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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밍뚜웅'의 생애 Ⅲ. '밍뚜웅'의 시 연구 |
Ⅳ. 맺음말 <참고 문헌> <Abstract> |
Ⅰ. 머리말
2 외대어문논집 제15집
식민지 시대 미얀마 근대시의 완성자 '밍뚜웅(Min Thu Wun)'의 생애와 그의 시에 관한 연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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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식민지 시대라 함은,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 '꼬웅바웅(Kounbaun)'조(朝)(1752-1885)의 최후의 국왕인 '띠보밍(Thibomin)'왕(1878-1885)이 1885년 11월 영국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왕위를 상실하고, 법적으로 그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한 이듬해인 1886년 1월부터 1948년 1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기까지의 63년간의 기간을 말한다.
미얀마에서 근대시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시기는 이러한 영국 식민지 시대였던 1920년대 후반이었다. 1928년에 '조지(Zoji)(1907-1990)'가 창작한 「'바다욱(Bada며)' 꽃」이라는 시를 미얀마 최초의 근대시로서 미얀마 문학사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지'는 미얀마의 근대시를 개척한 선구자적인 작가였다.
이러한 근대시는 작품의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종래의 고전시와는 색다른 감각으로 창작되었다. 먼저 작품의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종래의 고전시와는 색다른 감각으로 창작되었다. 먼저 작품의 형식면에서 보면, 종래의 고전시 작가들이 대개 많은 미사여구를 나열하여 그 시의 요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명료하고 어수선하게 작품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웅장하게 장식한 데 반하여, 근대시 작가들은 자신들의 느낌이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많은 미사여구로 장식하지 않고, 적절하고 유용한 소수의 단어만을 사용하여 그 시의 요점에 이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작품을 이해하기 쉽고 평이하게 구성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한편, 작품의 내용면에서 보면, 고전시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치중했던 종교나 탈세적인 형이상(刑而上)의 심오하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일상 생활에서 평소에 경험하는 인간과 세상, 자연 등의 형이하(刑而下)에 관한 것들을 작가의 느낌과 인상대로 묘사하였다. 종래의 고전시가 비인간 세계, 불가시적 세계의 소재를 전통적인 사상이나 어떤 습관에 의하여 묘사하였다면, 근대시는 인간 세계, 가시적 세계의 소재를 작가가 느낀 감동 그대로 묘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밍뚜웅'은 이러한 미얀마의 근대시를 완성한 미얀마 문학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역사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조지'로부터 개척된 미얀마 근대시가 '밍뚜웅'에 이르러서 그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본고(本稿)에서는 이러한 '밍뚜웅'의 생애와 그의 시 세계를 살펴봄으로써, 미얀마 근대시의 완성자 '밍뚜웅'에 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밍뚜웅'의 생애
1. 출생과 국내 학창 시절
미얀마 문학사에서 흔히 '동시(童詩)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밍뚜웅'은, 1909년 현재의 '양고웅 따잉(Yangoun Tain)'1)에 해당하는 '항따와디 카야잉(Hanthawadi Khayain)'2)의 '꿍장고웅(Kunjangoun)'시에서 부친 '우룽삥(U Lun Pin)'과 모친 '도미(Da Mi)' 사이에서 태어났다. '밍뚜웅'이라는 이름은 필명으로서 본명인 '우웅(U Wun)'보다도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꿍장고웅'시의 '자짜웅(Ja Kyaun)'이라고 부르는 '쉐징(Shweijin)'사(寺)에 개설해 놓은 미얀마어 사원 학교에서 '우보흘라잉(U Bou Hlain)'으로부터 처음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한 '밍뚜웅'이 비로소 시를 배우게 된 때는, 그가 13세가 되던 해 1922년 민족 학교로 전학을 하면서부터이다.
'밍뚜웅'이 11세 되던 사원 학교 시절인 1920년, 수도인 '양고웅'에서 대규모 학생 데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특권층 소수 그룹에게만 고등 학문을 허용하는 영국의 식민지 대학 교육 정책에 반발하여 학생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것인데, 이 데모를 근간으로 하여 미얀마 전국에 영국의 굴욕적인 피지배 생활로부터 벗어나 자유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목적하에, 정신적인 지주로서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미얀마어 교육과 미얀마 문학을 장려하는 다수의 민족 학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꿍장고웅'시에도 '밍뚜웅'의 부친 '우룽삥'이 주도하는 마을 원로회가 후원하여 민족 학교가 세워짐으로써, '밍뚜웅'도 그 민족 학교로 옮겨 교육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민족 학교에서 문학, 특히, 시에 흥미를 느낀 '밍뚜웅'은 자신의 창작 능력을 유감 없이 키워 나가게 되었다.
15세 되던 해 1924년, 수도인 '양고웅'시의 성요한(St. Jhon) 학교로 전학하여 대도시라는 풍부한 환경에서 교육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밍뚜웅'은, 1929년 그가 20세 되던 해 고등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 해에 '양고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그 당시 엘리트로서의 학자다운 면모를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학문열에 불태운 '밍뚜웅'은, 다른 학생들보다도 눈에 띄는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학교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학부 교양 과정 2년을 1년만에 수료하는 데 성공하여 미얀마어 우수 학사 과정3)에 진학하였는데, 그 해 1930년 미얀마에 영국 식민지 통치에 저항하는 농민 대표 '사야 쌍(Hsaya San : 1876-1931)'4)이 이끄는 '갈로웅(Galoun)'5) 혁명단이 무기로 무장하고 혁명을 일으키는 농민 혁명 사건이 발생하여, 미얀마 전국이 어수선하고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는 큰 재앙이 닥쳐왔다. 국가의 지도자가 되고 싶은 야망이 없지도 않았던 혁명의 주동자 '사야 쌍'이 정부군의 진압으로 목숨을 잃게 되자, 혁명에 가담했던 '사야 쌍'의 부하들은 이제는 혁명군에서 약탈자로 그 인생이 바뀌어 약탈과 살생으로 선한 농민들을 괴롭혔다. 이 재앙으로 말미암아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밍뚜웅'의 가정도 수확한 식량을 모조리 약탈당하여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되자, '밍뚜웅'을 더 이상 학교에 보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뜻하지 않은 사건들로 말미암아 '밍뚜웅'은 1931년 그가 22세 되던 해 본의 아니게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꿍장고웅'시로 되돌아와야만 하였다.
고향인 '꿍장고웅'시에 있는 민족 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시, '우페마웅띵(U Hpei Maun Tin)'6) 교수가 '밍뚜웅'에게 장학금으로 학업을 계속 할 것을 통보해 오자, 교장 직을 그만 두고 '양고웅'대학에 복학한 '밍뚜웅'은 1933년 그가 24세 되던 해 미얀마어 우수 학사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학과 조교를 하면서 미얀마어 석사 과정에 진학하였다. 대학원에서의 그의 학구열은 대단하여 문학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고, 왕성한 시 창작 활동과 함께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 1953년 석사 학위를 받음으로써, 그의 국내에서의 학창 시절은 남이 부러워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2. 영국 유학 시절
'밍뚜웅'의 실력은 국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1936년 정부의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성캐더린(St. Catherine) 스쿨에서 산스크리트어, 빨리어, 티베트어 등 각종 언어학을 공부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B. Litt.(Bachelor of Literature)를 획득하기 위하여 논문을 제출하고, 런던대학의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로 옮겨 학업에 정진하였다. 영국이라는 선진 문화와 접하면서 그곳의 여러 학자들과도 학술적인 교류를 활발히 가진 '밍뚜웅'은, 각종 학술 발표회에 참석하여 학문적인 견문을 넓혔으며, 영국의 좌경 문학회에도 회원으로 참가하여 좌경 문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방학 때에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로 연구차 여행을 떠나 학문적인 시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밍뚜웅'은 마침내 1939년 B. Litt.를 획득하여 9월에 고국으로 귀국길에 올랐는데, 스리랑카 실론섬 근처에 배가 도착하였을 때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3. 직업과 사회 활동
1939년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곧 바로 '양고웅'대학 미얀마어과 전임 강사로 근무한 '밍뚜웅'은,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인 1942년에는 교육부 산하 번역 문학국에서 번역 문학에 관한 일에 종사하였으며, 1944년에는 미얀마 학술 진흥회에 소속하면서 미얀마어 사전 편찬 사업을 최초로 착수하기도 하였다. 이 사전 편찬 사업은 전쟁의 위험으로 말미암아 고향인 '꿍장고웅'시로까지 이동하여 추진해야만 하였는데, 결국 이 사업은 전쟁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라 도중에 그만두어야만 하였다.
전쟁이 끝난 직후 '꿍장고웅' 북부 지방의 한 면장으로서 잠시 근무한 뒤, 1945년 8월 '양고웅'대학이 다시 문을 열게 되자 미얀마어과 전임 강사로 복직한 '밍뚜웅'은, 이듬해 1946년에는 이 대학 조교수로 승진하였다. 1948년 '양고웅'대학이 이 대학 출판 및 번역부의 책임자로 '밍뚜웅'을 임명하자, 일본 군정 시대7) 때 시작하였던 그의 염원인 미얀마어 사전 편찬 사업을 다시 수행할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1961년부터 1962년까지 '양고웅'대학 미얀마어과 정교수로 잠시 자리를 옮겨 근무한 '밍뚜웅'은, 1968년 이 대학 출판 및 번역부 편집장 직으로 정년 퇴직하였으나, 곧 바로 정부로부터 특수 관리로 발탁이 되어 교육부에서 교육 및 문학 담당 특수 관리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미얀마어과 객원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동안, 일본인 교수들8)과 공동으로 미얀마어ㆍ일본어 사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사전 편찬은 일본에서 미얀마학이 발달하는데 큰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얀마 문학 작품 편찬 및 번역 위원회 위원장, 미얀마 민족 문학상 수상 위원장, 미얀마 작가 협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한 것은, 오늘날까지 '밍우뚱'을 미얀마 문학이 발달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공을 세운 공로자로 인정받게 하고 있다.
Ⅲ. '밍뚜웅' 의 시 연구
'밍뚜웅'은 그의 나이 13세 때부터 시를 창작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시 창작 초창기에는 그도 역시 그 당시 여느 시인들처럼 고전시의 형식과 내용대로 시를 구성하였었다. 고전시 작가들은 대개 자신들의 명예나 체면, 위신 등을 내세우고자 많은 미사여구를 나열하여 장엄하고 화려하게 작품을 구성하곤 하였는데, 단어의 특이함이나 아름다움, 풍부함, 웅장함, 화려함 등은 고전시 작가들의 주된 핵심적인 시적 관심사였다. 이러한 고전시의 창작 기법대로 구성한 시들을 '다고웅(Dagoun)' 잡지, '까위맷흐망(Kawimyethman)' 잡지, '비띠샤 버마(Byitisha Bama)' 잡지, '디도웃(Didout)' 저널 등에 '메가웅(Meigawun)', '쌍또따(Santhdta)', '마웅뚜웅(Maun Thu Wun)' 등의 이름들로 게재하였다. 그러나 '밍뚜웅'이 이러한 고전시의 창작 기법을 지양하고 새로운 창작 기법인 '킷쌍(Khitsan)'시를 창작하게 된 동기는, 1929년 그가 '양고웅'대학에 진학하여 `떼입빵마웅와(Theippan Maun Wa)'와 '조지(Zoji)'를 만나 '킷쌍' 문학의 한 동인이 되면서부터이다.
'킷쌍' 문학이라 함은, 시대에 도전한다는 취지하에 새로운 감각의 작품 구성으로 새로운 작품 세계를 창조하여 미얀마 근대 문학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그 시대 혁신적인 신문학(新文學)을 말한다. 말하자면, '시대를 살펴보는 문학'이라는 의미9)를 가지고 있기도 한 이 '킷쌍' 문학은, 그 시대를 음미해 보자는 견지에서 출발한 하나의 문학 운동이었다.
1928년 '양고웅'대학내에서 `킷쌍' 문학의 싹은 서서히 트기 시작하였다. '양고웅'대학의 몇몇 학생들이 평이하고도 간단ㆍ명료한 문장으로 '간다로까(Gandaloka)' 잡지에 소설과 수필, 시 등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고전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왔던 불교 문학, 궁중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미얀마 문학의 수준을 시대에 맞게 근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양고웅'대학내의 미얀마 문학에 관심이 많은 몇몇 문학도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시킨 문학이 바로 '킷쌍' 문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취지하에 '킷쌍' 문학 작가들은 급속히 변해 가는 그 당시 미얀마 사회에서 민족 전통 문학도 유산으로서 우수하여 유지ㆍ보전해야 할 것은 유지ㆍ보전하고, 또한, 새로운 경향의 외국 문학도 흡수ㆍ수용해야 할 것은 흡수ㆍ수용함으로써, 미얀마 문학의 형태를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적합하고 조화가 되도록 부단한 노력과 심혈을 기울였었다.
그리움, 사랑, 믿음, 동정, 슬픔 등의 인간과 세상사를 중심으로 하는 소재를 가지고 단어의 미사여구를 지양하는 간결하고도 명료한 문체, 확실한 요점에 이르도록 하는 평이한 구성, 그리고 휴머니즘(Humanism)과 자연주의(Naturalism) 색채를 띤 작품의 경향이 그 당시 '킷쌍' 문학이 추구했던 핵심적인 문학적 성격과 특징이었는데, '밍뚜웅' 외에도 '떼입빵마웅와' 그리고 '조지'는 이 문학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작가들이었다. 미얀마 문학에 매우 심취해 있던 이들은 미얀마 문학뿐만 아니라 서양 문학도 깊은 관심으로 매우 박식하였는데, '밍뚜웅'은 시로, '떼입빵마웅와'는 자서전적인 단편 소설로, 그리고 '조지'는 시와 단편 소설로써 작품성과 문학성이 짙은 작품 창작을 위해 꾸준히 창작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 '밍뚜웅'의 동시(童詩)의 세계
'밍뚜웅'은 1931년 가정 형편상 대학을 휴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그곳에 있는 민족 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시, 민족 교육 위원회에 어린 학생들에게 정서적인 면에서 동요를 가르쳐야만 한다고 한 보고서를 낸 바 있다. '밍뚜웅'의 동시의 창작 활동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우페마웅띵' 교수가 '밍뚜웅'에게 대학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배려해 놓은 사실을 통보하자, 교장 직을 사임하고 대학에 복학한 '밍뚜웅'은 함께 가지고 간 동시들을 「'마웅퇴(Maun Htwei)'를 위한 시」라는 제목으로 '꼬레잇(Koleit)' 잡지에 보냈다. 1932년 3월 잡지가 출간될 때 만화가 '우헤잉쑹(U Hein Sun)'의 삽화도 함께 곁들였는데, 이 삽화는 시 주제에 대한 효과를 극대화한다고 하여 많은 어린이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또한, 이 「'마웅퇴'를 위한 시」를 1939년 '우킹조(U Khin Zo)'의 악보, '우킹조'와 G. H. Luce의 영어 번역, 화가 '우바냥(U Ba Nyan)'의 그림들로써 「'마웅쾨(Maun Khwei)'를 위한 시」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시집으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축음기 레코드로까지 녹음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이 레코드는 제 2차 세계 대전 때 불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밍뚜웅'의 동시들이 문단에 데뷰할 때, 그 당시 문학계에서는 꽤나 시끄러웠다. 한 쪽에서는 찬사를 보냈고, 한 쪽에서는 비난을 보냈다. 찬사를 보낸 쪽은 시의 내용이 쉽고 명쾌하고 분명하다는 이유에서였고, 비난을 보낸 쪽은 시의 내용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일부에서의 그러한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밍뚜웅'의 시들은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날이 갈수록 유명해져 명성이 높아져 갔다. 전국적으로 어린이들의 입가에서 읊어져 울려퍼져 갔다. 세상과 자연과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시인이라고 '밍뚜웅'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찬되어져만 갔다.
'밍뚜웅'은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골의 자연 환경과 생활 환경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사건들은 그의 시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의미를 낳는 것 같다. 또한,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그의 애틋하고도 정성스러운 마음도 그의 시들을 특별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는 것 같다. 그 애틋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란 시골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귀히 여기고, 애착을 갖는 그러한 마음이다. 그의 시 속에 그려진 시골 사람들의 생활상에 대한 묘사에는 그들에 대한 특별한 연민과 사랑과 동정과 존경과 예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한편, 시 구성에 있어서도 '밍뚜웅'의 시에는 꾸밈없는 소박한 시어들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체면이나 위신을 염두에 둔 어떠한 과장이나 화려함도 전혀 가미되어 있지 않고, 그리고, 어떠한 권위적인 장엄함도 전혀 느낄 수 없이, 오로지 산뜻하고 밝고 명쾌한 신선함만이 우리 마음에 느껴져 온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영혼의 소리가 우리 마음을 노크하는 것인가!
전원을 배경으로 창작한 '밍뚜웅'의 동시들 중「'다볘(Dhabyei)'10)열매 줍기」라는 시가 있다.
'다볘' 열매 줍기
'와조(Wazou)'11), '와가웅(Wagaun)'12), 물이 불어
'다볘' 열매 익어 가네. 가서 줍자꾸나.
엉겅퀴 가시 덤불 저 속에
새까만 커다란 거머리는 곧잘 붙어 있곤 하지.
거머리에 뿔이 나 있고
뱀과 용마저 있을지라도.
우리는 무서워하지 않아, 함께 가자꾸나
코코야자 나뭇잎을 소처럼 타고서 말이야.
가자꾸나, 가자꾸나.
우기인 미얀마력 4, 5월에 '밍뚜웅'이 태어난 남부 지방의 델타 지역 시골 마을인 경우, 장대 같은 비가 내리면 물이 범람하여 홍수가 나 모든 것이 물 속에 가라앉는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려고 해도 배를 타고 가지 않으면 뾰족한 다른 방법이 없다. 이때 배를 타고 갈 것 같으면, 흐르는 물줄기와 함께 둥둥 떠내려오는 잘 익은 '다볘' 열매를 수 없이 만나게 된다. 너무 탐스럽게 익어 이 열매를 먹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나머지,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이 열매를 건져내 먹는다. 어린이들은 배 위에서 건지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아예 물 속으로까지 뛰어들어 '다볘' 열매 줍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런데 물 속의 가시 덤불, 풀 덤불 사이에서 새까맣고 커다란 거머리들이 고개를 쳐들고 쳐다보고 있다. 기분이 언짢고 무섭기도 하지만, 시골 어린이들은 용감하다. 거머리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는 뱀이나 용이 있을지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다볘' 열매 줍는 일에 열중하기만 한다. 어린이들의 그러한 사랑스럽고 엉덩이를 두드려 주고 싶은 믿음직한 모습들을 '밍뚜웅'은 흐뭇하게 마음에 들어하면서 이 시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모습은 바로 자신의 어릴 적 그 모습이기에…….
꽃장수
'마웅레(Maun Lei)'야! 일어나라
동이 텃구나.
1절, 2절 노래 부르며
까치가 지저귀는데.
산 넘어 모과꽃이
얼마나 향기롭고 싱싱한지.
소쿠리 가져올래, '마웅레'야!
가서, 가서 줍자꾸나.
꽃장수 놀이 하자, 재미있게.
꽃다발 만들자, 둥그렇게.
이 시에서 모과꽃이 필 적에 아침 일찍 일어나 모과꽃을 줍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시골 어린 오누이의 정답고 천진난만한 모습이 눈에 선하기만 하다.
'다굴라(Dagula)'13), '까소웅라(Kahsounla)'14)에 모과꽃은 흔히 피곤 한다. 모과꽃이 피면 시골 어린 오누이는 서로서로 앞을 다투어 모과꽃을 먼저 줍고자 한다. 새벽 여명 아래 등잔불을 밝혀 놓고, 각자 소쿠리를 들고서 향기롭게 핀 모과꽃을 줍는다는 것은 시골 어린이들로서는 꽤나 신나는 노릇일 것이다. 주운 꽃들을 실로 묶어 제일 먼저 부처님께 공양한다. 그리고 나면 꽃장수 놀이를 하며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조개나 그릇 조각들을 돈으로 하여 서로서로 팔고 사는 놀이에 열중한다. 마땅히 유희 수단이 없는 시골 어린이들로서는 이것은 하나의 놀이 방법이기도 하여 매우 즐거운 일이다. '밍뚜웅' 자신이 어렸을 적 누나들과 함께 모과꽃이 필 무렵 모과꽃을 주우면서 즐거워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성장하여 다른 어린이들의 이러한 모습들을 보았을 때에도 옛날 생각에 사로잡혀 입가에 미소 지으며 아주 흐뭇해했던 것 같다.
이 시에서 동심(童心)의 세계로 돌아가 어릴 적 향수를 만끽하고 있는 '밍뚜웅'의 잔잔한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냥 친근하기만 하다.
순수
일어나자, 얘야!
시계를 볼래?
지저귀는 작은 새, 아침 햇살 화사하여
볼 필요 없어.
'다볘'꽃이 향기로운 새해 아침
달력을 볼래?
눈부시게 가득 핀 '바다욱(Badauk)'꽃15) 화사하여
볼 필요 없어.
이 동시는 자연과 친근한 시골 어린이들의 생각과 지각을 그 내용으로 하여 구성한 시로서 시골 어린이들의 천진성과 순수성이 돋보인다.
시골 어린이들은 까치가 울면 동이 텄다고 생각했다. '바다욱'꽃이 피면 해가 바뀌어 새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새해가 되면 '다볘' 나뭇가지로 물을 뿌려 주어 서로간에 새해를 축복하는 그네들의 전통적인 풍습도 알고 있었다. 자연의 질서 있는 아름다움이 찬사를 받을 만하듯,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아는 시골 어린이들의 정직하고 순수한 생각과 지각도 칭잔을 받을 만하다.
자연은 정직하다. 자연은 순수하다. 시골 어린이들은 그러한 자연을 깨끗하고 정직하고 순수한 감정으로 받아들이며 느끼고 있다. 인간에게는 자연의 혼이 깃들어 있는 만큼, 정직하고 순수하게 행동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이 시에서 '밍뚜웅'은 내심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시골 어린이들의 자연과 같은 정직하고도 순수한 생각과 지각과 감정을 예찬하면서 이 시를 구성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20 외대어문논집 제15집
퇴마약
해질녘이 되면 밖에 나가지 마
도깨비가 따라오곤 하니까.
도깨비가 무서워하는 퇴마약을
스님이 주었단다.
친구야! 퇴마약을
물소 모양으로 바꾸자꾸나.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를 읊어라
도깨비가 도망 갈거야.
읊자꾸나, 읊자꾸나, 삼보를.
옛날 시골에 황혼 무렵 해질녘에 집 밖에 나가면 도깨비에게 잡아먹힌다는 한 미신이 있었다. 이 시에서는 시골의 그러한 미신을 그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미신만을 이 시에서 단순히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깨비라는 악마를 불, 법, 승이라는 삼보로 물리치려는 시골 어린이들의 두터운 불교의 신앙심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한 두터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시골 어린이들의 믿음직스러운 불심(佛心)을 가상히 여기며 '밍뚜웅'은 흡족한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의 도깨비는 마귀적인 속성의 상징이 아닌가 싶다. 교만, 탐욕, 미움, 거짓말, 혈기, 시기, 질투, 분노, 불화, 투쟁 등 어린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이 세상에서 겪어야만 하는 불교와 역행되는 나쁜 속성들의 유혹을 삼보의 율법으로써 물리쳐 격퇴시켜야만 한다는 교훈을 암암리에 어린이들에게 일깨우고 있지 않나 싶다. 어릴 때부터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가슴 깊이 아로새겨 강하고 담대한 믿음 생활을 해 나감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것을 '밍뚜웅'은 이 시에서 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공의 노래
거센 폭풍우, 넘치는 개울
회오리 바람 소리는 울부짖고, 파도는 하얗게 부서지는데
'이레레 이레레(Yileilei Yileilei)'.
때리는 빗방울, 달려드는 나방
갈 길은 멀고, 바람은 찬데
'이레레 이레레'.
동무들아! 우리와 함께
노를 젓지 않을래? 힘차게 말이야, 파도는 하얗게 부서지는데
'이레레 이레레'
이 시는 어머니가 요람을 흔들면서 어린아이를 달래며 잠재울 때에 읊는 자장가 형식의 동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시에서 태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온갖 애를 다 쓰고 있는 어느 뱃사공의 끈기 있는 불굴의 투지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미얀마 시골에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외침 소리가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이레레'라는 외침 소리이다. 이 외침 소리는 미얀마 시골에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미얀마 시골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근한 소리의 하나이다. 이 소리를 외침으로써 시골 사람들은 자신에게도 힘을 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기를 북돋는다. 그리하여 단합하여 힘을 결집하거나, 전심전력으로 질서 정연하게 행동하거나 할 때에 이 소리는 흔히 사용되어진다. 강 줄기를 따라 보트 경기 할 때에 마을 사람들이 소리 모아 지르는 이 외침은 산천초목을 울리며, 어린이들이 요람을 흔들거나 그네 탈 때에 발하는 이 외침은 시골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자신감과 담대함을 고취시키는 정신적인 활력제로 작용한다.
'밍뚜웅' 자신이 이 외침을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사용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이레레' 외침도 늘 듣곤 했었던 것 같다. 자신이 외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이 외침을 들을 때마다 늘 그 소리가 가슴에 와 닿아 힘을 얻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바다 폭풍우 사이에서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뱃사공의 '이레레' 외침 소리를 이 시의 소재로 구성함으로써, 어린이들에게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낙심치 말고, 희망을 잃지 말고,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해 나갈 것을 종용하며 격려한 것 같다.
이상의 동시들을 찬찬히 음미해 보면, '밍뚜웅'은 힘과 위엄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친근하게 느끼도록 시를 구성하였음을 이내 알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친밀감을 가짐으로써 자연 속에서 안식을 얻기를 의도하고 있음을 이내 알 수 있다. 그의 시 속에서 예찬되어진 자연의 깨끗한 아름다움은 바로 시골 사람들의 정직하고도 순박한 마음과 연결되는 것 같다. 자연의 깨끗한 아름다움과 시골 사람들의 정직하고도 순박한 마음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 그의 동시들을 한층 빛나게 하는 것 같다. 그의 시 속에 그려져 있는 '다볘' 열매 줍기, 모과꽃 줍기, 야자 나뭇잎으로 소 타기 놀이, 꽃장수 놀이 등은 미얀마 시골의 모습과 전원의 생활상들로서, 이것은 바로 '밍뚜웅' 자신의 어릴적 모습이었으리라. 그러한 시골의 모습과 전원의 생활상들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 마음 속에 정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게 하여 그의 시를 쉽게 잊을 수 없게 하는 지 모른다.
2. '밍뚜웅'의 목가적인 애정시 세계
이와 같이 시골의 모습과 전원의 생활상들을 소재로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그의 동시 속에서 예찬한 '밍뚜웅'은, 1934년부터는 그의 시작(詩作)의 방향을 바꾸어 자연을 배경으로 젊은 연인들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1) 「북소리」 시 세계
'양고웅'대학 조교 생활 시절인 1934년에 창작한「북소리」라는 시에는, 득도식(得度式)을 거행하여 불문(佛門)에 입문하게 됨으로써 사랑하는 애인과 잠시 떨어져야만 하는 젊은 연인들의 애닯은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하루는 '밍뚜웅'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까마윳(Kamayut)' 경찰서 근처 한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잡담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까마윳'구내(區內)로부터 득도식 직전의 득도 예정자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의식인 '싱라웅흘래봬(Shinlaunhlebwe)'를 목격하게 되었다. '싱라웅흘래봬'는 그 당시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 '양고웅'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여간해서는 보기 드문 진기한 광경이었다. 지금처럼 고향을 떠나 타향인 '양고웅'에서 이러한 의식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밍뚜웅'은, 그것이 여간 반갑고 기쁜 것이 아니었다. 이 의식을 보면서 자신의 득도식 거행할 때에 행하였던 '싱라웅흘래봬'의 추억이 그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자, 기숙사에 돌아온 '밍뚜웅'은「북소리」라는 이 시를 창작함으로써 그때의 그 추억에 흠뻑 젖었던 것이다.
국민의 85%가 불교를 믿고 있는 미얀마에서, 미얀마의 남성이라면 일생에 한번은 불문에 입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행하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不文律)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일상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얀마에서, 미얀마의 소년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 바로 득도식이다. 수도승이 되기 위해 삭발을 하고 불문에 들어가기 전 행하여지는 이 득도식은, 미얀마 불교도들의 종교적이고도 문화적인 하나의 전통 풍습으로서, 옛날부터 미얀마에서 중요한 종교적인 의식으로 간주되어 왔다.
득도식 거행하기 전의 소년은 나이의 대소에 관계 없이 아직 성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소년 자신도 이처럼 생각하여 의기소침하곤 한다. 그러나 일단 득도식을 거행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성인으로서 인정되며, '꼬잉(Kouyin)'16) 누구누구라고 자신의 이름 앞에 '꼬잉'을 붙여 불리워지는 것은 하나의 명예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득도식이 끝난 소년은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고, 나도 이제 어엿한 남자가 되었다라는 생각에 미쳐 말도 점잖아지고 어른스러워지며, 생활 습관과 성격과 사고 방식까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미얀마 불교도 소년마다 득도식을 거행하여 불문에 입문하며, 부모들도 자식의 득도식 거행을 부모의 하나의 귀한 의무로 여겨 충실히 행한다. 따라서, 아무리 가정 형편이 어려워도 자식의 득도식 행사만은 치밀하게 계획 세워 거행함으로써, 자신들의 공덕도 쌓고 부모로서의 의무도 다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득도식을 거행할 때 득도식을 축하하고, 일종의 종교적인 공덕을 쌓는 의미에서 흔히 '뵤(Byo)'17)라는 북을 두드린다. 다시 말하면 '뵤'는 득도식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을 안에서 '뵤'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득도식이 거행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 소리가 들리면 마을 사람들은 기뻐하고, 그러한 종교적 행위에 대해서 축복의 기원을 한다. 미얀마 불교도들의 종교적인 풍습과 그 풍습을 소중하게 행사하는 시골 사람들의 성스러운 행위, 그리고 그 풍습을 행사할 때에 흔히 눈에 띄곤 하는 시골 젊은이들의 사랑, 정, 자비, 연민의 모습들을 그 소재로 구성해 놓은「북소리」라는 시에서 '밍뚜웅'은 이러한 것들을 잘 묘사해 놓고 있다.
북소리
둥둥둥
'따웅고웅(Taunggoun)' 마을 평화로운 곳에서
'도쉐메(Do Shwei Mei)'와 '우예창(U Yei Chan)'18)의
경건하고 심오한
불심(佛心)을 드높이는 북소리여!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시골에서 득도식을 거행하게 되면 득도식 직전에 득도 예정자 소년이 마을을 한 바퀴 도는 풍습이 있다. 이때 득도 예정자 소년은 얼굴에 화장을 하고, 눈부시게 화려한 고급 비단 왕족 의상을 몸에 걸치고서, 빌릴 수 있는 최대한 가족들의 금목걸이나 팔찌 기타 보석들을 빌려 몸에 장식하고, 금빛 우산을 쓴 채, 말이나 혹은 아름답게 장식된 우차(牛車)나 수레를 탄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여 자신들의 옷들 중 가장 아름답고 좋은 옷을 골라 입고, 소년의 주위를 둘러싼 채, 북소리를 둥둥 울리면서 마을 한복판을 따라 줄을 지어 함께 돈다. 이때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금빛 우산과 색색의 줄을 지어 도는 사람들의 긴 행렬은 생각만 해도 장관일 것이다. '밍뚜웅'은 그 화려함과 황홀한 광경을 2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고 있다.
아! 햇빛에 빛나는 황금빛
금빛 우산이 열 개도 더 되거늘
멀리 저 마을길
우산 행렬이 아름답기만 하도다!
그리고 그 다음 연들에서 '밍뚜웅'은 득도식 거행할 때에 흔히 눈에 띄곤 하는 시골 젊은이들의 애틋한 사랑에 대해서 구성해 놓고 있다. 불문에 입문하기 때문에 잠시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시골 젊은 연인 두 사람의 아쉬움, 사랑, 정, 연민 그리고 소녀의 간절한 여자로서의 본능 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득도식 직전에 득도 예정자 소년이 마을을 한 바퀴 돌 때, '뵤'라는 북을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또한, 그 북소리 간격 사이에 젊은 청년들이 북소리에 뒤이어 계절의 변화나 자연의 정경 등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3연 이내19)로 읊은, '삥야(Pinya)' 시대(1298-1364) 때 등장하여 '따웅우(Taunngu)' 시대(1488-1597) 때 전성기를 이루었던 4음절 1행 서정시인 '야두(Yadu)'를 규칙적으로 읊음으로써 박자를 맞춘다.
이와 같이 '야두'를 읊어 박자를 맞출 때에 득도 예정자와 그의 연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야두'도 읊어진다. "한 달 쯤 불문에 입문하여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게 해 주오! 허락해 주오! 나의 연인이여!"라는 내용의 '야두'는 그들 두 사람의 마음을 극도로 아프게 한다. 이 '야두' 읊는 소리를 들을 때, 상투로 머리를 틀어올린 득도 예정자는 그만 슬픔에 잠겨 머리를 숙인다. 하얀 말도 히잉거리고 날뛰며 조용히 있지 않는다. 득도 예정자는 슬픔에 잠긴 풀이 죽은 얼굴로 그의 연인의 얼굴을 연민의 정으로 잠깐 곁눈질한다. 그의 연인도 슬픔을 겨우 억누르지만 그 마음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비통하여 그만 손에 든 '꿍다웅(Kundaun)'20)조차 땅에 떨어뜨린다. 결국 "이러한 일로 떠나고자 한다면 한 달 아니라 열 달, 아니 그 이상도 허락해 줄 수 있어요!"라고, 소녀는 한편에서의 치밀어오르는 연민과 한편에서의 여자의 본능적인 자포자기 심정으로 떨면서 마음 속으로 불쑥 말한다. 그러나 슬픔을 제대로 억제할 수 없어, 흐르는 눈물을 몰래 감추느라 애쓰는 소녀의 모습을 가엾기가 이를 데 없다.
이처럼 소녀가 슬픔과 비탄에 잠기는 데 반해, 득도식에 참석한 축하객들은 즐거워 어쩔줄 모른다. 둥둥 '뵤' 치는 사람들, 삘리리 '흐내(Hne)'21) 부는 사람들, 척척 '야두'로 박자 맞추는 젊은이들의 신나는 모습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더덩실 어깨춤이 나게 한다. 슬픔과 비탄에 잠긴 가엾은 소녀를 마치 증오하며 비웃기나 하는 것처럼……. 이래저래 복받치는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소녀는, "조금 전 말했던 것을 듣지 마소서! 없는 것으로 해 주소서! 한 달은 너무 길어요. 좀 줄여 주소서!"라고 또 다시 애원하듯 남몰래 속으로 말한다. 소년과 소녀의 이와 같은 안타깝고 애틋한 석별의 정을 '밍뚜웅'은 다음과 같이 절절히 생생하게 묘사해 놓고 있다.
"한 달만 나의 갈 길을
사랑하는 그대여 허락해 주오!"라는
'야두'의 애닯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오.
상투 머리 소년은 고개를 떨구고
소년이 탄 말조차 갈 바를 모르는데.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애타는 마음, 시무룩한 얼굴로
말 위의 소년이
곁눈질로 힐끗 내려다보았을 때,
연꽃과 같은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떨결에 그만 '꿍다웅'마저 떨어뜨리고,
"열 번이나 그대를 놓아 드리지요."라는
마지못한 푸념 섞인 목소리만 허공을 치는데.
핑그르르 맴돌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에메랄드 눈물이여!
둥둥 북소리여!
삘리리 피릿소리여!
척척 '야두' 소리여!
너희들은 새침뜨기 소녀를
미워 미워 비웃는 듯하는구나!
조롱당하는 마음이 아프기만 한데.
그대의 얼굴만을 보고 살았는데
불문에 입문하기에 놓아 드리지만
나는 이제 어떻게 하라고!
그러나 한 달은 길어요, 줄여 주소서.
화 내서 미안해, 마음에 두지 마소서.
그대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애닯은 북소리여! 애닯은 북소리여!
(2) 「우안거(雨安居) 계절」 시 세계
우안거란 우기 3개월 동안 승려가 방 안에 들어박혀 수행하는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를 말하는데, '밍뚜웅'은 「우안거 계절」이라는 시에서 시골의 우안거 계절 때의 아름다움이나 우안거 계절에 자주 행해지는 시골의 풍속적인 행위들을 그 내용으로 구성해 놓고 있다. 이 시에서도 역시 전원의 아름다움이나 시골의 풍속적인 행위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밍뚜웅'의 풍부한 감성을 엿볼 수 있는데, 사실 이 시는 「북소리」의 후속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왜냐 하면, 득도 예정자가 득도식이 끝난 다음 삭발을 하고서 불문에 입문한 뒤의 상황을 흥미롭게 묘사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우안거 기간은 우기이기 때문에 형편과 여건이 여러모로 좋지 않다. 모든 것이 축축하게 젖은 느낌이다. 그러나 미얀마 시골 사람들은 이러한 우기를 매우 좋아한다. 농사에 힘을 쏟기도 하고,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투철하여 8계, 10계 등 계율을 지켜며 승려에게 보시를 공양하기도 하면서 즐거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우기 아침 일찍 날이 새면 까치들이 울곤 한다. 까치들이 울면 이제 동이 텄다고 시골 사람들은 하나의 표징으로 삼는다. 까치들이 울면 시골 마을에서는 부처님께 공양 드리기 위해서나, 재가신자(在家信者)들이 출가(出家)들에게 시주할 보시를 짓기 위하여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지금 막 까치가 울었다. 한 집에서 자매 두 사람이 공양할 보시를 짓기 위하여 잠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우안거 계절
까치가 까악까악
대문에서 지저귄다.
시간이 되었구나. 얘야!
공양 드릴 보시를 짓자꾸나.
공양 드릴 보시로서 특별히 알루미늄 밥솥이 아닌 돌솥으로 지은 '타밍우바웅(Htamin U Baun)'22)을 정성스럽게 그릇에 담는다. 예절을 중히 여기는 미얀마 문화에서 이 '타밍우바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부처님께 공양 드릴 때나 웃어른께 대접할 때 사용하는 특별히 성별(聖別)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두 자매는 이러한 '타밍우바웅'을 그릇에 담아 부처님께 정성스럽게 공양 드린다. 등잔에 불을 켜고 절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삼각형으로 된 놋쇠징을 쳐서 축북을 기원한다. 자신들이 쌓는 공덕으로 인하여 받는 축복을 혼자서 누리지 않고, 모든 중생들이 함께 누릴 것을 축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꼭 세 번 삼각형 놋쇠징을 쳐서 축복을 함께 누리려고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천상천하 모든 만물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정말 고귀하고 소중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타밍우바웅'을 공양 드리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자.
청아한 소리로 징을 울리니
등잔불도 빛이 나도다.
축복의 기도 세 번
보리수에 관수(灌水)공양.
천상천하 모든 만물이여
건강할지라!
그들의 징소리가 멈추자 이제는 마을 밖으로부터 다른 징소리가 들려온다. 마을 밖 사원의 수도승들이 탁발하러 돌아다니는 것이다. 미얀마에서 출가는 돈이나 금품을 전혀 휴대할 수 없고, 미얀마의 사원은 원칙상 부엌이나 채소를 가꾸는 텃밭이 없는 등 생산 수단이라고는 일체 없다. 따라서, 불문에 들어간 모든 출가들은 수입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미얀마의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는 구조적으로 출가의 경제 활동이나 노동 등의 생산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출가는 자연히 생활의 기반을 제 3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출가와 불신자(佛信者), 즉, 재가신자간의 상호 관계가 이루어진다. 마을 안의 사원에 기거하는 출가의 음식물은 모두 재가신자인 마을 주민들의 보시에 의하여 충당되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출가들은 동그랗고 약간 커다란 '다베잇(Dhabeit)'23)을 감싸안고, 매일 이른 아침 재가신자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갓 지은 밥을 제공받는 것이다.
그 수도승들 중에는 최근에 득도식을 마치고 불문에 입문하여 수도 생활에 들어간 언니의 애인도 들어 있다. 두 자매가 공양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사이 그 사람이 탁발하러 왔다. 동생이 나가 공양하고 있는 동안, 언니는 줄곧 먼 산만을 쳐다본다. 동생이 언니의 애인인 그 수도승의 얼굴이 풀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그 동안 안녕하셨나요?" 하고 묻자, "잘 있었습니다." 하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안색이 좀 좋아 보이지 않네요." 하고 동생이 다시 묻자,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하고 적당히 얼버무린다. 언니는 측은하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깝삐야(Kappiya)"24)들이 수도승들을 괴롭힌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늙은 '깝삐야' 할아버지가 그의 대머리를 때리고 놀려대어 그만 풀이 죽은 것일까? 등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매우 언짢다. 그녀의 애인은 꽤나 운이 좋지 않다. 어제 아침 그녀의 애인이 먹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모로 신경 써서 음식을 만들어 동네 아이를 통하여 보내었는데, 가는 길에 그만 그 아이가 마을 한복판 벽돌길에 넘어지는 바람에 그릇이 모두 깨져 버려 음식이 모조리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동구 밖 '웨루웅(Weilu Wun)' 사원에서
들리는 놋쇠징 소리.
'꼬잉(Kouyin)'이 탁발하러 오는구나
보시를 준비하자.
내 사랑 그님이
마음이 아픈지 풀이 죽어 있네.
동생이 잘 있었느냐고 묻자,
잘 있었다고 대답은 하지만.
'꼬잉'이 되면 역시
몸과 마음이 고달픈가 봐.
'깝삐야' 할아버지
참 나쁘지? 그렇지?
내 님의 까까머리를
때리며 놀려댔을 것 같아서 말이야.
별미를 준비해서
어제 아침 보냈건만.
마을 한복판에서 아이가 넘어지는 바람에
쨍그랑 깨진 보시 그릇들.
그리하여 언니는 하루 속히 그녀의 애인을 환속하게 하고 싶다. 그러나 환속한 뒤 머리가 다시 길면 머리에 또 이가 생겨 그녀의 애인을 가렵게 할 것을 걱정하는 여자다운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인 언니의 심정이다. 그녀의 애인이 환속하면 입을 '로웅지(Lounji)'25)가 없는 것도 걱정이다. 그래서 도매 시장에서 폭이 넓은 '빨래깟(Paleikat)'26)'로웅지'를 사 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애인이 '로웅지' 폭이 너무 넓으면 '로웅지' 동여맨 곳이 너무 길어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언젠가 말한 것이 생각나, 자상하고 섬세한 그녀는 '로웅지' 폭을 적당하게 잘라 두기도 하였다.
하루 속히
내 님이여 환속하소서.
환속하거든 부디 머리를 길지 마소서
이가 가렵게 하니까.
환속하면 내 님이 입을
폭 넓은 '빨레깟'을
도매 시장에서 사 왔지.
폭이 넓으면
허리춤이 느슨해진다고 하여
조금 잘라 두기도 하였다네.
언니는 그녀의 애인이 환속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도 지루하기만 하여, 하루는 그가 탁발하러 오자 그 애타는 마음을 도저히 이제는 억제할 수 없어서 언제 쯤이나 환속하느냐고 물었다. 그 자신도 하루 속히 환속하고 싶지만, 부모님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번만은 참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아서 그의 애인이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묵묵부답이다.
탁발하러 내 님이 오자
처음으로 물었지.
내 님이 환속하는 날이
언제인가를.
앳띤 얼굴은 침묵뿐
그것은 이번 한 번 참고 견디어
수행 생활에 매진하겠다는.
이와 같이 하여 시간은 점차 흘러 버린다. '와조(Wazou)'27), '와가웅(Wagaun)'28), '또달링(Todhalin)'29)이 되고, '또달링'에서 안거가 끝나는 달인 '다딘줏(Dhadinjut)'30)이 된다. 우기로 잔뜩 찌푸렸던 구름 낀 하늘은 태양빛으로 이제 밝고 빛나기 시작한다. 안거가 끝나는 날에 언니의 애인도 사원의 주지승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환속하게 되었다. 석양 무렵 빡빡 민 머리를 손으로 긁적거리면서 겸연쩍은 표정으로 마을로 돌아온 것이다. 언니는 기뻐 어쩔줄 몰라한다. 언니의 애인이 돌아오는 날짜를 동생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문에서 맞이하면서 그가 보임과 동시에 '꼬잉루툇 아삐챗(Kouyinluhtwet Ngapichet)'31)이라고 놀려대며 그녀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내 님이 돌아온단다.
대문에서 맞으렴.
내 님이 환속한단다.
'아삐'를 만들렴.
(3) 「'퇴뇨(Htweinyou)'의 원(願)」 시 세계
「'퇴뇨'의 원」이라는 시는 전원의 자연을 배경으로 시 속의 소녀 '퇴뇨'가 연못 옆에 물항아리를 일부러 남겨 놓고서(또는, 깜박 잊고 남겨 놓았다고도 볼 수 있음), 그녀의 애인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테스트 또는 확인하고자 남겨 놓은 그 물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연꽃 두 송이를 꽂아 가지게 오게 한다는 실로 극히 소박한 내용의 애정시이다. 그러나 이 시를 찬찬히 음미해 보면, 매우 정겨운 시골의 정서를 한껏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물이 가득 찬 항아리는 부의 충만을, 맑고 시원한 물은 평화롭고 화목한 가정 생활을, 두 송이의 연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애정을 각각 의미함으로써 시골 사람들의 삶을 비유 묘사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퇴뇨'와 함께 풍족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퇴뇨'의 애인이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소녀가 시키는 대로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연꽃 두 송이를 꽂아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서로간에 애정과 정성을 쏟는 시골 젊은 연인 두 사람의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마냥 흐뭇하고 흡족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 같다.
'퇴뇨'의 원
에메랄드빛 연못 둑에 두고 온
물항아리 가져오라고
'퇴뇨'가 원하네.
성스러운 연꽃이 향기롭기만 한데.
두 송이를 그 님이 가지런히 하여
시원하고 맑은 물 가득 찬 항아리에
꽂아 두었네.
(4) 「장미꽃」 시 세계
「장미꽃」이라는 시도 시골 젊은이들의 자연 속의 삶과 본능을 예찬한 애정시로서, 「'퇴뇨'의 원」이라는 시처럼 그 내용은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다.
이 시에서 소녀는 머리에 장식하고자 그녀의 애인에게 논에서 돌아올 때 모과꽃을 따 오라고 말한다. 소년은 소녀가 말한 대로 모과꽃을 따 와 그녀에게 선물한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은 소녀가 모과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미꽃을 머리에 장식해 놓은 것을 발견한다.
장미꽃
논에서 돌아오는 길
머리에 장식할래요
모과꽃을 따 오소서.
어느 날 아침
그녀의 예전에 없던 화려함이 눈에 띄었네.
그녀의 머리가 장미꽃들로
영화롭도다!
이 시를 찬찬히 음미해 보면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무엇을 꽃으로 비유 묘사했다는 점을 말이다. 지주의 딸과 소작인의 아들, 부농의 딸과 가난뱅이 농사꾼의 아들 등, 신분과 지위와 생활 수준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뜨겁게 서로 사랑하다가, 결국에는 여자측이 지위가 낮은 가난뱅이 남자측을 외면하고, 지위가 높은 부유한 다른 남자에게 가 버린다는 비유 묘사인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가 장미꽃들로 영화롭도다!'라는 마지막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지위가 낮은 가난뱅이 시골 소년은 자신의 애인이 자신을 배반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마음은 쓰라리고 아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욕하거나, 결국 그녀가 선택한 그 남자를 질투하지 않는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그 두사람의 사이를 훼방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머리가 장미꽃들로 영화롭도다!'라고 그녀의 좋은 결과를 바라면서 진심으로 그녀를 축복하는 것이다. 겉에 드러나 보이는 모습은 초라하고 내놓을 것 없고 가난하지만, 그 자신을 배반한 소녀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마음만은 여유 있고 선한 시골 소년의 그 너그럽고 넉넉한 심정을 예찬했다고나 할까? 이것은 바로 행복의 척도를 물질의 많고 적은 부에 두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는 가난한 마음에 두는 '밍뚜웅'의 가치관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미얀마 근대시의 완성자 '밍뚜웅'의 생애와 그의 시들을 통한 작품 세계를 살펴보았다.
종교나 탈세적인 형이상의 소재들을 가지고 많은 미사여구로써 그 시의 요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명료하고 화려하게 작품을 구성함으로써, 단어의 특이함이나 단어의 풍부함, 그리고 단어의 아름다움이나 단어의 웅장함 등이 주된 핵심적인 시적 관심사였던 종래의 고전시의 창작 기법으로부터 탈피하여, 때로는 동정을 가지고, 때로는 사랑을 가지고, 때로는 존경을 가지고, 때로는 향수를 가지고 형이하의 인간과 세상을 감동을 받은 자신의 느낌과 인상대로 그 시의 요점에 이르도록 간단·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미얀마 문학계에 새 바람을 불어 넣은 미얀마 근대시의 창작 기법은 '조지'로부터 시작되어 '밍뚜웅'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미얀마 문학을 지극히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바쁜 학문일에 종사하면서도 창작에 대한 열의를 잃지 않고 의욕적인 작품 활동을 병행해 온 '밍뚜웅'은, 동시의 아버지로 불리울 만큼 그의 초창기의 작품 활동은 동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자연을 배경으로 시골 청춘 남녀의 사랑을 묘사한 목가적인 애정시에서 한층 빛을 보게 된 그의 창작력은 미얀마 근대시의 절정을 이루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동시적인 시 세계에서나 목가적인 애정시 세계에서나 본론에서 보듯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점은, 그의 시 세계에는 자연주의와 휴머니즘 색채의 문학의 향기가 흠뻑 발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미얀마 습관과 풍속 등의 미얀마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어 미얀마인의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밍뚜웅' 자신이 어릴 적 직접 경험했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나 행위를 듣거나 목격한 소재들로서, 이러한 소재들이 그의 작품 가운데 투명하고 깨끗하고 순수하게 시상화(詩想化)되어 읽는 이들에게 신선하고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투명함과 깨끗함과 순수함으로 미얀마 근대시의 절정을 이루게 한 '밍뚜웅'이야말로 미얀마 근대시의 완성자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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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life and poems of 'Min Thu Wun' who is the greatest modern poet of myanmar in the colonial period
Choi, Jae-hyun
'Min Thu Wun' who is the greatest modern poet of Myanmar was a fellow member of the Myanmar 'Khitsan' literature which had branched off from the feudalistic court literature with meaning to 'test the age'
The 'Khitsan' literature was an important landmark in the history of Myanmar literature both in the aspect of form, namely, the simplicity and brevity of sentences, the plainness and definiteness of expression and content, namely, humanism and naturalism. The purpose of the literary movement of the 'Khitsan' literature was to retain the best in national legacy and to modernize Myanmar literary expression by making it compatible with the rapidly rising society because of foreign influences.
The representative three writers of the 'Khitsan' literature are 'Min Thu Wun', 'Theippan Maun Wa' and 'Zoji'. The subjects of the work world of these three writers were matters of human nature. Particularly, the work world of 'Min Thu Wun' in children's verses and love verses attains the highest on those matters. In this line of connection, he must be a greatest modern poet of Myanmar.
+ 이 논문은 1998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자유 공모 과제 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미얀마어과 교수
1) 영어로는 Yangoun Division으로 표시함.
2) 여기서 '카야잉'은 현재의 '따잉(Tain : Division)'이나 '삐내(Pyine : State)'에 해당하는 영국 식민지 시대 때의 행정 구역 단위임. 현재 미얀마의 국토는 7개의 '따잉'과 7개의 '삐내'로 구성되어 있음.
3) 일반 학사 과정은 2년이지만, 이 우수 학사 과정은 3년으로서 학교에서 인정받은 주로 소수 교수 요원의 양성 과정임.
4) 본명은 `마웅 쌍 샤(Maun San Sha)'로서, 1876년 `쉐보(Shweibou)' 지역에서 태어남.
5) 인도 신화에 나오는 인면조신(人面鳥身)의 생물로서, 1930년 '따야와디(Thayawadi)' 농민 혁명 때 '사야 쌍'과 그 지배하의 농민들이 호칭으로 사용함.
6) `양고웅'대학 미얀마어과 최초의 교수로서, 후에 학장까지 역임함.
7) 1942년 1월 미얀마에 진격한 일본군은 1942년 3월 수도인 `양고웅'을, 5월에는 미얀마 북부 지방의 요충인 `만달레(Mandalei)'를 점령함으로써, 이때부터 미얀마 전역에 걸쳐서 1945년 6월까지 일본 군정이 실시됨.
8) 일본 오사카 외국어대학 미얀마어과 原田正春 교수와 大野 徹 교수임.
9) `킷쌍' 중 `킷'의 의미는 `시대', `쌍'의 의미는 `살펴보다, 조사하다'임.
10) 이 나무의 잎사귀는 고대 그리스의 올리브처럼 미얀마에서 승리를 상징하고 있음.
11) 미얀마력 4월로서, 태양력으로는 7월에 해당함.
12) 미얀마력 5월로서, 태양력으로는 8월에 해당함.
13) 미얀마력 1월로서, 태양력으로는 4월에 해당함.
14) 미얀마력 2월로서, 태양력으로는 5월에 해당함.
15) 미얀마력 1월(태양력으로는 4월) 새해에 피는 황금색의 향기가 매우 좋은 미얀마의 국화(國花)임.
16) 번역하면 `수도(련)승' 또는 `견습승'이라는 뜻임.
17) 득도식이나 장례식 때에 잘 쓰이는, 줄로 목에 메고 2개의 북채로 두드리는 긴 북의 일종임.
18) 불문에 입문하기 위해 득도식을 치루게 되는 득도 예정자 소년의 부모 이름임.
19) 1연으로 된 '야두'를 '에까바잇 야두(Eikabait Yadu)', 2연으로 된 '야두'를 '아폐강 야두(Ahpyeigan Yadu)', 그리고 3연으로 된 '야두'를 '빠잇쏘웅 야두(Paitsoun Yadu)'라고 부름.
20) 득도식 때 사용하는 빈랑을 넣어 두는 장식함임.
21) 미얀마 민속 악기로서, 앞에 7구멍, 뒤에 7구멍의 대형 피리임.
22) 무럭무럭 김이 나는 갓 지은 밥을 말함.
23) 출가들이 탁발하러 다닐 때 지니는 보시 그릇을 말함.
24) 사원에서 승려를 돕는 속인 남성을 말함.
25) 미얀마의 전통 하의 의상으로서, 통치마 모양으로 되어 있음.
26) 남인도산 면직물 `로웅지' 옷감을 말함.
27) 미얀마력 4월로서, 태양력으로는 7월에 해당함.
28) 미얀마력 5월로서, 태양력으로는 8월에 해당함.
29) 미얀마력 6월로서, 태양력으로는 9월에 해당함.
30) 미얀마력 7월로서, 태양력으로는 10월에 해당함.
31) 우리말로 번역하면 '수도승이 환속한다. '아삐'를 만들라.'라는 뜻으로서, 수도승이 환속하면 맞이할 때 흔히 놀려대며 하는 말임. 이것은 득도식을 마치고 사원에 입문하여 수행 생활을 할 때, '깝삐야'가 수도승들에게 '아삐' 만드는 일을 시키며 괴롭힌 사실에서 유래함. 여기에서 '아삐'라 함은 미얀마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미얀마 전통 기본 요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