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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야기 스크랩 謙齋 鄭敾이 본 漢陽 眞景
세석평전 추천 0 조회 76 08.05.29 21: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1759)은
한양의 산과 강, 나무와 개울 등을 소재로 한 산수화를 여러 점 남겼다.

장안연우 (長安煙雨)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의 창시자다.
진경산수화라는 것은 우리 국토의 자연환경을 소재로 하여 그 아름다움을 사생해 낸 그림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은 늘 그렇게 있어 왔는데 어째서 겸재에 의해 그런 그림이
시작되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겸재가 살던 시기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에
의해 우리 고유 이념으로 심화 발전된 조선 성리학이 사회를 주도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우리가 세계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여진족이 청(淸)을 건국하여 중국 대륙을 여진화시켰다는 현실이
우리에게 이런 자신감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계 문화의 종주국이라는 자존의식이 팽배하여 우리 자신을 긍정적
시각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람은 물론 풍속과 산천까지도 우리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자긍심이 생겨
우리 문화를 그렇게 이끌어가려 노력하였다.
그런 시기가 숙종(1674∼1720)부터 정조(1776∼1800)에 이르는 125년간이었다.

당연히 이 시기에는 문학도 진경시문학이 발전하였고 그림도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출현하여
일세를 휩쓸게 되었으며 서예나 조각은 물론 음악까지도 모두 짙은 조선 고유색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진경시대라 부른다.

이 진경시대의 절정기인 영조 17년(1741년) 봄에 겸재가 당시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자부하던
서울을 그의 독특한 진경산수화법으로 그려 놓은 그림이 이 ‘장안연우’이다.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서울 장안을 육상궁의 뒷산쯤에 해당하는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내려다본 정경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1670∼1718)의 사당으로 지금 청와대 서쪽 별관
서쪽의 궁정동에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사적 149호인 이곳이 최근에는 일반에 공개된다고 한다.

연무(煙霧)가 낮게 드리워 산 위에서는 먼 경치가 모두 보이는 그런 날이었던 모양으로,
남산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멀리는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 등의 연봉들이 아련히 이어진다.

겸재가 전반의 생을 보냈던 북악산 서쪽 산자락과 후반의 생을 산 인왕산 동쪽 산자락이
마주치며 이루어 놓은 장동(壯洞)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눈앞에 깔면서 나머지 부분들은
연하(煙霞)에 잠기게 하여 시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꿈속의 도시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 서울 장안의 진경이다.

비록 남대문로와 종로, 을지로 일대의 번화가가 운무에 가리워 있다 하나 궁정동, 효자동,
적선동, 통의동 일대에서 동쪽으로는 광화문과 종로 초입 부근까지, 서쪽으로는 청운동,
옥인동, 필운동 일대에서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선 경희궁 근처까지 표현하고 있어 당시
인구 18만명 남짓이 살던 한양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무성한 숲 속에 싸여 천연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쾌적한 분위기를 만들어나간 선인들의
도시경영 실태를 이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그 생활의 예지와 문화역량에 새삼 탄복을
금할 수 없다.

자연의 파괴와 무질서한 건축으로 천부의 미관을 되찾을 수 없이 망가뜨리고 있는
현대 문화의 오류는 이런 수준 높은 우리 전통문화의 역량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자각과 반성을 거치면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청풍계 (靑楓溪)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종로구 청운동(靑雲洞) 54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楓溪)라 불렀는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이
별장으로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한다.

지금 이 터는 청운초등학교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댁 등 몇몇 부호들의 사가로
나누어져 있다.
선원과 그 아우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 형제가 율곡 학통을 이어 이 곳 인왕산과
북악산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결과 그들의 증손자 세대에 이르러서는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 등 진경문화의 선두주자들을 배출하게 되고
그들의 문하에서 진경문화의 주역인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川 李秉淵·1671∼1751) 등이
출현하여 진경문화를 절정으로 이끌어간다.

따라서 겸재가 진경문화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이 청풍계를 많이 그렸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현재 세상에 알려진 것만도 여러 폭인데 그 중에 이 청풍계가 대표작이다.

‘기미년 봄에 그렸다’는 겸재 자필의 글씨가 있어서 겸재가 64세 나던 해인
영조 15년(1739)에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눈길을 끄는 바위절벽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모습대로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사가의
뜰 안으로 숨었는지 아니면 파괴되어 사라졌는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흔적조차 가늠할 길 없다.

키 높은 전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훤칠하게 자라난 아름드리 노송의 표현에서 300년 묵은
고가의 전통을 실감할 수 있다.
청운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청풍계와 백운동(白雲洞)을 합쳐 지은 것이다.

인곡유거(仁谷幽居)



인곡유거(仁谷幽居)는 겸재가 살던 집의 이름이다.
지금은 아파트만 이름이 있고, 단독주택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름이 없지만
겸재가 살던 시대에 사대부의 집들은 모두 택호(宅號)를 가지고 있었다.

겸재도 자신이 52세부터 살기 시작해 84세로 돌아갈 때까지 살았던 인왕산 골짜기의 자기집
이름을 인곡유거 또는 인곡정사(仁谷精舍)라고 불렀다.

유거라는 것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이란 의미이고 정사는 심신을 연마하며
학문을 전수하는 집이란 뜻이다.
모두 학문 연구를 궁극의 목표로 삼던 사대부들이 붙일 만한 집의 이름이다.

그래서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즐겨 유거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겸재의 스승인 삼연 김창흡이
태어난 집도 악록유거(岳麓幽居)였다.
삼연의 증조부 청음 김상헌이 붙인 이름이다.

인곡유거가 있던 자리는 옥인동 20 부근이다. 지금은 그 터에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인곡유거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당시 겸재 댁 주소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도(漢都)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창의리(彰義里) 인왕곡(仁王谷). 그
러니 인곡은 인왕곡의 준말이었던 것이다.
옥인동이라는 현 동명도 1914년 옥류동(玉流洞)과 인왕곡이 합쳐져 붙은 이름이다.

겸재의 탄생지는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幽蘭洞)이었다.
현재 청운동 89 일대이니 경복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곳으로 북악산 서남쪽 기슭에 해당한다.
겸재는 이곳에서 나서 52세까지 살다가 이후 인왕곡으로 이사와 인곡유거에서 생을 마감한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절정에 이르는 것이 60대 이후이고,
이 그림을 그린 80세 전후해서는 추상세계로 이를 완벽하게 마무리짓는다.
따라서 인곡유거는 겸재가 그 예술혼을 한껏 불태웠던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인곡유거는 지금 신교동과 옥인동을 나눠 놓는 세심대(洗心臺) 산봉우리를 등지고
남쪽을 향해 있었던 것 같다. 그 집을 동쪽에서 내려다보고 그린 것이 이 그림이다.

바깥 사랑방 동쪽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겸재 자신의 모습을 표현해 인곡유거인 것을
나타냈지만 사실 이 그림을 그린 의도는 사랑채 앞 정원과 그 남쪽으로 전개되는
필운대(弼雲臺) 일대의 인왕산 자락이 어우러지는 그윽한 자연미의 표출일 것이다.

뜰 안의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산봉우리들과 어우러지면서 이뤄내는 조화가 바로 이를
말해주는데 이엉을 얹은 초가지붕의 일각대문과 버드나무를 타고 올라간 포도덩굴에 이르면
그 세련된 안목에 기가 질린다.

이렇게 그윽한 자연미를 자랑하던 이곳을 지금 찾아가 보면 옥인파출소와 효자동사무소 뒤로
군인아파트 건물들이 살벌하게 솟아나서 그 큰 인왕산을 간 곳 없이 밀어내고 있을 뿐이다.



대은암 (大隱岩)



대은암동은 지금 청와대가 들어서 있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산 1번지 북악산 남쪽 기슭을 일컫는
동네 이름이었다.
여기를 대은암동이라 부른 것은 조선 중종(1506∼1544)때쯤부터라고 한다.

점필재 김종직(F畢齋 金宗直·1431∼1492)의 제자로 글재주가 뛰어났던
지정 남곤(止亭 南袞·1471∼1527)이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
대은암이란 바위 이름이 생겨났다.

남곤이 당대를 대표할 만한 풍류문사였기에 그와 짝할 만한 문사인
읍취헌 박은(?翠軒 朴誾·1479∼1504)과 용재 이행(容齋 李荇·1478∼1534) 등은 늘 술을 들고
남곤의 집에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승지 벼슬을 지내던 남곤이 새벽에 나갔다 밤에 돌아오니 만나서 함께 놀 수가 없었다.
이에 박은이 그 집 뒤에 있는 바위를 만날 수 없는 주인에 빗대
대은암(大隱岩·크게 숨어있는 바위)이라 하고, 그 밑을 흐르는 시내를 만리 밖에 있는 여울과
같다는 뜻으로 만리뢰(萬里瀨)라고 했다.

이후 이 일대를 대은암이 있는 동네라 하여 대은암동이라 했는데 불행하게도 뒷날 남곤이
기묘사화(1519)를 일으켜 죄인이 되자 남곤의 후손은 이 집을 지킬 수 없게 됐다.
집주인이 바뀌다 드디어 율곡의 친한 벗인 백록 신응시(白麓 辛應時·1532∼1585)의 소유가 됐다.

이 동네에 남곤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우의정을 지낸 안당(安塘·1460∼1521)과 율곡학파 중추가문 중 하나인 임천 조씨(林川 趙氏)
일가 등도 대은암동에 터를 잡았다.
특히 안당의 집터는 대은암동 중 가장 명당이라서 현인(賢人)이 태어날 곳으로 꼽혔는데
그 집 종의 아들로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1534∼1599)이 태어난다.

그는 종의 신분을 타고났으면서도 학문을 대성하여 율곡의 벗이 되고 율곡학파를 성립하는 데
막후 실력자로 큰 역할을 한다.
이를 두고 명당터를 잘못 짚어 마땅히 내당이 자리할 곳에 행랑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런 집터들이 지금은 모두 청와대 안에 포함돼 있다.

그림에서 보는 집은 남곤이 처음 터를 마련하고 백록 신응시가 사들여 살기 시작한
백록의 옛집일 것이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백록의 6대손인 서포 신치복(西圃 辛致復·1680∼1754)이 살고 있었다.
물론 겸재의 동네 친구였다.

그래서 겸재는 유서깊은 백록의 대은암 옛집을 장동팔경(壯洞八景)의 하나로 즐겨 그리게 됐다.
이 그림은 그 중의 대표작이다.

초당(草堂) 뒤 산언덕에 솟아난 바위가 대은암이다.
여기에는 ‘대은암무릉폭(大隱岩武陵瀑)’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지
누군가 확인해주면 좋겠다.



세검정 (洗劍亭)



세검정은 서울 종로구 신영동(新營洞) 168의 6에 남아 있는 정자다.
세검정네거리에서 신영삼거리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세검정길이 홍제천 냇가와
마주치는 곳에 정(丁)자 모양의 정자가 옛 모습을 자랑하며 백색 화강암 위에 서 있다.

세검정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세검정을 둘러싼 비봉, 문수봉, 보현봉, 북악산, 구준봉 등 화강암봉과,
거기서 발원하는 맑은 물줄기가 모인 홍제천이 이루어 낸 빼어난 경치는
그 연원에 관한 갖가지 설(說)을 낳고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654∼660)이 삼국 쟁패 과정에서 죽어간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 세검정초등학교 부근에 장의사(壯義寺)를 지은 것도 그 절경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곳이 정자터였을 것이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자 세검정터는 풍류객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연산군은 즉위 12년(1506) 장의사를 철거하고 이 일대를 놀이터로 만든다.
세검정 물길 바로 위에 이궁(離宮)을 짓고 석조(石槽)를 파 음란한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곳이 탕춘대(蕩春臺)다.
이에 세검정이 이 시기에 지어졌으리라는 주장이 나오게 됐다.

또 하나의 주장은 이렇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때 이귀(李貴·1557∼1632) 등 반정군들은
홍제원에 모여 세검입의(洗劍立義·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의 맹세를 하고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격, 반정을 성공시킨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다는 것.

숙종 37년(1711) 건립설도 있다.
이 해에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수비군의 연회장소로 세검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이 모두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림 속의 세검정은 영조 24년(1748)에
지어진 것이다. 겸재 나이 73세 때였다.

영조는 인조반정 2주갑(二周甲·120년)을 기념하기 위해 1743년 5월7일 창의문에 친림하여
감구시(感舊詩·옛 일을 생각하고 감회를 읊는 시)를 지으며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써 문루에
걸게 한다.
즉위 23년(1747) 5월6일에는 총융청(摠戎廳·경기지역을 관할한 군영)을 탕춘대로 옮기고
북한산성까지 수비하게 한 뒤 이듬해에 총융청 장졸들의 연회장소로 세검정을 짓게 했다.

이 그림은 세검정이 준공된 다음 영조에게 보이기 위해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는 겸재의 그림 제자로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지극히 애호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그림의 세검정은 1941년 부근의 종이공장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6년 서울시는 이곳을 시 지정기념물 4호로 지정하고
1977년 5월 바로 이 그림을 바탕삼아 세검정을 복원해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이때 복원된 것이다.



동소문 (東小門)



동소문은 서울 종로구 혜화동 네거리에서 삼선교 네거리로 넘어가는 큰 길 중간 한 복판에
있던 한양성 4소문(小門) 중 하나다.

사방에 4대문을, 그 사이 간방에 4소문을 냈다. 4대문 중 정북문을 숙청문(肅淸門),
정동문을 흥인문(興仁門), 정남문을 숭례문(崇禮門), 정서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했다.
또 4소문 중 동북문을 홍화문(弘化門), 동남문을 광희문(光熙門), 서남문을 소덕문(昭德門),
서북문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이 가운데 홍화문을 동소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문으로는 동북지역 관민들과 여진족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그런데 성종이 14년(1483) 창경궁을 짓고 그 동문을 홍화문이라 불러 동소문과 혼란을 일으키자
중종 6년(1511) 동소문의 이름을 혜화문(惠化門)으로 바꾼다.

본래 이 혜화문은 문루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나서는 한동안 문루가 없는 암문(暗門)
형태의 ‘무지개 문’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도 문루의 표현이 없다.

영조 20년(1744) 8월 어영청(御營廳·인조 이후 서울 도성의 수비를 맡던 군영)이 왕명을 받들어
이 곳에 문루를 재건한다.
불탄 지 152년 만의 일이고 겸재 나이 69세 때였다.

겸재는 문루가 없던 때의 동소문 일대 진경을 남기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던 모양인데
기법으로 보면 70대 후반의 특징이 보이니 옛 기억을 되살리거나 이미 그렸던 옛 그림을
보기 삼아 다시 그린 그림일 수 있다.

영조때 지어진 동소문 문루는 일제가 방치하여 1928년 허물어지고 만다. 그
래서 그림에서 보이는 무지개 문만 남아 있었다.
일제는 1939년 경성부 확장이라는 명분 아래 서울의 청룡줄기인 동소문 고개를 자르고
새 도로를 내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이때 그림 속 동소문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높다랗게 능선을 따라 쌓은 성 안쪽 왕솔 우거진 산봉우리는 지금 가톨릭대가 들어선
혜화동 1번지 일대다.
본래 이 동네는 성 아랫동네라는 의미로 순 우리말로 잣동이라 했기 때문에
한자로 백동(栢洞)이나 백자동(栢子洞)으로 표기돼 왔으나 1914년 동명 통폐합시
혜화동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구름이 휘감아도는 산밑 동네가 대학로 일대라면 믿어지겠는가.
지금 동소문 고개에 가보면 1994년 10월 서울 도성 복원사업의 하나로 복원해 놓은
혜화문 문루가 있다.



광진 (廣津)



현재 워커힐호텔과 워커힐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의 모습이다.
이 곳에 한강을 건너는 가장 큰 나루 중 하나인 광나루가 있었다.

광나루가 언제부터 이 곳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의정부 동두천 쪽에서 내려와 한강을 건너 광주 여주 충주 원주로 가려면 이 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니 우리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이 나루도 함께 생겨났을 듯하다.

특히 겸재가 살던 진경시대는 평화와 안락이 절정에 이르러 상류층들이 이런 아취있는
풍류생활을 맘껏 누리고 있었다.
겸재는 그런 그 시대 상황을 이 광나루 진경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배를 타고 보거나 천호동 쪽에서 바라다보면 아차산의 층진 모습이 꼭 이와 같이 보인다.
다만 이 그림에서처럼 한식 기와집들이 드문드문 숲속에 배치되는 운치가 사라지고
살벌한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차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산 아래 나루터에는 두어 척 나룻배가 묶여있는데 강 한가운데로는 돛단배들이 쉴 새없이 오르내린다.
그 안에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들이 가득 타고 있으니 아마 여행이나 풍류를 즐기는
유람선인 모양이다.

지금 이 곳에는 천호대교(千戶大橋)가 지나고 있다.
천호대교는 1974년 8월에 착공하여 1976년 7월에 준공하였다.

그 위로 차량 행렬이 하루 종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나룻배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겸재시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하겠다. 어디 그뿐이랴!
지하철 5호선이 이 곳 광나루를 가로질러 지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그림은 영조 17년(1741) 비단에 채색한 것이다.



송파진 (松波津)



송파진은 지금 송파대로가 석촌호수를 가르고 지나서 생긴 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다.
이곳은 서울과 남한산성 및 광나루에서 각각 20리씩 떨어져 있던 교통의 중심지라서
광주(廣州) 읍치(읍소재지)가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는 병자호란(1636) 직후부터
서울과 광주를 잇는 가장 큰 나루로 떠오른 곳이다.

북쪽 매봉 기슭에서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수되어 한강으로 물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중랑천은 의정부에서부터 천보산 도봉산 수락산 삼각산 등의 물을 모아오고 청계천은 한양의
물을 몽땅 모아온다.

그러니 한강 본류와 탄천 중랑천이 이 낮은 분지에서 물머리를 맞대며 실어나르는
토사의 양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일대는 수많은 모래 섬이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반복을 되풀이했다.

이에 뚝섬 무동도 등은 섬이 아닌데도 섬이라 하고 부래도(浮來島) 잠실은 샛강이 생겨
섬이 되었다. 이것이 1970년 이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1970년 송파나루 앞으로 흐르던 한강 본줄기를 매립하고 성동구 신양동 앞의 샛강을
넓혀 한강 본류를 삼으니 이 일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됨)와
같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송파나루의 흔적은 메우다 남긴 석촌호숫가에서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그림에서 보면 멀리 남한산성이 보이고 그 아래 한강가에 송파진이 베풀어져 있다.

지금 화양동 쪽에서 비행기를 타고 보듯이 시점을 높이 띄워 멀리 내려다본 모습이라
한강의 양쪽 기슭이 모두 그려져 있다.
송파나루에서 서울 쪽으로 건너오는 나룻배에서 내린 인물들이 많고 그들이 잠시 쉬며
목이라도 축일 수 있는 곳인 듯 모래사장에는 차일이 쳐져있다.

요즘 강변 모래밭 풍경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남한산성 위로 솔숲이 녹색 휘장을 두른 듯 높이 솟아 있는 것도 오늘날과 같다.
이것이 바로 남한산성의 본 모습이며 그다운 아름다움이다.

녹음 짙은 한여름이나 새싹 돋아나는 봄철, 단풍 든 가을, 눈 쌓인 겨울 등 언제 보아도
소나무가 사시장철 푸르기 때문에 남한산성 모습은 늘 이와 같다.
다만 여기 보이는 한강 물줄기는 메워져 고층건물로 뒤덮이고 그 사이로 길이 나서
물길 따라 유유히 떠가는 돛단배 대신 사통팔달의 도로를 따라 차량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영조 17년(1741) 비단에 채색한 20.1×31.5㎝ 작품이다.



압구정 (狎鷗亭)



압구정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에 있던 정자다.
남쪽에서 우면산 자락이 밀고 올라와 북쪽의 남산 자락인 응봉(鷹峯)과 마주보며
한강의 물목을 좁혀 놓은 곳의 끝부분에 세워져 있던 정자다.
원래 이곳 응봉 아래를 휘감아 도는 한강 기슭은 두무개 혹은 동호(東湖)라 하여
경치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래서 중종(1506∼1544) 때부터는 독서당(讀書堂·젊고 재주 있는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던 집)을 이곳에 두기도 하였다.
이런 두무개 맞은편 강변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정자를 세웠으니 이곳에 올라앉으면
서울 강산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이에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의 모사가 되어 왕위를 찬탈하게 했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일찍이 이곳을 차지하고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죽은 뒤에는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에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尹)씨의 사사(賜死)
주모자로 부관참시(剖棺斬屍·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베는 형벌)의 극형을 받는다.
재산도 몰수되어 국고로 환수되었으니 압구정도 주인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때는 누가 주인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정자만은 팔작집의 큰 규모로 언덕 위에 덩그렇게 지어져 있다.
그 아래로 층층이 이어진 강변 구릉 위로 기와집과 초가들이 마을을 이루며 들어서 있다.
기와집은 서울 대가집들의 별장일 가능성이 크다.
잠실 쪽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본 시각이기 때문에 압구정동 일대와 그 맞은편 기슭인
옥수동 금호동 일대가 한눈에 잡혀 있다.
바로 강 건너가 독서당이 있던 두무개이고, 그 뒤로 보이는 검은 산이 남산이다.
정상에 큰 소나무가 서 있는 것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그 큰 소나무가 그렇게 서 있었다 한다.
압구정동 뒤로 보이는 먼 산은 관악산 청계산 우면산 등일 것이다.

이 압구정은 여러 손을 거쳐 조선 말기에는 철종의 부마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1861∼1939) 소유가 되었는데 박영효가 갑신정변(1884)의 주모자로
역적이 되자 몰수되어 정자는 파괴되고 터만 남는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곳은 경기 광주군 언주면(彦州面) 압구정리라 했으나
1963년 1월1일에 서울시로 편입되어 압구정동이 된다.
1970년대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일대가 아파트 숲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압구정 자리는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해당한다.

영조 17년(1741)에 비단에 채색한 20.2×31.3㎝ 작품이다.



양화환도 (楊花還都)



양화진(楊花津)은 서울 마포구 합정(合井)동 378의 30에 있던 나루다.
한양(서울)에서 김포 부평 인천 강화 등 당시 경기 서부지역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다.
그래서 일찍이 한양의 외백호(명당의 바깥 서쪽 줄기)에 해당하는 길마재(鞍山) 줄기가
한강으로 밀고 내려오다 강물에 막혀 불끈 솟구친 바위절벽인
잠두봉(蠶頭峯·용두봉·龍頭峯이라고도 했고 지금은 절두산·切頭山이라 한다)
북쪽 절벽 아래에 나루터를 마련하고 이를 양화나루라 하였다.

이곳에서 출발한 나룻배는 맞은편 강기슭인 경기 양천(陽川)군 남산(南山)면 양화리
선유봉(仙遊峯) 아래의 백사장에 배를 대었다.
이곳 역시 양화나루였다.
원래 양천 양화리에 있던 나루가 양화나루였기 때문에 이 양화나루에서 건너가는
한양 잠두봉 아래의 나루도 양화나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에서 보아도 이미 잠두봉쪽 양화나루가 나루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벌써 잠두봉 북쪽 기슭에 나루를 관장하는 관리들이 머무는 관청인 듯 번듯한 기와집이
여러 채 들어서 있고 그 아래 강가 버들 숲에도 기와집이 표현돼 있다.

빈 배들도 그 아래 강변 모래톱으로만 즐비하게 정박해 있다.
양천쪽 선유봉 아래 모래밭은 아무것도 없는 빈 터뿐인데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가
앞뒤로 시종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종에게 배를 부르게 하자 사공이 거룻배 한 척을 쏜살같이
몰아 건너오고 있다.

선비 일행이 서 있던 선유봉 아래 양화나루터는 지금 영등포구 양화동 양화선착장으로 변해 있다.
신선이 내려와 놀 만큼 강가에 매혹적으로 솟구쳐 있던 선유봉은 19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허물어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없던 산도 만들어야 할 판에 있는 산조차 허물어 버린 몰풍류에 기가 막힐 뿐이다.
이 양화나루터 부근으로는 양화대교와 성산대교가 남북으로 놓여서 밤낮없이 차량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길손이 강 건너에서 소리쳐 부르면 사공이 배를 저어 건너와서 태우고 가던 260년 전 겸재
시대와 비교해 보면 어떠한가.
양화대교는 1965년 1월 25일에 제2한강교로 개통됐고 1981년 11월에 확장된 뒤
1984년 11월 7일부터는 양화대교로 불린다.
잠두봉 아래 양화진과 강 건너 선유봉 아래 양화진 모두가 1936년 4월에 경성부 확장에 따라
서울로 편입되었다.

영조 16년(1740) 비단에 채색한 23.0×29.4cm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공암층탑 (孔巖層塔)



공암(孔巖)은 양천(陽川)의 옛 이름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주군현(州郡縣)의 이름을 한자식으로 고칠 때 이렇게 바꾸었다.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뒤에는 제차바위(齊次巴衣)라 했다.
이런 이름은 모두 한강 속에 솟아 있는 세 덩어리의 바위로부터 말미암았다.
차례로 서 있는 바위란 뜻으로 제차바위라 했고 구멍바위라는 의미로 공암이라 했던 것이다.

사실 이 그림에서 보듯 큰 바위 두 개에는 가운데에 구멍이 파여 있고 세개의 바위는 크기가
차례로 줄어든다.
그런데 그 옆 강기슭에는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 하나가 솟아있다.
이 산을 탑산(塔山)이라 한다.

이 석굴에서 양천 허(許)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 절벽을 허가바위라 한다.
허선문은 고려 태조(918∼943)가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934) 90여세의 나이로 도강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군량미까지 제공했었다.
그래서 고려 태조는 허선문을 공암촌주(村主)에 봉하고 그 자손이 이 땅을 대대로 물려받아
살게 했다. 공암 허씨 또는 양천 허씨라 하는 이들은 모두 이 허선문의 후손들이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이전에 김포, 부평, 인천, 수원 등지에서 개성이나 평양으로
가려면 이 공암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었으므로 이 시절 한강나루 중에서는
이 공암나루가 가장 번성했다.
그래서 고려 태조도 이 나루를 건너 천안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에 현의 이름도 공암이라 하고 나루 이름도 공암진이라 했던 것인데 고려 충선왕 2년(1310)에는
고을 이름을 양천으로 바꾸면서 읍치(읍소재지)를 현재 양천향교가 있는 가양동 231 일대의
궁산 아래로 옮긴다. 그러자 공암에는 나루만 남는다.

공암이나 허가바위는 모두 자줏빛을 띤 바위다.
세 덩어리로 이루어진 공암은 광제(廣濟)바위 혹은 광주(廣州)바위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백제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 아니었나 한다.
광제바위는 너른 나루에 있는 바위라는 뜻일 터이니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두고
한강의 물길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이 공암나루는 너른 나루 중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바위라 하는 것은 광제바위가 잘못 전해져서 얻은 이름이리라.

그런데 광주에서 떠내려와서 광주바위라 한다는 전설을 붙이고 광주관아에서는 매해 양천현령에게
싸리비 두 자루를 세금으로 받아 갔다고 한다.
어느 때 이를 귀찮게 여긴 양천현령이 이 바위들이 배가 드나드는 데 거치적대니
광주로 다시 옮겨가라고 하자 광주 아전들은 다시는 이 바위를 광주바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광주바위 즉 공암은 70년대까지 한강 물 속에 그대로 잠겨 있었고 허가바위 굴 밑으로는
강물이 넘실대며 스쳐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면서 뚝길이 강속을 일직선으로 긋고 지나자 이 두 바위는
육지 위로 깊숙이 올라서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구암 허준((龜岩 許浚·1546∼1615)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구암공원 한 귀퉁이에
볼품없이 처박혀 있다.

수천년 동안 한강물과 어우러지던 운치 있는 풍광은 이제 이 그림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산기슭에 남아 있던 탑은 일제강점기에 양천우편소장이던 일본인이 양천우편소에 옮겨놓았다는데
현재는 누구도 간 곳을 알지 못한다.

영조 16년(1740) 비단에 채색한 23.0×29.4cm



금성평사 (錦城平沙)



상암 월드컵경기장과 월드컵공원 등이 들어선 난지도(蘭芝島) 일대의 262년 전 모습이다.
원래 이곳은 모래내와 홍제천,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드넓은 저지대라서
한강 폭이 호수처럼 넓어지므로 ‘서호(西湖)’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곳이다.
따라서 이 세 개천과 대안의 안양천이 실어오는 흙모래는 늘 이곳에 모래섬을 만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난지도가 이렇게 생긴 모래섬인데 그 모양은 홍수를 겪을 때마다 달라져서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여 일정치 않았던 모양이다.
오리섬(鴨島)이니 중초도(中草島)니 하는 이름들이 난지도의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도
이 모래섬이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인 영조 16년(1740)에는 난지도가 이렇게 강 가운데로 깊숙이 밀고
들어온 모래섬들의 집합체였던 모양이다.

성산동 쪽으로는 잠두봉(절두산)에서 망원정(望遠亭) 금성당에 이르는 한강 북쪽 강변의 경치를
모두 그리고 그 뒤로 노고산, 와우산 등을 그려놓았다.
양천 쪽으로는 선유봉, 증미, 두미를 거쳐 탑산과 양천현아 곁의 소악루(小岳樓)까지 그려냈다.
양천현 뒷산인 성산(城山· 궁산 또는 파산)에서 바라다본 시각이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1970년대부터 크게 변한다.
1977년 3월에 성산동에서 강 건너 양화동까지 성산대교가 놓이기 시작하고 1978년에는
난지도에 쓰레기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성산대교는 1979년에 완공되었고 난지도 쓰레기장은 15년 동안 쓰레기가 쌓여 거대한 산을
이루었다. 그 결과 샛강이 메워져서 난지도는 육지가 되었고 마침내 2002년 5월에는 쓰레기산에
월드컵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밤낮없이 차량의 물결이 물밀듯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성산대교 이쪽저쪽의 소란스러운 모습과
돛단배들이 한가롭게 지나고 있는 겸재 당시의 이곳 모습을 비교해 보면 상전이 벽해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비단에 채색한 23.0×29.4cm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목멱조돈 (木覓朝暾)



목멱산은 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이다. 남쪽 산을 뜻하는 순 우리말 ‘마뫼’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마뫼’는 마산(馬山) 또는 마시산(馬尸山)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로써 동방 청룡(靑龍), 서방 백호(白虎), 남방 주작(朱雀), 북방 현무(玄武)의 사방신(四方神)을
설정하여 그에 해당하는 산이 사방을 에워싸야 명당이라는 중국식 풍수지리설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남산을 남쪽 산이라는 의미의 ‘마뫼’로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백악산(白岳山·북악산이라고도 함)
아래에 짓자 백악산은 현무인 진산(鎭山·명당의 뒷산)이,
목멱산은 주작인 안산(案山·책상과 같은 산이란 의미로 명당의 앞산)이 된다.

당연히 백악산에서 갈라져서 동쪽을 휘감아 도는 낙산(駱山) 줄기는 청룡이 되고
백악산 서쪽으로 이어져 웅크리듯 솟구친 인왕산은 백호가 된다.

조선 태조는 명당인 한양을 금성철벽(金城鐵壁·쇠로 만든 견고한 성벽)으로 보호하기 위해
이 ‘사방신산’의 산등성이를 따라 석성을 쌓아 둘러놓았다.
한성부(漢城府)라는 명칭은 이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한양이 명당인 것은 이 사방신산의 생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악산은 진산 답게 북쪽에 우뚝 솟고, 낙산은 청룡같이 동쪽으로 치달리며,
인왕산은 백호처럼 서쪽에 웅크리고, 목멱산은 주작마냥 두 날개를 활짝 펴 남쪽을 가로막는다.

거기에다 북악산과 낙산, 인왕산은 백색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산(巖山)인데
목멱산은 흙이 많은 토산(土山)이다.
또 위 세 산이 홑산인데 목멱산만 겹산으로 큰 봉우리 두엇이 동서로 겹치며 이어져 있다.

그래서 한양성 북쪽에서 보면 남산은 동쪽 봉우리가 약간 낮고 서쪽 봉우리가 약간 높아 마치
한일(一)자를 써놓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서예에서 한일자는 마제잠두법(馬蹄蠶頭法)으로 쓰라 한다.
붓을 대는 왼쪽 끝은 말발굽처럼 만들고 붓을 떼는 오른쪽 끝 부분은 누에머리처럼 마무리지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양 북쪽에서 본 목멱산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안산의 생김새로 이보다 더 완벽한 모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큰산은 보는 방향이나 거리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달라진다.
홑산보다도 겹산인 경우는 그 차이가 더욱 크다.
그래서 보는 방향과 거리에 따라서는 실제로는 오른쪽 봉우리가 높은데도 왼쪽 봉우리가 높게
보이는 경우도 가끔 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목멱산 모습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한강 하류 양천 현아 쪽, 즉 지금 가양동 쪽에서 보면 목멱산이 이렇게 보인다.
서북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목멱산 동쪽의 낮은 봉우리가 엇갈려 나와 먼저 보이므로
서쪽의 높은 봉우리가 그 뒤로 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철이 되면 아침해가 그 높은 봉우리의 등줄기에서 솟아오르게 마련이다.

겸재가 영조 16년(1740) 초가을에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 갔으니 그 다음해(1741) 봄에 남산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북악산과 인왕산 쪽에서만 남산을 바라다보고 60평생을 살았던 겸재가 65세에 양천에 부임해와서
남산의 두 봉우리가 서로 뒤바뀌는 현상을 목격하고 어찌 충격을 받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남산에서 해가 떠오를 줄이야!

겸재는 이 그림을 진경시(眞景詩)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川 李秉淵·1671∼1751)의 시 한 수와
서로 맞바꾸었다.
늘 낙산 위에서 떠오르는 해만 바라보고 살았던 겸재는 이런 신기한 사실을 가장 친한 동네 친구인
이병연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도 봄철에 가양동에서 해뜨는 정경을 바라보면 이와 같은 모습이다.

비단에 채색한 23.0×29.4㎝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안현석봉 (鞍峴石峰)



안현은 안산(鞍山) 또는 모악산(母岳山)이라 부르는 서울의 서쪽 산이다.
봉원사(奉元寺)와 연세대 및 이화여대를 품고 있는 높이 296m의 산이다.

한양의 내백호(內白虎·명당의 서쪽을 막아주는 안쪽 산줄기)인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다시 갈라져
인왕산 서쪽을 겹으로 막아주고 있으니 한양의 외백호(外白虎)에 해당한다.

이 산을 안산 또는 안현이라 부르는 것은 산 모양이 말안장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길마는 안장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아마 안현이나 안산은 길마재의 한자식 표기일 것이다.

모악산 또는 모악재라 부르는 것은 풍수설에 의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서울의 조산(祖山·풍수설에서 명당의 근원이 되는 으뜸산)인 삼각산(북한산)은
부아악(負兒岳·애 업은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를 업고 서쪽으로 달아나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서쪽 끝의 길마재를 모악(母岳·어미산)이라 하고 그 아래
연세대 부근 야산을 떡고개라 했다 한다.
어미가 떡으로 아이를 달래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런 길마재 위에는 태조 때부터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여 매일 저녁 봉홧불을 올리게 했다.
무사하면 봉홧불 하나를 올리고 외적이 나타나면 두 개, 국경에 가까이 오면 세 개,
국경을 침범하면 네 개, 싸움이 붙으면 다섯 개를 올리도록 했다.
따라서 평화시에는 늘 봉홧불 하나가 길마재 상봉에서 타오르기 마련이었다.

원래 길마재에는 동서 두 봉우리에 각기 다른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동쪽 봉우리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지 쪽에서 전해오는 봉홧불 신호를 경기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봉대산(烽臺山)에서 받아 목멱산 제3봉수대로,
서쪽 봉우리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바다 쪽 봉화 신호를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
고봉산(高烽山)봉수대에서 받아 목멱산 제4봉수대로 전해주게 돼 있었다.

그러니 중국 쪽에서 외적이 침입하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이 안현봉수대의 불꽃 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안현의 봉홧불이기에 겸재는 영조 16년(1740) 초가을에 강 건너 양천(현재 양천구)의
현령으로 부임해 가서는 성산 아래인 현재 가양동 6 일대의 현아(懸衙)에 앉아 틈만 나면
이 길마재의 저녁 봉홧불을 건너다보고 나라의 안위를 확인했던 것 같다.
그쪽 방향은 바로 자신의 고향집이 있는 한양이기도 했다.

한 가닥 촛불처럼 피어오르는 봉홧불은 오늘도 서북지역이 무사하다는 신호인데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길마재 너머로 인왕산과 북악산이 초저녁 어둠을 안고 더욱 뚜렷이 다가온다.
하늘이 멀어지고 먼 산이 가까워지는 초가을 어느 맑은 날 해거름에 소슬한 가을바람이 수면을
타고 소리없이 들어와 문득 겸재의 그리움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인왕산 아래에는 식솔들이 기다리는 고향집이 있고 북악산 아래에는 평생 뜻을 같이하는
그리운 친구 사천 이병연(?川 李秉淵·1671∼1751)이 있었다.
그래서 눈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정든 고향 산천의 모습을 먼 경치로 능숙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자신이 앉아 있는 양천 관아 서쪽 소악루(小岳樓) 일대의 한강 이쪽 경치도 서호(西湖)나
소동정호(小洞定湖)로 부를 만큼 넓어진 한강의 너른 강폭과 함께 대담하게 그려내어
강과 산이 어우러지도록 했다.

돛단배 몇 척을 띄워도 드넓은 강물이 채워지지 않았던지 광주바위와 허가바위를 끌어내어
음양의 조화를 통해 화면 구성을 완성시켰다.
사진기로는 잡히지 않는 구도다.
시각의 한계를 초월한 이런 화면구성이 바로 겸재의 화성(畵聖)다운 면모다.

1740년 비단에 채색한 23.0×29.4㎝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종해청조 (宗海廳潮)



종해헌(宗海軒)은 양천현(陽川縣·지금의 강서구) 관아의 동헌(東軒·지방 수령의 집무소) 이름이다.
그러니 ‘종해청조(宗海廳潮)’라는 그림의 제목은 양천현 현령이 동헌인 종해헌에 앉아서
조수 밀리는 소리를 즐기고 있다는 뜻이다.

양천현 관아가 현재 양천향교의 서남쪽 가양1동 239 일대인 성산 남쪽 기슭 한강가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그림에서 겸재라고 생각되는 벼슬아치 하나가 종해헌 2층 누마루 난간에 기대앉아 있다.
이때 한강에서는 밀물이 강물을 제압하며 사나운 기세로 역류해가고 있는 듯하다.
돛단배들이 모두 조수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듯 돛폭이 바닷바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닷물에 되밀려 오르는 강물의 함성이 얼마나 우렁차게 울려퍼지고 있었겠는가.

이 그림은 관아 뒷산인 성산에서 내려다본 시각으로 그려낸 것이다.
동헌인 종해헌을 중심에 놓고 부속 관사와 부근 일대의 민가까지 그려서 당시 양천읍의 전모를
화폭 한 쪽에 담고 있다.

조수가 밀려드는 드넓은 한강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난지도를 비롯한 모래섬들을 강 건너에
수없이 그려놓고 돛단배도 아래위로 여러 척 띄워놓았다.
그리고 강 상류에는 동쪽에 남산을, 서쪽에 관악산을 먼 산으로 그려놓고 있다.

남산 아래로 겹겹이 이어지는 낮은 산 언덕들은 노고산, 와우산, 만리재 등일 것이고
관악산 아래의 낮은 산은 동작동 국립묘지가 들어서 있는 동작봉이리라.
허가바위가 있는 탑산을 가까이 끌어내 앞산을 삼았는데 돛단배 몇 척이 허가바위 절벽 아래를
스쳐 지나도록 아련하게 표현했다.
종해헌 앞의 강물 위를 지나는 두 척의 배와는 크기가 한 눈에 비교될 만큼 차이난다.

강바람을 막기 위해 한강변으로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고,
종해헌 뒤편 산 언덕에는 늙고 큰 고목나무가 우람하게 솟아 있어 관아의 역사를 말해준다.

종해헌이란 이름은 ‘모든 강물이 바다를 종주(宗主·우두머리)로 삼아 흘러든다’는
‘서전(書傳)’ 우공(禹貢)편의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한강이 모든 강물을 대표하고 한강물은 양천 앞에서 바닷물과 부딪치므로 이 곳이 바로
종해(宗海·우두머리 바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는 조선이 곧 중화문화의 주체라는 조선 중화주의에 입각한 자부심에서 고유색 짙은 진경문화를
창달해 갈 때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방한 이름이다.

‘종해헌’이란 현판 글씨를 만교 김경문(晩橋 金敬文·1602∼1685)이 숙종 5년(1679)에
써 걸었다 하니 아마 그 이름도 이때 처음 지어졌을 것이다.

이 시기는 진경문화가 막 태동하던 때였다. 김경문은 중종(1506∼1544) 이후 이 지역에 명문으로
뿌리내린 원주(原州) 김씨 문중이 배출한 명필로 이 글씨를 쓸 때 나이가 78세였다고 한다.

지금은 행주 하류에 수중보를 막아서 물길을 고의로 차단했기 때문에 조수 밀리는 소리가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군사목적으로 건설했다는 이 인공보가 언제 철거되어 ‘종해청조’의 옛 풍류를 되찾을 수 있을지!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영조 16년(1740) 비단에 채색한 23.0×29.2㎝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소악루 (小岳樓)



소악루는 서울 강서구 가양동 성산 동쪽 기슭에 있던 누각이다.
전라도 동복(同福) 현감을 지낸 소와 이유(笑窩 李유·1675∼1753)가 영조 13년(1737)에
자신의 집 뒷동산 남쪽 기슭에 지은 것이다.

한강의 강폭이 넓어져 서호(西湖) 또는 동정호(洞庭湖)로 불리던 드넓은 강물을 동쪽으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졌으므로 소악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성산 동변의 북쪽 끝자락에 해당하는 한강가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기와집 안채는 한강을 내려다보게
동향으로, 또 한 채의 기와집인 사랑채는 남향으로 각각 지어져 있다.

그리고 그 기와집 아래로는 섭울타리를 둘러 별채의 성격을 분명히 한 초가들이 군데군데 지어져 있다.
딸린 식구들이 사는 협호(夾戶·본채와 떨어져 있어 다른 살림을 하게 된 집)일 것이다.

집 주변은 온통 큰 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집 뒷동산에는 소나무와 잡수림이 우거지고
집 앞 강가에는 버드나무 숲이 장관이다.
북쪽 산자락이 강가로 밀고 나와 집터를 명당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북산 기슭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북풍을 막아주게 했다.

협호 아래의 낮은 지대에는 연못을 크게 파고 연꽃을 심었는데 못 가운데에 섬이 있고,
섬 위에는 사모정 형태의 초정(草亭)이 지어져 있다.
사모정 둘레로는 버드나무를 비롯한 각종 꽃나무가 심어져 있고, 연못 좌우에도 몇 그루의
키 큰 버드나무가 있어 이 연못의 연륜을 짐작케 한다.

소악루 남쪽으로 초가들이 보이고 그 너머로 홍살문이 높이 솟아있어 그곳이 양천 현아임을 짐작케 한다.
홍살문 뒤로 기와집 한 채가 우뚝 솟아나 있으니 아마 가장 동쪽 높은 곳에 있다던 객사(客舍)인
파릉관(巴陵館) 건물일 듯하다.

연못 아래 강가에는 두 척의 돛단배가 돛을 내린 채 정박해 있고 한 척의 거룻배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 넷을 태운 채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아마 풍류를 즐기기 위해 소악루를 찾아오는 일군의 선비들인 모양이다.

이 소악루는 1842년 편찬된 ‘양천현지’에 벌써 터만 남아있다 해서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린 지 100년 이내에 허물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울시는 겸재의 진경산수화인 이 ‘소악루’와 ‘소악후월’이 1993년 세상에 알려지자
이 그림들을 토대로 소악루 복원을 계획하여 1994년 6월 25일 이를 준공했다.
위치는 가양동 성산 상봉 부근으로 옮겨 잡았다.

영조 18년(1742)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김충현씨 소장품.



소악후월 (小岳候月)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뜨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겸재가 이런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동복현감을 지내다 스스로 물러나 소악루 주인이 된 이유(李a·1675∼1757)는 겸재보다
한 살 위인 동년배인데 율곡학파의 조선성리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이자 아름다운 생활환경을
즐길 줄 아는 풍류문사였다.

당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술과 시문 서화를 사랑하니 사람들은 그를 ‘강산주인(江山主人)’이라 불렀다.
따라서 그와 사귀던 인사들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거나 최고의 풍류문사였다.

그리고 진경시(眞景詩)의 최고봉인 사천 이병연(?川 李秉淵·1671∼1751)은 시정(詩情)을 공감하는
시우(詩友)였다. 그런데 이병연은 겸재와 평생 뜻을 같이한 둘도 없는 지기(知己)였다.
그러니 강산주인으로 불리던 이유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와 친분을 맺지 않았을 리 없었다.

소악루가 양천현아 지척에 지어진지 불과 2, 3년 후에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것은 이런 친분 관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소악루를 짓고 나서 어느 때 이유가 사천과 겸재를 초대했고 이때 겸재와 사천은 이곳 경치에 매료되어
그 일대를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작정했던 듯하다.

이 사실이 ‘문화군주’인 영조의 귀에 들어가자 영조는 그림 스승인 겸재를 6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양천현령으로 발령내 그들의 소원을 이루게 했다.
그래서 남겨진 것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을 비롯한 한강 일대의 진경산수화들이다.

문화절정기를 이끌어 가는 최고 통치자의 문화의식이 어떻게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겨 놓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겸재는 소악루에서 달맞이하는 정경을 모두 한 화폭에 담기 위해, 소악루를 근경으로 잡고,
달 떠오르는 한강 상류를 원경으로 잡았다.
그러자니 소악루 뒤편 성산 위에서 소악루와 한강 상류를 바라보는 시각이 될 수밖에 없다.

솔숲이 우거진 성산 등성이 아래에 소악루 건물이 큼직하게 지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 잡목 숲이 우거져 있다.
저 아래 강변에는 거목이 된 버드나무 몇 그루가 늘어진 가지들을 탐스럽게 풀어 헤쳐 푸름을 자랑하는데
둥근 달은 남산 너머 저쪽 광나루 근처에 둥실 떠 있다.

달빛에 숨죽인 어둠이 강 건너 절두산 절벽을 험상궂고 후미지게 만든 다음
선유봉, 두미암, 탑산 등 강 이쪽 산봉우리들을 강 속으로 우뚝우뚝 밀어 넣고 있다.
강물을 갈라 놓은 긴 모래섬이나 강변의 모래톱도 달빛에 비쳐 날카롭게 강물 속으로 파고든다.

소악루와 본채 등 큰 기와집들은 숲 속에서도 그 위세가 당당하지만 그 아래 초가집은 그대로
달빛어린 숲 그늘에 파묻힌 느낌이다.
이런 대조적인 표현이 보름달 뜨는 밤 소악루 주변의 경치를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가게 했다.

영조 17년(1741) 비단에 채색한 23.0×29.2㎝ 크기의 작품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양천현아 (陽川縣衙)



겸재가 영조 16년(1740) 초가을 양천현령으로 부임할 당시 양천현 관아의 모습이다.
양천읍지에 ‘동헌 종해헌(宗海軒)이 건좌손향(乾坐巽向·서북쪽에 앉아서 동남쪽을 바라봄)’
이라고 기록돼 있어 현아 전체의 좌향(坐向·명당이 틀고 앉은 방향)이 동남향이었을 것이다.

겸재는 이를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건물들을 모두 서북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틀어 놓았다.
방향 감각까지 배려한 빈틈없는 사생 능력이다.

외삼문(外三門·관청이나 대갓집의 대문은 세개의 쪽문으로 되어 있어 삼문이라고 부름)과
내삼문이 이중으로 지어져서 관부의 위용을 자랑하니 백성은 이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외삼문 왼쪽으로는 육방(六房) 아전들의 집무소인 길청 건물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줄행랑이 이어져
여러 용도의 집무실이 차려져 있을 듯하다.

내삼문은 외삼문보다 규모가 더 큰데 왼쪽으로 이어진 줄행랑 규모가 훨씬 커서 이 건물이
관곡(官穀·관청 소유의 곡식)의 보관장소인 읍창(邑倉)이었다는 기록을 증명해 준다.
외삼문과 내삼문이 네모진 담으로 연결된 것을 삼문의 오른쪽 끝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현재 강서구 가양1동 239 일대인데 종해헌은 물론 그 부속건물 하나 남아있지 않고
연립주택과 개인주택이 가득 들어차 있다.
1977년까지는 종해헌 건물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해에 이곳 양천 일대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헐리고 연립주택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서울시내에 남은 유일한 지방관아가 최근에 사라졌다니!
더구나 이곳은 화성(畵聖) 겸재가 65세부터 70세까지 만 5년 동안 현령으로 재임하면서
그 천재성을 최고로 발휘하여 서울과 그 주변 한강 일대의 경치를 사생해낸 명화 제작의 산실이 아니던가!

1740년 비단에 엷게 채색한 29.1×26.9㎝ 크기의 작품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개화사 (開花寺)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 332의 12에 있는 개화산 약사사의 겸재 당시 모습이다.
그때는 주룡산(駐龍山) 개화사(開花寺)라 했기 때문에 개화사로 그림 제목을 삼았을 것이다.

주룡산은 안산의 수리산과 인천의 소래산 줄기가 뻗어 나와 한강변에 솟구친 산으로 양천현아의
뒷산인 성산에서 보면 서북쪽에 위치한다.

신라 때 이 산에 주룡(駐龍) 선생이라는 도인이 숨어 살며 수도하고 있었다.
그는 매해 9월 9일이 되면 동지들 두세 명과 함께 이 산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곤 했다.
그는 그 술 마시는 행사를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다 한다.
9월 9일 주룡산에서 술 마시기라는 의미다.
그러다가 주룡 선생은 이곳에서 천수를 다하고 돌아갔는데 그 ‘구일용산음’ 하던 터에 이상한 꽃이 피었다.
그래서 이 터에 절을 짓고 개화사라 하니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해서 주룡산을 개화산이라고도 불렀다

영조 16년(1740) 종이에 먹으로 그린 31.0×24.8㎝ 크기의 작품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소요정 (逍遙亭)



소요정은 서울 강서구 가양동 탑산 남쪽 기슭에 있던 정자인데 고종 28년(1891)에 편찬된
"양천현읍지’에 이미 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돼 있다.

겸재가 영조 18년(1742)에 그렸으리라 생각되는 이 ‘소요정’에도 정자의 모습은 없다.
이때도 아마 터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정자는 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정자를 지은 소요정 심정(逍遙亭 沈貞·1471∼1531)은 중종 때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심정의 집안은 그 증조부인 심귀령(沈龜齡·1349∼1413)이 태종이 등극하는 데 공을 세워
좌명(佐命)공신이 된 이래 그에 이르기까지 4대가 공신으로 군림한 대표적인 훈구공신 가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으니 양천 공암진 일대와 개화산 일대가 모두 그 집안의 소유였던 것 같다.

그래서 훈구세력을 억제하려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19) 일파의 사림 세력은
항상 그를 훈구세력의 표적으로 삼아 공격했다.
훈구세력은 공훈을 세운 기득권층이고 이에 대항하는 신진 선비층은 사림이라고 불렸다.

심정은 중종반정(1506)에 참여해 ‘정국(靖國)공신 3등’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져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등 요직을 거치지만 그때마다 조광조 일파는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며
혼탁하고 권세를 부리며 제멋대로 한다는 트집을 잡아 탄핵해 쫓아냈다.
이에 심정은 중종 2년(1517)에 이 공암진 탑산 남쪽에 소요정을 짓고 물러나와 울분을 달래며
지내게 된다.

그러나 심정은 장자(莊子)의 ‘남화경(南華經)’ 소요유(逍遙遊)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을 비우고 소요자적(逍遙自適)하지 못하고 사림세력을 일망타진할 기책(奇策)을 강구해
중종 14년(1519) 11월 15일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다.

심정은 이런 음모가 드러나 중종 25년(1530)에 평안도 강서(江西)로 귀양갔다가 그 이듬해 사사(賜死)되고 만다.

이렇게 역사의 죄인이 된 심정의 정자가 사회의 보호를 받았을 리 없다.
그래서 심정이 죽은 이후에 곧 허물어지고 말았던 듯하다.
그 터는 지금 가양동우체국 뒤편 가양취수장 부근 탑산 남쪽 기슭 중턱에 해당한다.

영조 18년(1742)경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의 소장품이다. 
이수정 (二水亭) 


  

이수정은 서울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都堂山·지금의 증산) 상봉에 있던 정자다. 

‘양천군읍지’에 이런 기록이 있다. 
‘염창탄(현 안양천) 서쪽 깎아지른 절벽 위에 효령(孝寧)대군(1396∼1486)의 임정(林亭)이 있었다. 
그 후에 한흥군(韓興君) 이덕연(李德演·1555∼1636)과 그 아우인 찬성(贊成·종1품) 
이덕형(李德泂·1566∼1645)이 늙어서 정자를 고쳐짓고 이수정(二水亭)이라 했다.’ 

이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최고 시인인 이태백(李太白·701∼762)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서’ 
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세 산은 반쯤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갔고, 두 물은 백로 깃들인 모래벌이 가운데를 갈라놓았다.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라는 구절이다. 

실제 이수정에 오르면 눈앞에 우뚝 솟은 삼각산(북한산)의 상봉을 흰 구름이 감싸 반쯤은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간 듯 보이고, 난지도 모래펄이 한강물을 두 쪽으로 갈라놓는다. 

1891년 편찬된 ‘양천현지’를 보면 이수정은 이미 터만 남아있었다 한다. 
그러나 겸재가 ‘이수정’을 그릴 당시인 1742년경에는 그림에서처럼 이수정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이 그림은 양천현아 쪽에서 배를 타고 거슬러 오르며 바라본 시각으로 그려낸 것이다. 
도당산 봉우리들이 강가에 급한 경사를 보이며 솟구쳐 있고, 그 봉우리가 상봉에서 서로 만나며 
만들어낸 평지에 이수정 건물이 들어서 있다. 

강가 모래톱에서 벼랑 위로 까마득하게 뚫려 있는 외줄기 길이 일각(一閣) 대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사 급한 이 오솔길이 이수정을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지금은 이 부근이 모두 아파트 숲으로 뒤덮여 이런 이수정 풍류의 자취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조 18년(1742)경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의 소장품. 


선유봉 (仙遊峯) 

  

지금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 양화선착장 일대의 260년 전 모습이다. 
이 곳에는 선유봉(仙遊峯)이라는 매혹적인 산이 있었다. 신선이 놀던 산이라는 뜻이다. 

관악산과 청계산의 서쪽 물과 광교산 수리산 소래산의 북쪽 물을 몰고 온 안양천이 산자락을 휘감으며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붓끝처럼 솟아난 산봉우리였다. 
선유봉은 그러나 1965년 양화대교가 이 곳을 관통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 산자락 강변에는 서울로 가는 큰 나루와 안양천을 건너 양천으로 가는 작은 나루가 있었는데 
모두 양화(楊花)나루라 불렀다. 이 곳의 지명이 당시에도 양천현 남면 양화리였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안양천 건너 염창리 쪽에서 본 시각으로 그려져 있다. 
작은 양화나루 쪽 모습을 그린 것이다. 

사공이 긴 삿대를 강변 모래펄에 꽂아 나룻배를 물가에 고정시키고 서있는 것은 아마 이쪽에서 
건너갈 길손들을 기다리기 위해서인 듯하다. 한나절이라도 기다릴 태세다. 

지금 이 곳을 지나는 성산대교 위는 물밀 듯 이어지는 차량 행렬이 분초를 다투며 
서로 앞서가려 초조해하지 않는가. 
이 사공의 여유와 비교할 때 행복의 기준이 어디에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선유봉 양쪽 아래 나루에는 모두 큰 마을이 들어서 있었던 모양인데 여기 보이는 것은 작은 양화나루 마을이다. 
초가집들은 나루터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평민들의 집일 것이나, 
큰 기와집은 이 곳에 은거해 살았다는 연봉 이기설(蓮峯 李基卨·1558∼1622)이 살던 집일 듯 하다. 

이기설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량을 조달하는 실무를 담당하다 상관의 부정을 목도하고 
벼슬을 버린 뒤에 종로구 삼청동 백련봉 아래에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은거해 
학문 연구에만 몰두한 인물이다. 

그는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으로 짐작하고 가족을 이끌고 
이 선유봉 아래로 이사해 광해군이 높은 벼슬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광해군 9년(1617)에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자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이기설은 다시 선유봉 아래 양화리를 떠나 김포로 숨어버렸다. 
그가 죽고 난 다음해(1623)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에게는 이조참판직이 추증된다. 

이기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조선 중종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선비)인 이언침(李彦?· 1507∼1547)의 
손자이고, 효자로 유명한 영응(永膺)선생 이지남(李至男·1529∼1577)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지남 때부터 선유봉 아래에 터잡아 살았던 듯 ‘양천읍지’에서는 이지남의 두 아들인 이기직(李基稷·1556∼1578)과 
이기설 형제의 유적이 선유봉에 있다고 했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이기설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큰 양화나루쪽 한강은 먼 경치로 처리됐는데 돛단배 두 척이 아득히 떠가고 강 건너 멀리 남산이 솟아있다. 
모래사장에 버들숲이 우거지고 마을 뒤편에도 키 큰 버드나무가 서있어 버들꽃 피는 양화나루를 실감케 한다. 

영조 18년(1742) 비단에 채색한 24.7×33.3㎝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의 소장품이다. 


양화진 (楊花津) 

  

서울 마포구 합정동 145 외국인묘지 부근 절두산 일대의 옛 모습이다. 
지금은 절두산(切頭山)이라 부르지만 그 시절에는 잠두봉(蠶頭峯) 또는 용두봉(龍頭峯)이라 했다. 
강가에 절벽을 이루며 솟구쳐나온 산봉우리가 누에머리나 용머리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절두는 머리를 자른다는 뜻이다. 
고종 3년(1866) 병인 1월에 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이 곳에서 처형하면서 절두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일대가 천주교 성지가 됐지만 본래는 양화나루가 들어서 있어 서울과 
양천 사이에 물길을 이어주던 곳이다. 

이 그림에서 잠두봉 아래에 큰 규모로 지어진 기와집이 그 무풍정 별서라고 생각된다. 
겸재는 아마 무풍정의 은거생활 장면을 떠올렸던 듯하다. 
그래서 홀로 낚싯배를 저어나가 잠두봉 아래에서 낚싯대를 담근 선비 하나를 그려놓았다. 

지금은 이 부근으로 양화대교와 당산철교가 지나고 있어 밤낮으로 소란스럽기 그지없으니 
무풍정이 다시 온다 해도 이곳에 은거하지 않을 것이다. 

영조 18년(1742)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의 작품이다. 


행호관어 (杏湖觀魚) 

  

행호관어는 ‘행호(杏湖)에서 고기 잡는 것을 살펴본다’는 뜻이다. 

한강물은 용산에서 서북쪽으로 꺾여 양천 앞에 이르면 맞은편의 수색, 화전 등 저지대를 만나 
강폭이 갑자기 넓어진다. 

그래서 안양천과 불광천이 강 양쪽에서 물머리를 들이미는 곳부터 서호 또는 동정호 등으로 불렀는데 
창릉천(昌陵川)이 덕양산(德陽山)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한강으로 합류하는 행주(杏州) 앞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더욱 넓어진다. 이 곳을 행호(杏湖)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마 이 행주에 실제 살구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공자가 행단(杏壇)에서 제자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즐겼다는 고사를 연상하며 
‘살구 행(杏)’으로 대신했을 수도 있다. 

어떻든 이런 행호에서 고기잡이가 한창이라 배들이 떼를 지어 그 너른 행호 물길을 가로막고 
그물을 좁혀나가는 듯하다. 
이처럼 큰 규모의 고기잡이 행사가 벌어지는 것은 별미 중의 별미인 이곳의 웅어와 하돈(河豚·황복어)이 
잡히는 철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수라상(임금에게 올리는 진지상)에 오르는 계절의 진미였으므로 
사옹원(司饔院)에서는 제철인 음력 3, 4월이 되면 고양군과 양천현에 진상을 재촉했다. 
그러면 두 군 현에서는 고기잡이배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웅어와 복어잡이에 나섰다. 

이 그림은 그 아름다운 행호에서 전개되는 고기잡이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양천현아 뒷산인 성산에 올라서서 서북쪽으로 행호를 내려다본 시각으로 그려냈다. 
당연히 현재 행주외동 일대의 행호 강변의 경치가 한눈에 잡혀들었다. 

오른쪽의 덕양산 기슭에는 죽소 김광욱(竹所 金光煜·1580∼1656)의 별서(別墅·별장)인 
귀래정(歸來亭)이 들어서 있고, 가운데에는 행주대신으로 불리던 장밀헌 송인명(藏密軒 宋寅明·1689∼1746)의 
별서인 장밀헌이 큰 규모로 들어서 있다. 
송인명은 이 당시 좌의정으로 세도를 좌우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행주대교가 지나고 있는 덕양산 끝자락 바위절벽 위에는 낙건정 김동필(樂健亭 金東弼·1678∼1737)의 
별서인 낙건정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행호 강안에서는 앞뒤로 7척씩의 고기잡이배가 대오를 지어 고기잡이에 열중하고 있다. 
아마 고기잡이 노래가 강물 위에 가득 넘쳐흐르고 황금빛 복어와 은빛 찬란한 웅어가 그물에 갇혀 
펄떡펄떡 뛰고 있을 것이다. 

영조 17년(1741) 비단에 채색한 23.0×29.0㎝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낙건정 (樂健亭) 

  

낙건정은 행주대교가 지나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덕양산 끝자락 절벽 위에 있던 정자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조판서를 모두 역임한 낙건정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이 
벼슬에서 물러나 ‘건강하게 즐기며’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낙건정이란 이름은 송나라때 대학자인 육일거사 구양수((六一居士 歐陽修·1007∼1072)의 
‘은거를 생각하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몸이 건강해야 비로소 즐겁게 되니, 늙고 병들어 부축하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 
그 본래의 싯구다. 
즉 젊고 건강할 때 은거해 삶을 즐기라는 뜻이다. 구양수가 이 시를 지은 때가 44세였는데 
마침 김동필이 낙건정을 지을 때도 44세였다. 

이런 내용들은 김동필의 동문 친구인 서당 이덕수(西堂 李德壽·1673∼1744)가 1726년 지은 
‘낙건정기(樂健亭記)’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도 이들과 동문이었다. 
더구나 이병연은 김동필의 이종사촌 형. 그러니 겸재와 사천이 김동필의 초청으로 이 낙건정에 
드나들었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래서 겸재는 1740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서 낙건정이 있는 행주 일대를 익숙한 솜씨로 자주 
화폭이 올리게 된다. 

이 때는 이미 낙건정 주인 김동필이 세상을 뜬 지 3년이 지난 뒤였지만 김동필의 둘째 자제인 
상고당 김광수(尙古堂 金光遂·1699∼1770)가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서화골동 수집과 감식의 1인자로 겸재 그림을 지극히 애호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는 높은 안목으로 낙건정을 더욱 운치있게 꾸몄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그 격조높은 생활환경을 확인할 수 있다. 
행호 강변에서 절벽을 이루며 솟구친 덕양산 줄기 끝자락 상봉 가까이에 큰 기와집 두 채가 있다. 
이 것이 낙건정의 살림집과 정자인가 보다. 
산자락 끝 편에 위치한 별채 기와집이 낙건정이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한강의 상류와 하류쪽이 모두 한 눈에 잡히겠다. 

멀리 한강 하구인 조강(祖江)으로 돛단배들이 무수히 떠 있어 드넓은 바다로 이어지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절벽 아래 강가에는 주인없는 배 한 척이 돛폭을 내린 채 대어져 있고 강변에서 낙건정으로 
오르는 길만 두 갈래로 훤히 뚫려있다. 

고요하고 한적한 낙건정의 분위기가 실감난다. 
지금은 이 부근으로 행주대교가 지나고 있어 이런 운치는 간 곳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영조 18년(1742)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 소장품. 



귀래정 (歸來亭) 

  

귀래정은 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낸 죽소 김광욱((竹所 金光煜·1580∼1656)이 행주 덕양산 기슭 
행호강(현 창릉천)변에 세운 정자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인 1742년에는 김광욱의 증손자인 동포 김시민(東圃 金時敏·1681∼1747)이 
주인이 되어 서울 집을 오가며 살고 있었다. 
김시민은 겸재와 인왕산 밑 한 동네에서 사는 친구로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1651∼1708)과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김시민은 사천 이병연(?川 李秉淵·1671∼1751)과 함께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1564∼1635)의 
외현손이라 서로 8촌 형제에 해당하는 친척간이었다. 
그러니 겸재와 사천은 어려서부터 김시민과 함께 이 귀래정을 무시로 출입했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낙건정(樂健亭) 주인 김동필(金東弼·1678∼1737)은 사천의 이종사촌 아우이면서 
김시민과도 8촌 형제간이었고, 장밀헌 송인명(藏密軒 宋寅明·1689∼1746)까지도 이정구의 외현손이었다. 
당연히 송인명은 이병연, 김동필, 김시민과 서로 8촌 형제에 해당했다. 

겸재와 사천이 행주의 3대 별장인 귀래정과 장밀헌, 낙건정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그래서 겸재와 사천은 진경산수화와 진경시로 이를 기회 닿는 대로 사생해 냈으니 이 ‘귀래정’도 
그런 겸재의 그림 중의 하나다. 

덕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강변 산자락에 큰 규모의 기와집이 지어져 있다. 
행랑채,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안채로 꾸며진 호사스런 대가 집 규모다. 

본채 오른쪽 뒤로는 별당이 하나 있고 왼쪽 쪽문 밖으로는 정자가 우뚝 솟아있다. 
이것이 귀래정인가 보다. 
그 앞에 소나무와 전나무가 쌍으로 서있고 집 뒤편은 온통 잡목 숲으로 뒤덮여 있다. 

덕양산은 솔숲으로 가득 찼으며 강변으로 이어지는 앞마당 가에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서 숲을 이뤘다. 
단촐한 기와집 한 채가 마을을 가려주는 오른쪽 앞산 기슭에 따로 지어져 있다. 
이것이 김시민의 양자인 강재 김면행((强齋 金勉行·1702∼1772)과 그의 친형인 김현행(金顯行·1700∼1753) 
형제가 기거했다는 연체당(聯?堂)이 아닌지 모르겠다. 

솔숲에 둘러 쌓인 그 집 아래 강가에는 이 집 전용인 듯한 거룻배 한 척이 매어져 있다. 
으리으리한 이 대가 집에 어디서 무엇을 실어다놓고 나가는지 쌍돛단배 한 척이 돛폭에 
골바람을 받으며 강으로 미끄러져 나가고 있다. 

작은 거룻배 한 척까지 달고가는 것을 보면 그 규모가 어지간한 듯하다. 

영조 18년(1742)경 비단에 채색한 33.3×24.7㎝ 크기로 서예가 김충현씨 소장품. 



설평기려 (雪坪騎驢) 

  

설평기려(雪坪騎驢)는 ‘눈 쌓인 벌판을 나귀 타고 가다’라는 뜻이다. 
겸재가 영조 16년(1740) 초가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 그해 겨울에 그린 그림이다. 
겸재의 벗인 사천 이병연이 동지 이틀 전에 보낸 편지를 통해 그 직전에 이 그림이 그려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겸재의 ‘설평기려’와 같은 내용을 뒷날 추사체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는 
독특한 글씨로 이렇게 써놓고 있다. 
‘꽃 찾아 목숨 아끼지 않고, 눈 사랑에 항상 얼어 지낸다(尋花不惜命 愛雪常忍凍).’ 

삼문 앞의 고목 밑을 지나니 양천 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끝에 우장산(雨裝山) 두 봉우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의 눈 경치는 대상의 윤곽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라 
우장산 두 봉우리도 실제 이상으로 윤곽이 분명하다. 

겸재가 나귀 타고 떠나는 곳은 지금 서울 강서구 가양동 239 부근의 양천현 현아 입구이고, 
맞 바라다 보이는 우장산은 발산2동 우장근린공원에 해당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현재 양천향교가 있는 성산 남쪽 기슭에서 우장산을 바라보면 
이 그림에서 보이는 산과 들의 모습을 그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드넓은 양천 들 안에는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만 빽빽이 들어차 있을 뿐이다. 

영조 16년 비단에 먹과 엷은 색으로 칠한 29.0×23.0㎝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빙천부신 (氷遷負薪) 

  

빙천부신은 ‘얼음벼루에서 나무를 지다’는 뜻이다. 
벼루라는 말은 낭떠러지 아래가 강이나 바다인 위태로운 벼랑을 일컫는 순우리말로 
베리 또는 벼리라고도 한다. 

이 그림은 겸재가 양천 현령으로 부임하는 영조 16년(1740) 겨울에 그린 것이 분명하다.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 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던 평생지기 사천 이병연이 이 해 동짓달 22일 
겸재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가 이 그림 뒤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글월이 동어(凍魚·언 생선) 풍미(風味)를 띄우고 오니, 아침이 와도 밥상 대할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받들어보니 정무가 매우 바쁘신 모양이나 어찌 조금 참지 않으시겠습니까. 
십경(十景)이 매우 좋아서 시가 좋기 어려울까 걱정입니다. 
곧 벽에 걸어놓고 보겠습니다.’ 

다시 그림 곁에는 사천이 보낸 시를 겸재가 옮겨 적은 제화시가 있다. 

‘층층이 얼어붙고 등에 나뭇짐 있어도, 올라오면 어려웠다 말하지 않네. 다만 걱정은 도성 안이니,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데 춥지나 않을까(層氷薪在負, 登頓不言難, 惟恐洛城裡, 曲房歌舞寒).’ 

겸재는 천지 사방에 눈이 가득 쌓인 어느 추운 겨울날 꽁꽁 얼어붙은 한강가 얼음베리에서 백성들이 
나뭇짐을 지고 오르는 위태로운 장면을 목격했던 모양이다. 
아마 설경(雪景)을 즐기기 위해 소악루(小岳樓)에 나왔다가 내려다본 정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 올림픽대로가 지나는 가양동 219 일대의 모습일 듯하다. 

해질 녘 눈 쌓인 강변 정취를 유감 없이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앞산 봉우리 위의 잡수림에는 마지막 새어나온 낙조(落照)의 잔광(殘光)이 언뜻 비치는가도 싶다. 

영조 16년 비단에 먹과 엷은 색으로 칠한 29.4×23.0㎝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동작진 (銅雀津) 

  

지금 동작대교가 놓여 있는 동작나루 일대를 서울 쪽에서 바라본 그림이다. 
관악산 우면산이 먼 산으로 처리되고, 현재 국립현충원이 들어서 있는 동작마을 일대가 그림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삼도(下三道·서울 아래쪽의 충청 전라 경상 3도)로 내려가는 가장 큰 나루답게 마을 아래 
강가에는 근 20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다. 
그 중 한 척이 나귀와 사람을 싣고 힘차게 삿대질하며 서울 쪽으로 건너오고 있는데 
서울 쪽 백사장에는 구종(驅從·말 모는 종)을 거느린 선비 일행이 기다린다 

당시 승방천(僧房川)이라 부르던 반포천(盤浦川)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이수교(梨水橋) 일대와 
반대편 흑석동 쪽 강변마을은 버드나무 숲이 가득 우거져 있다. 

이때 동작마을은 서울 세가(世家·대 물려 특권을 누리며 사는 집안)들의 별장으로 가득차 있었던 듯 
번듯한 기와집들이 즐비하다. 
겸재의 제자였던 근재 박윤원(近齋 朴胤源·1734∼1799)은 ‘동작나루를 지나며(過銅津)’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성곽 나서자 티끌 같은 세상일 없고, 강물빛 비 맞아 다시 새롭다. 
배에 앉으니 산은 저절로 오가고, 물가에 나앉자 백로와 서로 친하다. 
물위에 정자 많으나, 누각엔 주인이 적다. 누가 능히 내게 빌려줘 살게 하려나, 
꽃과 대나무에 경륜(經綸)을 붙여보겠네.’ 

이 동작마을 서쪽 뒷산 중턱에는 선조대왕의 조모인 창빈(昌嬪) 안(安)씨의 묘소가 있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서 양주 장흥(長興)에 있던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태어난 손자가 
선조(宣祖)가 됐고, 선조의 자손들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 왕위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광복 후 이 일대를 국립묘지로 선정한 것도 이런 명당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영조 20년(1744)경 비단에 엷게 채색한 32.6×21.8㎝ 크기의 개인 소장품. 



서빙고망도성 (西氷庫望都城) 

  

‘서빙고에서 도성, 즉 서울을 바라보다’라는 제목의 진경산수화다. 

서빙고는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199 서빙고초등학교 앞 길가에 있던 조선시대 얼음창고다. 
성동구 옥수동에 또 다른 얼음창고가 있어 이를 동빙고라 했기 때문에 서쪽에 있는 얼음창고라는 
의미로 서빙고라 했다. 

조선왕조는 태조 3년(1394) 10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왕실과 조정에서 사용할 얼음을 보관하는 
일을 맡을 빙고(氷庫)를 예조(禮曹)의 부속기관으로 설치했다. 태조 5년의 일이다. 

동빙고는 연산군이 사냥길에 방해가 된다 하여 서빙고 곁으로 옮기고 서빙고만 고종 31년(1894)까지 
498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 이에 이 일대를 서빙고라 부르게 됐다. 

그렇다면 어째서 겸재는 하필 ‘서빙고에서 도성을 바라보다’라는 제목으로 한양 서울의 전경을 그렸을까. 

이 곳이 동작나루의 대안(對岸)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왕산과 남산 줄기가 흘러 내려와 마주친 곳에 세운 숭례문(崇禮門·남대문)으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곳에서 시점을 하늘 높이 띄우면 도봉산과 삼각산을 조산(祖山)으로 하고 
북악산을 현무, 낙산을 청룡, 인왕산을 백호, 목멱산을 주작으로 하는 분지형의 한양 서울 전경을 
한 눈으로 잡아들일 수 있다. 

동작동 서쪽 동작진 버드나무 숲 일부도 표현해 한강의 동작나루 양안 풍광을 아우르면서 
둔지산 기슭의 서빙고 일대를 섬처럼 우뚝 솟구쳐놓는 것으로 근경을 삼았다. 
지금 서빙고로와 동작대교가 교차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하는 용산시민공원 일대의 모습이다. 

그림의 중심인 한양 서울은 북악산과 낙산, 인왕산, 목멱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진 석성(石城) 안에 
수많은 민가들이 들어차 있어 도성으로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북악산 아래로는 경복궁의 폐허가 솔숲으로 가득 차 있고 인왕산 기슭에는 사직단(社稷壇)과 
경희궁(慶熙宮·옛 경덕궁)이 솔숲에 쌓여있다. 
남산 북쪽 응봉 기슭에는 창경궁 창덕궁 종묘의 모습이 보인다. 
남대문을 비롯한 동대문과 서대문의 표현도 분명하고 북대문인 숙정문도 암문 형태로 부엉바위 근처에 표시돼 있다. 

삼각산과 도봉산의 형태는 푸른 먹칠로 그 형태의 대강을 추상해내는 원산 표현기법으로 일관했다. 
서울 장안의 모습을 이보다 더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는 없을 듯하다. 

영조 24년(1744)경 비단에 엷게 채색한 크기 미상의 그림으로 일본인 소장. 



사문탈사 (寺門脫蓑) 

 

사문탈사(寺門脫蓑)는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다’라는 뜻이다. 
도롱이는 물기가 잘 스며들지 않는 띠풀을 엮어 어깨에 둘러쓰던 비옷이다. 
눈이나 비가 올 때 이를 두르고 삿갓을 쓰고 나다녔다. 

이 그림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가 세밑 어느 눈 오는 날 소 타고 절을 찾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사실은 사천 이병연이 영조 17년(1741) 겨울에 양천 현령으로 있는 겸재에게 보낸 편지가 
그림 뒤에 붙어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궁하고 병든 몸이라 문안 못 드립니다. 
다시 화제(畵題)를 써서 보내드리는데 사문탈사는 형이 익숙한 바입니다. 
소를 타고 가신 율곡 고사(故事)의 본시(本試)에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해 저물고 눈이 산을 덮는데, 들길은 큰 나무 숲 속으로 나뉘어 간다. 
또 사립문 찾아가 늦게 두드리고 읍하여 뵈니….’ 
갖춰 쓰지 못하고 보내드리니 살펴보십시오.” 

몇 백년이나 묵었을 노거수(老巨樹)가 절 문 앞에 늘어서 있는데 잎 진 가지 위에 눈꽃이 가득 피어있다. 
절 문이 행랑채 딸린 재궁(齋宮) 건축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왕릉의 조포사(造泡寺·두부 만드는 
절이란 의미로 왕릉 원찰을 일컫는 말)인 것이 분명하다. 
당시 서울 주변에 남아있던 대표적 원찰인 뚝섬 봉은사(奉恩寺)가 아닐지 모르겠다. 

절 문이나 줄행랑의 지붕 위에도 눈이 가득 쌓여 있고 땅 위에도 눈빛뿐이다. 
이렇게 눈빛 일색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려는 듯 절 집의 벽을 온통 분홍빛으로 칠해놓았다. 

절 문 앞 큰길가에는 큰 도랑이 여울지며 흐르는데 그 위에 네모진 한 장 판석(板石)으로 돌다리를 놓았다. 

방금 그 다리를 건너온 듯한 율곡 선생이 검은 소를 타고 도롱이 삿갓 차림으로 절 문 앞에 당도하고 있다. 
소가 아직 채 걸음을 멈추지 못한 상태인데도 고깔 쓴 승려들이 달려들어 우선 도롱이부터 벗겨드리고 있다. 
정녕 ‘사문탈사’의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이 보이는 쪽 승려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인다. 
아마 절의 주지인 듯하다. 주지가 직접 달려나와 이렇게 허겁지겁 도롱이를 벗겨드릴 정도라면 
율곡 선생과의 관계가 어떤 것일지 대강 짐작이 간다. 

문 안으로부터 젊은 승려 하나가 합장하며 달려나오고 문 안 층계까지 달려나오던 노승은 뒤따르던 
젊은 승려에게 다담(茶啖·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차려 내는 다과)을 준비시키는 듯 
돌아서서 무엇을 지시하고 있다. 

눈 속을 뚫고 눈 사랑하는 감회를 함께하려 찾아온 현자를 맞는 사찰의 분위기가 유감 없이 드러나 있다. 

영조 17년 비단에 채색한 33.1×21.2㎝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겸재가 양천 현령으로 부임한 것은 영조 16년(1740) 초가을이다. 
이 때 겸재는 동심지우(同心之友)인 사천 이병연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즉,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굳게 하고 떠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겸재는 부임하자 마자 양수리 일대로부터 양천현 일대에 이르는 한강 주변의 명승지들을 
화폭에 담아 부지런히 사천에게 보냈고, 사천도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보냈던 것이다. 

겸재는 사천과 단 둘이 지금 청와대 서쪽 별관 근처의 북악산 기슭 개울가의 어느 노송(老松) 밑에 앉아 
시전(詩箋·시 쓰는 종이)과 화전(畵箋·그림 그리는 종이)을 펼쳐놓고 시화를 논하며 
시화환상간의 약속을 했던 것이다. 

아직 늦더위가 극성을 부리고 아침저녁으로 선들바람이 부는 그런 철이라서 베옷을 채 벗지 못한 듯하니 
소나무에서는 매미의 구성진 울음소리가 물소리를 제압할 만큼 크게 울려 퍼질 듯하다. 

이런 호젓한 분위기 속에 평생 뜻을 같이 하며 진경시와 진경산수화의 양대 거장으로 시화쌍벽(詩畵雙璧)의 
칭호를 얻은 두 노우(老友)가 마주 앉아 잠시의 이별도 섭섭해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고 굳게 약속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부러운 장면인가. 
진경시대를 살아가던 선비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인물 묘사는 간결하고 질박하며 부드러운 묘선을 구사했으나 골기(骨氣)가 내재해 생동감은 물론이거니와 
그 정신까지도 감지되는 듯하다. 
겸재의 평생 그림 수련 결과가 이 곳에 총 집결된 느낌이 든다. 

정면으로 얼굴을 보이고 앉은 노인이 사천일 것이고 그와 마주 앉아 뒷모습과 옆모습만 보이는 
콧대높은 노인이 겸재일 것이다. 
다른 그림에서 보이는 겸재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둘 다 갓을 벗은 맨 상투 차림이다. 
격의 없이 사귀던 평생지기의 돈독한 정의(情誼)를 이 그림에서 실감할 수 있다. 

영조 30년(1754) 비단에 엷게 채색한 26.4×29.0㎝ 크기의 그림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인곡정사 (仁谷精舍) 

  

조선 영조 22년(1746) 겸재가 71세 때 살던 자택의 모습이다. 
현재 종로구 옥인동 20에 해당하는 곳. 당시 이곳의 지명이 한도 북부 순화방 창의리 인왕곡(仁王谷)이었기 
때문에 인곡정사(仁谷精舍)라는 택호(宅號)를 썼던 모양이다. 

이 그림을 그린 내력은 그림이 들어있는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의 발문(跋文·책의 후기)에 밝혀져 있다. 
겸재의 둘째 아들인 정만수(鄭萬遂)가 지은 이 발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를 직접 짓고 썼다. 
이는 퇴계의 자손을 거치고 거쳐 후에 겸재의 외조부인 박자진(朴自振)에게 전해졌다. 
박자진은 스승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에게 이를 두 번이나 보여주고 발문을 받아왔다. 

겸재의 아들 정만수는 박자진의 증손자 박종상(朴宗祥)을 졸라 우암의 발문이 딸린 퇴계의 친필 
주자서절요서를 집으로 가져온다. 

이에 겸재가 크게 기뻐해 퇴계가 주자서절요서를 짓던 곳과 박자진이 우암의 발문을 받던 장면을 
각각 ‘계상정거(溪上靜居)’와 ‘무봉산중(舞鳳山中)’이란 이름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청풍계에 있던 자신의 외가를 그린 ‘풍계유택(楓溪遺宅)’과 주자서절요서를 수장할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 등을 모두 한 책으로 묶어 ‘퇴우이선생진적첩’을 만들었다. 

그림을 보면 행랑채가 딸린 솟을대문 안에 ‘ㄷ’자 모양의 본채를 가진 단출한 구조의 남향집이다. 
안채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랑채부터 담을 두르고 중문(中門)을 냈다. 
이것이 사대부 집의 기본 구조다. 중문 안에는 헛간채 장독대 등이 구비돼 있다. 

안목 있는 선비가 살기에 적당한 규모의 조촐한 집이다. 
뒤울 안에는 대나무가 우거지고 담장 밖 뒷동산에는 노송이 숲을 이뤘다. 
사랑채 앞마당에는 잡수 몇 그루가 제멋대로 자라서 그늘을 드리우고 행랑채 곁에도 고목나무가 서있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네모진 좌대석이 놓여있고, 지붕을 씌운 김치막 곁에는 바위더미가 자연스럽게 쌓여있다. 
정녕 화성(畵聖)다운 감각으로 운치 있게 꾸민 생활공간이다. 

본채는 30여칸, 행랑채는 6칸쯤 돼 보인다. 
이 집 곁에서 살았던 조영석(趙榮_)이 16칸 집을 은화 150냥에 샀다 했으니 
아마 이 집은 300냥쯤은 나갔을 듯하다. 

겸재가 어느 부자에게 ‘소문첩(昭文帖)’이라는 화첩을 그려주고 150냥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니 
이만한 집을 장만해 살기는 어렵지 않았을 듯하다. 

영조 22년, 종이에 그린 22×32.3㎝ 크기의 수묵화로 보물 585호로 지정돼 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풍계유택 (楓溪遺宅) 

  

풍계유택(楓溪遺宅)은 ‘청풍계(靑楓溪)에 남아있는 외가댁’이란 의미다. 
겸재의 외조부 박자진(朴自振·1625∼1694)이 세상을 뜬 뒤 그 자손들이 물려받아 살던 집이다. 

박자진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다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자 자결한 퇴우정 박승종(退憂亭 朴承宗·1562∼1623)의 
당질(5촌 조카)로 거부(巨富) 소리를 들을 만큼 부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의 옛 집이 있는 청풍계 초입에서 이만한 대저택에 살았던 모양이다. 

겸재가 14세이던 숙종 15년(1689)에 부친 정시익(鄭時翊·1638∼1689)이 세상을 뜨고 
이어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과 김수항(金壽恒·1629∼1689) 등 
율곡학파의 중진들이 연이어 사약을 받고 죽는 참변을 맞는다. 

이로 말미암아 겸재는 내외의 후원세력을 모두 잃게 된다. 
그래서 외조부 박자진의 그늘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겸재에게 외가의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당연히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89 경복고 경내에서 살던 겸재가 그 맞은편 개울 건너의 청운동 50 일대에 
있던 외가댁을 조석으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가 글공부와 그림공부를 하던 곳도, 외삼촌 외사촌들과 어울려 놀며 동네 친구들을 사귀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집보다도 외가의 구석구석이 그의 눈에는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런 외갓집을 화성(畵聖)으로 추앙되던 71세 때 그리게 됐으니 아마 눈감고도 그려낼 수 있었으리라. 

북악산 기슭에 있는 그의 집에서 보면 외가의 본채와 후원 쪽만 바라다 보였던지 
이 그림에서는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딸려있을 앞부분이 생략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저택의 면모가 완연하다. 
인왕산을 등지고 있는 안채 정당(正堂)은 2층 누각이고, ‘ㄱ’자로 연결된 살림집은 겹집인데 
담이 2중, 3중으로 둘러져 있으며 후원에는 대궐 전각 규모의 별채와 사당이 있다. 

담 안 곳곳에는 각종 키 큰 나무들이 나이를 자랑하듯 위용을 자랑하며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인왕산 기슭 바위 절벽 아래에는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 서있다. 

지금 이곳은 이렇게 넉넉한 생활공간이 아니다. 
해묵은 나무는 고사하고 빈 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민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영조 22년(1746) 종이에 먹으로 그린 22×32.3㎝ 크기의 그림으로 보물 585호.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백운동 (白雲洞) 

  

백운동은 인왕산 자락이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의 지명이다. 
종로구 청운동 8 일대로 자하문터널과 이어지는 자하문길 서쪽 골짜기에 해당한다. 

청운동이란 이름은 1914년 일제가 동명을 개칭할 때 아래 동네인 청풍계(靑楓溪)와 백운동을 합쳐 지은 것이다. 
따라서 청운동(淸雲洞)은 마땅히 푸를 청(靑)자를 쓰는 청운동(靑雲洞)이 됐어야 하는데 
당시 동 서기가 청운동(淸雲洞)으로 잘못 짓고 말았다. 

이곳은 인왕산의 세 봉우리 중 낙월봉(落月峯) 줄기가 흘러내려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곳으로 
계곡이 깊고 개울물이 풍부하며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도성 안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손꼽혔다. 

이 집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그대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순조 때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한경지략’에도, 고종 때 지어졌을 
‘동국여지비고’에도 그 내용이 실려있다. 

당연히 겸재 당시에도 이념의의 옛 집이 그대로 있었을 터이니 여기 보이는 골짜기 안의 
큰 저택이 그 집인가 보다. 

엊그제 이곳을 찾아가 보니 비록 폐가로 변한 청운아파트의 흉물스러운 모습이 자연경관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있기는 하나 깊은 계곡에는 아직도 물줄기가 살아있고, 
암벽에 뿌리박은 적송은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 형태 그대로였다. 

영조 26년(1750)경 비단에 엷게 채색한 29.0×33.0㎝ 크기의 그림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의문 (彰義門) 

  

창의문은 한양 도성 4소문(小門) 중 서북문에 해당하는 성문이다. 
이 문을 나서면 현재 종로구 신영동 평창동 일대의 장의사 계곡으로 이어진다. 
이곳을 흐르는 홍제천을 따라가면 서대문구 홍제동 홍은동 녹번동으로 이어지는 문산대로로 연결된다. 
따라서 개성 이북의 황해도나 평안도로 내왕하는 길손들은 이 문을 지름길로 삼았으니 
서대문 못지않게 내왕이 빈번했다. 

창의문의 별호 자하문(紫霞門)의 줄임말인 ‘자문’으로 애칭되며 서민들의 통행문으로 사랑받아 왔다. 

이 창의문은 서울 도성이 완성되는 조선 태조 5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6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그 문루는 영조 17년(1741)에 처음 세워진다. 
아마 국초에는 4소문을 4대문과 구별짓기 위해 월단만 두르고 문루는 세우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그림은 현재 경복고 자리에서 올려다보고 그렸을 듯하다.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이 내려와 마주치는 곳에 창의문을 내었는데 그곳에 문루를 세워놓으니 
양쪽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석성(石城)이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는 듯한 모습이다. 

지금은 청운중과 벽산빌리지, 많은 민가가 들어서 사람 사는 동네로 바뀌어 있지만 
겸재 당시에는 이곳이 이렇게 집 한 채 없는 첩첩산중이었던 모양이다. 
작고 큰 바위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고 그 사이사이로 솔숲이 우거져 있으며 골짜기마다 개울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보기만 해도 한적하고 그윽한 느낌이 절로 일어난다. 

인왕산 맨 북쪽 봉우리인 벽련봉(碧蓮峯)은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백색 암봉(岩峯)이다. 
이 그림에서 보면 그 위에 축구공같이 생긴 바위 하나가 올려져 있다. 
이 부침바위는 지금도 있다. 

겸재는 경복고 자리에서 태어나 51세까지 살다가 옥인동20 인왕곡으로 이사간 다음 그곳에서 84세에 돌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북악산과 인왕산에 어떤 바위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벽련봉 부침바위를 이렇게 표현해놓을 수 있었다. 
겸재가 진경산수화에서 내재된 아름다움까지 표출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영조 26년(1750)경 비단에 엷게 채색한 29.3×33.5㎝ 크기의 그림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자하동 (紫霞洞) 

  

자하동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창의문 아래 북악산 기슭을 일컫던 동네 이름이다. 
한자로는 ‘붉은 노을 속에 잠긴 마을’이라는 환상적인 뜻이지만 사실은 순우리말 ‘잣동’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본래 산이 많은 까닭에 예로부터 도읍을 산악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에 건립해 왔다. 
따라서 자연히 성곽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게 되니, 
산마루를 뜻하는 ‘자’ 또는 ‘재’가 그대로 성의 의미로 쓰이게 됐다. 
이에 산마루 위로 나있는 성문은 당연히 ‘잣문’으로, 그 아랫마을은 ‘잣동’ 또는 ‘잣골’로 불렀다. 

그래서 고려 왕도인 개성의 북성문(北城門) 아래에도 자하동이 있고, 
조선왕조의 도읍지인 한양 서울의 서북문 아래에도 자하동이 있다. 

‘잣동’을 꼭 자하동이라 표기한 것만은 아니다. 백동(栢洞) 또는 백자동(栢子洞), 척동(尺洞) 등으로 쓰기도 했다. 
모두 ‘잣’ 또는 ‘자’라는 우리말 훈(訓)을 가진 한자들이다. 
동소문인 혜화동 아랫동네를 백동이나 백자동으로 표기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자하동은 ‘자문’이란 순우리말로 불리던 자하문, 즉 창의문 바로 아래에 있던 동네라 해야 하겠다. 

그림으로 봐도 북악산 동편 북쪽 끝자락이 내려와 마을 뒷산을 이루고 있다. 
당연히 북악산과 인왕산쪽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이 마을을 앞뒤로 휘감아 돌아나갔을 터인데 
남쪽으로 장동(壯洞) 골짜기가 시원하게 툭 터져나가 한강까지 한눈에 잡히게 되니 서울 도성 안에서 
이만한 명당자리는 다시없을 듯하다. 

그래서 풍류를 아는 어떤 거부가 이곳에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짓고 살았던 모양이다. 
겸재 시대에 이곳에 이렇게 운치 있는 대저택을 짓고 살 만한 사람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1653∼1722) 
문하에서 겸재와 동문수학했던 모주 김시보(茅洲 金時保·1658∼1734)밖에 없다. 

김시보는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의 고손자로 충청도 홍주의 갈산과 모도(茅島) 일대에 
많은 장토(庄土·전장과 토지)를 갖고 있던 거부인데 진경시(詩)의 대가로 인정받던 풍류객이다. 

선원 고택인 청풍계의 주인이기도 한 그였지만 청풍계를 종손에게 넘겨주고 그는 이보다 더 운치 있는 
이런 생활공간을 따로 마련해 살았던가 보다. 
이 집은 그의 7대손인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1846∼1922)까지 전해지는데 동농이 망국기에 
농상공부 대신 등을 지내다 나라가 망한 뒤 복국(復國·나라를 회복함) 운동에 뛰어들면서 
이 집은 남의 손에 넘어가 백운장(白雲莊)이라는 요릿집이 되고 말았다. 

영조 27년(1751) 종이에 엷게 채색한 29.3×33.5㎝ 크기의 그림으로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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