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우
하퍼스 바자 대기실보다 촬영 공간에 오래 머무르는 것 같던데요. 스튜디오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서현우 단독 컷 찍은 공간 맞은편을 <삼식이 삼촌> 분위기로 꾸며놓으셨더라고요. 그쪽을 보면서 집중했습니다. 기분이 묘하던데요. 촬영 끝난 지가 좀 돼서 인터뷰 전에 되짚어볼 겸 어제 대본을 10부까지 읽고 왔어요. 그 덕에 정한민의 감각은 꽤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외적으로는 군복을 벗고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묘했던 것 같아요. 환생한 느낌.
하퍼스 바자 <삼식이 삼촌>을 글로 먼저 접했을 땐 어떤 것을 포착했나요?
서현우 처음 대본을 읽으면서 사진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게 기억나요. 인과관계를 토대로 다음 신을 예측하게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신들이 사진처럼 쑥쑥 들어오더라고요. 정한민이 등장하고부터는 조금 걱정도 됐어요. 이 인물은 구체적인 전사가 드러나진 않고 그저 의지와 엄청난 에너지만 존재하거든요.
하퍼스 바자 동료 군인들 앞에서 썩어빠진 군대에 대해 열변을 토해야 직성이 풀리는 불 같은 성격을 지녔죠. 절절한 가족애를 보여준 <로기완>의 은철부터 <헤어질 결심>의 신 스틸러 사철성까지. 에너지의 크기라면 뒤지지 않는 여러 인물을 거쳐왔음에도 유독 정한민이 두려웠던 이유는 뭘까요?
서현우 늘 전 작품과는 조금 다른 질감을 보여주려는 마음으로 맡는 역할에 어떤 겹을 만들려고 해요. 인물이 가진 위트, 고독함, 비겁함 같은 면모를 끄집어내서 다면적으로 풀어보는 거죠. 하지만 이번에는 되려 단순화시켜야 했어요. 정한민은 한 마디로 ‘기세’예요. 이런 사람에게 겹을 만들어버리면 이 인물의 진심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어마어마한 깊이를 가진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을까 걱정한 것 같아요. 나는 진지한 톤의 대사를 뱉어놓고도 농담인 척 풀고 싶은 기질을 가진 사람인데. 감정을 차곡차곡 눌러가며 쌓는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일종의 숙제였어요. 그 숙제를 조금은 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하퍼스 바자 “우리 대위님 영혼에 용광로가 계시네. 그 뜨거운 기운을 누가 불어주나.” 정한민을 처음 만난 삼식이 삼촌이 뱉은 말이에요. 어쩌면 정한민을 설명해주는 가장 명료한 문장일 수도 있겠네요.
서현우 맞아요. 그 한마디에 혹했죠 한민이가. 마치 용한 무당을 만난 것처럼. “요즘 뭐 안 좋은 일 있네, 그지?” 여기에 걸린 거예요. 어떻게 보면 순수하죠. 영리한 편은 아니고요. 열정과 의지를 주체하지 못해 주변의 먹잇감이 되기 쉬우니까. 이건 인물에게 공감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제가 연기를 하기 이전에 꽤나 다혈질이었거든요.
하퍼스 바자 이렇게 차분히 답변을 이어가는 모습만 봤을 땐 전혀 그려지지 않는 기질인데요.
서현우 감정을 잘 컨트롤하게 된 건 연극을 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정한민과 서현우가 다른 점이라면, 저는 유머를 좋아한다는 거.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위트를 넣어야 해요.(웃음)
하퍼스 바자 도전이자 숙제 같았던 정한민으로서의 삶을 무사히 통과해낸 뒤 배우 서현우에겐 무엇이 남아 있던가요?
서현우 참 좋은 배우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배우라는 말에는 인품도 당연히 포함되지만, 실력적으로 뛰어난 고수들을 만난 느낌이었어요. 신연식 감독님도 그러셨어요. 무림의 고수들이 뛰노는 걸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고요.
하퍼스 바자 원 없이 마음껏 뛰놀았던 장면 하나만 꼽아본다면요?
서현우 호텔 로비에서 삼식이 삼촌과 김산, 정한민이 아주 긴박하게 대화를 나누는 신이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될 정도의 육성으로 대사를 쉼 없이 주고받아야 하는데 2시간짜리 연극 한 편 한 것처럼 막 어지럽더라고요. 다음 테이크 들어가기 전에 송강호 선배님부터 요한이 보면 다 저쪽에서 몸 풀고 있어요.(웃음) 촬영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듯 또 순식간에 서로에게 집중해서 대사가 오가고. 이 과정이 ‘너어무’ 재밌는 거죠. 이 엄청난 에너지가 그립기도 해요. 중독된 듯이.
첫댓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