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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하신 사도들②
사도행전 1장 1-2절 / 이재철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1장 1-2절 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1. 오! 데오빌로여,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일에 관하여 내가 작성한 이전 보고서는 2. 그분께서 친히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해 명령들을 주신 뒤에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아멘.(KJV)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12명 가운데 넷째 아들인 유다로 하여금 구원의 정통성을 있게 하셨습니다. 12명의 형제들 가운데 유다의 행실이 가장 모범적이었기 때문인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며느리를 창녀인 줄 알고 동침할 정도의 부도덕한 면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한국식으로 보며 시대가 고대(古代)라는 것을 성경의 스토리는 전부 부도덕하고 폐륜이라는 말이 됩니다.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짓밟는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대시대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주님의 선택한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씨의 이어짐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마주할 때 한국의 특히 유교(儒敎)적인 사상에 안경을 끼고 보면 부도덕한 인간들의 책으로만 보입니다.
며느리와 동침한 시아버지라면 폐륜아(廢倫兒)라 불러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는 신앙의 선조로 선택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혹 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할지도 모릅니다. 형제들 가운데에 굳은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앞장섰던 사람은 유다뿐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지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미흡합니다. 창세기 25장 21절에 의하면,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 때, 그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주님의 도구로 선택하셨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 어떤 선행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신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선택하였다.
따라서 어떻게 야곱과 유다 같은 사람이 자신들을 믿어주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는가? 우리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 지성과 소양을 겸비한 미모의 처녀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2000년 전이라면 로마 제국이 지중의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입니다.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는 예루살렘 처녀들이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명문대가, 숙녀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2000년 전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던 여인은 이스라엘 변방 빈민촌 나사렛에서의 마리아였습니다.
어떻게 마리아가 그 선택을 받을 수 있었는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주님을 쫓는 사도들의 행함의 역사를 전해주는 사도행전은 그 첫머리의 막이 이렇게 오르고 있습니다. ➤“1. 오! 데오빌로여,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일에 관하여 내가 작성한 이전 보고서는 2. 그분께서 친히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해 명령들을 주신 뒤에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아멘.
우리가 3주째 상고하고 있는 본문의 예수님에 대한 세 번째 설명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신 사도들을 선택할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잘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갈릴리의 빈민들이나 어부거나 아니면 매국노로 지탄과 멸시의 대상이던 세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나 세리만 사랑하셨고 당시 어부와 세리가 그들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폭 12km에 길이 21km에 이르러 바다만큼 넓은 갈릴리 주변에 사는 모든 남정네들은 다 어부였고 당시에도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든 세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독 그 어부들과 그 세리들만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는지 우리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크리스천들을 색출, 연행, 핍박하는 것을 자신의 천직으로 삼았던 바울이 사도행전의 주인공으로 선택받은 데 이르면 우리는 아예 입을 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직도 이 세상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이었거나 더 윤리적으로 살았기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택함을 받기 전에 세상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지 않았습니까? 아니 여러 면에 걸쳐 도리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의 선택을 받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과연 그 누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목적이 아니거나 우리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목적에 우리가 부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이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2주 전부터 수요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서 고린도 전설을 배우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설을 기록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1절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기를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천하대적이었던 자신이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자신의 피택에 대해 하나님의 목적 이외에는 다른 해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야기하면서 헬라어로 셀레마(Σέλεμα)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단어는 소망한다는 동사 셀로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믿음은 소망을 낳고 소망은 믿음을 더욱 공고하게 해줍니다. 소망과 믿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소망의 또 다른 표현이 믿음이고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 소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특정인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이요, 믿음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선택은 언제나 버림의 결과입니다. 선택의 대상은 항상 복수거나 다수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것 가운데에 단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그 하나가 나머지 모두보다 더 낫다는 믿음으로 인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가게에 수없이 많은 옷이 걸려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가게에 들어가서 밝은 색깔의 옷을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검정 색깔의 옷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비싼 가격의 옷을 어떤 사람은 싼 옷을 삽니다. 그 경우에 그 누구도 왜 하필이면 그런 색깔의 옷을 샀느냐? 왜 그 가격에 그런 옷이냐? 하는 식으로 남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 옷을 구입한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형편과 기호에 가장 적합하다는 믿음으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역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그동안 설명할 수조차 없었던 것을 이제 밝히 이해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속에 들어있는 야곱을 핏덩이에 지나지 않는 야곱을 선택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며느리와 동침했던 패역한 유다를 선택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달동네 나사렛의 빈민 마리아를 성모 마리아로 선택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무식한 어부와 지탄받던 세리를 주님의 사도로 선택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 바울을 사도행전의 주인공으로 선택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그 해답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믿으셨고 유다를 믿으셨고 마리아를 믿으셨고 제자들을 믿으셨고 바울을 믿으셨고 형편없는 우리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절대시 합니다. 물론 인간의 믿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믿어주셨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믿어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추악한 죄인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위해 어떻게 당신의 독생자를 이 더러운 세상에 보내셨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믿어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어떻게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놓으셨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믿음이 십자가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형편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먼저 선택해 주시고 주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리란 하나님의 소망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믿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믿음은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유일한 토대와 동력이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 하나님의 믿음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삶입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의 믿음으로 우리를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주님께서 당신의 믿음으로 왜 우리를 선택해 주셨는지 그 까닭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신 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선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까닭은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쓰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란 주님의 직계 제자를 뜻하기도 하지만 실은 이 세상에서 크리스찬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 모두를 의미합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사람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선택하신 것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 속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도로 넉넉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주님의 소망과 믿음으로 인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를 뜻하는 헬라어 포스토로스는 보낸다는 의미의 동사 아포스텔로(Απόστολος)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즉 사도란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뜻도 목적도 없이 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사도라 읽히지는 않습니다. 사도는 반드시 보내는 자의 메시지를 지니고 가는 자입니다.
아무리 달려 나아가도 그 메시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는 참된 의미의 사도일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선택하신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품고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지난 주일날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배당 밖 우리 일상의 삶 속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아름다운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지만 만약 우리의 마음속에 세상의 메시지가 품겨져 있다면 이 순간 우리는 실은 세상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세상 어느 곳에 있든 바로 그곳이 아름다운 예배당으로 일구어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의 편지를 쓰면서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교회란 용어를 썼습니다. 교회를 의미하는 헬라어는 에클레시아(Εκκλησία)로 그 뜻은 부름 받은 자들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 혹은 교회가 이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약 성경이 쓰여 지기 전 1,000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 때부터 시작해서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로마 제국 시대에도 각 도시마다 에클레시아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에클레시아는 자기 도시의 재반 사항을 논의하고 관할하기 위한 시민의 대표로 이루어져 있는 모임으로서 우리 말 민회(民會) 혹은 공의회(公儀會)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주님을 쫓는 무리들이 나타나서 자기들도 에클레시아라고 나선 것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민회나 공의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라고 통보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당시의 사람들은 대단히 의아해하면서 서로 반문했을 것입니다. 야, 저 에클레시아는 도대체 뭐하는 집단이래? 듣도 보도 못한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삶을 면밀하게 주시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시의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를 자처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메시지, 욕망의 메시지를 품고 살았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를 자처하는 그들을 다시는 상종 못할 정신병자로 취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 의해서 로마 제국이 새로워졌다는 것은 당시의 크리스찬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로 불러주신 주님의 믿음에 부응하여 주님의 메시지를 품고 주님의 사도로 이 세상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믿음에 의한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 얻은 우리 역시 주님의 그 믿음에 우리의 믿음으로 응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품고 주님의 사도로서 우리의 삶을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로 날마다 읽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은 4강 진출이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 기록을 세웠고 어쩌면 앞으로는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그 대 기록은 출중한 지도력의 히딩크 감독으로 인해 실현될 수 있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다시피 그 이후로 히딩크 감독은 지금까지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축구팀 감독직을 맡고 있고 바로 그 팀에서 우리나라 이영표 선수는 레프트 윙백으로 온 유럽의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며칠 얼마 전에 일시 귀국 했던 이영표 선수에게 당시 축구 선진국에 비해서 현격하게 팀 전력이 떨어지던 한국 팀을 히딩크 감독이 4강까지 진출시킬 수 있었던 비결이 그때 출전 선수로 경기장에 나섰던 선수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자신들을 믿어주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이 대단히 감동적이었습니다. 프로 선수들은 아무도 모르게 고의로 자신의 베스트를 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 기량 이상의 투혼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히딩크 감독의 최대 장점은 월드컵 경기 내내 한국 선수들을 후자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11명의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나가기만 하면 자기 기량 이상으로 투지를 불태우며 온 몸을 내던졌다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동기는 선수들 개개인에 대한 히딩크 감독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라운드에 나서는 선수들은 자신들을 믿어주고 있는 히딩크 감독의 믿음을 믿으면서 그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서 자기 기량 이상의 투혼을 발휘하며 온 몸을 던진 끝에 4강 진출이라는 기적과도 같은 대 기록이 결과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당시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어떻게 90분 내내 선수들이 저렇게 사력을 다해서 뛸 수 있을까 하고 품었던 의구심이 비로소 해소되었습니다. 감독이 선수를 믿고 그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서 선수들이 자신들의 몸을 던질 때 기적과도 같은 대기록이 수립된다면 우리를 믿으시는 하나님의 믿음을 인식하고 그 믿음에 우리의 믿음으로 응답하면서 주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던질 때 어떻게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예배가 끝난 뒤에 시간 나시는 분들은 양화진 건너편에 있는 한국 가톨릭 성지인 절두산을 한 번씩 산책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두산 성당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의 본래 이름은 그 모양이 누에의 머리와 닮았다고 해서 잠두(蠶頭)봉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이 약 1만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인들을 바로 그 언덕에서 참수형을 시킨 이래 그 언덕은 절두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절두산 성지 내에 있는 숲으로 실내 교육관 지하 입구에는 이런 내용의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김수환 주기경의 글입니다. 저는 양화진을 거쳐서 절두산으로 산책을 나갈 때마다 그 글귀를 제 마음 속에 되새기곤 합니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전능하신 주님께서 자신을 믿어주고 계신다는 것보다 더 큰 격려와 소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믿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당신께서 믿으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의 제물로 버리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패역하고 더 부도덕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우리에 대한 당신의 믿음으로 우리를 불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에도 여전히 부족하고 허물투성이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당신의 믿음으로 이 어둡고 혼탁한 세상에서 100주년 기념교회를 이루는 당신의 사도들로 우리를 불러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으로 되어졌습니다. 주님의 믿음이 아니었던 들 이 가운데에 그 어느 것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믿음을 믿는다면 그 믿음에 우리가 우리의 믿음으로 응답할 때 전능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믿음으로 왜 우리를 계속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유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감독과 선수의 믿음이 어우러져도 새로운 기록을 세울 수 있다면 전능하신 주님과 그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한데 어우러질 때 어찌 이 땅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의 선택받은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고 세상이란 경기장을 향해 나아가십시다. 그 경기장에서 매일의 삶이란 경기마다 우리 인생의 감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쫓아 그라운드에 우리의 생을 던지십시다.
주님의 선수로 주님의 택한 받은 사도로서 우리가 응당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지십시다. 주님의 그 믿음에 오직 우리의 믿음으로 응답하십시다. 그때 우리의 삶은 우리의 가정과 일터, 우리의 교회는 새로운 역사를 일구는 신 사도행전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를 믿어주셨고 지금 이 순간 믿고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를 믿어주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로로 삼아 친히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의 크신 이름을 찬송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나 주님,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믿어주셨기에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셨고 앞으로도 우리를 믿어주실 것이기에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계속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임을 우리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택을 받았음에도 주님의 메시지를 품고 살아가는 사도가 되지 못했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주님의 믿음에 우리의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세상이라는 경기장 속에서 우리 인생의 감독이신 주님의 믿음에 부응하여 주님을 위해 우리의 온 삶을 던지게 하여 주옵소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을 위해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믿으시는 주님의 믿음을 힘입어 우리 일상의 삶이 전대미문의 생명의 대 역사를 일구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백주년 설교 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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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