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 제124권 / 묘지(墓誌)
고려국 정순대부 밀직사 우부대언 종부령 겸감찰집의 지판도사사 유군 묘지명
(高麗國正順大夫密直司右副代言宗簿令兼監察執義知版圖司事柳君墓誌銘)
이곡(李穀)
유주 유씨(儒州柳氏)에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한 이가 있었는데, 그후에 경사가 뻗치고 복덕을 받아 대대로 어질고 착한 이가 나왔다.
명종왕(明宗王) 때 정승 공권(公權)은 학문을 좋아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쓰며, 마침내 관직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고 시호는 문간(門簡)이었다.
이때 최충헌(崔忠獻)이 도적을 토벌한 공을 가지고 임금을 폐하고 세우기를 마음대로 하였으며, 자손들이 서로 잇달아 정권을 마음대로 하였다. 충헌왕(忠憲王 고종) 무오년(45년)에 이르러 문간의 손자 휘(諱) 경(璥)이 재화(才華)와 덕망(德望)이 그 당시에 제1이었는데, 별장 김인준(金仁俊)과 더불어 모의하여 충헌의 증손 의(誼)를 목베고, 임금에게 정권을 돌리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국가에 공을 세워서 지금까지 칭송하여 왔다.
벼슬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 태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니. 군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문정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事事) 휘 승(陞)을 낳으니 시호는 정신(貞愼)이며, 정신이 문화군(文化君) 휘 인기(仁奇)를 낳았으니, 휘는 온정(溫靖)인데 첨의중찬(僉議中贊) 휘 지숙(之淑) 시호 광절(光節)의 딸,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 김씨(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군에게는 부모가 된다.
나이 16세에 음관으로 흥왕 도감판관(興王都監判官)에 제수되고 두 번 옮겨 낭장이 되었다가, 지원(至元 후지원) 2년 병자(충숙왕 5년)에 소부소윤(少府少尹)에 임명되었다. 전직하여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가 되었다가 기묘년 봄에 밀직대언 겸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에 승진되었다.
천성이 총명하고 공손하여 어려서부터 의릉(毅陵 충숙왕)의 인정을 받았는데, 여기서 장차 크게 등용하려 하여 우선 납언(納言)의 임무로 풍기(風紀)의 직책을 겸하게 하였다. 군은 능히 가업을 깊이 생각하여 욕됨이 없게 할 것을 마음먹고, 당시에 공을 세워서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고 하였으며, 사람들 역시 이렇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얼마 후에 의릉이 나라를 버리니 시사(時事)가 크게 달라졌다.
다음 해 8월 을미일에 병으로 갑자기 죽었으니, 나이 37세이다. 부인 원씨(元氏)는 고(故) 검교평리(檢校評理) 선지(善之)의 딸인데, 화려한 문벌에서 덕을 닦고, 큰 가문의 착한 짝을 얻어 제사를 받들고 음찬을 주관하되 순하면서 법도가 있었다.
자녀 다섯을 낳았으니, 맏아들 계고(繼高)는 바야흐로 10세이며, 둘째 아들 상좌(尙左)는 8세이다. 맏딸은 심양로 달로화치 홍천군(瀋陽路達魯花赤洪川君) 홀실첩목이(忽失帖木耳)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지유낭장(指諭郞將) 홍유귀(洪有龜)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 딸은 신양군(新陽君) 노영(盧瑛)에게 출가하였다.
9월 경신일에 성동 대덕산록(城東大德山麓)에 장사 지내는데, 부인이 군과 평소에 왕래하던 문사들 중에 나만한 이가 없다고 하여 와서 명문을 청해 오게 한 것이다. 명에 이르기를,
유씨의 흥성은 / 柳氏之興
나라와 함께 하였네 / 與國竝焉
근원이 멀고 머니 / 源其遠矣
흐르는 경사가 면면하도다 / 流慶緜緜
문간공과 문정공은 / 文簡文正
재주도 있고 착하기도 하여 / 旣藝旣賢
우리 동방에 정승하여 / 相我釐東
다섯 대를 잇달았네 / 五葉蟬聯
군 또한 착하여 / 惟君克肖
가업을 잇기를 생각하였는데 / 志篤紹先
하늘이 덕을 싫어하지 않으면 / 天未厭德
어찌 수를 주지 않으시나 / 胡不永年
누가 수요를 주장하는가 / 孰尸壽夭
그 이유를 알 수 없네 / 莫究其然
유실에 명을 새겨 / 刻銘幽室
후세에나 전하리니 / 惟後之傳
<끝>
ⓒ한국고전번역원 | 김용국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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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國正順大夫,密直司右副代言,宗簿令兼監察執義,知版圖司事柳君墓誌銘 / 李穀
儒州柳氏有佐命開國者。其後延慶食德。代生賢哲。明王宰相諱公權。好學工草隷。卒官參知政事。謚文簡。是時崔忠獻。挾討賊功。擅廢立。子孫相繼專政。至忠憲王戊午。文簡之孫諱璥。才華德望冠一時。與別將金仁俊謀誅忠獻之曾孫誼。用能歸政于王。施惠于民。而功在社稷。至于今稱之。官至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脩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謚文正。於君爲曾祖。文正生知都僉議司事諱陞。謚貞愼。貞愼生文化君諱仁奇。謚溫靖。娶僉議中贊諱之淑謚光節之女。海陽郡夫人金氏。於君爲考妣。君諱甫發。年十六以門蔭除興王都監判官。再遷郞將。至元二年丙子。拜少府少尹。轉通禮門副使。己卯春。陞密直代言兼監察執義。性聦慧恭恪。幼承毅陵之知。至是將大用。試以納言之任。攝風紀之司。君能深惟家業。志于無忝 。方將立功于時。而垂名于後世。人亦以此望之也。已而毅陵棄國。時事一變。明年八月乙未。病暴卒。年三十七。夫人元氏。故檢校評理諱善之之女。毓德華閥。媲賢大家。承祀主饋。以順以則。生男女五人。長繼高方十歲。次尙左八歲。長女適瀋陽路達魯花赤洪川君忽失帖木耳。次適指諭郞將洪有龜。季適新陽君盧瑛。以九月庚申葬城東大德山麓。夫人以君之嘗所往還者。於文士莫若余。使來乞銘。銘曰。
柳氏之興。與國並焉。源其遠矣。流慶緜緜。文簡文正。旣藝旣賢。相我釐東。五葉蟬聯。惟君克肖。志篤紹先。天未厭德。胡不永年。孰尸壽夭。莫究其然。刻銘幽室。惟後之傳。<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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