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는 밀실이다.
밀실을 감싸고 있는 벽은 두터운 냉오석(冷烏石)이었으며, 벽면에는 지극히 두껍고 질감이 훌륭한 휘장이 달려 있었다.
밀실의 채광은 천장에 박혀 있는 야광주로써 비롯되고 있는데, 꽤나 어두운 편이었다.
기이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또한 밀실 안에는 매캐한 연향(煙香)이 가득 찬 상태였다. 밀실 가운데에는 원탁 하나가 있고, 원탁 위에는 봉서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수백 장의 봉서들은 모조리 구겨지거나 찢어진 상태였다.
원탁 둘레, 열 개의 태사의가 놓여 있으며, 그 중 일곱 개의 좌석은 빈 상태였다.
사람이 머물러 있는 좌석은 오직 세 개에 지나지 않았다.
사군옥,
형사검(刑史劍),
고야림(古野林).
세 사람은 한 시간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황하 유역에서 날아든 밀지로 인해 깊은 침묵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사군옥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초췌해진 상태였다. 하나 모사가 특유한 예리함만은 아직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냉정을 지키고 있는데 비해, 고야림이나 형사검은 좌불안석 불안해하고 있었다.
대륙혼.
십지마련에 정면으로 도전한 자, 그는 단 일 인에 지나지 않는데 그의 출현으로 십지마련의 기반이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사군옥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원탁을 쓸어 봤다. 그의 눈은 독사(毒蛇)의 눈을 방불케 했다.
"최근 들어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벌어졌소. 이제는 수하자(手下者)들 또한 그 일에 대해 세세히 알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우리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세력의 기반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소!"
"……."
"……."
"훗훗……, 그러나 패배의식에 젖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오. 오늘 두 분을 모신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오!"
사군옥의 목소리는 점점 음침해졌다. 그는 형사검과 고야림을 쓸어 보며 눈빛을 강하게 뿜어냈다.
"우리들이 중원의 버러지들에게 당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을 너무나도 무시했기 때문이었소!"
"으음……!"
"하, 하긴."
피의 동맹자들, 이들은 최근 들어 환락에 겨운 삶을 보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형사검이나 고야림의 체격은 이전에 비해 훨씬 비대해졌다.
주(酒)와 색(色), 그리고 도박.
무사들이라면 금기로 삼아야 하는 인간의 유희들이다.
무의 길은 바로 극기의 길. 그 길에서 이탈되는 자의 검은 자연히 녹이 슬게 된다.
"어쩌면 전화위복의 기회일지도 모르오!"
"전, 전화위복이라니?"
"어, 어이해 그러한 말을?"
형사검과 고야림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들은 사군옥에 비해 지혜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위기에 접하자 사군옥에게 정신적으로 상당히 의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군옥은 한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떼었다.
"현재 우리들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사건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소!"
"……!"
"세, 세 가지?"
"첫째, 우리들이 정녕 숭배하고 존모해 마지않았던 야율초 대총사가 우리들이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고 있을 뿐더러…… 도울래야 도울 수 없는 폐인(廢人)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오!"
야율초는 정녕 천하무도계의 거인이었다. 그는 군림하되 정복자로서 환락을 취하지는 않는 자였다. 그는 중원무림계의 거성(巨星)들을 목검(木劍)으로 떨어뜨려 버린 다음, 홀연히 대막으로 돌아갔다.
십지마련은 그의 후광으로 인해 세워진 방파라 할 수 있었다. 십지마련의 무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는 바로 야율초이고, 그 다음의 존재가 혈류흔이었다.
"야율초 대총사는 유감스럽게도 검을 버렸소!"
"으으음……!"
"……."
형사검과 고야림의 얼굴이 추악히 일그러졌다. 사군옥의 목소리가 보다 격렬해졌다.
"다시 말해 그는 무도에서 이탈한 것이며, 짐작컨대 다시는 강호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으음……!"
"……."
"즉, 그는 십지마련을 버린 것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를 아직까지 대총사로 추앙하고 있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십지마련의 상부 지휘 체계가 혼란에 빠진 것이오!"
사군옥은 얼음 같은 심장을 갖고 있는 자였다. 그의 혈관(血管) 속을 흐르는 피는 북해의 바닷물보다도 차가우리라.
계략과 신계귀산(神計鬼算)의 천재,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철두철미하게 이용하고 있는 자였다.
"또 하나의 중차대한 사건은 대륙혼이 아직 제압당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우리들은 그를 잡기 위해 일부러 혈류흔의 은거지를 천하에 소문내기까지 했소!"
"……."
"……."
"훗훗……, 그러나 그것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소. 혈류흔은 소문과는 달리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소. 그는…… 꺾이고 말았소."
사군옥은 야릇하게 웃었다.
두 번째의 현안은 공포라기보다는 야릇한 희열이라 할 수 있었다. 혈류흔이 쓰러졌다는 사실, 그것은 사군옥에게 있어서는 목에 박혀 있던 가시가 빠져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통쾌한 일일 것이다.
"세 번째의 현안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 십지마련이 통치자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오!"
"아……!"
"하긴 우리들의 처지는 머리가 잘린 뱀과 같은 것이오!"
형사검과 고야림은 사군옥의 교묘한 화법에 휘말려 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세력 내부에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존재가 없는 것이오. 그로 인해 급변하는 상황 가운데 신속히 대처를 하지 못하고 번번이 동맹자들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오!"
뱀의 눈이었다. 그 눈은 악마의 눈이며, 공포에 떨고 있는 자의 눈이라기보다는 야망에 가득 찬 정복자의 눈이었다.
"십지마련은 절대자를 필요로 하고 있소!"
"……."
"……."
"사실 동맹자들은 여럿 쓰러졌으되, 세력은 건재하오."
사군옥의 손이 쳐들렸다.
전면의 벽에는 대륙도(大陸圖)가 걸려 있었다. 대륙도 곳곳에는 아홉 개의 삼각점이 그려져 있었다. 구주(九州)에 하나씩의 점이 있고, 점에는 금빛 글씨가 쓰여 있었다.
부상군도(扶桑群島) 부풍군림부(扶風君臨府)
백팔로살영마군단(百八路殺影魔軍團)
천외천마전(天外天魔殿)
북해왕부(北海王府)
흑혼막부(黑魂幕府)
천왕뇌존궁(天王雷尊宮)
구룡야련(九龍夜聯)
월하검단(月下劍團)
삼십육마천(三十六魔天).
피와 공포의 이름들이다.
위대한 정복자들의 이름, 대륙혼으로 인해 그 빛이 흐려지기는 했으되 십지마련의 세력은 여전히 거대하고 막강했다.
"아홉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이 불행이오!"
형사검과 고야림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군옥이 비밀회담을 갖고자 요청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사군옥은 위기를 틈타 중원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라면 백전백승(百戰百勝)할 것이오. 훗훗……, 나는 우리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오!"
사악한 미소가 흘렀다. 형사검과 고야림은 얼굴을 땀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회유인지 협박인지 모를 미묘한 제안이 시작되는 가운데, 사방 벽에서부터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도합 팔십일 인의 무사들이 원탁 둘레를 완전히 포위했다.
빛이 일어나지 않는 묵인(墨刃)의 장도(長刀)를 지닌 자들. 전신을 흑포로 휘어감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편립(篇笠)을, 아래턱에는 모래바람을 가리기 위해 쓰는 가리개를 하고 있었다.
숨결과 호흡, 눈빛마저 죽어 버린 자들이었다.
장도를 비스듬히 내리고 있는 자들은 십지마련에서 가장 뛰어난 살인기계들이었다. 그들은 사군옥의 명에만 복종하도록 훈련받은 절정의 살객들이었다.
여든하나의 장도는 형사검과 고야림의 등과 목, 배를 노리고 있었다. 뼛골을 깎아 버릴 듯한 살기가 흘렀다.
사군옥은 손바닥으로 아래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나는 우리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오!"
악마제일뇌(惡魔第一腦).
그의 아래턱에는 미묘한 떨림이 일어나고 있었다.
차디찬 살기가 흐르고, 사군옥의 미소가 흘렀다.
고야림과 형사검의 눈빛은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졌으며, 팔십일 인의 살수들은 장도를 보다 바짝 쳐들었다.
만에 하나, 사군옥이 손바닥을 아래턱에서 떼어낸다면 여든한 자루의 장도는 형사검과 고야림의 전신을 찌를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고야림은 일어서고 싶은 듯 엉거주춤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형사검은 얼굴을 찡그린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사군옥……, 네가 승자인 듯하구나.'
'으음, 이미 늦었다. 완전 포위당했다. 사군옥은 언제든 이런 일을 할 자였다. 우라질! 놈은 대륙혼의 등장마저 자신의 야망에 이용해 버린 것이다. 놈은 대륙혼이 내부의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를 은근히 기다린 것이다.'
'혈류흔이 제거되었다고 기뻐한 것이 후회스럽다. 그가 존재했다면 사군옥은 감히 이러한 짓을 못했을 것이다.'
온갖 언어가 교차되었다.
좌절감, 배신감…… 패배의식으로 두 사람의 전신은 비지땀으로 축축이 물들어 갔다.
어느 한순간, 사군옥의 볼에 가는 경련이 일어났다.
"……!"
너무나도 가벼운 표정 변화, 그리고 팔십일 인의 살객들은 장도를 한 치 정도 바짝 치켜세웠다.
살기가 밀실을 가득히 메울 때 돌연,
"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형사검이 입을 따악 벌렸다. 그는 반 울상이 되어 이렇게 외쳤다.
"십지마련은 새로운 도약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야율초 대총사를 마련의 태상제일좌(太上第一座)에서 제거하고, 그 대신 천하제일뇌 사군옥 대협을 신임대총사로 추대하며 구대세력을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침을 퉁기어 내며 외치는 형사검, 그는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가슴에서 하나의 옥패(玉牌)를 꺼냈다.
삼만 명의 수하와, 여든한 곳의 개척분타(開拓分舵)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부풍군림부(扶風君臨府)의 신표였다.
그는 그것을 두 손에 쥐고 사군옥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두 무릎을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댄 채 어기적어기적 기면서 그는 너무나도 간사스러운 표정 가운데 신패를 사군옥에게 바쳤다.
'개새끼!'
그는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야림도 어느 틈엔가 형사검과 같은 자세가 되고 있었다.
사군옥은 세 번 거절했다.
그는 형사검과 고야림이 바치는 신패를 받지 않고자 했고, 형사검과 고야림은 진짜 눈물을 흘리면서 신패를 반 강제로 그의 손아귀에 쥐어 주었다.
결국 사군옥은 두 개의 영패를 회수했으며, 몹시 민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십지마련의 제이대 총사가 되어 송구하다는 말을 하며 두 사람을 너무나도 친절한 자세로 일으켜 주었다.
그는 이 순간, 휘하세력 이십오만을 거느린 천하제일 거대세력의 단일맹주가 된 것이다.
"내겐 과분한 지위요."
사군옥이 그렇게 말할 때, 천하의 오백 군데로 일제히 비합전서구(飛 傳書鳩)가 날아들었다.
오백 개 지역에 전해지는 전통이었는데, 그것은 정확한 시간 거리 계산 가운데 거의 동시에 오백 개 지역으로 날아들었다.
사군옥은 천재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대총사가 되는 바로 그 순간, 천하의 오백 개 지역에 자신이 대총사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밀지를 날린 것이다.
<대총사 천하무황(天下武皇) 사군옥>
<총사부인 난울금!>
십지마련의 연맹은 이 순간, 사라졌다 할 수 있었다.
열 개 지역에서 일어난 십지마련은 삼 년 만에 처음으로 한 인물의 손아귀에 장악된 것이다.
바로 그날, 그는 사월의 가을 하늘 가운데 자색으로 타오르고 있는 천하제일의 건축물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구문(九門)에 둘러싸인 천하제일지 자금성.
그는 사월의 하늘을 어깨에 떠멘 채 느릿느릿 자금성 안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
자금성 둘레에는 아홉 개의 거대한 문이 세워져 있다.
정양문(正陽門)에서 시작하여 숭문문(嵩文門), 선무문(宣武門)이 있으며, 안정문(安定門), 덕승문(德勝門)과 동직문(東直門), 서직문(西直門)이 있다.
그리고 조양문(朝陽門)과 부성문(阜城門)!
아홉 개의 문은 구문이라 불리며 구문제독(九門提督), 혹은 제독구문보병통령(提督九門步兵統領)이라는 관리가 구문의 수비를 관장하고 있다.
자금성은 자색의 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햇살이 투명하게 떨어져 내릴 때에는 총 연장 수백 리에 달하는 성벽과 전각의 지붕들이 화려한 빛을 뿌린다.
십 리 넘게 걷더라도 신발에 진흙을 묻히지 않아도 되는 곳. 가히 천하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금성에서 오십여 리 떨어진 곳에 청량산(淸凉山)이 서 있다.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백칠십여 리 떨어진 곳에는 실로 거대하고 신비로운 축조물이 세워져 있다.
백만 평도 더 넘어 보이는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축조물이다. 그 규모는 자금성을 방불케 하며, 도합 일백팔 개의 대소전각(大小殿閣) 가운데 오십여 개가 이미 완공되어 있었다.
기와며 석로(石路)의 석판이 모두 푸른색이며, 정중앙에 세워진 한 채의 청와대전(靑瓦大殿) 앞에 선다면 아홉 개의 뜨락이 청와대전을 중심으로 구궁대진(九宮大陣)으로 펼쳐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도처에 아름다운 가산이 세워졌으며, 내정(內庭)과 외정(外庭) 사이에는 옥류(玉流)가 흐르고 있다.
자금성에서 이백오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리도 웅장한 건축물이 세워지고 있다니.
만에 하나, 천자의 재가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건축물은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구천묵시전(九天默示殿)>
무림구주를 통괄한다는 대야망 가운데 세워지고 있는 축조물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며, 대명이 이룩한 건축물 가운데 가장 기품이 있었다.
천하의 거장(巨匠)들이 오천여 명 모여들었으며, 연인원 십오만 명의 인부들이 수년에 걸쳐 밤을 새워 작업하며 하나의 위대한 축조물을 이룩한 것이다.
당세에 폭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신비인 주묵친왕!
구천묵시전은 바로 그의 대아성(大牙城)이었다.
사해팔황(四海八荒)에서 기라성 같은 무사들이 모여들었으며, 금군(禁軍)에서 무용이 뛰어난 자들이 차출되어서 구천묵시전 예하 편입이 되었다.
본시 구천묵시전은 황실과 깊은 유대를 갖고 있는 세력인지라, 강호의 영웅호걸들은 구천묵시전에 투신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봄이 되면서 구천묵시전의 기세는 가공해졌으며, 황실의 지지 기반으로 인해 세워지고 있기는 하나 세력구조가 황실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져 강호의 무사들이 속속 구천묵시전에 투신했다.
구천묵시전에 들어오는 사람은 무공 서열에 따라 아홉 개의 단계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구천무반(九天武班).
그 안에 들어가는 자만이 진정한 구천묵시전의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금포(金袍), 자포(紫袍), 은포(銀袍).
삼대무반은 천류삼반(天流三班)이라 일컬어지며, 최상승 절정고수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황포(黃袍), 철포(鐵袍), 남포(藍袍).
지류삼반(地流三班)이라 칭해지며, 이십 년 이상의 실전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흑포(黑袍), 백포(白袍), 회포(灰袍).
인류삼반(人流三班)이며, 일당십의 무사라면 누구든지 가입할 수가 있었다.
불같은 기세로 타오르는 구천묵시전. 그곳이야말로 천하무림계 세력 판도의 절대변수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주묵친왕이 그 어떠한 세력과 손을 잡느냐에 따라서 항차의 무림계의 조류가 달라질 것이다.
그가 마도와 결탁한다면 백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주묵친왕이 십지마련과 손을 잡는다면, 구대검파는 회생도 하지 못하고 영구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사월의 하늘은 푸르고, 구천묵시전의 궁정(宮庭)은 기화요초에서 뿜어지는 화향에 뒤덮이고 있었다.
천랑관(天浪關).
구천묵시전을 찾는 강호의 기인이사(奇人異士)들 가운데 구천묵시전에 투신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이백여 무사들이 머물러 있으며, 그들이야말로 구천묵시전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강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었다.
천랑관의 입관 자격은 지극히 간단하다. 어떠한 수단을 쓰든 십 장 거리를 격해 오금석(烏金石) 한 덩어리를 파괴한다면 천랑관에 머물 수가 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뜨락이다.
구천묵시전의 다른 곳은 완공이 되지 않았으나 두 곳의 장소만은 완전무결하게 건축이 되었다. 그 중 하나의 장소는 묵검왕부(默劍王府)로, 주묵친왕이 기거하는 곳이다.
또 하나의 장소는 천랑관이다. 회랑(回廊)의 길이가 천 장에 달하며, 아홉 개의 가산이 병풍처럼 뒤덮여 있어 그곳에 들어가면 심산유곡에 머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상아(象牙)로 이루어진 회랑을 따라 객실의 방이 만들어져 있다.
이백여 기인이사들이 머물러 있는 곳, 그곳에 전속되어 있는 시종들의 숫자는 오백에 달한다. 지금 그 중 하나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하고, 조금 맹한 눈빛을 흘리며 가끔 가다가 실수를 잘하는 여자아이. 이름은 산화(山花)였던가.
지금 산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작은 소녀의 실종, 그것은 구천묵시전에 있어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할 일이다.
자금성 안에는 공자대부(公子大夫)들의 출입이 잦은 화려한 다루(茶樓)가 즐비하다. 대로(大路)를 따라 다루가 잇달았으며, 다른 곳이라면 쉽게 눈에 뜨일 기루는 보이지 않았다.
당세의 황제는 근검한 인물인지라 고관대작들은 감히 기루를 출입할 수 없었다.
무수한 다루 가운데 한 곳, 그곳은 공자대부들이 들어가서 세상을 논하고, 차의 일미를 감상하기에는 부족한 장소였다.
건물이 오래되기는 하여 고풍(古風)이 완연하나 다루는 주인이 수선하기를 싫어하는 통에 단청(丹靑)은 퇴색했고, 다루로 접어드는 입구가 구석길인 통에 공자대부들은 그곳의 누추함을 꺼려하여 잘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이야말로 진정 훌륭한 차맛을 감상할 수 있는 극소수의 장소였다.
향편(香片)이나 오룡(烏龍) 같은 차종은 아예 없었다. 용정(龍井)이나 천지(天池), 혹은 호구(虎邱)라는 진미의 차만이 끓여지고 있으며 다구나 집기 등이 화려하다기보다 소박하였다.
본시 차(茶)는 선(禪)이다. 차는 대화를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것이다.
죽(竹)과 난(蘭).
다루는 꽤 너른 정원에 뒤덮여 있었다.
정양다루(正陽茶樓).
다루의 이층 창을 통해 자금성 구문 가운데 으뜸인 정양문이 보인다 하여, 다루는 정양다루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리라.
사월의 햇살은 노곤하다. 겨울의 햇살은 시리도록 차가우며, 여름의 햇살은 태워 버릴 듯 강렬하다. 가을의 햇살은 너무나도 맑고 투명하게 느껴지는 데 비해, 봄의 햇살은 피부를 투과하는 햇살이 아니라 피부에 끈적끈적 달라붙는 듯이 노곤하다.
다루 이층의 구석진 자리,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예의도 모른 채 다루 안에서도 편립(篇笠)을 벗지 않았다. 또 한 명은 밀랍 같은 낯색에 완전히 정지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지극히 차가운 인상의 미소년이었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으며 소박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기품이 있는 청년이 머물러 있었다.
차 주전자는 하나, 찻잔은 두 개인데, 쓰여지고 있는 찻잔은 오직 하나에 불과했다.
차갑고 냉막한 인상의 미소년은 팔짱을 낀 채 미남청년만 바라보고 있을 뿐 즐기지는 않았다.
"차맛이 역시 좋군!"
느긋하게 말하는 청년, 그의 손은 몹시 고결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는 세 잔의 호구차(虎邱茶)를 거푸 따라 마셨다.
그가 차를 네 잔째 따를 때였다. 다루 안으로 얼굴이 꽤나 못난 소녀 하나가 걸어 들어서고 있었다.
누군가의 심부름으로 다루 안으로 들어선 듯한 소녀는 다루 입구로 걸어드는 찰나 시선을 한곳으로 고정시켰다.
"……!"
실로 기괴한 시선이었다.
'오셨군, 아니 오시기를 바랐는데……!'
그 소녀의 시선에는 강렬한 정열이 있으며, 또한 차디찬 지혜가 머무르고 있었다.
'아아, 어떻게든 저분을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소녀는 미청년을 쓰윽 바라봤고, 눈길을 빠르게 돌려 청년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미소년을 훑어봤다.
"……!"
소녀의 눈빛이 묘하게 흐트러졌다.
하여간 소녀는 두 사람을 슬쩍 훑어보다가 신형을 틀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으러 왔다가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듯이 신형을 틀어 다루를 나섰다.
일각 후, 미청년과 미소년은 실체와 그림자인 양 걸음 걷는 자세마저 비슷하게 다루를 나서고 있었다.
'몹시 삐진 듯한데, 어인 이유일까? 내가 명한 살인을 실패하였기 때문일까?'
청년은 팔짱을 낀 채 걷고 있었다.
미소년은 그의 분신인 양 뒤따르는데, 두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세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청년의 기세는 너무나도 온화했으며, 소년의 기도는 실로 차가웠다.
추운객잔(秋雲客棧).
자금성에는 몇 개 없는 허름한 객잔이다.
그곳의 후원, 일각 전에 방이 하나 예약이 되어 있었다. 객점 주인은 미리 선금(先金)을 받았는지라 청년과 소년이 객점 안으로 들어서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인물이 객실로 들어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청년은 단아한 정실로 접어들며 피식 웃었다.
"화랑(花娘), 다루에서 만나 이야기해도 되는데 어이해 이렇듯 복잡한 절차를 쓰는 것이지?"
그의 눈길은 병풍 쪽으로 돌려졌다.
그가 느긋이 말한 직후 병풍 뒤에서 왜소한 그림자 하나가 솟아올랐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녀. 뭐가 그리 노여운 듯 얼굴에 잔뜩 노기를 띠고 있다.
"괴물과 함께 다닌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는데, 사실이로군요?"
생김새와 달리 음색이 아주 아름답다.
"훗훗……, 괴물이 아니다. 너와 같은 여인이다."
"흥, 다 알고 있습니다. 저 괴물이 바로 월하검단에서 창조해 낸 인간 괴물이라는 것을!"
눈빛이 독살스러워지는 소녀는 산화랑(山花娘)이었다.
"머지않아 시집갈 처녀이다. 괴물이라고 하지 말거라."
빙그레 웃는 청년은 백검산이었다.
절대 풍운아 백검산! 드디어 그가 자금성까지 찾아든 것이다.
그가 자금성에 온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산화랑은 만통의 소식통을 통해 백검산이 자금성으로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역용환을 발라 얼굴을 바꾼 상태였으며, 현재의 신분은 구천묵시전의 하녀 산화(山花)였다.
"만통에게서 밀지가 왔었습니다!"
산화랑은 입술을 잘강잘강 씹었다.
"밀지?"
백검산은 팔짱을 낀 채 창가로 다가섰다.
그는 산화랑에게 등판을 보이는 자세로 서서 저 멀리 보이는 자금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금성의 기와지붕이 노을 가운데 화려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백검산은 한 번도 산화랑을 따뜻하게 대해 준 바가 없었다.
"밀지에는 제가 꼭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적혀 있었습니다!"
산화랑의 숨결이 떨리고 있었다.
무사가 되기 위해 여인의 길을 잊었노라고 공공연히 말했던 여인. 그녀는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수척해져 있었다.
구천묵시전 안에서 간세 노릇을 하느라 수척해졌다기보다는,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한 인물의 영상으로 인해 수척해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있다.
여인과는 거리가 먼 듯 보이는 백검산. 산화랑은 그의 그림자에 파묻혀 체중이 꽤 많이 줄어 버린 것이다.
"조심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백검산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자금성만 계속 응시할 뿐이었다.
"만통은 현명한 인물이더군요. 그는 천하를 경륜할 만한 지혜를 갖고 있으며, 강호의 무사들이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산화랑은 만통에게서 어떠한 밀지를 건네받은 것일까?
"그는 제게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
"그것은 제가…… 제가 주공을 막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산화랑의 오른손이 번쩍 쳐들렸다. 그녀는 언제 꺼냈는지 모르게 독탄 한 알을 거머쥐고 있었다.
"……!"
실로 놀라운 일은 백검산이 너무나도 태연자약하다는 것이었다.
'역시…… 만통이로군.'
만통은 그를 막아야만 한다는 글을 산화랑에게 보냈다.
백검산을 막아야만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무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베는 일!
백검산이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떠한 강호인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다. 백검산이 그 일을 실천에 옮길 경우, 천하는 혈겁에 빠져들고 말리라.
산화랑은 독탄을 쥔 채 어조를 차갑게 했다.
"용서하십시오, 주공! 다른 일이라면 모르되, 주묵친왕을 친히 암살하실 계획만은 포기하셔야 합니다!"
"영리하군. 내가 주묵을 죽이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다니!"
백검산은 처음으로 신형을 틀었다.
그는 너무나도 굳강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산화랑은 그의 눈빛만 봐도 오금이 저려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여기까지 오기 이전 마음을 모질게 먹었는 듯 숨도 쉬지 않고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주묵을 죽일 수도 없거니와,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를 베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그를 벤다면 천하를 어지럽히는 죄인이 될 것이며, 황군의 무림 개입을 야기시킬 것입니다!"
산화랑의 입술이 장미 꽃잎처럼 나풀거렸다. 주근깨를 얼굴에 뒤덮고 있기는 했으나 얼굴 윤곽은 매우 아름답다.
"그것만은 불가(不可)합니다!"
"글쎄, 관점 차이겠지!"
"절대 해서는 아니 되십니다. 주공은 지극히 총명하신 분이나 상황을 잘못 판단하셨습니다."
"……."
"다른 일이라면 모르되 이번 일만은 막을 것입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산화랑은 울상이 되어 손아귀를 거머쥐었다.
팟―!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방안 가득 푸른 연기가 흘렀다.
산화랑은 이미 해독약을 먹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백검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여자이면서 남장소년 차림을 하고 있는 단시홍만이 가쁜 숨소리를 내며 천천히 뒤로 넘어졌다.
쿵―!
단시홍은 백독불침지신인데도 불구하고 작은 독탄이 깨어지는 찰나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데 백검산은 숨을 제 호흡대로 들이쉬고 내쉬며 전혀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그는 공기 중에 퍼지는 향기를 맡으며 이렇게 말했다.
"만통, 역시 수완가로군. 천하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진 천일환몽취(千日幻夢醉)를 구하다니!"
천일환몽취!
독이라기보다는 약이다. 다만 그 약효가 너무나도 강하기에 어떠한 상승고수라도 그 약 내음을 맡으면 혼절할 수밖에 없다.
"쓰, 쓰러지지 않다니?"
산화랑은 울상이 되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는 산화랑.
매우 못난 자세이나, 그녀가 이 순간처럼 아름답게 여겨진 때는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