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동서원(鹿洞書院)
김충선(金忠善, 일본어: 沙也可 さやか 사야카, 1571년 ~ 1642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항왜 장수로, 귀화한 후에는 자를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으로 지었다. 일본의 역사서에는 이 사야카가 정확하게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한국 측에서도 《조선왕조실록》에 두 번 언급될 뿐이다. 그에 대해 그나마 언급된 것은 그 자신이 쓴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다. 본관은 김해(金海)다.
임진왜란과 항왜 김충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박진에게 항복한 뒤 귀부(歸附)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동래성으로 상륙한 지 다음 날이었다. 이때 사야카는 박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이후 사야카는 경상도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郭再祐)와도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 전공을 세워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孫時老)등 항복한 왜장(倭將)과 함께 의령(宜寧)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관 3품(三品)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이어 사야카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金景瑞) 휘하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선조로부터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하인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
임진왜란 이후 행적
임진왜란 이후 야인(野人)들의 침입이 잦자 변방(邊方) 방어를 자청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10년 동안 북방 변경 수비를 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이괄의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포참(捕斬)한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에 반납하여 둔전(屯田)을 만들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소명(召命)을 받지 않고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나가 싸워 청나라 병사 500여 명을 베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대구의 녹리(鹿里)로 돌아갔다. 1643년 외괴권관(外怪權管)으로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중 청(淸)나라 칙사의 항의로 해직되어 대구(大邱) 녹리(鹿里)로 돌아왔다.
사후 녹동서원(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배향되었다. 1798년(정조13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녹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4년 재건되었다.
김충선의 실체
조선은 왜란 중에 조총을 자체 개발하여 조총 부대를 만들었다. 학계에서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보급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실제 조총을 개발한 사람은 본래 일본에서도 철포대라 하여 조총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김충선(사야카)으로 보고 있다. 실제 김충선이 귀화한 직후 조총 개발을 건의하는 서신을 절도사에게 제출했고, 이순신과 나눈 서신에서는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김충선은 조선으로 귀화한 후, 조선에 일본식 조총 및 화약 제조법과 철포대(일본에서 조총 부대를 일컫던 이름) 전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점을 근거로 일본 측 사야카 연구가들은 일본 센고쿠 시대때 와카야마 현의 사이카(雑賀)라 불린 철포 부대의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가 사야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와카야마 현에서 옛 총을 연구하는 고식 총 연구회의 고문이기도 한 일본 소설가 고사카 지로도 그런 사람들의 한 명이다. 실제로 스즈키 마고이치는 조선으로 출정했고, 출정 후 즉시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나고야 성(현 사가 현 가라쓰 시)까지 100명을 이끌고 갔는데, 스즈키 혼자만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일본측의 기록에서 사이카슈(雑賀衆)에 소속된 스즈키 요시유키(鈴木善之)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시유키의 이름과 김충선의 자인 선지(善之)인데 같은 한자를 사용한다고 하여, 그가 김충선이라는 설도 있다.
이에 대해 사이난가쿠인 대학의 마루야마 교수는 사야카가 스즈키 마고이치가 아니라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라고 주장한다. 스즈키 마고이치는 반히데요시 세력의 한 명이었기 때문에 가토의 선봉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토가 출병 전에 작성한 예하 부대 및 장수 명단에 사야카란 이름은 없지만, 철포대를 보유하고 있던 하라다 노부타네는 있으며, 하라다 역시 출병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면서 그가 사야카라고 주장한다. 전사했는데 확인이 안되었거나 투항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미다. 가능성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대립하여 조선에 투항한 오카모도 에치고라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고여무(沙古汝武), 사여모(沙汝某), 사야가(沙也可)라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사고여무는 복성이다. 사여모(沙汝某)는 단성 인지 복성인지 확실하지 않다. 사야(沙耶), 사야(紗弥)는 주로 성보다는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야라는 지명도 여러 있다. 사야가(沙也可)의 경우는 사야가라는 이름의 여러 해석 때문에 성인지 이름인지 명확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의 일본 장수 성명은 일본 기록과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목사(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결혼, 5남 1녀를 두었으며 가훈(家訓), 향약(鄕約) 등을 마련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그의 후손들인 사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사성 김씨는 족보에서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은 김충선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밝히고 있다.
아들로는 김경원(金敬元), 김경신(金敬信), 김우상(金右祥), 김계인(金繼仁), 김경인(金敬仁)을 두었다. 손자로는 김진영(金振英), 김여삼(金汝三), 김용하(金龍河)를 두었다.
현대 후손으로는 박정희 정부 의 법무부,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김치열, 대학교수 김윤희, 전 AOS 부회장 김형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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