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시문학사의 변화와 추사 김정희
이철희(성대 대동문화연구원 교수)
1. 머리말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예계의 거장으로 추사 김정희를 꼽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서예분야에서는 동아시아의 최정상으로 칭송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추세에는 오늘날의 시각이 개입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추사체를 거론할 때 현대적 감각과 조형미를 거론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20세기를 사는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서도 추사체는 찬탄을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사체에 대한 연구만으로 추사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뿐만 아니라, 당대 현실 속에서 그 존재 의의가 분명해야만 한다. 소위 거장이란 자기 시대의 문제와 고군분투하며 기존과는 다른 길을 개척한 자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추사체를 논하기 앞서 추사가 무엇과 싸웠는가를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추사가 19세기 문예계에 최고의 거장으로 추숭(追崇)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소위 ‘완당 바람’이라 칭해지는 서화계의 일대 변화는 조선후기 문예사에 뚜렷한 단층이 추사로 인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미술학계의 표현을 빌리자면 18세기 절정을 이룬 진경화풍(眞景畵風)이 단절되고, 문인화풍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화풍(書畵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예 전반에 걸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추사는 서화뿐만 아니라 시론분야에서도 청조문예이론의 성과를 흡수하여 이전 시기와는 다른 새로운 이론과 감각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추사는 이전시대의 시론들과 어떠한 대립점(對立點)을 형성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고, 추사가 개척한 길은 당대에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2. 조선후기 시문학사의 변화와 추사 김정희
조선후기 실학의 3대 유파에서 ‘실사구시학파’의 대표자로 칭해지는 추사는 청조학술 뿐만 아니라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과 같은 우리나라 선배 실학자들로 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청조학계 인사들과 맺은 학술적 교류는 사실 이들이 마련한 가교위에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승적(繼承的) 측면뿐만 아니라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실사구시학파’가 따로 구분되는 것이며, 추사가 그 대표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 사이의 차이점은 시문학분야에서도 분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2-1 ‘박학의 시학’에서 ‘실사구시의 시학’으로
추사 이전 시기라 할 수 있는 18세기 문학론의 출발점은 명대(明代) 의고주의(擬古主義)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까지 주도하고 있었던 의고주의는 김창협(金昌協, 1651~1708), 김창흡(金昌翕, 1653~1722) 형제와 같은 노론 명문가로부터 홍세태(洪世泰, 1653~1725)와 같은 충인층에 이르기까지 명대(明代) 공안(公安), 경릉파(竟陵派)의 문학론이 폭넓게 수용되면서 문예계의 기치가 ‘법고(法古)’에서 ‘창신(創新)’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에 자유롭고 개성적 문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상 위에서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문학의 특징 ‘백탑시사’로 칭해지기도 하는 연암 박지원그룹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담헌 홍대용으로부터 일기 시작 청대학술에 대한 학문적 열의는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 등에 이르러 큰 진전을 보게 되는데, 이들이 조선의 보수적 편협성과 문학적 후진성을 인식하며 선진문물의 수용을 지향하는 사상적 전환의 첨단에 섰던 것이다.<열하일기>, <북학의> 등의 저술을 통하여 ‘이용후생’의 실학을 추구하였는데, 소위 ‘중원벽(中原癖)이라 칭해질 정도의 박학에 대한 열정은 명말청초의 문학에 있어서도 왕성하게 섭취하며 전파시켜 나갔다. 그들은 <수호지>, <서상기> 등과 같은 소설을 즐겨 읽고, 불온한 사상에 감염된 것으로 평가받는 공안, 경릉파의 문학을 탐독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단행하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김영택이 영조 이후의 시풍을 “기궤첨신(奇詭尖新)”이라 규정하며 중국 만당(晩唐)의 시풍에 비견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망국의 퇴폐적 문학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먼저 백탑시사의 특징은 시학습의 전범을 확대시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유득공은 ‘검서체’라는 유별난 시체를 만들어냈다는 지목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당시(唐詩)든 송시(宋詩)든 아니면 원시(元詩) 명시(明詩)든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림이 없이 수많은 작가를 종횡으로 공부하여 그 정수만을 취하는데 뜻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이덕무는 시경으로부터 중국전시대의 시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안남, 일본, 유구국의 시를 모두 섭렵할 것을 맹세하면서 ‘상하 삼천년(上下 三千年), 종횡 일만리(縱橫 一萬里)에 안력(眼力)이 미치는 바는 조금도 남기지 않아 스스로 양보하지 않겠다.’고 한 글에서 시학에 대한 박학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이 맹세를 실천하여 유득공은 중국과 한국의 전 분야, 전 시대의 시를 뽑아 초록하기도 하였다. 이덕무는 시학습의 대상에 대하여 벌이 꿀을 만들 때 꽃을 가리지 않는 것에 비유하였고, 박제가는 문학을 다양한 음식의 맛에 비유하여 선을 행하는 데에는 정해진 스승이 없다는 뜻을 지닌 <서경>의 “선무상사(善無常師)”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그들의 박학에는 어떤 선택의 기준이나 가치관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공안, 경릉파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또 스스로 그 폐단을 경계하면서도 그들의 시문집을 탐독하고 또 그 매력에 빠져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시문학이 생기있는 개성의 시대로 칭해지는 데는 그들이 이렇게 시 감상과 학습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한 환경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계속)
첫댓글 행복한 4월 맞으세요 무림선생님...공부잘했습니다...
벌써 4월! 봄꽃... 살구꽃이 하마 졌겠습니다.
박제가의 <묘향산수기> 전문을 구할 수 없을까요? 일부만 접할 수 있었는데 그 화려한 문구와 뛰어난 감성에 매료되었거든요. 쌤~~! 감사합니다....^.*
초정의ㅡ 妙香山小記(묘향산 기행문)라 있습니다. 태학사에서 나온 태학산문선 101권으로 안대회 교수가 국역한 박제가의 산문선집으로 <궁핑한 날의 벗> 속에 나와 있습니다. 물꽃나무님, 참고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