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상 명예회장님의 '마무리'

[맑은샘]

 

마  무  리

  한 해의 마무리를 앞둔 세모다. 해마다 새해를 맞이할 때면 새로운 각오로 보다 잘 살아보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살다보면 꼭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서 때로는 실망스럽고 후회스럽기도 하다.

  올해 또한 연초에 여러 가지 할 일을 정해놓고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갖가지 장애요소가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별 수 없이 하느님 뜻으로 돌리고 접어두기로 했다.

  원래 마무리란 끝내기, 또는 마감이란 뜻도 있어서 어떤 일의 종결을 의미한다. 인생 역시 생성과 소멸의 자연법칙에 따라서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자연스런 과정일 뿐이다. 태어남이 내 뜻이 아니듯 죽음 또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어쩌랴.

  지금부터 십오 년 전에 나는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가톨릭중앙의료원(현재 한마음 한 몸 운동본부)에 안구와 장기 일체를 기증키로 했었다. 정확히 1991년 1월 1일의 일이다. 무슨 비장한 각오라도 한 양 장기 기증서를 늘 지갑에 넣고 다녔다. 유사시에 발견하기 쉽도록 주민증록증과 함께 끼워놓았다.

  그 당시 환경교육에 몰두하여 심혈을 기울였던 나는 자원재활용을 강조하며 각 학교와 교회, 그리고 YWCA 강사로 초빙되어 열변을 토했다. 그런 나였기에 내 육신까지도 재활용한다는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찼다.   ‘아나바다’ 노래의 가사를 작사하면서 ‘아’껴 쓰고 ‘나’눠 쓰며 ‘바’꿔 쓰며 ‘다’시 쓰자는 환경운동을 전개하며 그 실천에 앞장섰던 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별로 장할 것도 없고 칭찬받을 일도 아니건만 어쨌든 그런저런 활동들이 널리 알려져 급기야 서울시장으로부터 ‘서울 환경상’도 받았고, 환경운동가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그랬던 내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재하니 그 또한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나는 2005년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남은 내 인생까지도 마무리한다는 뜻으로 또다시 가톨릭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키로 하였다. 보증인 두 사람이 지장을 찍어야 하는 절차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식들에게 알려졌다. 다행히도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서 삼남매 중  아들이 서명을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증인은 제자들 가운데서 선정되었다. 내가 젊음을 다 바쳐서 40여 년 동안 제자 사랑을 실천한 뜻을 살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제자를 선택해서 보증인이 되어 주기를 청했다. 1955년부터 교직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첫 해에는 4학년을 담임했고, 이듬해에 6학년을 맡았으므로 나이로는 그들이 가장 위였다.

  이번에 서슴없이 보증인이 되어준 이냐시오(천주교 세례명)도 강원도 홍천에서 요양병원을 운영하며 노인복지를 위해 봉사하는 귀한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라며 고령화시대를 대비한 선견지명이었다. 그의 아내인 젬마와 합심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서 성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도처에서 알게 모르게 좋은 일하며 어두운 이 사회를 밝히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제자들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장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것이 나의 공로인 양 행복한 것을 어쩌랴. 강원도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삼만 이천 평의 대규모 시설을 돌아보며 나도 활동이 부자유해지면 이곳에 와서 안락한 노후를 보내리라고 안도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잠들기 전 나의 기도는 언제나 ‘설령 이 기도가 마지막이 될지라도 …….’였고, 새벽 기도는 ‘오늘 하루를 또 허락하신 주님께’ 바치는 감사의 기도이다.  나는 장례미사 예물과 그 밖의 비용들을 조목조목 적어서 한지 봉투 다섯 개를 마련했다. 장례미사 때 부를 성가 곡목까지 세 곡을 정해 놓았으니 나는 살아서 나의 장례식 광경을 내 눈으로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생과 사가 엇갈리며 살아남은 자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신의 대전에 나아가 심판받을 일은 더욱 겁나고 두렵다.

  이제 와서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며 회한의 눈물을 흘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은 시간을 서둘러 챙겨야겠다. 참회하고 사과하며, 용서하고 화해하면서 ……. 은인들을 만나 보답하는 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이제라도 선업을 쌓는 일에 나에게 주어진 귀한 시간을 값지게 써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그런 마음으로 조용히, 그리고 차근차근 주변정리를 서둘렀다.  우선 비디오테이프에 담겨진 삶의 흔적들을 줄이기로 했다. 그 부피와 양으로 보아 내가 막상 떠난 뒤에 뉘라서 그런 것들을 소중히 보관하고 관리하겠는가?  그리하여 TV에 방영된 나의 교육활동과 환경교육 실적,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출판기념회를 통한 문학 활동 등 중요한 부분만을 편집해서 DVD 두 장에 수록했다.

  그것을 연말에 나의 혈육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와 함께 나눠주었다. 받아본 사람들이 제 자랑한다고 혹시 비웃지나 않았을까?  나의 행적을 되돌아보며 총정리하려는 속셈을 들킨 것은 아닐까.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날들이 꿈처럼 아련하다.  막상 주변정리를 끝내고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자 칠십 평생 벌려놓은 일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

  평생 숙원사업으로 조그마한 문화공간을 꾸며보겠다고 주워 모은 잡동사니와 버리지 못하는 천성 때문에 수집된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처리하려는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일제히 나를 향해 교태를 부린다. 그들의 애처로운 눈길과 마주칠 자신이 없어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버리자니 아깝고 보관하자니 그 또한 문제다. 방 하나와 베란다를 가득 메운 소장품들을 제대로 진열하기 위해서 삼년 전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추진 중이던 박물관 건립은 설계 비용만 축낸 채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아까운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내 나이 또한 그대로 머물지 못하고 나를 재촉하니 조급해질 수밖엔.

  사랑하는 수하들에게 무엇인가 보탬이 될 만한 문화유산을 남겨주고 싶었는데, 그것 역시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이었나 보다.  할 수 없이 매듭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그 중 일부는 교육박물관에 기증키로 했다.

  그러나 아직도 진행 중인 수집활동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추진 중이다.

별볼일없는 평범한 나 같은 사람도 신변정리를 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태어날 때는 벌거숭이로 세상에 던져졌건만, 떠날 때는 무엇이 그리도 복잡한지. 사는 동안 맺어진 인간관계도 그렇고, 일상생활에 필요했던 생활용품 또한 너무 많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떠올리며 잘못 살았다는 후회가 가슴속 깊이 일렁인다.

  그런데 막상 시신을 기증키로 마음을 정하고 나니 이상하리만치 담담하고 평온하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보내는 날들이 줄곧 내게는 축복이요 은총이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감사하고 기쁨이 넘친다.

  다만 내 시신이 젊은 의학도들의 실험 연구용으로 요긴하게 쓰이기를 바랄 뿐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반신욕을 하며, 언제라도 정갈한 몸으로 실험대에 오를 준비를 갖추는 일을 잊지 않는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인 정수현 프로 9단은 ‘인생과 바둑’이라는 책자에서 바둑을 인생에 비유했다. 나 역시 동감이다.  포석 단계에서는 원대한 꿈을 구사하지만 중반전에 돌입하면 엎치락뒤치락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활이 걸린 혈투 끝에 드디어 승패가 결정된다.

  그러나 이론뿐이지 실전에 약한 나는 번번이 피를 흘리며 고배를 마셨다. 어디 세상사가 내 뜻대로만 되던가. 상대가 있는데 …….  대마불사란 말도 바둑에 관한 격언일 뿐, 어이없는 참패를 당하기도 한다. 인생이 파도타기와 같다는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도 종반에 가서 차분히 냉철하게 끝내기를 하다보면 승패가 뒤바뀌는 묘미도 있지 않은가.

  나는 끝내기를 착실히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내 인생의 마무리도 끝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리는가 보다.

  오로삼매(烏鷺三昧)¹⁾에 빠져서 좌은(坐隱)²⁾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맑은샘]

[사진편집-방울이]

[이경구]

아, 김지상 님이시여!

[설안]

우와! 윤영이 솜씨가 대단하네. 김지상 명예회장님의 훌륭한 글에 사진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라고 해야겠지요? 대단하신 김지상 선생님! 존경합니다.

[모령]

방울아 우리 방울아 언제 이리 잘 컸노. 사랑해. 나중에 나도 이런거 해 주라이~~. 잘보여야지.

[도라지꽃]

마음의 양식 삼으려, 게을러질 때마다 들여다보려 따로 복사해 놓았어요. 김지상 선생님, 진실로 존경합니다. 그 따스한 모습 우러릅니다.

[서강옥]

윤영이의편집이 더해지니 금상첨화가되었네요. 정말이경구선생님표현 한마디로 아! 김지상님이시여!!!!!

[뚝배기보다장맛]

김지상 선생님 뵐 때마다 참 고우시고 아름다우신 분이라 느꼈는데 정말 존경합니다 그리고 윤영이의 편집이예요? 칭찬합니다

[오양수]

문화유산! 우리 사는 동안 몸 안에 숨겨진 문화유산 하나쯤 찾아낼 수만 있다면 고단해도 좋으리. 님의 성스러운 마무리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 참으로 아름답네요. 윤영이와 그 엄니의 생각이 휘날레를 더욱 멋지게 장식해 주어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