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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동양에서는 제사를 생활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다. 제사는 조상과 살아있는 후손들과의 만남이며 조상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덕을 기리는 것으로서 민족성의 원천인 조상숭배사상에서 생겨난 유교적 행동원리이다. 또 시조를 추모하고 조상의 업적을 기리며 조상숭배의 관념을 돈독히 함으로써 일족의 단결을 굳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소위 종(宗)은 조상의 제사를 기초로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종법 또한 그 종을 이어 제사를 계승하는 사람을 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제사제도는 종족제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천자는 돌아가신 임금님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행하는 종묘를 세웠고 개인은 가묘나 사당을 두는데, 이는 선조를 추모하는 조상숭배사상과 은덕에 감사하려는 보본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사당은 조상을 위하는 공경의 공간이고 정성의 마음이 담긴 공간으로서 의례와 행동의 표준이 되는 상징공간인 동시에 불멸의 공간이다.
사당이란 조상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왕실의 사당은 종묘, 개인의 사당은 가묘, 문성왕인 공자를 비롯한 유현을 모신 향교, 성균관의 사당을 문묘 혹은 대성전이라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삼묘(三廟)인 종묘, 문묘, 가묘를 중심으로 의례행위를 하였다.
사당은 엄숙하고 정적인 공간으로 비록 종가에 위치하고는 있으나 그 후손들 개개인의 마음속에 항상 살아있는 듯 받들어졌고, 후손들은 늘 조상의 덕으로 자신이 존재하며 생활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당은 절대적인 공간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사당은 사당 자체에 어떤 성격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사당에 모셔져 있는 조상의 공간으로서 존재하고 동족마을에서는 정신적인 중심처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우리는 흔히 사당과 가묘를 같은 의미로 생각하고 있으나 엄격한 의미에서 사당과 가묘는 구분된다. 사당은 조상이나 옛날 현인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통칭하는 것이고 가묘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가진 곳이다. 또한 엄밀히 말해 사당은 좀더 넓은 의미를 가진 데 비해 가묘는 그 의미가 보다 좁다. 원래 '묘'라는 말은 선조의 신주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을 뜻하였으나 나중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도 묘라 하였다. 여기에 '가(家)'자를 붙였던 것은 다른 제사공간과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조상신을 둘로 나누어 5대조 이상의 선조들에 대한 제사는 사당에서, 고조 이하의 조상들에 대한 제사는 주택 내의 정침에서 지냈다. 그러나 서민의 경우는 그렇게 명확하게 조상을 구분하지 않고 단지 같은 고조의 후손들을 당내라고 인식하여 그들끼리는 모두 8촌간이라고 아는 정도였다. 이는 결국 양반과 서민 간에는 조상에 대한 인식의 범주가 달랐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즉 서민일수록 근친의 조상을 보다 가깝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가묘를 설립한 또 다른 의의는 적장자 중심의 종법질서 확립을 들 수 있다. 족장이란 개별 가문이 지역적인 신분편제에서 벗어나기 전의 지배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지역적인 신분편제에서 벗어난 집의 의미가 생기면서 족장의 의미는 사라지고 적장자의 의미가 중요시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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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당채는 집 뒤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돌아가신 조상을 섬기고자 하는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후손들의 바람을 나타낸 것이다.
종손이 가묘를 세우고 조상의 제사를 주제하는 것은 의무인 동시에 특전이었다. 종손을 제외한 일반 자손들은 제사 때에 종가에 가서 제사에 참여하고 제물을 나누어 만듦으로써 서로 도왔지만 따로 묘를 세워 제사를 행할 수는 없었다. 가령 종손의 관직이 낮고 지손의 관직이 높은 경우라도 가묘는 종손의 집에 세우고 또 그가 제사를 주제하였다. 더구나 4대가 지나도 물리지 않고 사당에서 계속 모실 수 있는 불천위(不遷位)는 그 집안의 영광이고 자랑이기도 하였다.
가례에서는 집을 지을 때 먼저 사당을 짓는데 그 위치는 정침의 동쪽이 되도록 하였다. 좌향은 어디로 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전면을 남, 뒤는 북으로 하며 좌는 동쪽, 우는 서쪽으로 정하였다. 이는 가묘의 좌향이 물리적인 절대향보다는 상대향을 더욱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많은 주택들이 경사지 또는 뒤가 높고 앞이 낮은 대지에 위치함에 따라 집안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인 가묘를 정침보다 높은 위치에 배치하여 승화공간으로서의 가묘의 위계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가묘 전면에 의식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배려로 여겨진다.
이는 결국 유학과 유교의 기본골격인 입지질서를 근본으로 하는 가묘나 사당에 곧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중심성과 시각적 구조와 정신적 의미로서의 입지성, 인간 활동의 범위를 제어하는 영역성이 부여되고 그럼으로써 죽은 사람의 신령이 산 사람의 생활을 규제하는 공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당의 규모는 3칸에 5량집으로 짓는 것이 원칙이지만 형편이 어렵거나 집터가 좁으면 1칸으로 사당을 세우기도 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묘의 규모는 정면 3칸이 대부분이나 1칸짜리 사당도 일부 존재하고 있다. 대개의 사당은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하고 있는데, 이는 건축물로서 최소한의 조건만 갖춘 것이고 검소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여유롭지만 넘쳐나지 않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는 구조라 할 수 있다.
내부는 마루 또는 전돌을 깔고 북쪽으로 4개의 감실을 만든다. 매 감실에는 탁자를 하나씩 놓고 탁자 위에는 신주를 남향으로 하여 북쪽 끝에 놓는데, 신주를 모시는 순서는 서쪽으로부터 고조할아버지 내외, 증조할아버지 내외, 할아버지 내외, 부모이다.
사당의 문 밖에는 두 개의 섬돌을 동쪽과 서쪽에 놓고 사당 주위에 제기를 보관하거나 유물을 보관하는 건물을 두기도 한다. 또한 사당 주위에는 담을 쌓고 앞쪽에 외문을 만드는 것이 예제이나 일부 가묘에서는 담을 두르지 않고 주위를 개방해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당을 지을 형편이 못되는 집에서는 사랑 뒷벽 상부를 터 벽감을 만들어 조상의 위패를 모시거나 방 하나를 사당의 양식에 따라 설치하고 신주를 모시는데 이것을 사당방 또는 감실방이라 한다. 한편 서민가옥에서는 쌀이 담긴 작은 단지를 안방의 시렁 위에 모셔두기도 하였다.
출처_[네이버 지식백과] 『한옥』, 2005.10.17, ㈜살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