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스님의 묘용(妙用)
조계종의 대원로이신 석주정일(昔珠正一) 큰스님을 어떻게 호칭해야 할까. 이 글에서 직접 일컬어야 할 큰스님의 호칭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 싶다. 형식에 얽매이면 평소 자애로우신 큰스님을 느끼는 데 거리가 생기고, 또 일상의 친근감만 내세우자니 종단의 큰 어른께 결례가 될 것 같아서이다. 나 혼자 가만히 앉아서 끙끙거리다가 마침내 노선사(老禪師)로 호칭하여 부르기로 했다. 이것은 누구나 함께 의논하여 입을 맞춘 결론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나 혼자의 외경(畏敬) 어린 정성으로 내린 결론이다. 알다시피 노(老)라는 말은 덕(德)을 의미하지만 수행자들인 스님들께는 한량없이 큰 지혜와 자비를 구존(俱存)한 고승대덕에 대한 공경어이기도 하다. 선사는 심안을 얻은 여래장자로 조계종의 가풍을 고스란히 이은 전등적자(傳燈嫡子)라는 뜻이다.
1. 조계종의 보살
나의 학생시절, 그러니까 1983년(불기 2527) 12월 26일 겨울방학 때였다. 평소 일 벌이기 좋아하는 번잡한 나의 성격 탓이었는지, 그때 내 나름대로 가슴속에 작은 사명감이 작용한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우리 불교계나 조계종 일원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청소년이나 어린이 포교에 대한 지도자(법사) 교육이 거의 없었을 때였다. 그 점을 안타까워하던 젊은 우리들은(석림회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우선 선학과의 같은 학년 도반들과 의견을 맞추었다. 그리고 난 뒤, 선학과 여러 교수님들과 청소년교화연합회의 지원을 얻어 법사교육을 위한 연수회를 설림회와 연합회 공동주관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우리는 먼저 연수 교과과정을 짜고 교재로 쓸 책자를 준비하면서 도 한편으로는 연수 장소를 물색했다. 마침 어느 회원의 제안으로 지금의 서울 강남 역삼동 언덕에 있었던 영동 반도 유스호스텔을 빌려 연수장으로 사용하기로 정하고 곧바로 계약까지 마쳤다. 즉각 행동으로 옮기는 그때의 순발력과 행동력을 지금 다시 돌아보면 그것이 젊음의 힘이었음을 다시 느낀다. 사명감도 있었고 또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과 성취감도 있었다. 젊은 학인들의 우연한 토론이 계기가 되어 ‘불교 어린이 및 청소년 교육 지도자 연수회’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수회나 교육 같은 무게 있는 행사는 주최 측의 권위가 성패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우리 젊은 학인들 위조의 행사와 진행으로 일이 꾸며지다 보니 대중의 신뢰도나 인지도에서 아무래도 가볍게 여겨질 것 같아 고심을 했다. 그 행사가 갖는 중요성과 연수내용에 비해 대회적인 무게감과 신뢰성이 부족한 느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염려와 판단으로 우리는 정신적인 의지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를 어른으로 모시느냐에 대해 이 궁리 저 궁리를 거듭해 가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그러는 중 문득 나의 생각에 빛이 번쩍 하는 느낌이 왔다. 가장 적합한 일은 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자꾸만 문제의 핵심에서 겉돌기만 하여 설왕설래로 결론은 없고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내 머릿속에 빛으로 떠올랐던 어른은 바로 삼청동 칠보사의 석주 노선사였다. 내가 그 이야기를 발설하자 같이 있던 준비위원들은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앞뒤 재볼 것도 없이 그렇게 하자고 모두 즉시 동의했다.
나와 더불어 몇몇 회원이 그 길로 칠보사로 달려갔다. 역시 젊음에는 좋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하게 된다. 그때의 그런 순수한 열정은 출가에 대한 자부심과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의 사명감이고 신심이었다. 우리는 일제히 노선사께 허둥지둥 숨가쁜 인사를 올렸다. 마치 뒤에서 적군이라도 쳐들어오는 것처럼 자리에 앉기 바쁘게 행사의 취지를 말씀드리고 이번 행사에 증명이 되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노선사의 대답은 미처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기정 사실로 했다. 우리들의 뜻만 생각하고는 결례의 불경(不敬)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리고는,
“노스님, 이번 행사에 쓸 교육자료집을 발간해야 하는데 그 자료집에 넣을 교훈이 될 경전 말씀 한 구절을 붓글씨로 써 주십시오.”했다.
우리들의 두서없는 서두름을 보고 웬만하면 못마땅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노선사께서는 조금도 그런 내색이 없었고, 귀찮아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즉시 붓을 들어 『지도론(智度論)』에 나오는 전법 공덕에 대한 게송을 썼다. 사실 여기까지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깜짝 놀랄 상황은 곧 이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연수회 입재를 하는 날, 노선사께서는 이미 두어 시간 전에 연수 장소에 도착했다. 그것뿐만 아니다. 노선사께서는 연수회가 시작된 첫날부터 모든 일정을 연수생들과 똑같이 함께 했다. 밤이 되어도 지척에 있는 칠보사로 귀사하지 않고 온돌방 하나를 더 얻어서 연수장에 머물렀다. 사실 그때 연수회에 동참한 가장 나이 많은 연수생은 노선사였던 것이다. 노선사께서는 마지막 끝나는 날까지 잠시도 연수장을 떠나지 않고 숙식과 모든 연수 일정을 동참대중과 함께 했다.
그로 말미암아 연수회는 기대 이상으로 성황리에 이루어졌고 열렬한 호응과 호평을 받았다. 교육생 모두가 스님들이었으며 120명의 출가대중이 동참했다. 스님들만의 행사로는 매우 많은 인원이었고 그것도 꽤 비싼 교육비 내며 자발적으로 참가했다는 점에서 가히 놀라운 일이기도 했다. 특히 포교에 뜻을 둔 젊은 학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말사 주지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명감 넘치는 젊은 학인들이었고 그들의 뜨거운 열기는 연수 기간 내내 뜨겁게 달아올랐다.
행사를 준비한 우리들은 힘든 일도 더러 있었지만 큰 보람을 느꼈다. 사실 그러한 성공에는 시기의 적절성도 있었고 주최가 석림회와 청소년교화연합회라는 공신력도 있고 담당자들의 열의와 노력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더 컸던 힘은 노선사의 뜨거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살심과 보살행의 높은 법력 때문이었다.
나는 그 행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노선사의 참다운 면모와 후학에 대한 지극한 배려, 종단에 대한 무한 책임감과 애정을 느끼게 되었고 배우게 되었다. 노선사의 모든 불사에 헌신과 정성으로 임하는 자세는 매우 고귀했고 지극하기 그지없었다. 노선사의 그러한 자비와 보살행은 당시 우리들에게만이 아니었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젊은 사람이 일하고 원하는 공이라면, 보살서원의 뜻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언제든지 가리지 않고 달려가 증명하고 지켜보며 깊은 관심과 뜨거운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관세음보살처럼 부르기만 하면 곳곳에 그 몸을 시현(示現) 하셨으니, 어찌 우리가 칠보사 노선사를 이 시대 조계종의 육신보살이라고 우러르고 칭송해 부르지 않겠는가.
2. 노선사와 스님
스님(광덕)은 노선사와 참으로 각별했다. 스님이 초기에 발간한 책을 보면 제목은 거의가 노선사의 붓글씨였다. 노선사께서 일찍이 1954년 부산 동래 금정사 주지를 할 때부터 스님은 노선사께 신세를 끼쳤고 서로 깊은 마음을 주고받았다. 어느 때의 일인지 시간과 장소에 대한 명확한 기억은 없지만 스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던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스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한 내용이므로 그 줄거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떠올려 본다.
“송암, 내가 불광법회를 열어 포교활동에 적극 나서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보살 동지들이 모여들고 회원이 늘어나 점점 규모가 커지게 되었지.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대 밖의 일이었어.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우리 절 짓자는 말이 신도들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들은 척도 않고 있었는데 그것도 어디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하는 수 없이 회장단과 의견을 나누고 여러 임원들과 구체적인 검토를 거쳐 대중의 뜻을 수렴하여 절을 짓기로 했어. 그렇게 결정해 놓고도 나는 가능한 절을 짓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지. 내가 생각했던 새불교운동은 일반인들이 들으면 이해 안 될 정도로 달랐기 때문이야. 그러나 대중의 뜻이 결정된 이상 절 짓는 일을 바꿀 수도 없었고 바꿔서도 안 되게 되어 계속 추진하고 있었지.
그래서 어디에다 어떻게 절을 짓나, 터를 보고 장소를 고르고 거기에 대한 장래를 점치고 이것저것 연구했지.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중에도 나의 속생각은 한국불교의 획기적인 대전환이라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거지. 그러나 아무리 내 나름대로 비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대중의 생각과 너무나 달라 시기상조로 보고 결국 내가 단념하고 말았어. 절을 근거하지 않고 포교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무리 비상한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인간은 땅을 딛고 사는 현실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바에는 그것도 나만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말았던 거야. 우리 불광 형제들이 동서남북 뛰어다니며 맹렬하게 전법하고 권선하여 절 지을 땅도 사고 마침내 정토식을 가진 뒤 절의 모양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어. 나는 절을 지으면서도 본사나 어떤 스님들이나 특정한 절에 보시를 바라거나 내지 조그만 도움, 그 어떠한 협조도 바라지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지. 그냥 나 혼자 힘으로 불광 형제들과 더불어 불사 수행에 정진했던 거야. 그런데 내가 절 짓는다는 이야기를 칠보사 석주스님께서 전해 들으시고 나에게 전화를 하셨어. ‘아니 절 지으면 이야기를 해야지, 왜 혼자 하느냐?’하고, 무척 안타까워하면서 인편에 권선 책을 즉시 보내라고 하셨어.
우리 불광사를 지으면서 스님으로 자진해서 권선해 주신 분은 오로지 석주노스님뿐이셨지. 그때 상당한 금액을 권선해 주셨는데 물론 큰 힘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나중에 누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석주노스님께서 몸소 화주책을 들고 신도들에게 다니면서 권선하셨다고 해. 그런 고마우신 은혜를 우리가 세월 따라 잊어버기거나 설령 상황이 바뀌었다 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돼. 다행히 송암이 어른들께 정성껏 잘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놓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변함 없어야 해.“
이 이야기를 스님께서는 나에게 몇 차례나 들려주었다. 노선사와 스님과의 수행담과 보살행의 협력은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다. 단지 이 이야기는 그 수많은 여러 일 중에서 아직 내 책에서 밝히지 않은 내용 하나를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쓴 책 『시봉일기』1, 1권에서 몇 편의 이야기를 소개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싣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다. 그 중에서 ‘불광유치원 건립 선서화 전시회’를 빠뜨릴 수 없다. 그때 써 주신 노선사의 글씨는 화선지와 도자기를 포함해 백여 점이 훨씬 넘었던 것을 보면 나의 조그만 필설이 다 감당 못할 일임이 명백하다.
또 불광 초기 포교가 한창 불붙어 갈 때, 스님은 노선사의 글씨로 『반야심경』을 한문과 한글 두 가지를 써서 그것을 다시 천에다가 인쇄하여 불광 형제들 집집마다 모셔놓고 아침저녁 기도하게 했던 일에서부터,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노선사와 스님 사이에 벌어졌다. 그 가운데는 내가 모르고 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노선사와 스님, 두 분만 아는 일도 무수히 있을 것이다.
3. 학선사(鶴禪師)
노선사의 용자(蓉姿)는 말 그대로 연꽃이고 학이시다. 어쩌다가 칠보사를 참방해서 노선사를 뵈오면 언제나 변함 없는 단아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노선사의 그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수행자의 사표이기에 나는 가끔 한번씩 친견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발심이 되고 의지가 되었다. 그래서 젊은 학인들 사이에는 ‘석주 큰스님처럼만 살자’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수행자로서 노선사는 무엇 하나, 어느 것 하나 흠잡거나 말 만들 수도 없는 평범 가운데 특출이었고, 특출 가운데 평범이었으니 어찌 그 미묘함이 후세에 길이 사표가 되지 않겠는가. 항상 노선사께 느끼고 배우는 것은 바른 마음가짐이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불편 부당의 담박함,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하고 엄정한 자세 등, 그런 노선사를 위의와 세행을 함께 겸전한 분이라고 말하면 될지 모르겠다.
앞에서 노선사의 글씨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한국 불자 집집마다 노선사의 법서(法書) 한 점 소장하지 않으면 한국의 불자가 아니라고 할 만큼 노선사께서는 글씨를 통해 수많은 법문을 했다. 글씨에 대해서는 비단 불자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에서부터 심지어는 타종교인들까지 노선사의 글씨를 갖고 싶어했으니 어느 시대를 보아도 그처럼 많은 글씨를 쓴 스님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노선사 가문의 내력인지도 모르겠다. 노선사의 은사이신 남전(南泉) 대선사께서도 당대 명필이었고, 또 노선사의 문인 중에도 글씨로 이름난 스님이 있는 것을 보면 결코 흔한 내력은 아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노선사의 글씨는 글씨가 아니고 법을 전하는(傳法) 석주가풍(昔珠家風))이다.
저 옛날 임제선사의 가풍은‘할’이요, 덕산선사의 가풍은‘방’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석주선사의 가풍은‘글씨(法書)’라고 말할 수 잇을 것이다. 그러기에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글씨의 품평은 노선사에게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천진고불(天眞古佛)의 선방편(善方便), 오직 석주가풍일 뿐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글씨도 상(相)이고 가풍도 방편이기에, 그것을 굳이 언어분자로 표현해 본다면 연꽃 같고 학 같다고나 할까. 역시 이 말은 말 이전의 말로 들어야지 온갖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연구로만 듣는다면 노선사의 진의와는 십만 팔천 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선사의 글씨를 명필이니 선필이니, 또는 달필이니 하는 말을 아예 쓰지 못한다. 격외도리(格外道理)를 전하는 일획이고 방외소식을 알리는 일점 때문임을 거듭 천명한다.
허물을 면치 못하겠지만 노선사의 글씨에 대한 소식을 다시 한번 끌어온다면 ‘구만리 푸른 하늘을 홀로 나르는 학이다.’라고 하겠다. 또 부연하면 글씨의 획 하나하나는 난초 잎과 같다. 그 빼어난 초출(超出)은 격 밖의 일구를 건져 올리고, 우아하고 고상한 묘미는 법희선열(法喜禪悅)로 만 중생의 자량(資糧). 텅 빈 화선지 위에 내달리는 운필의 자취는 종횡무진의 신기(神技)다. 자고로 한번 떠오르면 구만리 푸른 하늘까지 높이 오르는 것을 학이라 하고 하늘을 누벼도 자취 남기지 않는 것을 노닌다고 한다. 그래서 노선사의 글씨는 천공학유(天空鶴遊)와 같다.
아, 노선사! 학인 제접의 가풍은 학과 난초였구나.
누가 감히 헤아리며, 불가사의 해탈경계의 무진묘용(無盡妙用)을 누가 입으로 담아낼 수 있으며, 형용으로 지어낼 수 있겠는가. 개가 코끼리가 입으로 담아낼 수 있으며, 형용으로 지어낼 수 있겠는가. 개가 코끼리 가죽을 덮어 쓴 만세의 웃음거리를 자초할 사람 아예 없을진대,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리라, 시방세계의 밑이 쏙 빠지는 그때까지.
단연 남전가풍(南泉家風)을 홀로 이은 노선사, 외외한 북악의 장송에 홀로 앉은 학이시구나.
광덕스님 시봉일기 3 -구국구세의 횃불,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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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과 석주스님의 여러가지 공통점에 또 한번 보살의 마음을 느낍니다. 큰스님처럼만 살자! 큰스님처럼만 살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