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에 귀의 하옵고...()... [渴愛(갈애) 가 완전히 시들어 사라지면 존재에 대한 집착은 소멸하고, 집착이 그치면 형성 과정이 소멸하고, 형성 과정이 소멸하면 재생이 소멸하고, 재생이 소멸하면 늙음.죽음.비애.한탄.고통.슬픔.절망이 소멸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고의 덩어리가 소멸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됨으로써 색.수.상.행.식을 그치고 초극하게 된다. 이것이 고의 그침이요, 병의 끝나이요, 늙고 죽는 것을 초극하는 것이다.] - 상응부경전 - 고의 끝남이 열반(Nibbana.닙바나) 이다. 불교적 의미로는 열반은 형성해 가는 과정을 그친다는 뜻이며, 이는 마치 연료 공급이 중단되거나 공기가 통하지 않게 되어 불이 한창 타다가 꺼지는 경우와 같다. 이 불이란 탐.진.치. 세 갈래의 큰 불길인데 연료가 끊어져서 타기를 멈추게 되면 생명을 지탱하는 충동들이 끝나면서 더 이상 재생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태는 정신적.육체적 온은 아직 남아 있지만 五取蘊(오취온)이 아닌 상태, 갈애와는 아무 관련이 없게 된 열반의 상태, 즉 有餘依 涅槃(유여의 열반) 상태의 아라한이 자연 수명이 남아 있는 동안 경험하는 상태이다. 그것은 절대적 평화.적정.충족이다. 아라한이 생을 끝내게 되면, 즉 생명 전개 과정의 최종적 停止(정지)에 이르면 無餘依 涅槃 (무여의 열반)을 이룬다. 다시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조건 지어지지 앟은 열반으로 거기에는 개체적 인격요소 같은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의 無化(무화)는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 어느 존재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전개 과정만 있었기에 열반은 그 전개 과정의 종결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일찍이 현상적인 생명 연속을 일으키던 집착의 온들이 꺼진 것이다. 苦(고)가 도무지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태, 그것은 오직 열반 뿐이다. 그러기에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 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통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저 갈애의 완벽한 그침, 포기, 버림이며, 저 갈애로부터 완벽한 헤어남이며, 저 갈애로부터 완벽하게 떨어져 버림이다] 그러면 열반계(Nibbanadhatu), 다시 말해 그 자체의 특성면에서 고려한 열반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열반이란 그 자체는 변화라든가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계 즉 "어떤 면으로도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 이라고 정의된다. 그러기 때문에 열반을 두고 이렇게 무엇 무엇이 아닌 어떤 것 식으로 우회하지 않고 바로 실증적 어휘로 정확하게 규정 짓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 하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의사 소통을 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모두가 조건지움의 세계에 속하는 사물이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들이기에 다른 어떤 개념과 비교 혹은 대조 되지 않는 , 그래서 다른것과 관련없는 개념을 표현하는 방법을 우리는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은 끊임없이 서로 상반된 것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명과 암, 열과 냉, 선과 악.... 이 모두는 서로 정반대되거나 강하게 대비되는 상대적 가치들이며, 이러한 상대성과 분리 되어서는 아무런 실질적 의미도 없게 되는 것들 뿐이다. 오온의 감각적 경험세계는 어떤 것도 다른 그 무엇과 관련되지 않으면 아무런 성질도 띨 수 없기 때문에 이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세계는 상대적 실제일뿐인 어떤 영역으로 간주하는 길 밖에 없다. 사실 이 세계는 의식이 통상적으로 기능하는 어떤 특정한 지혜랄까 또는 앎이랄까 하는 수준에서 볼때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 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 세계는 의식의 차원이 달라질 때에는 전혀 실재성이 없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보통의 중생들은 두개의 세계를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자신들의 감각기관이 알려주는 대로 받아들인 감각세계와 또 그 감각의 그림이 사실대로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지혜 또는 지성의 세계이다. 우리들은 이 두개의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받아 들이는 정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는 그림은 궁극적 의미에서는 감각적 속임수의 작품이다. 우리가 감관을 통해 인식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상대적 측면, 즉 우리 자신의 특정 의식 양태에 상대적으로 부합된 사물일 뿐이다. 즉 不(불)열반의 반대말이 열반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不열반의 반대말은 열반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반대의 말(상대적 측면)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에서도 언급 하였지만 어떠한 것으로도 조건 지어지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있다 없다의 차원인 상대적 측면 즉 무엇의 반대말은 무엇이다든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식의 상대적으로 부합되는 그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대해서 딱 부러진 정의를 내리기를 계속 거부 하셨고 또 이 세계가 영원한지 영원하지 않은지, 아라한이 열반에 들어서도 계속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 하기를 거부 하셨다. 이런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침묵은 질문 자체가 잘못 제기 되었다는 것이다. 그 질문들은 논의 대상들이 실재 하느냐 않느냐 하는 식의 잘못된 관념에서 나왔고, 그리고 그 대상들은 언급하는데 사용한 용어들도 잘못된 관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정적 형태의 대답이나 부정적 형태의 대답이나 둘다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될 따름이다. 부처님은 몰라서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르칠까봐 하지 않으신 것이다. 만일 이 생이 진실된 의미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면 열반은 無, 즉 단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생이 전적으로 실재가 아니라면 결국 無 일 것이고 그럴 경우 열반은 절재적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생이 비실재 즉 無 가 아닌 것은 우리가 겪는 경험이 실제적(有.유) 이기 때문이다. 또 열반을 有(유)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은 "자아 의식" 같은 有(유) 에 결부시키는 특징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그 특성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은 "자아" 같은 개체성을 띠지 않는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계속 변화고 있는 모든 "온" 들의 화합체이고 변화의 흐름이기 때문에 어떤 본체론적 실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서술적으로 말해 시.공 연속체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흐름 이리고 묘사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서술 영역을 넘어서 버리면 어떤 의미에서도 그런 것 즉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교나 상대적 실재(有 아니면 無)에 관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질문에 대해서 그와 똑같은 단어들로 이루어진 대답(無 아니면 有)을 해 본들 절대적 진리를 구현하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궁극적 의미에서 "최고의 진리(Paramattha sacca)" 는 전혀 표현할 길이 없다. 또한 열반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실현 될 뿐이다. 그리고 열반을 실현했다 해서 존재 일반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나 열반과 관련된 의문들에 대해서 별다른 대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문들이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의문들은 상상이 낳은 가공적 구조물로서 궁극적 진리가 감각 자료의 영역과 용어들에 얽매인 개념적 사유를 통해서 이해 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열반의 경험이 본질적으로 남에게 설명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빠알리 경전에는 그에 관해 서술한 말들이 있다. 이러한 말들은 열망의 시적 표현으로 가득차 있으며 결코 철학적인 용어들이 아니다. 윤회의 제 조건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이상을 전해주는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진리의 가치를 지니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열반은 不死(죽음과 태어남이 없는 것), 행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열반은 끝내 "설해지지 않는 것(Anakkbata)" 이고 "조건지어 지지 않는 것 (Asankkbata)" 이다. 究竟(구경) 열반은 원인과 결과가 하나 되는 곳,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것도 사라져 버리는 곳, 공간.시간 그리고 일체의 사유의 범주를 단멸시는 그 지점이다. [조건 지워진 것에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에는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이 없는 곳에 靜寂(정적. 고요함)이 있다 정적이 있는 곳에 갈애는 없다 갈애가 없는 곳엔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다 감도 옴도 없는 곳엔 생김도 사라짐도 없다 생김도 사라짐도 없는 곳엔 이세상도 저세상도 그 중간 상태도 없다 이것이 바로 고의 끝남이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대해서 정의 내리시길 침묵 하셨지만, 하지만 미혹한 중생들이 혹 열반계가 없는게 아닌가 의구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열반의 실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緣起(연기)되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나니 그처럼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연기되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과 같은 어떤 상태가 없다면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연기되고, 형성된 것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실로 이처럼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 지지 않은 것, 연기되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과 같은 어떤 상태가 있기에 태어 났고, 만들어 졌고, 시작된 것이며, 형성된 것으로부터의 탈출이 진실로 있는 것이다.] 정등각자이신 부처니의 깨달음은 아라한의 지혜뿐만 아니라 거기에다가 일체지를 더 증득한 즉 완전무결한 지혜이다. 그러나 그분의 대부분의 지혜는 남에게 소통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설법시에는 보통 대중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을 그대로 사용 하셨다. 그러지 않고 달리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그리고 부처님만이 알고 계시는 지혜의 일부를 빌려와 사용했다면 대중들은 기괴하게 생각하고 이해되지 않음으로 해서 부처님 설법에 대해서 온갖 개인적으로 서로 다른 이해가 생겼을 것이고 또한 제대로 믿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구구셈을 겨우 배운 학생에게 인수분해 미적분을 가르쳐 줄 비상식적인 스승은 없다. 어느 제자가 부처님에게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를 모두다 가르쳤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부처님은 흙먼지를 집어서 손위에 올려 놓으시고 그 흙먼지와 땅에 남아 있는 흙먼지 중 어느쪽이 더 크냐고 반문하셨다. 뻔한 대답이 나오자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가 갖고 있는 지혜도 가르친 것 보다 더 크다. 그렇지만 완전한 해탈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래는 가르쳤느니라. 여래에게는 무언가 따로 감추어 놓은 스승의 숨은 손 같은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아시면서도 가르치지 않은신 것들은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윤회의 바다를 건너도록 중생을 이끄는 일과는 어르모로도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부처님께서는 형이상학적 사변을 권장하지 않으셨다. 아무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어떠한 이론도 제시하지 않으셨다. "진리를 몸소 체득" 하셨기에 부처님은 단순히 이성적 사고에만 근거하거나 불완전한 지식에 근거한 견해들을 배척하고 내다 버려셨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이론이나 종교적 독단 또는 몽상가의 꿈이 아니라 누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해 낼 수 있고, 또 실제로 증명되어 온 진실로 제시하신 것이다. 불사의 문을 여는 그 열쇠를 한 사람 또는 어느 특정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각자 스스로 노력해서 누구나 그 문으로 들어 가도록 활짝 개방해 놓으셨다. 부처님법은 "심오하고 미묘한 것이고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쓰시는 언어 체계에서 지혜는 학문적 배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혜라는 말은 사물을 분명하게 보는 능력을 뜻한다. 이렇듯 부처님의 말씀은 신비한 언어도 아니고 진리만을 위해서 통용되는 성스러운 단어도 아닌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일반 용어 속에 있다. 성스러운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는 누구나 이해 할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단어로 "팔정도" 라고 분명하게 선언 하셨다. 사람들이 볼수 있고 알수 있게하여 평화로 통챂로 완전한 지혜로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길이다. 팔정도는 마음과 더불어 시작되고 마음을 초극함으로서 끝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기에 나이가 많든 적든 학식이 높거나 일자무식이거나 사물을 見(볼 견) 하는 것이 아니라, 觀(볼 관) 할 수 있는 諸根(제근) 을 온전하게 갖추기만 했다면 인생의 참 성질을 찾아내고 또 열반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수단은 이미 다 갖추고 있다고 할 것이다. 불사의 문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갈애와 집착은 어디서 끝나게 되는가. 부처님께서 하신 대답은 일어난 그곳이 바로 끝나는 곳이다라는 것이다. [걷고 걸어도 그대 세상 끝에 이를 수 없을니 그대 거기 이를 수 없기에 苦(고)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리 그러나 지혜가 깊고 세상을 바로 보는 이 진실로 그 끝을 보도다 청정한 삶을 살아 온 이 평온한 마음으로 윤회의 끝남을 알게 되리 이 세상도 저 세상도 가려고 하지 않으리] -상응부 경전- [언젠가는 태양이 메말라 사라져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날이 오고 이 거대한 대지도 불에 타 사그라져 흔적이 없어 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무명의 족쇄에 묶이고 갈애의 덫에 잡혀서 윤회를 서두르고 재촉하는 존재들의 苦 에는 끝이 얺으리라] - 상응부 경전 - Samma Sambuddho : 모든 법을 바르게 직접 스스로 완전 깨달음을 이루신 분 Lokavidu : 세간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 Satthadevamanusam : 모든 천인과 인간의 스승이신 분 Buddho : 깨달으신 분. 존재의 실상을 깨달으신 분 Bhagava :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Buddham saranam Gacchaami 나는 그분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
첫댓글 넘 길어서 못읽겠다.... 불교경전 홍보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