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4명이 되기까지의 몇년의 세월.....
처음 여자친구에서 애인이 되고,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족이 된 그 간의 사연을
빛 바랜 사진 부터 하나씩 하나씩 들춰내어 그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1996. 5월의 어느날에
난 88학번, 아내는 90학번.
같은 나이면서 난 학교를 1년 일찍들어갔고, 아내는 또 한번의 시험을 치뤘다.
그래서 두학번의 차이가 생겼고.........
군대를 다녀와 복학해서 2,3,4학년을 우린 한 방(전공실)에서 생활했다.
같은 공업디자인 전공이었기에 함께 밤새는 일도 자주 있었고, 그랬기에 더 많이 가까울 수 있었을게다.
2,3학년 때까지 그냥 후배로만 생각했던 그녀가 4학년이 되면서 여인으로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우린 그렇게 그렇게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이 사진이 바로 그 파릇파릇했던 대학 4학년때 함께 강의 들으러 가던 중에 찍은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어떤진 모르겠지만
예전엔 연인이면 대부분 거쳐야 했던 언약식. 1994년 7월 14일....
우린 절친했던 친구들 몇 앞에서 서로의 사랑을, 연인임을 공식적으로 약속하는 그런 절차를 가졌다.
커플반지도 준비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을 쪼금씩 쪼금씩 키워나갔다.
연애시절 참 자주도 싸웠다.
어찌보면 그 싸움을 즐겼을런지도 모를정도로 자주.....
아마 모르긴 몰라도 1년 365일 중에 300일은 싸웠던 것 같다.
그렇게 그렇게 싸우면서 사랑의 깊이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참 생각해보면 우수운게 사랑만 하기엔 너무 밋밋했었는가보다. 그토록 자주 싸웠던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사진은 우리 연애시절 다섯손가락 꼽을 만큼 안다녔던 데이트 중 한 사진으로 기억된다.
1996년 가을날 애버랜드에서.....
스물 여덟살의 해였던 1997. 10. 18(토) 오후 1시
고향인 전북 군산 작은 아버지 공장의 조그만 정원에서 야외결혼식으로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 해의 5월에 양가 상견례에서 바로 결혼날짜를 잡고 후다닥 일사천리로 진행을 시켰다.
어차피 예식장은 미리 선정해놓은 상태였기에 무리없이 진행이 되었다.
그 옛날 중학교 때 작은아버지 공장 부지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이미 못을 박았었다.
"작은아부지..제가 요기 야외에서 결혼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이다.
주례선생님(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으신 큰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인생사의 세가지 덕목.....
사랑, 건강, 순리...... 우리 가정의 家訓이다.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다.
3박4일의 일정으로 차를 렌트해서 편안하게 코스별로 여행을 즐겼다.
정말 쾌창한 그런 날씨 속이었기에 그 여행의 즐거움이 몇 배는 더 했던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아내에게 평생 잊지못할 기억 하날 또 만들었던 여행이기도 했다.
그 기억은 바로 신혼여행의 첫날밤에 일어났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본 배탈 덕분이었던 것이다.
여행 첫 날 낮에 먹었던 생전 처음 먹어본 갈치국이
그 날은 생각만치 몸에 잘 맞질 않았었나보다.
평생 발그래지면서 콩당 콩당거리는 기억으로 남아야 할 첫날밤에
난 식은땀과 오열 속에서 그렇게 밤을 지세워야 했었던 것이다. 흑흑흑.....
결혼한 그 이듬해, 그러니까 1998년의 여름휴가때이다.
경상도를 타고 내려가듯 가면서 들린 해인사의 초입에서 찍은 사진인데
사진에 보여지는 모습은 둘 이지만 사실은 셋이다. 그 때 아내는 임신 3개월이었으니깐....
엄마의 몸속에서 아이가 무럭 무럭 자라듯 우린 부부애를 키워나가면서
우리는 엄마,아빠의 마음가짐을 하나씩 하나씩 준비하고 있었을게다.
1999년의 1월 초쯤으로 기억한다.
일요일의 아침......
만삭의 아내가 집근처의 다니는 교회에 가기위해 아침에 준비를 하는 모습속에서
엄마로써만이 가질 수 있는 따스함이 침실로 찾아드는 아침 햇살과 함께
눈부시도록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 아내가 하던 말을 기억한다.
"아무런 탈 없이 우리 아가 건강하게 잘 태어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를 할 꺼라고.....
1999년 2월 6일 13시 50분....
우리의 첫 아이 준형(駿亨)이가 태어났다.
엄마의 뱃속에서 38주1일 만에 세상의 그 빛을 보려 나온것이다.
아내는 분만실에서 내내 그 고통을 잘 참아내주었다.
다른 이들처럼 고통의 소리를 질러보라 해도
아내는 장녀답게 아주 작게 쉰소리만 세어나올뿐 몇시간의 고통을 잘 참아내주었다.
그런 아내에게 다시 한번 여기에다가 감사한 마음을 옮겨본다..... 사랑해!
그리고 준형이는 이 사진이 꽂혀있는 엘범을 보면서
늘 이런 말을 한다. "아빠..엄마가 많이 아파하면서 나 낳은거지이..!" 라고 말이다.
태어난지 51일째 되는 날의 준형이 모습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책임감과 함께 참 많은 것이 경이로울뿐이다.
아이의 눈,코,입,손,배꼽,꼬추...발톱,발가락까지....전체가 다 신기하기만 했다.
얼마전(2002.8.16)에 아랫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어 준형이와 다시한번
똑같은 모습을 해보았다. 준형이 曰 "아빠..나 많이 컸지!"
1999년의 초여름
경기도 벽제 근처에 위치한 중남미 문화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그런 편안한 사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엄마의 사랑이 듬뿍 전해지는 듯도 싶고....
개인적으로 참 아끼는 그런 사진이다. 사랑이란 이름의 사진 한장 !
1999년의 여름...보는 바와 같이 불국사이다.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이 곳은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다녀오고 나서 처음으로 밟아본것이다. 우린 일부러 여행지를 여기로 정했다.
그 때의 그 길을 첫째아이와 다시금 밟아보는 기분은 참 뭔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간간히 흩뿌리듯 내려주는 그 여름비와 함께 왜 그리도 운치가 넘치던지.....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보는 아기의 모습에서 동심을 느끼게 해주었던 기억,
절 초입의 사천왕을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기의 눈망울....
또 언제고 아이와 함께 다시금 걸어야 할 곳으로 생각되어진다.
생후 20개월 가까이 된 시기로 기억한다.
아기 때부터 꼼지락 꼼지락 손으로 무엇을 만지고, 느끼고,
관심의 표현이 다른애들보단 좀 더 있어보였다. 그리고 사물의 직관력과, 기억력 등등도 말이다.
그리고 엄마, 아빠 다 그러질 못한데 참 순하게 자라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아마도 이 사진은 엄마와 처제 함께 한 자리였는데 이모에게 재롱을 부리는 그런 모습이다.
1000년대에서 맞는 마지막 겨울.....
처음 맞이하는 준형이의 겨울은 상당히 혹독했었는가보다.
코감기가 자주 찾아와 사진에서처럼 코 밑이 성할때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형이는 아픈 내색을 잘 안했다.
그 모습이 한편으론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많이 된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2000년 1월 22일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원칙적인 돌은 2월 6일어야 맞겠지만 여러 사정상 이 날 치룰수 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회사에서, 친구들이, 동네에서 참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셔서 그 자릴 빛내주었다.
그 날 사회자의 갑작스런 권유로 축가얘기가 나와 동네의 친한 형님이자
베네치아 음악학원의 원장님되시는 형구형께서 축가를 뽑아주셨고, 지금은 고인이 된
아내의 대학동기인 류지현이가 '개구리 왕눈이'를 멋드러지게 불러주었다.
그리고 그 날..... 그 겨울의 첫눈이 다 마감하고 잔칫집을 나오는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2000년의 봄.....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릴깎기 바로 얼마전이었을게다.
참 주위에서 보면 태어날때도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나오기도 하더구만
그러니까 태어날때의 머리숱 정도가 이 사진의 준형이 정도도 있더구만
우리 준형이는 참으로 더디다. 물론 나 역시 그랬기에 피는 못 속이는가보다.
준형이 옆의 사진이 내가 6살때의 유치원 졸업기념 사진이다.
주위에선 붕어빵이라 하는데 난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얼마나 더 성장하면 알 수 있을까!
준형이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내가 목욕을 시켜봤다.
아빠의 서투른 몸짓이 약간은 겁내하면서도 물이 닿는 그 느낌이 좋았는가보다.(내 생각일려나!)
암튼 목욕하는 내내 둘이 신나하면서 그렇게 즐겁게 목욕을 마친 것 같다.
나는 우리 아부지와 목욕탕을 간 기억이 한 번 밖에 없다.
어릴쩍 어무닌 형과 함께 가족탕에 가 둘을 다 씻겼었고, 더 커서는 형과 둘이서 다녔으니깐...
그래서 어릴쩍엔 목욕탕에 아빠와 자식들이 함께 오면 왜 그리도 부럽든지,
하지만 이젠 하나도 부럽지 않다. 왜!
나두 남부럽지 않을 자식들이 둘 씩이나 있고, 또 애들을 그렇게 데리고 목욕탕에 가니깐.......
2000년의 여름으로 기억한다. 애나 어른이나 할것없이 먹고 살것다고....
우리 준형이가 그 동안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후 멋지게 숟가락질을 하는 모습이다.
저녁 준비를 하시는 장모님과 아내 사이에 왔다리 갔다리 하던 준형이는
어느 틈엔가 밥상 앞에 와서는 언제나 처럼 자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성큼....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진 말고 연사(연속촬영)로 몇 장이 더 있지 아마!
하지만 지금(2002. 여름)은 아니지만 한 동안 늘 포크로 끼니를 떼우고저 하는 준형이의
습관도 생겼었다. 포크 아니면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의 그런 습관이.....
저 멀리 있는게 익산에 있는 현존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규모가 크다하는 미륵사지 9층석탑이다.
저 시기가 2000년의 여름이니깐 사진을 찍고 난 그 몇 달후 해체 복원된다 하였었다.
우리가족(나, 아내, 준형이, 신형이:임신 몇개월쯤)이 보내는 여름휴가의 사진이다.
준형이가 성큼 자라 저 끌고 가는 유모차를 졸리면 타기도 하고 직접 끌고 다니기도 하는 그런 때이다.
그 때나 지금(2002년 여름)이나 보면 우리 준형이는 상당한 운전실력의 소유자임은 틀림이 없을게다.
전진, 후진, 죄회전, 우회전을 무리없이 잘 이끌어나갔으니깐 말이다.
그러면서 요즘은 그런다. " 나 커서 아빠차(체로키 2.5 수동) 운전할꺼다" 라고......
결혼해서 얻은 두번째의 전세집.....준형이 방에서 찍은 모습이다.
뒤에 걸려있는 사진은 준형이의 돌 잔치때 전면에다 걸어놓은 사진이다.
휴일의 한 낮에 자는 준형이의 모습은
창가에 스며드는 따사로운 오후 햇살과 함께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아이들의 자는 모습속에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늑함과 온화함 같은 것이 들어있다.
그 속에 사랑스러움도......
근데 어른들의 자는 모습 속엔 과연 무엇이 담겨있을까! 없을까!
엄마는 태교 中, 준형이는 공부 中, 그리고 신형이는 엄마를 느끼고 있는 中......
이 때가 아마 엄마 뱃 속에서 신형이가 6~7개월 쯤은 자랐을 때이다.
나름대로의 태교를 아내는 잘 지켜나갔다.
동요도 들려주고, 만화도 많이 보고, 그리고 좋은 음악도 많이 듣고......
그렇게 우리 신형이는 엄마 뱃속에서 모성을 느끼면서 하루 하루를 보냈을게다.
아이는 늘 카메라를 봐 왔을것이다.
태어났을 때 부터 늘 그렇게 옆에 있었으니깐 말이다. 그래서 많이 궁금했을것이다.
어떻게 찍히는 것일까! 무엇이 보이는 것일까! 나름대로의 많은 궁금증이....
이 날 역시 준형이의 모습을 담고저 삼각대에 카메라를 거치 시켰는데
준형이가 늘 카메라 앞에만 서 있었는데 성큼 성큼 카메라로 왔다.
그러더니 내 자릴 뺐어버렸다. 그러더니 앵글안의 앉아있는 엄마를 쳐다본다.
옛 어른들 말씀에 아이들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했다.
그래서이리라! 성큼 성큼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에 마냥 신기하고 대견하기만 하다.
이 놈이 태어나 샀던 아기 목욕통에 이젠 혼자 첨벙 첨벙 신나 물놀이를 한다.
정말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아내와 아이들이 다니는 교회이다.
경기도 일산에 이살 와서 처음부터 쭈욱 다니고 있는 개척교회인 아담한 그런 교회이다.
목사님도 좋고, 그리고 맘씨 좋은 많은 분들이 다니는 그런 교회.....나눔의 교회.
2000년의 아내 생일때 난 이런 생일 선물을 준비해 보았다.
교회의 벽화를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교회분들도 흔쾌히 승락을 해주었고,
며칠의 짬을 내서 틈틈히 그림을 그려내었다. 정말 좋은 생일선물로 기억된다.
그해의 크리스마스날 우리 한가족이 모였다. 준형이와 만삭의 신형이, 아내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말이다.
1999. 2. 6 일날 준형(駿亨)이가 태어났고,
2001. 1. 18 일날 14시 35분(37주 6일)에 둘째 신형(信亨)이가 태어났다.
둘 다 같은 병원에서, 한 의사선생님께서 받아주셨다. 이기훈 선생님.
큰 애는 3.2kg , 둘째는 2.88kg 으로 건강하게 세상의 빛을 보았다. 사랑스런 나의 아이들....
문산<->서울역 까지 가는 기차가 있다. 그 기차가 일산역에서도 정차를 한다.
소담스런 통근기차내지는 마을기차로 보면 맞을 그런 기차이다. 꼭 비둘기호 기차마냥.....
너무도 운치 있는 기차라 그런 기차가 내가 사는 일산을 지난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 또한 한켠에 자리 잡고도 있다.
아마도 지하철하고는 또 다른 맛이 있으니깐 말이다.
준형이와 그 기차를 둘이서 탔다. 올림푸스-PEN FT 라는 구형 카메라 한대들고 편안한 차림으로 그렇게....
왼쪽 사진은 내가 찍은 것이고, 오른쪽 사진은 준형이가 날 찍어준것이다.
아무리 아무리 쳐다봐도 준형이가 찍은 사진이 비교도 안되게 훨 나은 것에 감동을 느끼게 한다.
세파에 찌든 사고에 도식적인 방식으로 밖에 찍을 줄 모르는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준형이와 단 둘이 떠나는 여름여행이었다.
정말로 재미 있었던 기억이다. 직장생활 덕분에 신경을 못 써 아쉽기도 많이 아쉬웠었는데
이렇게 둘이서 훌쩍 떠나니 서로의 모든것들을 좀 더 밀착시킬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런 생각들로 서로를 더 가깝게 만들었던 여행이었다.
종착지 없이 차에 뻐너, 아이스 박스에 잔뜩 실고 그냥 떠났던 여행.......
가는 도중에 라면 끓이다 비가 와 다시 타고 가서 아름드리 나무 아래서 제대로 끓이던 중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데 뭐 그 속에서도 둘이 아랑곳 않고 팅팅 뿔은 라면발을 맛나게 먹던 기억,
가는 도중 계곡가에 송사리 잡는다고 잡다가 둘 다 푹 빠져 옷 엄청시리 젖어 준형이 감기 걸렸던 기억들.......
정말 소중한 기억이다. 또 언제 준형이와의 단 둘이 가는 여행길이 생길까!
이때도 어리지만 더 어릴쩍부터 난 늘 준형이에게 최고라고 손짓을 해주었다.
준형이 또한 늘 그렇게 생각하고 늘 이렇게 응수해준다. 자기가 최고다고.....
무언가 아빠와의 교감이 어긋났나보다. 그래서 이런 표정이 나왔을게다.
신형이가 태어나서 그리 오래지 않았을 때의 가족사진이다.
언제부턴가 탈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었던 큰아들 준형이,
어찌된 영문인지 준형이완 상반(?)되게 튼튼하게 잘 자라주는 대견한 둘째 신형이,
사내아들놈 둘을 고통 참아내며 자연분만으로 건강하게 낳아주신 우리 아내와 함께
그렇게 그렇게 한 자리에 모여 예전부터 가끔 들리던 중남미 문화원의 그 벤취에 앉아 촬영을 했다.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받은 엄마와 신형이의 모습...
언제나 처럼 늘 최고라 한다.
그리고 아빠 역시 그런 준형이를 최고로 느끼고 있다.
고향인 군산에서 작은아버지의 두 딸이 서울로 놀러 올라왔다.
방학기간의 잠시 짬을 내서 오는 그런 여행이었다. 나는 사촌동생들과 코엑스를 둘러보기로 했다.
준형이와 함께 도착한 코엑스엔 아직 사촌동생들이 도착전이었고, 우리 준형이는 긴 낮잠에 빠져있었다.
이런 곳에서도 아이이기에 용납되는 아주 깊은 그런 낮잠에......
코엑스 內에 있는 아쿠아리움이란 곳이다.
상어가 득실거리기도 하고, 수중 생태계가 다양하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준형이는 다른 것에는 다 관심을 가졌지만 유독 상어에는 겁을 많이 냈다.
그래서 결국엔 상어가 다 피한(?) 상태에서 이 사진을 건질 수 밖에 없었다. 하긴 상어가 무섭긴 무섭지.....
둘째 신형이가 태어난 그 해의 겨울이 되었다.
많이 자랐고, 늘 건강하게 커가고 있는 것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
언제고 한 번 가고파 했던 원당 종마장을 둘째와 함께 거닐었다. 해도 뉘엿 뉘엿 저물고,
계절이 계절인지라 흐드러졌던 나무잎들도 어느새 땅에 쌓여만 가고 있었다.
많은 인파들의 대열속에 우리도 가족임을 새삼 느껴보았던 즐거운 기억이 있다.
홀로가 아닌 우리라는 느낌의 기억이.....
아내는 동물을 좋아하면서 보는 것과는 달리 근처에 오는 것을 상당히 겁내한다.
이 모습도 상당히 비장한 각오로 접근했었으며, 아이에게 호기심을 자극시키기 위한 엄마의 당당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큰 맘 먹고 떠난 준형이와의 나들이다.
둘째 신형이는 장모님께 염치불구하고 맡겨놓고, 아내와 준형이 이렇게 셋이서 에버랜드로 향했다.
날씨도 매서웠었고 했지만 그 때의 준형이는 동물에 참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부터 호랑이, 사자 등을 노랠 했어고, 멀리 케냐까지 가지 않고 용인으로 가서
해결할 수 있었던거에 얼마나 다행이든지.....그리고 타고 싶은 많은 놀이기구가 아직 덜 자란 덕분에
참고 뒤돌아 설 수 밖에 없었다. 과연 그 기구들을 얼마다 더 지나면 타게 될까!
준형이가 잠이 들었다. 아낸 내 카메라 가방에 삼각대 그리고 캠코더 가방까지 짊어매고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최고의 핫도그맛을 자랑하던 마네킹이 준형이에게 딱 걸렸다. 우리 준형이는 여지없이....
회사에 드라마 오픈세트장이 꾸며졌다.
그 어릴쩍 동네를 누비고 다니던 놀이기구..... 갖가지 색깔의 말들...그 말위에 올라타 신나게 흔들어 댔던 기억들...
그 놀이기구가 시대극의 오픈세트장에 들어섰다. 똑같은 기억으로 준형이 역시 열심히 흔들어 댔다.
예나 지금이나 동심이 어찌 다를 수가 있을까!
자유로를 지나 통일동산 근처에는 프로방스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일산에 살게 되면서 이따금씩 찾는 음식점이다. 이 날 우리가족 모두가 그 곳을 찾았다.
준형이는 제법 자라 다양한 표정을 연출 할 줄도 아는 시기가 되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엄마, 아빠에게 시위하는 법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을 정리,
표현할 줄 아는 그런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신형이는 탈없이 무럭 무럭 자라나 주고 있었고.....
CEC 캐논사랑 동호회에서의 첫 출사 였다. 장소는 남산 한옥마을이었다.
충무로에 있는 타임포토에서 집결해서 한옥마을로 이동, 촬영을 몇 컷 하였다.
느지막한 시간 탓에 그리 많은 사진은 찍을 수 없었고,
그 이후 질펀허게 술자리만 길어졌다. 물론 준형이와 함께 한 이유로
더 이상 길게 이어질수 없었지만 준형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힘들어했다.
오죽했으면 그 날 밤 잠꼬대를 " 아빠.. 그만 가자~~아 " 라고 까지 했을까!
준형이와의 첫 영화 관람이었다.
영화 제목은 '몬스터 주식회사' 3D 에니메이션으로 잘 구성되어진 영화였다.
영화 시종 내내 말똥 말똥 자릴 지키며 보던 준형이의 모습에서 안심이 되었다.
앞으로도 부담없이 함께 영화 상영을 할 수 있을 테니깐 말이다.
그 '몬스터 주식회사' 영화 내용은 대략 이렇다
괴물도시의 에너지원은 다름 아닌 어린이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그 비명소리를 채집한 다음
그것을 고성능 동원력으로 만드는 회사가 바로'몬스터 주식회사'이다.
거구에 온 몸이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덥힌 몬스터 주식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괴물인 설리와
단짝 괴물인 외눈박이 괴물 마이크가 실수로 몬스터 주식회사에 들어오게 된 꼬마숙녀 부를
인간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한 좌충우돌의 재미진 내용이다.
2002년 임오년의 음력설 얼마 전..... 준형이의 세배연습 中
"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
2002년 2월 1일(음력12월 20일)
준형이가 세상에 태어나 맞이하는 세번째의 생일이다.
2002년 되어서 한 가족의 첫 나들이었다.
일산 호수공원근처의 광장에서 준형이는 세발자전거를 난생 처음 지치도록 끌었다.
동생 신형이를 태우기도 하고, 혼자 여기 저기 쏜살같이 운전하기도 하고.....
505 세발자전거....준형이의 생일 선물로 산 것이다.
새삼스레 세발자전거 까지 선물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된 준형이의 모습이,
그리고 그 만큼 먹어버린 아빠의 모습에서 만감이 교차되었지만 너무도 뿌듯했었다.
성큼 성큼 걷는 신형이의 모습에 너무나도 대견해함을 느끼는 듯 하다.
날씨가 많이도 추웠다.
휴일의 오후 간만의 햇볕이었지만 아직 채 풀이 꺽이지 않은 겨울같은 이른 봄 이었기에
우리 식구들도 그러했고, 광장에 놀러온 많은 가족들이 그러했었다.
사랑이란
따스한 봄바람의 시린손을 녹여주는 것. 호오~~ 하면서....
콧물 찌익....눈물 찌익....
모든것에 준형이의 전철을 밟는 듯 하다.
머리 않자라는 것도 그렇고, 전화기, 휴대폰 등등에 광적인 것들도 그렇고(다 그런가!)
별 탈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나 주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사지 부족한 것 없이 다 잘 달고 나온것에 감사 감사 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온 몸 끝까지 보존하는것에 엄마 아빠의 커다란 몫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준형이가 깊은 낮잠에 빠져있다.
호랑이가 물어가도 모를 정도로,
세상이 뒤집혀도 모를 그럴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 모습에서 사랑이 느껴지고, 순수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바라 보는 내 심장이 뛴다.
너무도 사랑스럽기에 생기는 요동소리가 내 전신에 느껴진다.
준형이가 TV를 보고 있다.
한 곳에 빠지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없이 정신을 못차리지..... 우리 준형이도 그렇다.
영화를 보더래도 집중을 하고 있어 함께 다니기가 편타. 그래서 더 이쁘다.
사랑하는 준형아....
우리 준형이가 태어난지도
어느덧 37개월이란 시간이 흘렀구나.
어릴때 가끔 몸앓이를 해 많은 걱정도 했었고,
많이 아파도 또 잘 참아내주었던
우리 준형이....
우리 준형이가
언제나 늘 지금의 눈망울처럼
영롱하고 환하기를 이 아빤 바란단다.
겨울이 채 다 가시지 않은 어느날 신형이와 처음 나섰던 산책길이었다.
신형이의 걸음걸이가 어느정도 완숙단계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신형이는 이 아빨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그 산책을 마치고 들어왔다.
그리곤 신형이는 성큼 성큼 아이방으로 들어간다.
장난감을 찾고 있다... 그리곤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젠 자연스레 카메라 앞에 선다.
신형이가 엄마에게 혼이 나고 있다.
그리곤 한 켠에서 손도 들게하고 벌을 세운다.
신형이 스스로는 그 영문을 알면서도 늘 믿었던 엄마에게 혼이 난다는게 무척 서운한가보다.
난중에 이 글을 보면 난 아마도 신형이에게 많이 혼날 글이겠지만
사실 이 때 이 모습을 보는 난 속으로 배꼽 잡고 웃었다.
신형이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결혼하고서 옮기는 세번째 집으로 이사가기 얼마전의 사진이다.
회사일로 잠시 낮에 집에 들어왔다.
1층의 우리 집에선 늘 옆집들에 휩싸여 한낮에도 그리 많은 빛이 찾아들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안에서도 늘 평온함을 느끼는걸까!
대형할인매장에서 세제를 샀는데 사은품으로 바구니를 하나 받았다.
준형이는 통아저씨인양 그 안에 쏘옥 들어가 한참을 그렇게 놀고 있었다.
목욕을 시키고자 하는 엄마의 소리가 점점 커진다.
하지만 준형이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아빠의 카메라 앞에 포즈까지 취하는 배려까지 해준다.
그리곤 엄마한테 엉덩이 한 대 맞고 결국엔 목욕탕으로 끌려갔다.
2002. 4. 22 경기도 일산에 와서, 그리고 결혼해서 살았던 정든 두번째의 집을 나선다.
첫번째 집에서 큰아이 준형이를 나았고, 두번째 집에서 둘째 신형이를 낳았다.
그리고 다사다난 했지만 무리없이 잘 꾸려나가면서 두 해를 살았던 정 많이 들었던 집이었다.
2층의 형님네와도 친했고, 옆집 1층, 2층 할머니와도 많이 주고 받고 해서 정 많이 나눴었고,
집 주변의 많은 친한 동네분들과도 함께 술자리도 가끔 가졌었고,
눈 내리면 2층 형님과 함께 골목길을 쓸고 했었는데.... 새삼 그 집이 가고파진다.
준형이가 간만에 병원신세를 졌다. 2002년 5월 초에.....
새 집으로 옮기면서 준형이가 먼저 액땜을 하고 싶어졌는가보다.
폐렴으로 인해 5일정도 입원을 해야했으니까 말이다.
엄마, 아빠가 되가지고 이사준비에 신경쓰느라 아들들에게 많은 신경을 못썼으리라.
정신차리라는 큰아이의 배려에 새삼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었다.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아픈가운데에서도 중심(?) 잃지한고 늘 초연한 우리 준형이....
준형이와 신형이가 머릴 깎으러 미용실에 갔다.
동네 미용실에서 늘 깎았었는데 그 날 엄마, 아빠(1999 ~ 2002.5)가
애용하던 미용실의 헤어디자이너에게 맡겨 깎았다.
휴일날 회사일 마치고 달려갔던 미용실에서의 준형이는 이미 마쳤던 상태....
그 앞의 거울에다가 얼마나 많은 변화무쌍한 표정들을 지어내던지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떠 오른다.
신형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릴 깎았다.
빡빡깎은 신형이의 모습에서 동자승이 떠 오른다.
그리고 사진 찍은 이곳이 장미 넝쿨이었는데 우리 신형이가 사진 몇 장 찍겠다고
카메라 앞에 몸을 내맡기기까지 한 그런 사진 한장이다.
2002년의 역사적인 그 월드컵... 한국 - 포르투칼 전 때 찍은 사진이다.
가정 안에서도 뭉쳐졌고,
온 나라가 뭉쳐지는 계기를 월드컵이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월드컵 이후에도 쭈욱 그렇게 되어야만 하리라.
내가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 코리아 팀..... 화이팅!!!
2002월드컵 3,4위전의 경기 때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월드컵 덕분에 우리 가족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을 그런 사진 한장
만든 것 같아 내심 많이도 뿌듯해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더더군다나 우리나라의 멋진 경기와 함께 했기에 그 기분이 몇 배나 더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 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 전 국민의 공감대가 아니었을까!
이 사진의 신형이 상처가 바로
처음으로 머릴 깎은 그 날 장미 넝쿨 앞에서 찍은 사진의 결과물이다.
어른들이 이런 상처면 무지하게 험한 인상으로 보일 텐데 아이들의 상처는 왜 이리도 앙증맞은지....
(이 글을 나중에 신형이가 보면 이 아빨 도끼눈 뜨고 보겠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일요일날 하루 나들이를 오셨다.
전라북도 군산에서 서울까지....
나와 준형이는 고속터미널로 마중을 나갔다.
이른 아침의 출발이셨을텐데도 피곤을 숨기신 밝은 모습이었다.
다 큰 아들래미의 모습을 보시고져, 지 똑 닮은 손자녀석 보실려고 그 곤함도 다 잊으셨으리라.
집에 오는 길에 상암경기장을 들렸다. 불과 며칠전까지 엄청났던 바로 그 경기장을 들렸다.
그리곤 아버지, 어머니, 준형이와 함께 첫 사진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