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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무술에 영향을 준 남인도 전통무술 깔라리 삐야트 |
우리가 잠시 머문 도시의 이름은 코친에서 190km 떨어진 테까디(Thekkay)다. 기념품 가게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관광지임이 분명하고 길잡이의 얘기로는 향신료가 유명한 곳이다. 특히 카더몬이나 계피와 같은 향신료가 되는 식물을 재배하는 농원이 많은데 후추는 후추나무 덩굴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께랄라주에서도 후추의 주요생산지는 테까디인 모양이다.
테까디가 자랑하는 또 하나는 남인도 10여 개의 야생동물 서식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페리야르 야생동물 보호구역(Periyar Wildlife Sanctuary)이란다. 유람선을 타고 호숫가에서 뛰노는 야생동물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일행은 관광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향신료 농원이나 페리야르 입장은 아예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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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여인들이 힌두교의 락슈미신을 맞기 위해 문 앞에 그려놓은 문양. |
소림무술 연상 남인도 전통무술
그 대신 께랄라주 전통무술인 깔라리 빠야트(Kalari payat)를 공연하는 건물을 발견하고는 마두라이에 도착하는 시간이 좀 늦더라도 일행 모두가 관람하자고 의견의 일치를 본다. 어제 저녁에 께랄라주 전통무언극인 까따깔리만 보고 말았던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중국 소림사 방장 스님의 인터뷰를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다는 현장스님의 한 마디가 호기심을 더 자극한다.
“소림사 방장 스님의 얘깁니다. 인도와 중국 간에 문화교류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건강을 지키는 무술을 가지고 들어왔던바 그것을 발전시킨 것이 소림무술이라고 하는 설이 있답니다.”
일행은 ‘ㅁ’자 형태의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관람객만 차면 아무 때라도 공연하는지 잠시 후 7년 이상 수련했다는 6명의 무술 고수들이 등장한다. 공연장 출입구 맞은편 벽면에는 칼(단검과 장검)과 둥그런 방패, 철봉과 장대 등이 세워지거나 놓여 있다. 고수들이 하나씩 들고 무술 대련을 보여줄 모양이다.
무술의 기본 동작은 사자, 호랑이, 코끼리, 거북이, 뱀 등의 동작을 흉내 낸 것이라는데 실제로 보니 중국의 소림무술과 너무나 흡사하다. 다만, 내가 보기에는 깔라리 빠야트가 집단체조 같은 소림무술보다 동작들이 덜 세련돼 보이지만 격렬함에 있어서는 훨씬 더한 것 같다. 칼과 칼이 부딪칠 때는 번쩍번쩍 불꽃이 일고 칼이 부러져 나뒹굴 때는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왕자였던 달마대사가 깔라리 빠야트를 중국으로 가지고 들어갔는지는 불분명한 듯싶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애매하다. 왕자가 받는 수업에는 반드시 무예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테까디에서 달마대사의 고향인 칸치뿌람까지는 왕래가 어려울 정도로 먼 거리가 아니므로 께랄라주와 칸치뿌람의 전통무술은 대동소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인도의 민낯 마두라이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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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시바신이 타고 다닌다는 난디(소). 그 앞에서 순례자들은 모두가 지극한 모습으로 합장한다. |
일행은 기원 전 판디아왕국의 수도였던 마두라이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른다. 이제야 남인도의 민낯을 보게 될 터이다. 사실 께랄라주는 유럽풍의 오래된 왕궁과 성당, 인도의 베니스라 불리는 수로도시 알라피 등등 이색적인 풍물을 지닌 땅이었던 것이다. 기독교 인구가 19%쯤 되는 주로서 거리 곳곳에 교회 건물이나 십자가로 표시한 묘지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문맹률이 0%에 가깝고 주정부는 진보적인 공산당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특이했던 것이다.
인구 300만 명의 마두라이는 타밀나두주의 제2의 도시인데 힌두교 성지로서 강가강이 있는 바라나시처럼 끊임없이 힌두 사두와 신자들이 순례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일행은 께랄라주를 떠남으로서 비로소 남인도의 모습을 보게 되는 셈이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에야 버스가 타밀나두주 경계에서 멈춘다. 통행세를 내야 되기 때문이다. 2만3000루피(약 46만원)니까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러나 일행은 더 큰 문제에 봉착한다. 서류를 발급하는 책임자가 상(喪)을 당해서 지금 급히 장례식장에 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오기보다는 우리 일행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이란다. 할 수 없이 버스는 그가 있는 장례식장을 찾아가느라고 1시간 이상을 낭비하고 만다. 우리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도에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다.
결국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일행은 판디아호텔에서 고단한 몸을 누인다. 창밖은 흑단 같은 밤이다. 아쇼카대왕이 정복하지 않은 판디아왕국의 수도 마두라이에서 하룻밤 묵게 된 것이다. 현장법사도 7세기 중엽에 이곳 마두라이를 순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웨스트가트 산맥 때문에 인도 남서쪽 께랄라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말라이콧타국(抹羅炬?國)까지만 내려왔다가 중인도로 돌아갔던 것 같다. <대당서역기>는 첫 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말라이콧다국은 주위 5000여 리다. 나라의 대도성(마두라이)은 주위 40여 리다. 토지는 척박하고 산물은 풍부하지 않지만 해산(海産)의 진귀한 보물들이 이 나라에 많이 모여든다. 기후는 덥고 누렇고 검은색의 사람들이 많다. 성격은 격렬하며 사교와 정법을 모두 믿고 있다. 학예는 존중하지 않고 다만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가람의 흔적이나 절터는 아주 많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적고 승려 또한 적다. 힌두사원은 수백 개이고 외도들이 많다. 특히 노형(露形; 나체수행자)이 많다.’
가람의 흔적이나 폐사지가 아주 많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마두라이도 판디아왕조 때는 불교가 아주 번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라이콧타국을 왔다는 사실이나 아쇼카대왕이 스투파를 세우고 전법사를 파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남인도 불교역사다. 그런데 왜 남인도 불교는 5세기 이후부터 차츰차츰 힌두교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 것일까?
경제적인 논리를 내세우는 학자도 있다. 불교를 외호해왔던 상업세력의 몰락이 그 배경이라는 것이다. 또 불교사상이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사변적으로 발전하여 대중의 삶과 괴리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실제로 소승과 대승에 이어 금강승(밀교)은 불교와 삶의 일치를 내세우며 태동했다. 모두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방만해진 승가와 흐트러진 계율정신, 그러니까 불교 내부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팔라바왕국의 셋째 왕자였던 달마가 양무제의 초청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 양무제에게 경고한 내용도 바로 그것이었다. 고국의 불교 행태가 중국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 양무제가 불교를 외호한 자신의 공덕을 묻자 ‘무공덕(無功德)’이라며 비불교적인 것을 불교적인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수많은 절을 짓고 불경을 번역하고 수행자들에게 만발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부처님이 제시한 정법을 깨닫는 것이 바로 불교의 본질이라고 사자후를 토했던 것이다.
스리미낙쉬 사원에서 발견한 가야 쌍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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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일행은 숙소에서 여유를 부리며 마두라이 거리로 나선다. 7세기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계속 증축해 온 스리미낙쉬사원을 보기 위해서다. 물론, 스리미낙쉬사원에도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남인도의 고대 힌두사원들 모두가 불교를 바탕으로 해서 조성된 힌두사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1월 12일 토요일이다. 힌두축제 기간인지 일행이 지나치는 도로변 상점이나 주택들 문 앞에 여러 색의 안료를 이용하여 문양이 그려져 있다. 문 앞의 그림을 보고 행운을 상징하는 락슈미신이 들어온다는데 그림은 여자만 그린다고 한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부적인 셈이다.
길을 걷다가 일행은 마니얌마이(Manni yammai) 초등학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문양이 크고 정교하기 때문이다. 마침 초등학교 건물 안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축제기간 동안 전시회를 하고 있다. 교장선생이 학교를 방문한 기념으로 일행 중 몇 사람에게 숄을 선물한다. 시장 골목을 지나자 바로 3억3000의 신이 조각된 고뿌람(힌두교 탑)이 사방과 중심에 다섯 개나 우뚝 서 있다. 주차장에는 검은 천의 도티를 걸친 순례자들이 북적거린다. 채색과 금욕생활을 하는 그들을 ‘아야파’라고 부르는데 48일 동안의 축제기간에 2000만 명이 스리미낙쉬사원을 다녀간다고 한다. 신앙의 열정이 대단하다. 그들의 열정을 벤치마킹하고 싶을 정도로 부럽기도 하다.
이윽고 시바신을 숭배하는 사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입구에 시바신의 자가용격인 난디(소)가 시바신을 응시하고 있다. 순례자 모두가 난디에게도 지극하게 합장한다. 인도 사회에서 왜 소가 대접받는지 의문이 저절로 해소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내 눈길은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조각과 사원 천정에 그려진 두 마리 고기가 마주보고 있는 쌍어문(雙魚紋)에 머문다. 쌍어문은 우리나라 가야의 문양이 아닌가! 그렇다면 허왕후가 인도를 떠날 때 쌍어문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닐까?
[불교신문 2887호/2013년 2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