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선재 논제 245
2562.12. 28
발표자 : 종진
1) 관자재觀自在에 대하여
산스크리트 어로 ‘아발로키테슈바라(스바라)(Avalokiteśvara)는 관자재란 뜻인데, 이는 현장 법사가 번역하였다. 이중에서 아바로키타(avalokita)는 ’관(觀)‘, 이스바라(īśvara)는 ’자재(自在)‘로 한역(번역)한 것이라 한다.‘아바로키테스바라’는 접두어 ‘보다’라는 의미인 ‘아바(ava)'와 세간[세계]을 의미하는 ’로카(loka)'에다 어미 ‘이타(ita)'와 자유 또는 자재를 의미하는 ’이스바라(īśvara)'가 합쳐진 복합어이다. 자재[이스바라]는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그러나 구마라습(鳩摩羅什, Kumārajiva) 법사는 이것을 관세음(觀世音) 도는 관음(觀音)이라 번역하고 있다.이렇게 원어(原語)에 서로 다른 번역이 있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첫째는 원어 자체가 다르다는 설이다. 즉 관세음의 경우 이슈바라의 이(i)가 없어져서 스바라(svāra)로 되면 음(音)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이 때문에 구마라습이 번역한 관세음의 산스크리트 어는 아발로키타슈바라(Avalokiteśvara)라는 것이고,두 번째는《관음경》에서 설하는 뜻을 취하여 그렇게 번역했다는 설이다.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 부처님께서 무진의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약 무량백천만억 중생들이 여러 가지 고뇌를 받게 될 때에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듣고, 일심으로 그 명호를 일컬으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관하고 모두 고뇌에서 해탈케 한다.” 여기서 고뇌를 받고 있는 중생의 ‘음성을 관한다’고 하는 것에서 “관세음”의 의미가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관세음보살은 ‘세간의 고뇌하는 중생의 음성을 보아서 구해 주는 보살’의 의미가 되는데, 음성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들은 일상에서 보는 것은 눈의 작용이라고 생각하지만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귀로도 들어 보고 냄새로 맡아 보고, 혀로 맛을 보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도 보는 것이다.‘관觀’에 대한 해석에는 세 가지 있다한다.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이 그것인데,첫째 공관은 반야를 지혜를 이용해 먼저 모든 외부 경계를 관하면 모두가 연기에 대한 가상假相이며, 그 당체는 바로 공空이므로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 다음으로 임시로 화합하여 있는 사대四大를 관하여 마침내는 무너지고 없어지니, 이 사대를 떠나서 바깥에 본래의 실다운 나는 없다. 다음으로 육식六識의 허망한 마음을 관조하면 생멸生滅하여 무상無常하니, 근根과 진塵을 떠나서 바깥에 본래의 자성自性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둘째 가관假觀은 반야의 지혜를 이용하여 모든 경계境界를 관조하면 비록 본체로는 공의 듯(空義)에 통달했다 해도 연기의 모든 법을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니, 사물에 응하여 인연을 따르더라도 모든 경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셋째 중관中觀은 반야의 지혜를 이용해 모든 법을 관조하면 모두가 중도中道이니, 성품(性)과 현상(相)이 둘이 아님과 색色과 공空이 다르지 않은 이치를 철저히 증득하고, 집착하지도 않고 없애지도 않아 원융圓融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다.결론적으로 공관은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가관은 모든 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중관은 모든 법이 원융하여 비록 집착하지 않으나 또한 버리지도 않는 것이다.관자재보살은 바로 이 삼관三觀으로 말미암아 자재함을 얻은 것이다.또 자재自在에도 세 가지가 있다 한다.첫째, 관경자재觀景自在이다. 이는 보살이 반야의 지혜를 이용하여 진여眞如의 경계를 명료히 비추어 모든 법에 원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다.둘째, 관조자재觀照自在이다. 보살이 반야를 수행하여 관조할 때 깊이 생각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철저히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한 치의 간격이나 미혹(惑)과 장애가 없이 명명백백하게 실상을 몸소 증득하는 것이다.셋째, 작용자재作用自在이다. 이는 보살이 깊은 반야를 수행할 때 몸소 법신法身이 본래 있다는 것을 증득하고, 본체(本體)를 따라서 작용을 일으키니(從體起用) 일체의 신통한 일들이 모두 자재함을 얻어 인연을 따라 감응하는데 걸림이 없다. 또 자재는 바로 자성이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자재의 의미를 해석하면 體체와 용用의 두 가지 뜻을 벗어나지 않는다.
관경, 관조, 작용은 용用의 방면에 속한다
관경觀境은 관해지는 경계(所觀)가 자재함을 밝히는 것이며, 관조觀照는 관하는(能觀) 지혜가 자재함을 밝히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지혜에 속하며 원인에 속하며 자리自利에 속한다. 작용作用은 바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자재함을 밝히는 것으로, 자비慈悲에 속하며 결과에 속하며 이타利他에 속한다.
자재란 오온이 공이라는 것을 조견하여 깊은 반야를 체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욕망, 번뇌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난 자[보살]이다. 그러나 이 보살은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는 자, 바로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관자재보살을 굳이 번역하자면 ‘자유자재하게 세계를 바라보는[관찰하는] 보살’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2) 보살菩薩애 대하여
‘보살菩薩’은 범어로 보리살타(菩提薩埵, bodhi-sattva)인데, 이를 줄여서 보살이라 한다. 보리菩提는 깨달음(覺)이라고 번역하며, 살타薩埵는 유정有情이라고 번역한다. 이를 합하여 말하면 각유정覺有情이 된다. 유정이란 중생을 말한다. 중생이란 말은 무정無情의 식물 또한 내포하는 뜻이 있으니, 실은 유정이라는 말과 견주면 정확하지 않다. 대개 지각이 있고 정신활동의 하는 모두가 유정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말한다면 각유정은 바로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위로는 불도佛道를 구하여 스스로 ‘깨닫고(覺)’, 아래로는 ‘유정有情’을 교화하여 남을 깨닫게(覺他) 하는 것이다.
보리인 불과佛果는 위로 구함(上求)이고, 살타인 유정은 아래로 교화(下化)이다. 보리는 구하는 바의 불과(果)이며, 살타는 제도되는 중생이다. 그러므로 보살이라고 한다.
대승을 보살승(菩薩僧)이라고 하는데 bodhi-sattva(보디 삿트바)라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보살이라는 복합어의 앞 말인 ‘보디bodhi’는 ‘깨달음’, ‘정각’,이라는 한 가지 뜻만을 가지고 있지만, 뒷말인 ‘삿트바sattva’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도의 불교학자 하르 다얄은 그 어의(語義)로서 일곱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① ‘삿트바’는 본질本質을 의미한다. 이 경우 보살이란 ‘정각을 그의 본질로 하는 사람’이 된다.
② ‘삿트바’는 ‘유정有情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 보살이란 ’정각을 얻는다고 정해진 유정‘ 혹은 ’정각을 구하고 있는 유정‘이 된다.
③ ‘삿트바’는 ‘심(心)’ ‘결의(決意)’ ‘지원(志願)’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 보살이란 ‘그 마음, 지원이 정각을 향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
④ ‘삿트바’는 ‘태아胎兒를 의미한다. 이 경우에 보살이란 ’그 지식이 아직은 잠재력. 미발전적인 사람‘이 된다.
⑤ ‘삿트바’는 《요가수트라(Yoga-sūtra)》에서 ‘푸르샤’와 대비적으로 사용되어, ‘의식’, ‘예지’를 의미한다. 이 경우에 보살이란 ‘잠재적 예지의 인격화’가 된다.
⑥ ‘삿트바’에 해당하는 팔리(Pāli) 어 삿타(satta)는 산스크리트 어 사크타(sakta)의 대응어이기도 하다. 이 경우에 보디삿타(bodhisatta), 보디사크타(bodhisakta)는 ‘정각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
⑦ ‘삿트바’는 ‘용기勇氣’를 의미한다. 이 경우에 보살이란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
하르 다알은 이 중에서 두 번째와 여섯 번째, 특히 두 번째를 가장 적절한 해석으로 취하고 있다.
보살이란 자신이 부처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가지고 깨달음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중생으로서 그가 부처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이것을 구하면 그것이 반드시 성취되도록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3) 대승 수행자의 보편적 수행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이념은 바로 보살정신과 6바라밀의 실천이다. 다시 말해 대승의 길(道)로 나아가는 주체는 보살이고, 그 길로 나아가는 실천은 6바라밀(saṭ-pāramita)이라는 것이다. 6바라밀이란 자신의 재물이나 능력을 아낌없이 타인에게 베푸는 보시바라밀(dāna-pāramita), 오계, 팔재계, 보살계를 계속해서 지키는 지계바라바밀(śila-pāramita), 고난을 참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 인욕바라밀(kṣānti-pāramita), 기쁨으로 수행 노력하는 정진바라밀(vīraya-pāramita), 바른 선정을 실천하여 마음을 집중하는 선정바라밀(dhyāna-pāramita), 붓다의 바른 가르침을 배워 진리[진실]을 보고 지혜를 얻는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a)을 말한다.
바라밀은 생각만 갖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늘 관세음보살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면 언젠가 중생의 탈을 벗고 관자재보살과 같은 불보살의 위(位)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왕초보 반야심경 박사되다」김명우/민족사
「반야심경 강의」빈종법사/운주사
「반야심경과 선 공부」법상스님/무한
「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김명우/민족사
「혜담스님의 반야심경」혜담스님/불교시대사
「반야심경찬」원측/주민출판사
종진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