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3439: μονογενής
모노게네스 monogene-s
유일하게 태어난, 단 하나의.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모노게네스(Hes. 이래)는 모노스(G3441: 홀로, 혼자서)와 게노스(G1085: 자식, 자손)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을 의미한다.
(a) 모노게노스는 '유일하게 태어난, 단 하나의, 유일한, 외로운'이란 의미를 가진다.
(b) 모노게노스는 문자적으로 '그 종류의 하나의 혹은 단 하나의 종류'를 뜻하며, 불사조(phoenix)에 대해 사용되었다. 따라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모노게네스는 '유일한, 필적할만한 것이 없는, 비길데 없는'이란 의미로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모노게네스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히드, 기본적으로 독자, 곧 '유일하게 태어난 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유일하게 태어난, 단 하나의'(삿 11:34; 토비트 3:15; 8:17), '유일한'(시 22:20; 시 35:17; 지혜서 7:22), '외로운'(시 25:16)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모노게노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누가복음에 3회, 요한복음에 4회, 히브리서와 요한일서에 각각 1회 사용되었고,
(a) 마태복음, 마가복음, 바울 서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후기 문서에서만 발견된다. 이 단어는 단 하나의 출생한, '유일하게 태어난'을 의미한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모노게네스이고(히 11:17), 나인성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그 사람은 어미의 독자이며(눅 7:12), 야이로의 딸은 그의 외딸이다(눅 8:42). 또 귀신들린 소년은 그 아버지의 외아들이다(눅 9:38).
(b) 요한만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모노게네스를 사용한다. 마가와 마태는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내 사랑하는 아들")를 사용하고, 바울은 롬 8:3에서 투 에아우투 휘오스("자기 아들"), 롬 8:32에서 투 이디우 휘우("자기 아들"), 롬 8:29; 골 1:15; 골 1:18에서 프로토코스("맏아들")를 사용한다. 즉 마가와 마태와 바울은 노모게네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묘사가 더 진전한 단계에 있었다는 것은 마태와 바울 등의 기록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신자들을 지칭한 휘오이 데우("하나님의 아들들")가 똑같이 예수님에게도 적용되었지만, 요 1:12; 요 11:52; 요일 3:1; 요일 3:2; 요일 3:10; 요일 5:2에서는 신자들이 언제나 테크나 데우("하나님이 자녀")로 불리우고, 휘오스는 예수님에게만 국한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요한은 예수님과 신자들간의 차이점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되심을 보다 강력하게 강조한다. 물론 마태나 바울 같은 기자들의 경우에도 예수님의 독생자의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메시야되심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요한은 이 사상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공식화하여, 그것은 세례(침례)에서의 신앙 고백에 채택되었으며, 지금까지 기독교의 신조의 확고한 일부분이 되었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서의 모노게네스에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파테르 이디온("자기의 친 아버지")(요 5:18)라는 사실이 부응한다. 왜냐하면 이디오스는 그와 같은 다른 관계를 배제하고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노게네스는 요 1:14; 요 1:18; 요 3:16; 요 3:18; 요일 4:9에서 나온다. 요 3:16과 요일 4:9에서 그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자이시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최고도로 증거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이 멸망으로부터 생명과 구원을 가져오실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이다 생명이 그의 속에만 주어졌기 때문이다(요 5:26). 그러나 그가 독생자라는 사실은 또한 사람이 그를 부득불 믿어야만 하며 만일 그를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심판 아래 놓이며, 실로 이미 그렇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요 3:18).
따라서 모노게네스는 위엄이나 권위(mejesty)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이러한 사실은 요 1:18에 적용된다. 여기서 호 모노게네스 휘오스("독생하신 아들")이라는 언급을 볼 수 있다.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으시다. 하나님과 이와 비슷하게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다른 이는 없다.
하나님은 이 아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하신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어느 인간도 줄 수 없는 것, 즉 하나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증거를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시되 들리는 말로써가 아니라 그 분과의 비할 바 없는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아신다.
요 3:16; 요 3:18; 요일 4:9; 요 1:18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세상의 아버지와 독자의 관계에 거저 비교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의 관계 바로 그것이다.
요 1:14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상을 나타낸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의 영광은 독자의 그것에 단지 비교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광은 독생하신 아들의 영광으로 묘사된다. 문법적으로는 두 가지 해석 모두 옳다. 그러나 모노게네스의 총체적인 용법은 오스 모노게누스(속격 단수 남성)를 단순한 비교로 취하는 것을 매우 강조적으로 반대한다.
요 1:14; 요 1:18; 요 3:16; 요 3:18; 요일 4:9에서 모노게네스는 예수님의 유일성이나 비교할 수 없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모든 구절에서 그는 분명히 아들로 불리우고 요 1:14에서 그와 같이 간주된다. 요한에게서 모노게네스는 예수님의 기원을 나타낸다. 그는 독생자로서의 모노게네스이다.
요한의 호 모노게네스 휘오스("독생하신 아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요한의 천제 선포의 빛 안에서만이 그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있다.
호 모노게네스 휘오스는 단순히 호 휘오스 투 데우의 특수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말할 때, 비록 전적으로 인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부활하시고 선재하신 주님 뿐 아니라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기본적으로 염두에 둔다.
선재하신 주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아들과 천부의 관계이다.
이것은 요 17:5; 요 17:24에서 논쟁의 여지 없이 분명히 하고 있는 바이다.
예수님은 그가 청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셨으며, 영광을 부여받았음을 아신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친교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서두에서나 요 8:58이나 요 17장에서 요한이 선재하신 주님에 대해 '아들'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선재하신 주님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아들의 관계로 표현한다.
요한에게서 선재하신 주님은 오직 말씀(Word)이고 아들(Son)은 역사적인 부활하신 주님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쪽에 선재를, 다른 쪽에 역사상의 그리고 역사 이후의 삶을 분리하여 너무나 뚜렷하게 선을 긋는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주님(Lord)은 항상 아들(Son)이시다. 그 분만이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천부의 사랑은 온전히 그 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 분만이 하나님과 함께 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오로지 그분에게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다.
모노게네스는 온 삼라만상의 존재 위에 유일하신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용법에 있어서 현재 구원론적인 의미는 근원적인 의미보다 훨씬 더 강조되었다(요 1:14; 요 1:18; 요 3:16; 요 3:18; 요일 4:9). 모노게네스로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헨 에스멘)"(요 10:30)고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포함되는 예수님께서는 역사와 역사적 사실에서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서 그것을 감찰하신다.
(참조: Buchsel; K. -H. Batte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