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무도(中原武道) 제2권
지은이: 서효원
- 차례 -
1. 풍운은 깊어가고
2. 무인은 검으로 말한다
3. 천하가 바란다면
4. 인자와 자객
5. 강시미인 빙화
6. 젊은 풍운아
7. 그대에게 꽃을
8. 운명의 여인, 혈지
9.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
10. 파과(破瓜)
11. 용의 초상
12. 황실의 문제아
13. 자시의 자객
1. 풍운은 깊어가고
혈무(血霧)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뻘건 혈무는 거대한 금두꺼비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옥향로(玉香爐)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옥향로는 거대한 원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고, 원탁 둘레에는 열 개의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두 개의 의자는 백포(白袍)에 뒤덮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흰빛은 바로 죽음의 빛깔이다.
다시 말해, 의자 두 개의 임자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둘이 쓰러졌소!"
차가운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들려왔다.
유사형의 중년인이 부채를 흔들어 대며 입술을 떼고 있었다.
"혈류흔 총감찰(總監察)과 다라혈니(茶羅血尼)는 소집령이 있음에도 불참하였으며, 대총사의 종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소이다."
냉막하게 말하는 자는 십지마련의 군사 사군옥이었다.
홀연히 사라진 야율초를 대신하여 십지마련을 이끌고 있는 그는 대륙혼의 출현을 알게 되자 십지마련의 구대맹주에게 비밀 소집령을 내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자는 가히 무적이오. 그 자는 단독으로 행동하기에 종적을 찾기 힘든 상태이며, 천하제일의 추적술을 지닌 혈류흔 총감찰은 우리들이 하나하나 쓰러져 감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일에 빠져들어 비밀회의에도 불참하였소. 혈류흔은 대륙혼과 마찬가지로 대세에 있어서는 이단자요! 다라혈니 또한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으며……."
"……!"
"……."
도합 오인이었다.
사군옥과 고죽생, 난울금(蘭鬱金), 그리고 고야림(古野林), 형사검(刑史劍), 이들은 일 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사군옥은 좌중을 쓸어보며 차디차게 말했다.
"대륙혼은 몹시 위험한 존재이오. 그를 즉시 찾아내어 죽이지 못한다면, 십지마련의 토대가 흔들릴지 모르오!"
그가 정색을 하고 말할 때였다.
"호호……, 찰리타는 멍청하기에 죽었으며, 철목표는 바보스럽기에 쓰러졌을 뿐이오!"
매우 음탕한 목소리가 사군옥의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작은 부채를 쥐고 흔드는 요염한 여인. 그녀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한 인물로 인해 기반이 붕괴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으음……!"
"하, 하긴……."
수긍하는 사람이 반, 회의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사군옥과 고죽생은 불안해 했으나 고야림과 형사검, 그리고 말하고 있는 난울금은 태연한 편이었다.
"다른 사람은 놈의 방문을 두려워하는지 모르나, 호호……. 나는 놈을 쓰러뜨릴 방법을 갖고 있소이다!"
한 마리 꽃뱀과도 같은 여인이었다.
어떠한 사내라도 유혹해 버리고야 마는 색기의 소유자, 난울금의 눈빛은 보다 뜨거워졌다.
"내가 그 자를 쓰러뜨리게 된다면, 우리들이 약조한 대로 나는 십지마련의 수석부맹주(首席副盟主) 지위로 오르게 될 것이오! 호호호……!"
난울금의 웃음소리와 함께 비릿한 육향이 흘렀다.
난울금은 세월이 지날수록 젊어졌다. 기름이 응결진 듯한 피부에는 윤기가 흘렀으며, 굴곡이 진 완연한 몸뚱이는 완벽한 미녀상을 보는 듯했다.
하루에 한 남자로 만족하지 못하여, 변황의 거마들 중 그녀와 침상을 쓰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희대의 우물이었다.
그녀가 음탕한 어조로 자신 있게 말할 때, 꽤나 회의적인 표정을 짓는 자가 있었다.
'그는…… 무공이 없을 때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를 쫓아 보았기에 그 자의 가공스러움을 알고 있다.'
애도를 가슴에 안고 있는 예리한 인상의 노인. 대나무 가지처럼 깡마른 몸에 풍성한 우직포(羽織袍)를 걸치고 있다. 그는 몹시 불길하다는 눈빛을 원탁 표면에 던지고 있었다.
'대륙혼……. 아아, 예상대로라면 그는 하나의 유성처럼 잠깐 빛을 발하다가 스러져 갈 것이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간다면, 그는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을 하나씩 찾으리라. 죽음이라는 한 송이 꽃과 더불어서. 만에 하나,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를 끌어들여야 한다. 그를 얻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되리라.'
그는 힐끗 고개를 쳐들었다.
'중원이 점점 두렵게 느껴진다. 아아, 역시 중원은 중원이다.'
고죽생의 두 눈에서 묘한 공포의 빛이 떠오르고 있을 때였다.
"놈은 피에 굶주린 놈이며, 가공할 무공에 철저한 지략을 겸비하고 있소. 게다가 놈은 비밀이 노출될까 우려한 나머지, 휘하세력을 거의 거느리지 않고 있는 상태요. 그런데 어떠한 방법으로 그를 간단히 처단하겠단 말이오?"
사군옥의 목소리가 흘렀고, 난울금은 전신에서 요요(妖妖)하고 음사한 기울을 흘리며 입술을 잘강잘강 씹었다.
"놈은 한 마리 야수와 같소이다! 빠르고 거칠다는 데에서!"
"흠……!"
"으음……!"
"야수를 잡기 위해서는 또 다른 야수를 써야 합니다."
또 다른 야수는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난울금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혈류흔이라는 한 마리 야수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소. 그는 강하고 잔혹하여, 머지않아 대륙혼보다도 무서운 내부의 적수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오."
혈류흔은 십지마련에서 이단자였다.
그는 여전히 승부를 추종하고 있었다. 지금은 승부보다는 수성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혈류흔은 머무르지 않았으며, 끓어오르는 야성을 억누르지 못하고 강호를 주유하고 있었다.
변황의 무사들 가운데 기질이 강한 자들은 혈류흔을 제이의 야율초로 여기며 따르는 실정이 아닌가.
난울금은 십지마련의 안위를 위해 혈류흔을 베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혈류흔을 이용해 대륙혼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대륙혼과 혈류흔을 동시에 패망시킬 수 있으며,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진정한 풍운아마저 끌어들인다면…… 사태는 보다 빨리 처리가 될 것이오!"
두 눈에서 새파란 불길을 토하는 희대의 요화(妖花). 그녀는 핏빛 입술을 잘강잘강 씹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를 끌어들이게 된다면 십지마련은 어떠한 무림세력도 얻지 못한 최후의 성역에 아성을 쌓게 되는 것이오!"
"성, 성역이라니?"
"대체 어떠한 곳을……?"
"풍운아……. 그 자가 누구요, 난 맹주?"
중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질 때, 오직 한 사람 사군옥만이 난울금의 입 안을 맴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구중천(九重天)의 그를?"
사군옥의 머리카락이 빳빳이 치솟아 올랐다.
구중천.
아홉 겹의 비밀에 휘어감긴 천하제일의 장소 자금성(紫禁城)을 말한다. 설마 난울금은 대륙혼을 쓰러뜨리기 위해 자금성을 이용할 작정이란 말인가?
"주묵을 끌어들일 작정인가, 난 맹주?"
사군옥의 음성이 신중해졌다.
"호호……, 그 자는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강호세력을 꾸미고 있지요. 그 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소. 또한 그 자가 남자인 이상, 그 자를 능히 유혹할 수 있소!"
구천묵시전을 일으킨 주묵.
비강호인으로서 강호에 풍운을 일으키고 있는 숨은 거인이다.
구천묵시전은 세력만을 쌓고 있을 뿐이며, 강호 대세와는 상관 않고 있었다. 십지마련에서는 많은 밀정들을 그곳에 들여보냈으며, 그들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보고받고 있었다.
강호를 침묵시킬 힘을 비축하고 있는 구천묵시전. 그곳을 얻으면 강호와 구중천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군옥의 눈빛이 야릇한 빛을 발했다.
'놈은 찰리타와 철목표의 거처를 너무도 쉽게 찾아냈다. 내부에 끄나풀이 있거나 가공할 이목을 지닌 자가 곁에 있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십지마련을 결성해 변황의 중원 침입을 성공시켰던 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는 없었다.
차츰 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내부자가 아니라면 분명 그 자일 것이다. 녹수야월궁을 이끌고 있는 만통! 그 자의 가공할 이목이 대륙혼을 돕고 있는 것이다.'
사군옥은 이미 만통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천외천마전의 무사 일천이 만통을 잡기 위해 강호 전역을 누비고 있으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늑대 한 마리로 대세가 흔들릴 수 없다. 놈이 은자삼십삼천의 세력을 모두 거뒀다 해도 우리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놈은 제거될 수밖에 없다. 놈은 죽음으로써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할 것이다. 모래알로 흩어졌던 십지마련은 하나가 될 것이며, 그때 내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뇌리에 백만 가지의 흉계를 담고 있다고 알려진 자. 그는 백만이 피를 흘린다 해도 서슴없이 일을 감행할 자였다.
대륙혼의 출현은 십지마련을 뿌리째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필생의 꿈을 실현시킬 호기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 일단 안탕의 그 허수아비들을 이용해 보자. 대륙혼은 백도의 후견인이 아닌가? 후후……, 실패로 끝난다 해도 손해볼 것은 하나도 없다.'
그날, 악마의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십대만산의 하늘 위로 한 마리 매가 날아가는 것으로 중원무림의 목을 조이는 십지마련 거두들의 모임은 그 은밀한 막을 내렸다.
하늘은 유성우(流星雨)에 베어지고 있다.
끝없이 흘러가기만 하는 긴 꼬리별들의 행진.
밤은 또 이렇게 깊어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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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古都) 장안의 봄은 현도관(玄都觀)의 매화 향기에서 시작되곤 했다. 수만 수천의 매화가 화해를 이루었으며, 바람이라도 불면 눈부신 화우(花雨)가 쏟아져 내렸다.
당조(唐朝)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는 천 년의 고도 장안성!
그곳의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차가운 창궁에 뒤덮여 있었다. 손가락을 대기만 한다면 파아란 유리 조각이 되어 허물어져 내릴 듯한 하늘 가운데에서 장안의 춘색(春色)은 짙어지고 있었다.
거리를 따라 오가는 인파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화복(華服)을 걸친 사람들이 태반이며, 베옷이나 다른 값싼 의복을 걸친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사람,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장안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귀여운 여자아이 하나를 가슴에 안고 느릿느릿 걷고 있는 산발청년, 그리고 큼지막한 서궤 하나를 등에 지고 청년을 뒤따라 걷는 외팔이 흑의노인, 이들은 어디를 봐도 특징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도시는 귀찮은 데가 많아. 고루거각이 화려하기는 하되, 조화옹(造化翁)이 빚은 자연만은 못하지 않는가!"
느릿느릿 걸음을 내디디는 청년의 몸에서는 먹물 내음이 흘렀다. 수차례 과거에 응시했고, 번번이 낙방하기만 한 낙척서생(落拓書生)일까?
그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곡강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양귀비(楊貴妃)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며, 천하의 시인묵객들이 와서 온갖 찬미의 말을 다하여 시부를 남긴 곳이 장안성이었다.
천 년의 역사를 품고 굽이쳐 흐르는 곡강 위로 은색 편린이 튀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도합 삼 인의 모습은 난화로(蘭花路) 어귀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청운객잔(靑雲客棧).
세워진 지 이 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장안성에서 손꼽히는 객잔으로 발돋움하게 된 드넓은 객잔이었다. 가산이 두 개나 세워져 있는 뜨락이 아름다우며, 사계를 가리지 않고 기화요초가 피어나서 뜨락을 장식했다.
봄에는 혈매화(血梅花)가, 여름에는 옥잠화(玉簪花)와 한련(旱蓮)이, 가을에는 백국화(白菊花)가 정원을 뒤덮으며, 겨울에는 나목으로 퍼부어지는 눈송이들이 설화(雪花)를 뜨락 가득 피워 내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무리들이 모여드는 청운객잔. 그곳 뒤에는 곡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갈대가 무성한 강가에 청년 하나가 아이를 가슴에 안고 누워 허공을 보고 있었다. 노을이 사라져 가며 허공은 묵궁(墨穹)으로 화하고 있었다.
하나의 달이 뜨자 곡강은 낮의 번화함과는 달리 유적함과 고아함을 애잔한 물소리로 흐르며 달빛과 더불어 흐르기 시작했다.
유심한 눈빛을 가진 청년, 그는 바로 일세의 풍운아 백검산이었다. 그의 수중에는 한 장의 서찰이 쥐어져 있었다.
<다라혈니(茶羅血尼)는 장안성에 머물고 있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장안성의 청운객잔에서 얻을 수 있음!>
만통의 서찰이었다.
천하대상 만통은 남북(南北) 이십이 성(省)에 수백 개의 하부세력을 갖고 있었다.
청운객잔은 그가 갖고 있는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본래 일점흔은 백검산이 청운객잔의 특실에 들기를 바랐으나 백검산은 은자가 없다는 구실로 객잔에 들기를 포기했다.
그는 하늘이 푸른빛에서 검은빛으로 물들 때까지 하늘을 바라봤다.
'떨칠 수 없다!'
백검산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있었다.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두 개의 그림이 있었다. 하나는 한 여인의 영상이며, 또 하나는 기이한 천화(千花)의 그림자였다.
여인과 꽃…….
두 가지 그림은 기이한 운명이 되어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십지마련의 악마들은 죽여 없앨 수 있을 것이나, 나의 뇌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두 개의 그림자만은 지우기 힘들다.'
백검산이 속으로 중얼거릴 때, 너무나도 가벼운 파공성과 함께 흑의인영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바로 일점흔, 그는 백검산의 종자가 되어 따라다니는 가운데 본래보다도 앙상하게 마르게 되었다. 그는 백검산의 행동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지금의 일만 해도 그러했다. 백검산은 이미 장안성을 떠났어야 했다. 그는 청운객잔에서 알게 된 정보에 따라 한 인물을 제거한 다음, 홀연히 사라져야만 했다.
그런데 갈대밭에 누워 하늘만 보며 세 시진을 보낼 줄이야…….
"주공, 언제 가시렵니까?"
일점흔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거듭했다.
백검산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아이를 안은 채 달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공, 세 번째로 죽어야 하는 다라혈니는 보름 전부터 망천장 지하 연공실에 숨어서 마공대법을 연성하고 있소이다!"
"……!"
"그녀는 중원의 거대방파에서 빼앗은 열 가지 단약(丹藥)을 복용하며, 신체를 금강불사지체로 만들고 있소이다. 또한 칠백 고수가 그를 호법 서고 있소이다."
다라혈니는 서역(西域) 삼십육 국의 무림계를 정복하고 나서 삼십육마천(三十六魔天)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무공의 괴이함과 사악함은 십지마련 안에서도 손꼽히고 있으며, 언제고 야율초를 꺾고 나서 십지마련을 장악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는 일세의 여마두였다.
그녀는 장안성에 머물러 있었다.
다라혈니는 오천 평이 넘는 장원을 다섯 채나 사서 하나로 합쳐 망천장이라는 대장원을 이룩했다. 그녀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장안에 연공관을 마련한 까닭은, 모든 것을 이룩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부족한 게 있었더라면 심산유곡에서 무공 수련을 했을 것이다.
일점흔은 그곳에 두 번이나 갔다 온 상태였다. 장원 일대에 포진된 진세의 종류며, 매복해 있는 자들의 위치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한데 백검산은 야릇하게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달맞이를 하러 강가에 나온 사람 마냥 달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기회는…… 지금입니다."
"……!"
"다라혈니의 마공은 완성되기 직전입니다. 달빛이 사라질 무렵이면 그녀를 죽이기 힘듭니다. 주공, 다라혈니는 무수한 영약을 복용하고 악마의 대법을 잇달아 시전했소이다. 그녀는 지금 폐관을 끝내기 직전이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혔다. 한데 백검산은 태연자약하기만 하다니?
"그녀의 불사마혈공(不死魔血功)은 내일 새벽이면 완성이 됩니다, 주공."
일점흔은 점점 더 초조해져 갔다.
일대는 너무도 고요했다. 달빛이 교교하며, 강물은 달빛에 은색 편광을 잔잔히 흘리고 있었다.
백검산은 강가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고, 그의 왼팔에는 강보에 싸인 여아가 안겨 있었다.
취옥(翠玉).
방글방글 웃는 아기의 입매가 귀여웠다. 백검산은 왼손으로 취옥을 가볍게 안은 채 오른손으로 취옥의 도톰한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 몹시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나는 가슴이 큰 여자를 얻어야겠네. 이런 상태로 떠돌다가는 취옥이가 젖이나 제대로 먹겠는가? 훗훗……, 그렇다고 해서 일점 노인더러 새장가를 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주공, 취옥의 젖동냥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일점흔은 정색을 했다.
백검산의 무공이 그에 비해 월등하다고는 하나, 강호의 경험은 일천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백검산이 두 번의 살업을 성공적으로 끝냈기에 얻었음 직한 자만심이었다.
백검산은 지금 보이지 않는 칼이었다. 적이 완성되기 전에 그 숨통을 끊어 놓고는 안개처럼 사라져야 했다.
"다라혈니가 마공을 완성하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주공, 이렇게 꾸물거리다가는 실기하게 됩니다."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검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점 노인의 가슴에서 젖이 나오게 할 재간도 없고!"
"그녀의 불사마혈대법(不死魔血大法)이 여명과 더불어 완성된다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무진 고생을 다했습니다. 한데, 어이해 시작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일점흔이 초조감을 이기다 못해 그렇게 말할 때,
"훗훗……. 취옥아, 새벽까지는 너와 지낼 수 있겠구나. 서천목산과 숭산에서 너의 귀여운 모습을 보지 못해 무척 괴로웠었다!"
백검산은 일점흔의 말을 아예 무시했다.
새벽까지는……!
일점흔은 그 말을 듣고 멍청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는 백검산이 새벽이 되기 전에는 다라혈니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백검산은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가 아닌가.
"여명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구나!"
취옥을 안고 있는 백검산은 파천황검을 베개 삼아 베고 있었다. 취옥의 웃음소리가 은파(銀波) 가운데로 퍼져나갔고, 일점흔의 눈빛이 한순간 아득해졌다.
'그, 그렇다면…… 주공은 오히려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신가?'
그렇다. 백검산은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라혈니를 암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라혈니에게 진정한 패배를 안겨 주기 위해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밤바람이 다가서며 일점흔의 옷자락을 뒤집었다. 그리고 일점흔의 초조하던 표정이 봄눈이 녹듯이 녹기 시작했다.
"설마…… 그때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천하제일의 자객 소리를 들은 바 있던 일점흔이다. 그는 적을 암살하는 방법에 대해 절대적인 전문가였다.
허점을 노려 살해하는 방법과 무공이 약할 경우 독(毒)이나 암기(暗器)로써 암살하는 방법, 위기를 알고 몸을 피신하는 법…….
검공망이 일점흔을 백검산의 비위로 붙여 준 까닭은, 바로 그 탁월한 자객업의 경험 때문이 아니던가.
본시 자객이라면 상대의 허리를 노리기 마련이다. 하나 백검산은 자객으로 접근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녀가…… 완성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일점흔이 아득해지는 기색으로 외칠 때, 백검산은 취옥의 입술과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맞춘 다음 이렇게 중얼거렸다.
"취옥아, 석두(石頭)에서도 가끔 명쾌한 해답이 나올 수도 있구나. 프핫핫……!"
백검산은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웃었다.
취옥은 뜻도 모르고 따라 웃었고, 석두 소리를 듣는 일점흔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
"ㅋㅋ……, 돌대가리 소리를 들어도 싼 듯하오. 하오나, 천재 주인을 섬기는 것은 실로 괴로운 일이외다!"
▼
장안성의 북쪽에 가면 한 채의 거대한 장원이 있음을 보게 된다.
백 보마다 거루(巨樓)가 세워져 있으며, 십 보마다 백석(白石)의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망천장(望天莊).
멀리서 보면 한 마리 흰 코끼리가 엎드려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장안제일의 장원이었다. 화원이 넓으며, 열여덟 개의 가산(假山)이 중구궁(重九宮)의 구조를 이루며 화원을 두 겹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가산 사이로 옥류(玉流)가 흐르며, 옥류 위에는 대리석(大理石)으로 만든 다리가 걸치어져 있었다.
새벽이 타오르는 가운데, 거대무비한 장원의 고루거각 위로 연보라색 안개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십 장 높이의 철탑(鐵塔).
만천장의 중극(中極)을 이루는 지점에 세워진 철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보이지 않으며, 철탑 둘레에는 기이한 사기(邪氣)가 푹푹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천마궐(天魔厥).
철탑은 그러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현판조차 붙여져 있지 않은 거대한 철탑 천마궐의 하늘 위로 야릇한 흑기(黑氣)가 치솟아 오르고 있지 않은가.
고오오― 고오오―!
연보라색 하늘을 뚫고 치솟아 오르는 기이한 기운. 그 기운은 묘시(妙時)가 가까워지자 점점 짙어졌다.
하늘 위에서부터 먹물이 풀리듯이, 아름답게 타오르던 새벽의 정경은 천마궐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악마의 기운으로 인해 거세되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리링― 휘리리리링―!
여덟 개 방향에서 마풍(魔風)이 솟아오르며, 당장 무엇이 튀어나올 듯한 긴박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망천장으로 향하는 동북의 대로는 보름 전부터 엄밀한 진세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곳곳에 기관이 설치됐으며, 매복자들이 안개로 몸을 휘감은 채 일체의 접근을 막아내고 있었다.
누구든 접근하는 자는 죽는다. 드넓은 망천장 일대가 절해고도의 적막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십 장 아래의 지하였다.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에서 악마의 포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장 두께의 철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하 비전(秘殿)이다. 바닥은 대리석판으로 뒤덮이어 있으며, 비전의 천장에는 백팔 개의 야광배(夜光杯)가 박혀서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단(壇).
녹옥(綠玉)으로 만든 단이며, 기기묘묘한 장식 가운데 녹옥단은 한 송이 거대한 연화의 형상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 위, 언제부터인가 전라의 여인 하나가 결가부좌를 튼 채 머물러 있었다.
지극히 풍만한 몸뚱이, 터져 버릴 듯 부푼 젖가슴에 잘룩 꺾여 버릴 듯한 세류의 허리, 안반처럼 부풀어오른 둔부에, 우윳빛의 투명한 살색은 뇌쇄(惱殺)의 유혹이었다.
한데 여인에게는 두 가지 미묘한 점이 있었다.
첫째는 여인의 머리카락이 전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여인의 전신 팔만사천 모공(毛孔)에서 검은 기류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콰아아― 콰아아―!
주위를 압도하는 악마흑기(惡魔黑氣). 그것은 머리가 파아란 비구니의 모공에서부터 스며나오고 있는 암흑불멸흑살기(暗黑不滅黑煞氣)였다.
녹옥연화단 둘레에는 가공할 강기의 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네 개의 원형 벽이 핑그르르 돌고 있으며, 그 가운데 녹옥연화단이 완전무결하게 방어되고 있었다.
어깨에 쌍검을 짊어지고 있는 비구니들이 여든하나, 그네들은 유가표향검무진(瑜伽飄香劍霧陣)을 이루는 가운데 녹색 가사 자락을 펄럭거리며 불단 외곽의 제일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야차흑향검진(夜叉黑香劍陣)이 구축되고 있고, 그 뒤에는 마혼강시대진(魔魂 屍大陣)이 형성되어 있었다.
제일 외곽지역에는 음풍멸천군진(陰風滅天軍陣)이라는 진세가 형성되어 철벽과 불단 사이를 엄밀한 강기의 벽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도합 칠백 인, 이들은 이미 보름째 침식을 잊고 있었다.
'드디어…… 개벽의 순간이다.'
'혈니(血尼)께서 활불이 되시는 순간이 다가섰다. 으으, 혈니가 개안하시는 순간 천하의 그 어떠한 무도자도 다라혈니를 막지 못할 것이다.'
'불사마혈공은 곧 마무리지어진다.'
휘리리리― 휘리리리링―!
강맹한 바람이 일어나며 강기의 벽이 더욱 가공스러워졌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바로 삼십육마천의 고수들이었다. 변황무도계에서도 사악하기로 이름난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대체 어떤 순간이란 말인가.
콰아아― 콰아아―!
검은 안개가 수만 마리의 흑사(黑蛇)처럼 벌거벗은 비구니의 신체를 휘어감기 시작했다. 검은 기류는 풍만한 젖가슴 사이를 능선을 타고 기어가는 검은 뱀처럼 꿈틀꿈틀 흘렀으며, 비구니의 나신은 점차 흑무 속으로 사라져 갔다.
쓰으으― 쓰으으―!
마기는 보다 자욱해졌으며, 유백색의 피부를 지니고 있던 비구니의 신체가 차츰차츰 묵옥(墨玉)의 빛깔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기류는 다라혈니의 땀구멍 속으로 모조리 빨려들었고, 새까맣게 물든 피부가 다시 하얗게 변화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개벽의 순간처럼 녹옥연화단이 균열되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보라! 다라혈니의 전신에서부터 배광(背光)이 치솟아 오르며 이제껏 감겨져 있던 두 눈이 천천히 떠지는 것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수고했다!"
아아, 이럴 수가, 다라혈니의 두 눈은 홍수정(紅水晶)처럼 새빨갛지 않은가.
검은자위와 흰자위의 구별도 없이 온통 붉기만 한 악마안(惡魔眼). 또한 다라혈니의 파르스름한 대머리에서 빠른 속도로 흑발(黑髮)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일순 칠 척 길이로 자라났다.
우르르르릉―!
연화단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 다라혈니는 탄력적인 종아리를 내어 뻗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 세 노비구니로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을 아름답고 매끄러운 동체가 연체동물의 몸뚱이 마냥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흰 피부, 도박적으로 솟아오른 젖가슴에 선정적인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는 흑발.
"이제 그 어떠한 힘도 나의 신체를 허물어뜨리지 못한다!"
다라혈니는 까르르 웃었으며, 지난 십오 일 내내 그녀의 운기행공을 호법 서고 있던 칠백 고수는 일제히 진세 운용을 멈추며 꿇어 엎드렸다.
"우우우!"
"출관을 경축합니다!"
"드디어…… 드디어 운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야율초 대총사보다 더한 기세로 천하를 다시 한번 짓밟을 운명의 시간이!"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신비로운 다라혈니의 육체에 매료되어 입을 크게 벌리는 자들도 있었다.
다라혈니는 십지마련의 십대맹주 중 하나이며, 다른 사람이 황금과 세력, 신병이기를 모을 때 그녀는 영약을 수집했다. 그녀는 체중보다 십 배 무거운 양의 영약을 섭취하는 가운데 십오 일 폐관에 들었고…… 결국 이룩한 것이었다.
불사마혈공(不死魔血功).
배교(拜敎)에서 시작된 환술(幻術)이며, 그것을 익히게 되면 신체가 금강석처럼 단단해지게 된다.
"호호……, 누구든 나를 쳐 봐라! 호호……!"
다라혈니는 두 팔을 번쩍 쳐들었다.
터질 듯 풍만한 젖가슴이 덜렁 덜렁거릴 때, 칠백 고수 가운데 십여 명이 몸을 일으켜서 다라혈니 쪽으로 다가섰다. 다라혈니의 숭배자들이며 서역 최고의 무림세력 삼십육마천의 패주(覇主)들이었다.
어떠한 자는 단창(短槍)을, 어떠한 자는 철추(鐵鎚)를 들고 있었다.
"속하들, 무례를 무릅쓰고 성니의 신체를 베어 보겠습니다!"
"불경스럽게도 성니의 신체에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간사한 표정을 지으며 병기를 꺼내는 자들. 그들은 자발적으로 나섰다기보다 다라혈니가 미리 한 명령에 따라 계획적으로 나섰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다라혈니는 자신의 신체의 가공스러움을 수하들에게 자랑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일 작정이었다.
어린탈백도(魚鱗奪魄刀) 한 자루, 열화신창(熱火神槍) 두 자루, 귀전(鬼箭)이 열다섯 개.
따당― 땅―!
다라혈니의 피부에 부딪히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산산이 바스러졌다. 그때마다 환호성이 치솟았고, 중인의 눈에는 무상의 경배지심이 샘솟듯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끊어진 병기는 다라혈도(茶羅血刀).
이것은 다라혈니의 피부에서 한 치 가까운 곳에 이르는 찰나 산산이 바스러지고 말았다.
순간, 다라혈니는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다시 한번 두 팔을 쳐들었다.
"누구든 나서기 바란다, 호호호……!"
다라혈니의 웃음소리 가운데 환호성이 시작되는데, 돌연 낭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병기를 쓰지 않고 손으로 해 보겠다!"
너무나도 신비한 목소리가 흐르며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산발청년 하나가 팔짱을 낀 채 다라혈니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기회를 준다면, 훗훗……!"
대체 어디서 나타난 자일까?
히죽히죽 웃고 있는 자, 그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지하 연공관 안으로 잠입해 들어와 다라혈니가 운기행공을 마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듯했다.
백검산, 바로 그가 느릿느릿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첫댓글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