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순이 할머니의 의복생산과 경제활동
똑순이 할머니의 일기를 통해서 의복 생산의 구체적인 과정과 범위를 확인해 보자. 똑순이 할머니의 의복생산과 판매는 소규모이고 간헐적인데 이 일기가 작성된 기간 똑순이 할머니가 수시로 그리고 상당 기간 편찮으셨다는 것과 ‘봉제사 접빈객’의 과중한 업무도 병행해야 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순이 할머니의 의복 생산의 빈도와 내용을 분석해 보면 여러가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똑순이 할머니는 의복 제작을 위해 색실, 바늘, 초록실, 물감 등을 자주 구입하고 있으며, 여성을 주 고객으로 하는 저고리, 치마, 속치마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물론 자가소비와 선물로 송출하기 위해 남성 의복을 제작하는데, 저고리, 누비속곳, 당목 겹바지, 토시, 배자(소매없는 덧저고리), 솜옷, 잔누비 저고리(좁게 누빈 옷), 주 누비저고리(중간 정도로 누빈 옷), 당목 소창 옷, 누비바지, 버선 등이 일기에서 언급되고 있다. 똑순이 할머니가 바느질, 즉 의복 생산에 상당한 전문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똑순이 할머니가 집에서 제작한 의복들은 고객들에게 호평을 받은 듯하며 순조롭게 판매되었다. 할머니의 일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① 슈만의게 십냥 밧은 것 남치마 돈 밧다.(1849. 11. 29)
② 쳔 칠냥 젼 밧은 것 내 반쥬치마(속치마) 돈이라 (1849. 12. 3)
③ 슈만이게 몬져 밧은 것 열냥 강샹득 빗 어더가고 듄집 넉냥 반 내 당묵치마 차 돈이라. (1849. 12. 5)
④ 오 아 광졈 뉵냥 빗준 거 내 즈쥬 져구리 돈이오.(1850. 4. 29)
똑순이 할머니의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의류 판매 기사 중 몇 가지만 예시한 것이다.
①은 남치마 판돈 14냥을 수만에게서 받았다는 것.
②는 자신의 반주치마 팔아 기천에게서 7냥을 받았다는 것.
③은 중국산 당목치마를 팔았다는 것.
④는 자주저고리 판 돈 중 6냥을 광점에게 빚을 주었다는 것.
똑순이 할머니의 일기를 보면 총 14회의 여성용 저고리와 치마를 판매하고 있으며, 판매 시기는 한 해 농사가 끝난 늦가을과 겨울철로 상대적으로 농가에 현금이 회전되고 있을 때이다.
저고리와 치마를 판매한 수익률은 어느 정도였을까?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는 면포 1필로 한복 1벌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에 1필로 치마(26척)와 저고리(9척)을 제작하는 것으로 계산해보자. 똑순이 할머니가 판매한 의복 중 가격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만 뽑아 제시한 것으로 당시의 의복 가격을 가늠할 수 있다. 일단 옷감이 많이 사용되는 치마는 13~14냥 정도로 판매되었으며, 반주치마는 속치마로 그것의 절반 가격인 7냥 5전 정도에 판매되었다. 남색 치마의 원가를 계산할 때는 옷감과 염료를 계산해야 하지만, 염료 값을 알 수 없으므로 치마 값 14냥에 26척의 옷감이 들어가는 것으로 계산하면, 1척 당 5전4분이라는 판매 단가가 나온다. 반면 저고리를 만들어 판매할 때는 약 7냥 정도(일기에 적시된 저고리 판매 대금은 6~10냥 사이)를 받는다고 할 때, 1척 당 7전8분의 판매 단가가 나온다. 12승 면포 단가가 1척당 4전 정도이므로 치마로 만들어 팔 경우 1척당 1전4분, 저고리는 3전8분의 수익이 나온다. 이같이 저고리의 판매수익이 높은 것은 수공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며, 이에 부인은 치마보다는 마진이 높은 저고리를 더 많이 제작하고 있었다.
부가가치의 창출
방직 수공업자가 총 1냥 2돈을 받고 제작한 12승짜리 50척 면포의 최종 수익률을 확인해보면, 똑순이 할머니가 면포만 제작했을 경우에는 판매 대금으로 20냥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생산에서 방적과정까지의 제작비용이 포함된 금액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의복으로 제작할 경우, 수익률은 급증한다. 12승 면포 50척으로 치마 2개를 만들 경우 예상되는 판매 총액은 28냥이고, 치마1개와 저고리 2개를 제작하면 총 28냥(치마 14냥, 저고리 7냥으로 계산) 정도이다. 즉, 방직 수공업자가 받는 총 1냥 2돈(1일 7.3푼)인 임금 수익 금액과는 비교도 안되는 7냥 정도를 추가로 확보 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에 바느질 솜씨 좋은 많은 여성들이 의복제작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전업인가 부업인가?
그런데 의복의 제작은 누가 담당했을까? 의복생산을 주변 노동력을 동원하여 전업화하였는지 혹은 부업 차원에서 하신 것인지 알아보자. 똑순이 할머니는 장기간의 병환에서 일어나 당목 천을 만지면서, 이제는 다시 못 맡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추정해 보면 똑순이 할머니도 직접 의복의 제작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집에서 생산되는 의복을 오로지 똑순이 할머니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변에서 일손을 동원하는데, 짧게는 4~5일, 길게는 2~3주 유숙하는 정주댁, 물화 모, 경화 등이 의복 생산에 투입되지 않았는가 추정된다. 일기에 의하면 의복의 판매는 총 14회, 즉 1달에 1회 꼴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가족을 위한 의복도 생산하고 ‘봉제사접빈객’에 분주했으므로, 판매를 위한 생산에 매달릴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결국 똑순이 할머니의 경우 의복생산은 전업 생산이 아니라 남는 시간과 노동력을 활용한 부업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똑순이 할머니의 일기를 통해서 매우 흥미로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 다음 편에서 계속 –
첫댓글 똑순이 할머니가 편찮으셨군요.
그럼에도 부업을 열심히 하셨네요.
대단하시네요.
남치마를 팔아서 돈을 준 수만,
저고리 중개 판매하는 춘옥,
반주치마 판돈을 준 개천 등은 모두
이댁 하인 들이군요
빚을 내준 춘옥, 탱운, 광점 등도
모두 이댁 하인들인데
이들에게 고리대금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알수 있는 사실은,
앞선 자료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솜씨있는 하인들에게 임가공형태 생산품을
(생산행위에는 유씨부인도 직접 참여하고 있음)
다시 재리에 밝고 수완 있는
하인을 시켜서 장사를 대행케 하였고
직접 흥정하는 유통행위를 한 것 같지는 않군요
하인들을 상대로 대부를 해준것을 보면
일종의 금융행위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가내수공업(임가공 포함)으로 상품의 생산하여
이를 시장에 내다파는 상품의 판매
생산자에게 자금을 빌려주는 대출까지 이루어진 셈이군요
상전-노비 관계가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노동의 댓가 지불이 제대로 보장되는
초기형태의 노동자-사용자간 긴밀한 경제 공통체를 이루어서
한묶음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임을 엿볼수 있을 듯합니다
이러한 경제행위로 인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을 것으로 보이며
부가가치를 통한 자금축적으로 생산에 재투자하거나
사대부가에서 중시하는 봉제사접빈객에 연계된
'선물경제'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사업수완과 기술이 좋은 디자이너 기계부인이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