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서안(西安)]에서 5일(4-4)
(2024년 4월 24일∼28일)
瓦也 정유순
4-3. 진시황릉(秦始皇陵)
병마용을 나온 발걸음은 서쪽으로 약1.5㎞ 이동하여 진시황릉으로 간다.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 최초의 황제(皇帝)인 진시황제의 묘(墓)로, 여산(驪山) 또는 역산(酈山)이라고 불리며 중국 섬서성 서안 임동구에 있는 야산에 있다. BC 246년에서 BC 208년까지 38년간 공사를 했으며, 지금의 황릉은 야트막한 피라미드형으로, 시간이 지나며 그 높이가 낮아졌음에도 높이가 무려 76m나 된다.
<진시황제릉 모형도>
진시황릉은 당시 수도였던 진시황의 함양(咸陽) 궁전을 그대로 축소, 복제한 모형이라고 한다. 거대한 봉우리가 중앙에 있고, 내성과 외성이 이를 차례대로 둘러싸며 보호하고 있다. 또한 내성과 외성 안팎에 군데군데 점토로 구워 만든 병마용과 유물들이 묻혀있다. 내성벽 내부의 서쪽 부근에서는 청동 마차와 말들이 발견되었다. 내성벽 안에서는 황제들을 모시던 관료들의 모습을 본뜬 인형들이 발굴되었다.
<여산원 - 진시황제릉 입구>
외성의 둘레는 6.3㎞이고, 내성의 둘레는 2.5㎞이며 전체 면적은 2.26㎢(683,650평)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산은 당시 내성이었던 부분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을 바라보는 앞에서 눈요기만 한다. 우리 서울대공원의 코끼리열차 같은 관람차를 타면 황릉을 한 바퀴 돌 수 있었으나 선택하지 않았다. 관(棺)이 안치된 매장실(埋葬室)과 기타 부장품(副葬品)들은 지금까지 완전히 발굴되지 못하였다.
<진시황제릉 안내판>
외성과 내성 안 사이의 공간에서는 무희들과 광대들의 인형들이 출토되었다. 외성벽 북쪽에서는 황실 정원이 있었는데, 이 정원에서 청동으로 만든 학과 거위, 오리, 악사들의 모형이 발굴되었다. 외성 바깥쪽에서는, 말들이 산 채로 묻힌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진시황릉 서쪽에서는 이 능을 짓기 위해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의 유해가 묻혀있었는데, 병마용은 진시황을 사후세계에서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진시황제릉 표지석>
이와 같이 진시황릉은 본격적으로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를 발굴하기 위해 수많은 기술이 연구되고 있으며, 진시황의 지하 궁전이 봉우리 바로 아래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고고학자들이 금속 탐지기를 통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봉우리 아래에서 약 4m 정도 높이의 벽이 발견되었는데, 가로로 390m이고 세로로 460m였다고 한다. 이는 지하 궁전을 지탱하는 벽으로 추정되며, 벽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진시황제릉>
이 벽들의 사면에는 완만한 경사로가 연결되는데, 이 중 서쪽에 연결되는 경사로에서는 청동 말들과 마차가 발견되었다. 관(棺)이 들어있는 매장실 자체는, 동서로 80m이며, 남북으로 50m이고, 그 높이는 약 15m 정도다. 다만 지하 궁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약 20m에서부터 최대 50m까지라는 학설이 분분하다. 능 연구에 참여한 과학자들에 의하면, 대부분의 금속 구조물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고 한다.
<진시황제릉비>
이는 진시황릉에 설치된 안정적인 배수 시스템 덕분으로 여겨진다.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릉을 팔 때 지하수를 세 번이나 만났기 때문에 능을 잘 보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배수 설비가 완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00년에는 지하 댐과 배수로가 발견되었고, 지하궁전은 침수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진시황릉 주변의 토양에서 극도로 높은 수치의 수은이 검출되었는데, 이는 사기에 기록된 내용 중 ‘수은으로 하천과 강, 바다를 가득 채웠다’라는 부분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시황제릉 앞의 초원>
일부 학자들은 만약 지하 궁전의 발굴로 수은(水銀)이 외부 공기에 노출되면, 공기 중으로 확산(擴散)될 것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총 54곳에서 수은 검사를 하였는데, 한 군데에서만 유독 1440ppm에 달하는 수은이 검출되었고, 나머지 53곳에서는 보통과 비슷한 205ppm에 근접한 수치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산업오염(産業汚染)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진시황제릉 개요>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본기※> 편에 따르면 기원전 246년, 진시황이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진시황릉의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처럼 산 하나를 통째로 쌓아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난 후였다. 즉위 초부터 여산(酈山)에 무덤을 착공하기 시작하였고, 통일 후에 국력이 강성해지자 이곳의 공사를 위하여 최대 70여만 명까지 동원하였다고 사기에 나온다.
<진시황제릉 비석>
진시황(秦始皇)은 조(趙)나라 수도 하북성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다. 성은 영(嬴)이고, 씨(氏)는 조(趙), 이름은 정(政)이다. 장양왕(BC 281∼BC 247)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왕위를 계승하여 39세에 황제라 칭했고, 37년간 재위했다. 제후들이 할거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는 통일을 향한 추세가 날이 갈수록 뚜렷해진다. 당시 진나라는 동방 6국(한·위·조·제·초·연)을 아우를 수 있는 국력을 갖춘 최강국이었다. 진왕 정의 즉위 초에 국정은 상국(相國, 재상) 여불위와 환관 노애가 좌우하고 있었다.
<진시황제 석상>
BC 238년 정(政)은 몸소 국정을 맡는 한편, 노애의 반란을 다스리고 여불위의 상국 자리를 면직시키고 그를 촉군(蜀郡)으로 내쳤다. 이와 함께 위료(魏缭)와 이사(李斯) 등을 발탁하여 전국을 통일하기 위한 전략과 책략을 마련하기 위한 부서를 만들었다. BC 230년부터 221년에 이르는 동안 차례차례 동방 6국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그리고 다민족적이고 전제주의 중앙집권제 국가인 진(秦)을 탄생시켰다.
<진시황제릉 - 국가중점문화유물지정비>
그러나 진(秦)의 역사는 오로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내용이 전부인 것 같다. 13살에 즉위한 진시황이 과연 죽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설령 당시 섭정(攝政)을 한 여불위(呂不韋)도 어린 왕의 죽음을 위해 미리 무덤을 만들 수 있었을까? 춘추전국시대에 아무리 진나라가 동방 6국(한·위·조·제·초·연)을 압도(壓倒)하고 있더라도 혼란기에 병사(兵士)를 동원하여 능역(陵域) 공사에 동원할 수 있었을까?
<여산(驪山)>
사후세계를 건설하고 있는 황제가 과연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서불(徐市)을 동방으로 파견할 수 있었을까? 진시황을 포악한 군주로 만든 갱유분서(坑儒焚書)도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혹시 그 당시에 참고했던 기록을 왜곡하여 사기를 쓰고는 나중에 문제 될 만한 자료를 없애고 진시황이 마치 없애버린 양 꾸민 것은 아닌가? 이는 사기의 내용을 실증할 수 있는 다른 사료(史料)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병마용>
그리고 혹시 황릉을 발굴하면 증명할 만한 지석(誌石)이나 다른 유물이 나올 법도 한데, 황릉의 발굴조사를 미루기 때문에 의심은 더해 간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만약에 진시황이 살아생전에 자신의 유택(幽宅)을 만들었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의 출생과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도 의문투성이다.
참고로 진시황릉은 병마용갱과 함께 1987년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병마용>
[붙임]
※<진시황본기(秦始皇本記)>
九月, 葬始皇酈山, 始皇初即位, 穿治酈山, 及并天下, 天下徒送詣七十餘萬人, 穿三泉, 下銅而致槨 宮觀百官奇器珍怪徙臧滿之 令匠作機弩矢, 有所穿近者輒射之 以水銀為百川江河大海, 機相灌輸, 上具天文, 下具地理, 以人魚膏為燭, 度不滅者久之, 二世曰「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皆令從死, 死者甚眾。葬既已下,或言「工匠為機, 臧皆知之,臧重即泄, 大事畢, 已臧, 閉中羨下, 外羨門, 盡閉工匠臧者, 無復出者 樹草木以象山
"9월, 시황제를 여산(酈山)에 매장했다. 시황제가 처음 즉위 했을 때 여산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게 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궁궐과 여러 관리,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매장하였다. 장인에게 기계 쇠뇌를 만들게 하여 (묘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하였다.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하였다.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추었다. 인어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하였다. 이세 황제가 말하기를 “자식이 없는, 선제의 후궁을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매장을 끝내자 누군가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모든 노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노예가 많아 (사실이) 누설될 것입니다." 장례가 끝나고 (보물 등을) 이미 다 감추어 놓자, 묘의 가운데 통로를 폐쇄하고 바깥문도 폐쇄하여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마치 산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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