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태평양 저 너머
"채옥아 너 고집 좀부리지 마라. 무슨 기집애가 엄마 말을 그리도 안 듣니 그래. 다 절 잘
살리려고 그러는 건데. 미국에 가서 멋들어지게 폼잡고 살면 좀 좋으니."
임채옥의 어머니 황 집사는 한편으로 꾸짖는 척, 다른 한편으론 군침을 돌게 하며 딸을 살
살 꼬드기고 있었다.
"엄마, 제발 그 말 좀 그만해요. 난 미국이 싫다구요. 그리고 난 시집간 출가외인이에요.
그러니까 날 데려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임채옥은 말만큼 싸늘한 기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미국이 왜 싫어, 요런 맹추야. 미국이 사람 사는 천국이라는 거야 세 살 먹은 어린
애들도 다 아는 일이잖아. 너, 이민 가고 싶어 환장을 하면서도 못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
은지 몰라서 그래!"
황 집사는 소리를 빽 질렀다. 위아래턱이 이중으로 겹치도록 피둥피둥 살찐 얼굴에 노기
가 드러나 있었다.
"엄마, 우리나라가 뭐가 모자라고 딸리는 게 있다고 이민을 가겠다고 그 야단이세요, 그
래. 난 도대체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너 정말 바보 멍청이니? 모자라고 딸리는 게 없다니, 아니 세탁기가 있니, 청소기가 있
니, 설거지 기계가 있니, 부라자, 스타킹을 어디 하나 제대로 만드니? 이런 걸 일일이 다 말
을 해야 알겠니? 물자 풍부하고 사람 살기 좋기로야 미국이 천당이고 우리나라는 지옥인 거
야 두말할 것 없잖니?"
"어머, 엄마 참 이상하네요. 그런 물건들이야 돈만 있으면 도깨비시장에서 얼마든지 구해
다 쓸 수 있는 거야 엄마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돈 많은 엄마가 척척 구해다 쓰면 될 걸
가지고 왜 딴 나라로 이민까지 가고 그러느냐구요. 미국에 가면 말이 통하기를 해요, 아는
사람이 있기를 해요. 무슨 재미로 살려고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구요."
임채옥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이것아, 깊은 속 모르면 잔소리나 하지 말어. 이리 말이 나왔으니까 속말을 털어놓겠는
데 이민을 가려는 진짜 이유는 전쟁 때문이야. 여러 말할 것 없이 이놈에 나라는 언제 또 전
쟁이 터질지 모른다 그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황 집사는 '이제 꼼짝을 못하겠지' 하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딸을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 갑자기 또 그건 무슨 소리에요? 지금 평화통일을 내세우며 남북적십자회담이 평
양, 서울을 오가면서 열리고 있는 세상인데. 남들이 들으면 엄마 정신이 좀 이상하다고 하
게 생겼어요."
임채옥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외틀었다.
"하이구, 대학 나온 유식으로 잘도 아는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요런 헛똑똑이야,
알려면 똑똑히 알아. 뭐 남북적십자회담? 그걸 어떻게 믿니? 김일성이하고 하는 일을 어떻
게 믿어? 앞으로는 회담하는 척하면서 이쪽을 안심시켜 놓고 뒤로는 치고 내려오는 게 김일
성이가 하는 수작이라구. 김일성을 믿느니 미친개를 믿어라."
"엄마 그렇게 감정적으로 말하면 안 되잖아요. 그 사람도 한 나라의 대표자로서 위신과 체
면이 있는데 그런 짓을 어떻게 함부로 하겠어요.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막강한 군대가 있는
걸 아는데 멋대로 전쟁을 못 일으킨다구요."
"시끄럿! 김일성이는 나하고 아빠하고 직접 당해봐서 제일 잘 알아.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잔소리야 잔소리가. 6.25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설마설마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
어. 근데 엄마 아빤 미리 피한 덕에 너희들 하나도 다치지도 잃지도 않고 잘 키워낸 거야.
그때 경험 살려 미국으로 가자는 거다. 전쟁 일어날 염려 없는 미국땅에서 물자 풍족하게 쓰
고 편히 살면서 자식들 잘 기르고 잘 가르치면 얼마나 행복하겠니. 가자, 에미 말 들어라."
"네, 그런 엄마 마음 알 것도 같아요. 근데 타국땅에 가서 외롭고 적막하고 답답해서 어떻
게 살려고 그러세요. 난 그 생각만 하면 무서워 죽겠어요."
"아니, 그 무슨 물러터진 소리냐? 고향 등지고 맨주먹으로 38선 넘어와서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서울은 뭐 별수 있었는 줄 아니? 피난 때 내려간 부산까지 남쪽땅 어디든 몰인정
하고 살벌하기가 타향 아닌 데가 없었다. 그래도 이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 오늘처럼 되었
어. 타향에 사나 타국에 사나 다를 게 뭐가 있니? 아니지, 이젠 든든하게 돈이 있으니까 타
국생활이 훨씬 더 낫지. 전쟁 걱정 없는 나라에서 마음 푹 놓고 돈 써가며 살면 그보다 더
좋은 천국이 어디 있겠니? 엄마 아빤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
한 땅에다 너만 떼어놓고 갈 수가 없어서 애가 타는데 넌 그런 부모 속도 모르고 어찌 그리
멍청한 소리만 하고 앉았니, 그래. 여러 소리 말고 딱 작정해라."
황 집사는 힘찬 어조에 맞추어 손바닥을 맞때렸다.
"엄마,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데 전에는 그럼 어떻게 살았어요. 다 늙어가지고
괜히 이민바람 타고 그러지 마세요. 추해 보여요."
"뭐라구? 다 늙어? 아직도 30년은 짱짱하게 살 테니까 방정맞은 주둥이 놀리지 말어!" 황
집사는 불쑥 화를 내며 노기 품은 목소리로 내쏘고는, "네가 자꾸 잔소리를 해서 하는 말인
데, 5년 전이고 10년 전이고 진작에 뜨고 싶었어도 미국이 어디 이민을 받아줬니? 그러고 하
나도 외롭거나 답답할 게 없는 게 벌써 우리 고향사람들이 꽤 가서 자리잡고 빨리 들어오라
고 성화야. 돈만 있으면 그보다 더 살기 편코 좋은 데는 없다고 말야. 그러니 너 혼자 철딱
서니 없는 소리 해대지 말고 어서 결심해" 하며 그녀는 오징어 다리를 찢어 입에 넣었다.
"아니, 호태는 아들이니까 별수없이 엄마 아빠 따라갈 거고, 수옥이도 간다는 거예요?"
임채옥은 동생 수옥이가 어쩌기로 했는지 불안을 느꼈다.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내가 말도 꺼내기 전에 눈치를 채고 김 서방하고 함께 찾아와
저희들도 데려가 달라고 통사정이더라. 자식이 그런 맛이 있어야지 넌 왜 그 모양이냐? 너
혹시 정 서방이 싫어할까봐 그러는 거 아니냐? 혹시 네가 말 꺼내기 거북하면 내가 정 서방
불러서 말해 주랴?"
"아니 뭐, 그러실 것 없어요. 내가 며칠 생각해 볼게요."
임채옥은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몸을 사렸다. 동생 수옥의 남편이 그랬듯 자신의 남편
도 이민에 들뜨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미제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듯 미
국에 대한 선망을 갖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만약 남편이 마음을 정해버리면
그것처럼 낭패가 없는 일이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며칠씩이나 생각하긴 뭘 생각해. 지금 서류 하기에 바빠 죽겠는데. 내
일 당장 데려와."
"엄마, 나 시집에 미움 사게 하려고 작정했어요? 만약 정 서방이 간다고 해도 시부모가 완
강하게 반대하고 나서면 일이 안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 되면 일만 버그러지고 내 입장
은 뭐가 되겠어요. 평생 미운털 박혀 시집살이 고약해지는 거지요."
임채옥은 머리를 빨리 돌려 어머니가 제일 두려워할 급소에다 침을 꽂았다.
"체, 그 잘난 시집. 좌우간 질질 끌 시간 없으니깐 빨랑빨랑 해."
황 집사는 그만 한풀 꺾였다.
"차암, 아빠도 이해할 수가 없네. 잘되는 사업 어떡하고 이민을 가시려고 그러는
지......."
임채옥은 시름겨운 듯 혼자말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구, 저렇게두 철이 없구 쑥맥일까. 월남 경기 죽은 지가 언젠데 사업 잘된다는 타령
이냐. 군인들이 철수하고 있는 판인데 군납사업 한물간 거야 오래되었어, 이것아."
임채옥은 문득 '그런가!' 싶었다.
"그 공장들은 다 어쩔 거예요?"
"지금 아빠가 비밀리에 처분하고 있다. 이민 간다고 소문나면 똥값이 되고, 누구나 공짜
로 먹으려고 덤빌 테니까."
말 내용에 따라 황 집사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엄마 아빤 참 기운도 좋으셔. 그 나이에 무서운 것 아무것도 없이 태평양을 건너갈 작정
을 하다니."
임채옥은 손가방을 끌어당기며 주섬주섬 일어설 채비를 했다.
"그게 뭐 엄마 아빠 영화 보자는 게냐? 다 앞길 9만 리 같이 남은 자식들을 위해서지.
얘, 급한 것 잊지 마라."
황 집사는 일어서는 딸에게 다짐하며 바삐 전화기를 들었다.
정말 또 전쟁이 일어날까......?
임채옥은 골목을 걸어나오며 마음 한구석을 불안하게 채우고 있는 그 생각을 되짚었다. 세
상 돌아가는 걸 보면 괜한 걱정 같기도 했고, 매사에 빈틈없고 실수 없는 아버지가 떠나기
로 한 것을 보면 위험한 것 같기도 했다. 더구나 아버지 어머니한테서 줄기차게 들었고, 학
교에서도 귀가 닳도록 배운 나쁜 인간 김일성을 생각하면 전쟁은 언제든지 또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 수만 명이 버티고 있고, 우리나라 군인들도 수십만 명이 있는 걸 생각하면 아
무리 전쟁 좋아하는 김일성인들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
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도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전쟁이 안 일어날 것도 같고, 도무지 종잡
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친정 식구들이 다 떠나버리면 어쩌나......?
임채옥은 잠시 망연해졌다. 자신은 혼자 이민을 안 가겠다고 한 것만이 아니었다. 어머니
도 못 가게 막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건 이미 틀린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민을 따라나서
고 싶은 생각은 거의 없었다. 찾아갈 친정이 없어진 것을 생각하면 허망하고 막막했지만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질긴 그 무엇이 몸을 감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민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자신의 의식 저편에서 어른거린 모습. 늘 서러움으
로 가슴에 안개 끼게 하고 그리움으로 마음에 비 내리게 하는 그 사람은 유일민이었다.
그가 없는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잃지 않고 친정도
잃지 않는 것은 이민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벌써 남모르게 공장들을 처분하는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임채옥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버스를 탔다. 그러나 마음속의 저울이 어딘가 한쪽
으로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시집가기 전에 가졌던 가장 큰
걱정이 집이 그리워 어찌 사나 하는 거였다. 그리고 시집가면 그가 차츰 잊혀지리라 생각했
었다. 그러나 정작 시집을 가고 보니 날이 가면서 친정은 마음에서 멀어져가면서 발길도 드
문드문해졌다. 그런데 그는 날들이 쌓여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속 깊이 도사리고 앉
아 그리움의 샘만 자꾸 깊이 파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더디 가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1년에 한 번 만날 때면 그 사람 유일민이 신음처럼 꼭 하
는 말이었다.
"왜 결혼 안 하세요."
자신은 그의 말에 대꾸인 것처럼 이 말을 거르지 않았다. 당신이 결혼을 안 하니까 마음
을 정리할 수 없다는 뜻인지, 당신이 결혼을 하지 않고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뜻인지, 자
신도 스스로의 말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 물음에 어떤 대답도 한 일이 없었
다. 흐린 안개 같은 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그 슬프디 슬프고 외롭기 그지 없
는 얼굴은 자신의 가슴에 소용돌이를 일으키고는 했다. 그 소용돌이는 그를 잡아가는 형사
들 앞을 가로막았던 그때의 감정이었다. 그를 지켜야 한다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가슴 뜨겁
게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부가 되었었다.
그가 그렇게 외롭게 슬프게 서 있는데....... 그래, 재산 다 처분하면 큰돈이 많이 생기겠
지. 그거나 한몫 크게 뜯어내야지.
임채옥은 그 기발한 생각에 소리치고 싶도록 기쁨을 느끼며 버스에서 내렸다.
멋을 부릴 대로 부린 황 집사는 다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짙은 화장에 옷만 잘 차려입
은 것이 아니었다. 값비싼 보석반지를 세 개씩 낀데다가 귀고리와 목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온몸에다 돈을 맥질하고 다닌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아니 황 집사, 이 가을바람 타고 무슨 좋은 일 생긴 것 아냐? 요새 웬 멋을 그리 내? 늦
바람 사람 잡는다는데."
한 여자가 수다스럽게 황 집사를 맞이했다.
"아유, 말 말어, 강 여사.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 더 늙기 전에 멋도 좀 부리고 그래
야지, 요런 것 장만해서 쌓아두기만 하면 뭘 해. 더 늙어버리면 끼고 달고 해봤자 폼도 안
난다니까. 나 이젠 궁상 그만 떨고 인생을 엔조이하면서 살기로 했어."
황 집사는 더욱 입심 좋게 받아넘겼다.
"누가 아니래. 우리네 인생이 천 년 만 년 사는 것도 아니고, 이적지 돈 모으느라고 멋도
호강도 모르고 살았으니 이제 좀 폼잡아 가며 살 때도 되었지. 암, 우리야 그럴 자격이 있다
마다. 좌우간 황 집사는 그리 차악 꾸미니까 10년은 더 젊어 보이네. 그 옆에다 젊은 놈씨
하나만 끼면 왔따겠어, 왔따."
강 여사라는 여자는 자기 말에 흥이 돋아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글쎄, 욕먹을까 봐 내놓고 말을 못해서 그렇지 우리 맘이야 어디 늙었나. 지금도 맘으로
야 서른 살 노총각하고 한바탕 뜨겁게 연애를 할 수 있는데 말야. 참, 나이 먹고 세월 흘러
가는 것 생각하면 인생 허망해."
"아휴, 황 집사 말하는 것 좀 봐. 하긴 이 나이 되고 보니까 연하의 남자하고 연애하는 얘
기가 영화에 나오는 얘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히히. 아이구, 우리 주책인 거
봐. 남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하겠네."
강 여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몸가짐을 고쳐잡았다.
"말로라도 이런 소리 못하면 무슨 재미야. 세금 무는 것도 아닌데."
황 집사도 옆자리에 놓았던 큼직한 손가방을 무릎 위로 옮겼다.
"와리깡(사채업자가 하는 어음할인)할 게 몇 개월짜리야?"
강 여사가 황 집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말투만 다부지게 변한 게 아니었다.
얼굴도 농담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딴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응, 넉 달짜리."
황 집사도 웃음기 싹 가신 얼굴로 손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래, 넉 달짜리면 딱 좋고, 액수는?"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황 집사는 손가방에서 어음을 꺼내 강 여사 앞으로 착 디밀
었다.
"......아니, 이게 얼마야?"
"얼마긴, 700이지."
"그래 글쎄, 700씩이나 깡을 해?"
"아니, 700 가지고 뭘 그래? 2천, 3천도 척척 하면서."
"그야 물주가 범털일 때 말이지. 이건 믿을 만해?"
"그 무슨 섭한 소리야? 하루이틀 터 다진 사이도 아니면서. 뒤에 우리 임 사장이 이서한
거라구."
황 집사는 어음을 재빠른 솜씨로 뒤집었다.
"응, 그럼 진작 그리 말할 것이지. 요새 은행에서 발행하는 어음도 빵꾸가 자주 나니까 말
야."
강 여사가 비로소 얼굴을 풀며 웃음기를 보였다.
"하긴 그래. 지난번에 사채시장 피 보고 나서 돈은 돈대로 딸리고 깡 이자는 올라가고, 사
업하는 사람들 죽을 맛이지 뭐야. 그나마 우리는 믿는 데가 있으니까 폼은 안 구기는 거지
만."
황 집사는 어음을 다시 손가방에 넣으며 거만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렇잖구. 황 집사같이 든든하고 신용 좋은 사람들만 있으면 우리도 속썩일 것 없이 안심
하지. 상부상조가 뭐 별건가. 서로 믿고 돈거래하는 사이 그거지. 가자구, 저 금성여관으
루."
강 여사가 큰 손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황 집사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여관방의 문을 걸어잠그고 앉자마자 두 여자는 큼직한 손가방에서 서로 돈다발과 어음을
꺼냈다. 강 여사는 대여섯 개의 돈다발을 책상다리를 한 한쪽 무릎 아래로 몰아넣고는 하나
만을 들어 종이끈을 익숙한 솜씨로 밀어내렸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에 튀튀 침을 튀기더니
돈을 세기 시작했다. 돈은 그 특유의 소리를 내며 착착 잘도 넘어갔고, 두 개의 손가락은 마
치 회전 빠른 기계처럼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자아, 600에 넉 달 이자 제한 남치기. 맞나 세봐."
강 여사는 무릎으로 덮고 있던 돈다발들을 황 집사 앞으로 밀었다.
"우리끼리 이걸 뭘 다 세고 말고 해. 자투리는 아까 강 여사가 셀 때 따라서 셌고."
황 집사는 어음을 건네며 말했다.
"아유, 귀신! 황 집사는 머리가 그렇게 시원하게 잘 돌아서 좋다니까."
강 여사는 어음을 손가방에 넣으며 벌써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 집사는 택시를 잡아타고 남대문시장 뒷골목으로 갔다.
"아유 황 집사, 어서 오슈. 그러잖아두 기다려지던 참이었수.
가게와 가게 사이에 나앉아 있던 여자가 반색을 했다.
"예, 잘 있었수? 좀 올라갑시다."
황 집사가 눈을 위로 뜨는 눈짓을 했다.
"알았수. 오늘은 뭐유? 살 거, 팔 거?"
여자가 낮게 속삭였다.
"요새 무역회사들이 뻔질나게 생겨나서 그러는지 어쩌는지 살 게 그리 많아지잖수. 다리품
도 시원찮은데."
좁고 낡은 나무계단을 오르며 황 집사는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우리끼리 말이지만 그래두 돈장사만큼 실한 게 뭐 있수? 외상이 있나 속기를 하나. 안 그
래요?"
"그리 보면 그렇기두 허우. 술장사 외상으로 망하구 빚놀이 속아서 망하는 법이니까."
"오늘은 얼마나 쓰시려고?"
여자는 2층의 조그만 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물었다.
"별로 많진 않수. 500에 맞춰주셔."
황집사는 마음에 있는 것보다 액수를 절반으로 줄였다. 액수가 너무 커서는 눈총받을 데
가 한두 곳이 아닌 탓이었다.
"500이라 가설랑은에......."
여자는 장사꾼들이 수를 헤아릴 때 흔히 읊조리는 타령조를 내며 손바닥만한 작은 주판을
꺼냈다.
"내 발품값 잘 쳐주셔야 허우. 쓰리꾼들 겁나 택시 타고 왔다갔다 하는 거니까."
황 집사는 굳이 이 말을 걸쳤다. 1달러당 단돈 10원이라도 싸게 바꿔 생기는 이익 때문만
이 아니었다. 자신이 달러를 바꾸는 것이 돈장사에 모자라는 액수를 보충하는 것인양 다른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황 집사두, 그걸 꼭 말을 해야만 맛이유. 그야 서로 다 좋자고 하는 거랜데. 찰떡은 굴려
야 고물이 묻고 돈은 돌려야 이문이 붙는 것 아니유."
여자는 작고 흰 주판알을 능숙하게 튕기며 대꾸했다.
황 집사는 여자한테 돈다발 다섯 개를 건네주고 받은 달러를 꼼꼼하게 세어 챙겨넣고 밖으
로 나왔다. 그녀는 두 군데쯤 더 들러 달러를 바꿀 생각을 하며 택시에 몸을 실었다.
"오늘도 그 일 좀 했어?"
밤 느지거니 돌아온 임상천 사장은 옷을 받아 거는 아내에게 물었다.
"그러믄요. 그 일보다 중한 게 우리한테 뭐가 있나요. 시일도 얼마 안 남았는데 더 부지런
히 해야지요. 당신은 내가 맡은 일 걱정일랑 말고 어음이나 빨랑빨랑 끊어가지고 오세요."
"응, 난 계획대로 다 하고 있어. 헌데, 당신 너무 방심하면서 그 일을 해선 안 돼. 좀 힘
이 들더라도 사람을 자꾸 바꿔야 해. 손쉽고 편하게 하느라고 몇 사람만 상대했다간......."
"아이구, 알았어요. 내가 어린앤가요 뭐. 그나저나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생겼어요."
"뭔데?"
임 사장의 좁장한 얼굴이 놀라움으로 딱 굳어졌다.
"아니 뭐, 그리 놀랄 일은 아니구요. 글쎄 채옥이가 안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요."
남편을 너무 심하게 놀라게 한 것이 미안하고 민망해 황 집사는 말을 한달음에 해치웠다.
"이러언......, 난 또 무슨 소리라고."임 사장은 마땅찮은 기색으로 아내에게 눈을 흘기고
는, "걔네들이 따라나서면 몰라도 안 가겠다는 걸 괜히 데려가려고 안달하지 말어. 데려가기
도 잔뜩 힘드는 판에 억지로 데려갔다가 원망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잖아." 그는 날카로운
성깔을 드러냈다.
"그래도 혼자 떼놓고 가기가 마음 아파서......."
"어허, 당신은 그게 탈이야. 일단 시집 보냈으면 다 잊어버려. 출가외인인데 언제까지 끼
고 살려고 그래."
임 사장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알았어요. 평양 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니까요." 황 집사는 한숨 같지 않은 한숨
을 내쉬고는, "여보, 근데 말예요, 채옥이가 끝내 안 따라나서면 그 대신 돈을 좀 주는 게
어떻겠어요. 저 혼자 떨어져 살면서 돈이라도 좀 지니고 있어야 힘이 되고 덜 외롭지 않겠어
요?" 남편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응, 그야 나쁠 것 없구먼. 기왕 주는 거니까 좀 넉넉하게 떼 줘. 언제 우리가 또 목돈
줄 수 있겠어."
임 사장은 아주 선선하게 대꾸했다.
"어머, 고마워요. 여보, 고마워요."
황 집사는 금방 목이 메며 눈물 찍어내는 손짓까지 했다.
"고맙긴 이 사람아. 내가 어디 채옥이 의붓애빈가. 그게 첫 번째로 태어나는 바람에 자식
들 중에 제일 배곯고 헐벗은 고생을 많이 했지. 그저 애 낳고 저만큼 살아가는 게 고마워."
"어머머 놀래라. 당신 속에두 그런 알뜰살뜰한 맘이 다 있수? 세상에나, 당최 믿을 수 없
는 일이네."
"괜히 수다 떨지 말어. 표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남자는 뭐 사람이 아닌가? 그때 그 지경
이 되도록 두들겨팼던 게 지금까지도 쓰리고 아프게 그대로 남아 있는데. 미안하기도 하
고......, 괴롭기도 하고......, 자식이라는 게 뭔지......."
임 사장의 목소리가 젖어들고 있었다.
"됐어요, 됐어요. 그때 얘긴 비치지도 말아요. 괜히 더럼 타고 우환 불러들여요."
황 집사는, 불길처럼 화가 난 남편에게 두들겨맞고 댓돌 아래로 굴러 떨어지던 딸의 모습
이며, 하혈하는 딸을 새벽녘에 숨 넘어가게 옮겼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라 몸서리쳤다.
"그래, 궂은일은 다 잊어버려야지. 그런 험한 꼴 당하고도 끄떡없이 가정 잘 이루고 사는
채옥이가 기특하고도 고마워. 당신이 잘 생각했어. 돈 좀 두둑하게 챙겨주라구."
"예. 근데 수속은 잘되겠어요? 이것저것 따지고 시비 붙고 하는 게 보통 까다롭지 않다고
하던데."
"제까짓 게 까다로워 봤자지. 돈 놓고 돈 먹기라고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미국사람들한테는 사바사바가 잘 안 통한다면서요. 돈 쓰고도 안 돼서 돈만 날린 사람들
도 있는 모양이던데요."
"그거 다 웃기는 소리야. 세계에서 돈 힘이 젤 센 게 바로 미국이야. 돈을 써도 어설프게
쓰니까 안 되는 거지 왕창 써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민도 돈 있는 사람들만 골라서 받
아들이는 게 미국이라구. 그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다른 일이나 잘해, 집 계약
은 어떻게 됐어?"
"예, 2~3일 있으면 계약될 거예요. 두 사람이 맞붙어 있으니까. 값이 좀 싼 걸 용케 안다
니까요."
"값이 싸서 누가 혹시 눈치채게 되면 안 되는데."
"그거야 걱정 말아요. 한강맨션아파트로 이사하는 거라고 아주 그럴듯하게 안개 피워왔어
요."
"하여튼 매사를 잘하라구."
"그나저나 저쪽으로 다 가져가지 못하는 건 어쩌죠? 적은 액수가 아닐 텐데."
"별걱정 다 하는군. 가지고 가지 못하는 건 얼마든지 땅에다 묻어두면 돼. 땅은 썩지도 않
고 닳아지지도 않거든. 그리고 부동산 전망은 계속 좋으면 좋았지 나빠질 리가 없어. 사람
은 자꾸만 불어나는데 땅덩어리는 언제나 그대로니까. 그렇게 재산을 불리다가 적당한 기회
를 봐가면서 슬슬 처분해 가져가는 거야."
"어머, 맞아요. 그런 수가 있었네요. 당신은 역시 머리 기막힌 일등 사업가라니까요. 피곤
하지요. 어서 욜로 누워요. 시원하게 주물러드릴게."
황 집사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 넘치게 눈웃음을 치며 요를 깔았다. 임 사장은 허
엄, 허엄 거만스레 헛기침을 하며 요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임상천 사장은 회사에 나가 결재서류들을 살핀 다음 약속장소로 나갔다.
정동진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 양복에 검은빛 감도는 자주색 넥타이를 맨 그
의 모습은 무척 세련되어 보이면서도 부티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찌 됐습니까?"
임 사장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정동진과 악수를 하며 용건을 물었다.
"예, 별 문제 없습니다. 바로 출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정동진도 상대방의 성미에 맞도록 결과부터 밝혔다.
"역시 정 사장님 빽이 튼튼하고 효과만점이군요. 그럼 빨리 수속해야지요."
임 사장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담배를 권했다. 그런데 그가 내민 것은 가죽 담뱃갑이었다.
그건 속에 든 양담배의 위장용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양담배 단속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동진은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 목재사업 말
고 건설업 쪽이 어떨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임 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
레 말을 꺼냈다.
"건설업이라니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지요?"
그 순간 임 사장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감추려고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
다.
"아 예,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에서 짜고 있는 계획
을 입수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잠실 저쪽에서부터 여의도를 지나 김포까지 한강 양쪽을
따라 쭈욱 아파트를 지어나간다는 계획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서울의 극심한 주택난을 해결
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뭔고 하니, 북쪽에서 김일성 괴뢰도
당이 다시 쳐내려 오는 유사시에 시가전 진지 겸 도강 장애물로 활용한다는 겁니다. 한강 북
쪽의 아파트들은 1차로 시가전 진지로 사용하고, 상황이 여의치 못하여 후퇴를 할 시는 모
두 폭파해 버리면 고층 아파트들은 그대로 무너져내려 적의 탱크들이나 모든 차량들을 꼼짝
달싹 못하게 하는 훌륭한 콘크리트 장애물이 되는 거지요. 그리고 아군은 한강 남쪽의 아파
트들을 진지삼아 적의 도강을 철저하게 봉쇄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정동진은 자기 이야기에 취해 자기가 해야 할 말의 맥을 놓치고 '어떻습니까?' 하고 있었
다. 그는 과거의 군대 시절이 되살아나 그 작전계획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잠실 저쪽에서부터 김포까지 줄줄이 아파트를 지어대다니. 그것
도 한쪽도 아니고 양쪽으로 그게 어느 세월에 그리 된단 말이오. 서울로 대한민국 인구가
다 몰려드는 것도 아닐 거고. 남 국장이 그런 소리 하던가요?"
말같잖은 소리에 비위가 상해버린 임 사장은 칼칼하고 입바른 본디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
고 있었다.
"아니 딴 데서......."
"그래서 정 사장님은 그런 헛소리 듣고 아파트 짓는 건축업을 해보자 그런 얘깁니까?"
임 사장의 기세에 밀려 정동진은 '믿을 만한 사람이 준 정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뭐 꼭 그러자는 게 아니라......."
그런 공박을 듣고 보니 막상 자신이 없어져 정동진은 어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 사장님, 누구한테 들은 말인지는 모르나 사업가는 남보다 눈치가 빨라야 하기도 하지
만, 돌다리도 두들겨가며 건너는 것을 잊지 말아야해요. 우리가 동업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손해 없이 재미를 본 건 바로 그 점을 중시했기 때문이잖아요. 물론 아파트 사업도 앞으로
전망이 괜찮아요. 허나 바로 그 사업에 손대기에는 우리 자본이 너무 짧고, 회사 규모가 갑
자기 커지기 때문에 실패의 위험이 너무 커요. 그것에 비하면 목재사업은 돌다리지요. 현지
에서 직접 벌채하니까 이익이 커지고 국내에서 건축붐이 계속되니까 얼마든지 팔아먹을 수
있고, 안전한 돈벌이로 이만한 게 없어요, 안 그런가요?"
정동진의 엉뚱한 생각을 꺾어버린 임 사장은 느긋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의도대로
몰아가고 있었다.
"예, 그렇고말구요. 사업이란 실패 없이 안전하게 해나가는 것이 최고지요. 임 사장님 말
이 명언입니다. 근데, 남 국장이 손을 써주면 열흘 이내로 출국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동안
에 다른 준비들이 다 될까요?"
정동진은 괜한 소리를 해서 실없이 보였을지 모를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서도 말머리
를 돌려 새 사업에 적극성을 드러냈다.
"뭐 어려운 준비랄 건 없지요. ㄷ목재의 그 사람을 빼오는 게 제일 중요한 문젠데, 그건
내가 2~3일 안으로 끝낼 테니까 정 사징님은 서류수속이나 차질 없도록 하시고, 슬슬 여행
준비나 하세요."
"그게 2~3일 안에 될까요?"
"그야 돈과 직위를 보장하는데 안 될 리 있습니까? 특별 공로금으로 집 한 채 값을 주고,
상무로 임명하겠다는 데야 누가 응하지 않겠어요. 근데 한 가지 문제는 정 사장님 때문
에......."
"나요? 무슨 말인지......."
정동진은 긴장하며 넥타이를 매만졌다.
"아, 다름이 아니라 더운 인도네시아에서 하루이틀도 아니고 오래 있어야 할 테니 고생이
될 것 같아서요. 거리나 교통으로 봐서 자주 왔다 갔다 할 형편이 못 되니까 이번에 어떻게
든 성사 단계까지 가려면 자연히 시일이 오래 걸릴 테니 말이오."
"난 또 무슨 말씀이라구요. 그런 걱정일랑 깨끗하게 잊으셔도 좋습니다. 나도 그 점은 이
미 단단하게 각오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니까 이번에 한 달이 걸
리든 두 달이 걸리든 꼭 성사되도록 해놓고 오겠습니다. 인도네시아도 우리처럼 딸라가 필요
한 처지고, 나무는 첩첩이 많은데 일이 안 될 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더위 같은 건 염려도
마세요. 아직도 군인 기질이 씽씽하게 살아 있으니까요."
정동진은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좀 들뜬 것 같기도 하고 과장된 것 같기도 했지만 그건
그의 솔직한 마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는 돈벌이 좋다는 새 사업에 기대가 부풀어 있기도
했고, 이번 사업을 꼭 성사시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도 강했다.
"예, 정 사장님이 그렇게 각오하고 있다면 내가 한시름 놓겠습니다. 그리고 그쪽에서도 우
리나라처럼 사바사바가 잘 통한다니 고비마다 눈치껏 꿀을 먹이세요. 돈처럼 효과 큰 건 없
으니까.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말은 너무 노골적이고 천하긴 해도 사업가들에겐 불변의 진리
고 철학아니오."
정동진이 자신이 유도하는 대로 끌려든 것에 임 사장은 적이 만족하며 돈 인심을 쓰고 있
었다.
"그렇지요. 사업을 해갈수록, 세상살이를 해갈수록, 돈 힘이 얼마나 세고 무서운지를 알
게 되더군요. 목숨도 권력도 모두 돈 아래에 있으니 돈이란 게 무엇인지 참......."
정동진은 새삼스럽게 톤의 위력을 상기하며 선선하게 마음쓰는 임 사장에게 고마움을 느끼
고 있었다.
"돈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마디로 제왕이지요. 우리도 제왕 위의 제왕이 되려면 이번
일이 뜻대로 잘돼야 합니다. 그저 정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임 사장이 손을 내밀었고,
"예, 꼭 성사시키겠습니다."
정동진은 임 사장의 손을 맞잡았다.
임채옥은 1주일에 한 번꼴로 발걸음하던 친정을 2주일째 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 이 에미 안 볼 작정이냐?"
전화기에서 대뜸 흘러나온 말이었다.
"엄마, 화나셨수?"
임채옥은 어리광 투를 섞으며 시치미를 뗐다.
"그래 이것아, 화가 나도 많이 났다. 당장 좀 오너라."
"엄마, 또 그 얘기면 난 싫여. 괜히 모녀 사이만 나빠지잖아요."
"내가 널 꼭 데려갈 심산이었으면 여태 가만히 있었겠니? 아빠가 니 뜻대로 내버려두라고
해서 진작에 작파했다."
"어머, 역시 아빤 다르시네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임채옥의 목소리도 얼굴도 금방 밝아졌다. 그녀는 연속극이 흘러나오는 트랜지스터 볼륨
을 낮추었다.
"그래. 와보면 안다. 궂은일 아니니까 맘 편히 먹고 빨리 오너라. 냉면 말아놓을 테니까
집에 와서 점심 먹어."
"네, 알았어요. 엄마가 말아주는 냉면 못 먹은 지도 오래됐어요. 곧 갈테니까 빨리 전화
끊어요, 엄마."
전화를 끊으며 임채옥은 콧등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을 데려가지 않기로 했다는 것
과 냉면을 말아놓겠다는 말을 듣자 어머니의 도타운 정이 물큰 끼쳐옴과 동시에 이별이 성
큼 다가서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는 다른 음식은 몰라도 냉면 마는 솜씨 하나만은 일품이었
다. 억척스러운 생활력과 함께 냉면 마는 솜씨는 어머니의 고향이 평양이라는 것을 확실하
게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다. 어머니는 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식모를 제
쳐놓고 손수 냉면을 말며 고향을 그리워하고는 했다.
임채옥은 돈이 아까웠지만 마음이 바빠 택시를 잡아탔다. 친정 식구들이 다 떠나버리면 어
쩌나......, 하는 생각이 무슨 두려움처럼 밀려들었다. 그건 분명 두려움이었다. 친정 식구
들이 다 떠나고 말면 자신은 외톨이였다. 시집 식구들과 미묘한 갈등이나 부딪침이 생길 때
마다 친정은 얼마나 큰 의지고 바람벽이었던가. 그런 친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니......, 허망하고 기막힌 일이었다. 그렇다고 어디에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임채옥은 문득 전쟁의 위험 때문에 이민을 떠난다는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그게 확실한 사실이라면 아버지가 자신을 떼어놓고 떠나기로 결정했을 리가
없었다. 그거야말로 남들 앞에 내세우기 위한 이유였다. 오래 군납을 해온 관계로 그쪽 정보
가 빠르고 정확한 아버지가 전쟁 재발 위험을 확실히 알았더라면 아버지 성질에 무슨 수를
써서든 데리고 갈 거였다.
그러고 보니 전쟁 위험이란 이민 가는 사람들이 으레 쓰는 말이기도 했다. 그 말에 대한
비아냥이 '그래, 느네들만 잘먹고 잘살아라'이기도 했다. 미국이 좋아 이민을 가면서 굳이
그런 이유를 내세우는 것도 이민 가지 않는 사람들의 감정을 역겹게 하는 것이고, 더구나 전
쟁이 일어날 위험이 확실하다면 몰매맞기 딱 좋은 얌통머리 없는 짓거리가 분명했다.
아버지는 어째서 미국이 그리 좋은 것일까.......
임채옥은 여전히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자의 단순한 허
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무시 못할 재력과 함께 사장이라는 사회적 지위까지 지
니고 있었다.
임채옥은 그 시간강사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 황인종은 괜히 흑인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요? 백인들에게는 괜히 열등감을 가
지는 것처럼.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는 그런 인식이 안 통합니다. 황인종이 흑인 다음입니
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오늘의 미국을 건설하는 데 흑인들이 노예로서 바친 피땀의 공로를
인정해 백인 다음인 두 번째 서열로 쳐주는 겁니다. 그 반면에 황인종들은 아무것도 공헌한
것 없이 다 키워놓은 과일나무 열매만 따먹으러 온 것으로 취급해 맨 뒤로 제쳐놓는 거지
요."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고학을 하느라고 식빵만 너무 많이 먹어 식빵을 보면 질색을 하는
그 시간강사는 식빵만큼 미국 사회를 싫어했다.
임채옥은 왜 진작 그 이야기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할 생각을 못했는지 뒤늦게 아쉬움을 느
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해버린 아버지 어머니한테 그런 이야기가 아무런 효과도 나타내
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동대문 다 왔는데요."
운전수의 말에 임채옥은 서둘러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 동네도 이젠 올 일이 없게 되겠구나.......
임채옥은 골목으로 접어들며 가슴에 찬바람이 스치는 쓸쓸함을 느꼈다. 그때 문득 떠오르
는 얼굴이 있었다. 아니, 색바랜 검정 작업복을 입은 유일민이 골목 저쪽에서 생생하게 걸어
오고 있었다.
아아, 오빠아.......
임채옥은 갑작스런 가슴 두근거림 속에서 신음을 물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퇴색할 줄 모르
는 생생한 현실이었고, 여고 시절 그대로의 가슴 두근거림으로 그리운 존재였다. 그런데, 그
를 볼 수 없는 세상으로 영영 떠나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친정 식구들한테 들킬 염려 없게 됐으니까.
임채옥은 친정 식구들이 남겨놓고 갈 외롭고 쓸쓸한 자리에 유일민을 확대시켜 채우기로
했다.
"자아, 어서 먹어라. 맛이 제대로 났는지 모르겠구나. 나이 들어 늙어가니 솜씨도 늙어."
황 집사는 정 넘치는 얼굴로 냉면그릇을 딸 앞에 놓았다.
"엄마, 무슨 일인데?"
임채옥은 젓가락을 들며 어머니에게 다정한 웃음을 보냈다.
"어여 맛있게 먹기나 해라. 먹고 나서 얘기해도 안 늦다."
황 집사는 곱게 눈흘김을 하며 젓가락으로 냉면을 집어올렸다.
"엄마아, 속타게 뜸들이지 마. 그건 엄마 스타일이 아니잖아."
임채옥은 어리광 섞어 콧소리를 냈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공략하는 효과 좋은
무기였다.
"흥, 그래 봤자 소용없어. 어서 냉면이나 맛있게 먹으라니까. 일에는 다 순서가 있는 법이
야."
황 집사는 딸의 수법에 넘어가지 않고 냉면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럼 할 수 없죠. 근데 이민 수속은 잘돼 가고 있어요?"
"응, 한 열흘쯤 있으면 떠나게 된다."
"네에? 이 집, 회사 같은 건 다 어쩌구요?"
"이런 쑥맥 그간에 다 처분했지."
"어머나! 어쨌거나 엄마 아빤 언제나 돌격대 같고 요술쟁이 같아요. 두 분이 그러니까 자
식들이 늘 마음에 안 차고, 시원찮게 보이는 거라구요."
"글쎄, 모르겠다. 어여 먹어라."
임채옥은 별 맛도 모른 채 냉면을 마구 그러넣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닥쳐온 이별이 가
슴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식모가 상을 가지고 나가자 황 집사는 경대 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이거 아빠가 너 주라고 하신 거다."
황 집사가 딸 앞에 밀어놓은 것은 저금통장과 도장이었다.
"뭐예요, 이거?"
"펴봐라."
임채옥은 저금통장을 펼쳤다. 자신의 이름이 먼저 눈에 띄었고, 그 아래 적힌 숫자를 보
며 그녀는 어리둥절해지고 있었다. 1자 뒤로 동그라미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엄마, 이게 다 얼마예요?"
"차분히 세보렴."
"이걸 다 절 주시는 거예요?"
"그래. 혼자 떨어져 살자면 남 모르는 돈이 좀 있어야 할 거야. 아껴 써라."
"엄마아!"
임채옥은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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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小說漢江)
한 강 = 재 3부 불신시대 (7권)ㅡㅡㅡ 4. 태평양 저 너머
소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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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05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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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찍 올려주신 덕에 일찍 다녀 갑니다 퇴근준비 서두르는 직원들 가위바위보로 마무리 하네요 사람살이가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거라면 근심걱정 없을 텐데요... 고맙습니다 하루가 평안하소서 소슬바람님..
날씨가 다시 추워졌어요 난 왜이렇게 추위를 타는지. 사무실에서도 혼자 춥다고 징징거려요 .ㅎㅎ.. 건강 조심하세요 ~^^*
병술년에는 하시고자하는일 뜻과 같이 이루어지소서. 그리고 건강하시고 화목한 가정이 되시길... 나날이 좋은날 되소서...
고맙습니다. 굴렁쇠1님.. 님 께서도 여전히 건강 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읍니다. 감기 조심 하시고 늘 행복 하시길 바랍니다.^^*
땡큐 ..아우님!!! 잘 지내지요? 새해에도 좋은인연 잘 가꾸어 보자구요 ㅎㅎ...^^*
한강의 초기와 이제 후미를 보는듯합니다. 여전히 세상사는 버겁지만요...잘봤습니다. 소슬님...은행나무는 아시죠?
하하... 은행나무 잘 알지요. 올해는 은행나무보러 한번 가야하지 않을까요? 새해 소망하시는 일마다 다 이루어 지시는 축복의 해가 되시길 빕니다. 건강 하세요 ^^*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