검산의 몸뚱이는 검광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백검산은 이미 천하 고수의 서열에 올라간 것이다.
▼
"쓰군!"
백검산은 세 알의 환약(丸藥)을 질겅질겅 씹어먹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가 복용한 단약은 철골금단(鐵骨金丹)이라는 것으로 한 알 복용할 때마다 내공이 급증하는 성단(聖丹)이었다.
백검산은 단아한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그의 면전에는 두 권의 책자(冊子)가 놓여 있었다.
<천음무보(千音武譜)>
<무유진경(無遊眞經)>
두 권의 책자는 모두 무공비학서였다.
능히 일파를 이루고도 남을 비급들인 바, 그 중 한 가지만 익혀도 능히 강호의 일각을 제패할 수 있었다.
"어리석은 노인네들. 아아, 사문의 비전은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보여 주지도 않는다던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를 위해 이것을 전했고, 그로 인해 살해당하다니……!"
백검산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무도(武道)란 희생의 길이라더니, 과연 무의 길은 극기의 길이다!'
눈빛이 야릇하게 타올랐다.
역용(易容)하고 있을 때에는 매우 흐릿한 눈이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그의 눈빛은 지극히 순수하고 격정적이었다.
'나는 무혈(武血)을 갖지 못한 녀석이다. 여타한 자라면 이 두 권의 비급을 보고 뜨거운 감루를 흘릴 텐데, 내게는 지겨운 글로만 여겨지니…….'
백검산의 두 눈은 점점 깊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익혀야 한다. 승부의 세월을 단축하기 위해!'
그는 두 권의 비급을 읽었고, 그러는 가운데 그의 표정은 강철로 만든 신상처럼 굳강하게 경직되었다.
<대륙혼(大陸魂)에게!
비급의 원주인들은 모두 살해되었네.
철목표와 혈류흔, 그리고 고죽생. 그들은 십지마련에서도 가장 잔혹한 자들이네! 그 자들은 아직도 자네를 찾고 있네. 무공을 속히 완성시키지 않으면 그 자들에게 제거될 수밖에 없네.>
비급 내부에 적힌 글은 일점흔(一點痕)이라는 자가 적은 글이었다.
과거의 중원제일자객(中原第一刺客)이며, 사십 년 전 황하 기슭에서 더 이상 죽일 자가 없다며 혈검(血劍)을 부러뜨렸던 자. 그는 머나먼 천축(天竺)에 가서 머물렀는데, 중원천하에 불어닥친 혈풍을 알고 중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오래 전부터 흠모하던 검공망의 우비위(右臂衛)가 되었고, 검공망 좌백충이 택한 천하 기재의 무공교두(武功敎頭) 노릇을 반년 전부터 시작해 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서호서림(西湖書林)의 일점서생(一點書生)!
그의 치밀함이 아니었더라면 백검산의 종적은 이미 십지마련의 추적자들에게 노출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은밀하게 십지마련의 살수들이 백검산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확인되기 전에는 추적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백검산이 항주로 들어온 것은 일점흔의 살수 경력에 기인한 바 컸다. 이렇듯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항주 한복판에서 잠룡(潛龍)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일점흔의 글은 아래의 글귀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익힌 다음, 잊어버릴 것!>
실로 기이한 주문이었다. 익히는 것은 가능할 것이나, 어찌 익힌 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백검산은 대수롭지 않은 듯 다음 장을 넘겼다.
세필로 적은 글귀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백검산은 한 자 한 자 글귀를 뇌리에 담으며 두 권의 비급을 탐독했다.
<대륙혼(大陸魂)!
온 천하가 죽이고자 하는 존재이다.
십지마련의 암중 지배하에 있는 무림천하에 풍운을 몰고 올 존재. 그가 원하는 대로 성장을 한다면 무림계는 또 한 차례 혈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 나이 십오 세가 넘어 처음으로 무도에 들 경우, 임맥이 막히고 근골이 완전히 굳어 상승무도(上昇武道)를 익힐 수 없다!
십구 세라는 나이는 검을 쥐기에는 너무나도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은자천주(隱者天主)인 검공망은 백검산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 검산의 두뇌에는 가공할 지혜가 있다. 지혜는 절대 속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검도(劍道)는 속성될 가능성이 있다.
하여간 검공망 좌백충은 백검산을 선택했다.
글밖에 모르던 서생을 살인기계로 키우려 하다니.
대체 그에게는 어떠한 속셈이 있단 말인가.
첫댓글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