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사랑하는 두 남녀
등아는 세 늙은이를 보며 여유만만하게 생글거렸다.
"세 분을 무슨 일이든 왜 그리도 깜깜이세요? 늙으면 다 그런가요, 호호호……."
노불락이 대번에 이맛살을 찡그렸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아무리 귀가 어둡다 한들 그래 우리가 남의 일에 깜깜이란 말이냐? 아니면 화산파 일에?"
"남의 일은 물론이고 화산파 일도 모르신다 그 말씀이에요."
등아는 짐짓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래소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지. 한데 우리가 제 집안일도 모른다는 건 무얼 두고 하는 소린가, 엉?"
"그럼 한 가지 물을게요. 선우순이 자기의 사형을 모해하고 화산파 장문 자리를 차지한 내막을 아시나요?"
등아가 정색하고 물으니 삼로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등아는 빙긋 웃으며 한마디 쐐기를 박았다.
"여보세요, 어르신들. 저와 이이는 도망치지 않을 테니 먼저 자기 사형를 모해한 선우순이나 잡아 족친 후에 저희들을 죽이든가 말든가 하세요. 화는 언제나 안으로부터 생기는 법이에요. 군자는 제 집안부터 다스린다는 말도 있잖아요?"
삼로는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길게 한숨을 날렸다.
"한숨을 내쉴 건 뭐예요?"
노래소는 열적게 웃으며 투덜거렸다.
"선우순이 화산파 장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검을 가지고 있으니 우린 어쩌는 수가 없단 말야."
"참, 그러니. 제가 답답하다 그러지요! 그런 주제들이시니 저희들 일도 이제 그만 간섭하고 어서 저리 비켜요."
삼로는 벌떡 일어나 그 자리에 잠자코 선 채 말이 없었다.
등아는 앉은걸음으로 두어 발짝 비켜 앉았다. 곽명송도 따라왔다. 둘은 세 늙은이가 있거나 말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백사장에 누웠다. 등아가 곽명송의 가슴으로 파고드니 곽명송은 적이 난색을 지었다. 등아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점잔을 뺄 건 뭐예요? 여든 자신 늙은이들이 옆에 있다뿐인데요."
그러면서 등아는 더욱 곽명송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곽명송도 후끈 달아올라 아무 거리낌없이 등아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두 남녀가 자기들을 아랑곳하지도 않자 삼로는 포기한 듯 털퍼덕 주저앉아 그쪽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을 멍청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노래소가 먼저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말했다.
"어이구, 난 피곤해서 먼저 눈 좀 붙여야겠네."
"그래 한잠 자두세. 제 놈들이 뛰면 어디로 뛰겠나?"
노시락도 한마디 거들며 벌렁 드러누웠다. 두 사람이 넘어지자 노불락도 뒤따라 몸을 눕혔다. 그러더니 곧바로 드렁드렁 코를 곯아댔다.
노인들의 코고는 소리마저도 그들에게는 마치 음악 소리처럼 흘러 들었다. 두 젊은 남녀의 몸뚱어리는 시간을 더할수록 점점 불덩이처럼 달라올랐다. 곽명송의 뜨거운 입이 등아의 입술을 찾아 헤매고 등아는 스스럼없이 입을 주면서 두 팔로 곽명송의 목을 감고 늘어졌다. 곽명송은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아아…… 그날 밤도 이렇게 입을 맞추었지……."
곽명송에겐 그날 밤은 마치 까마득한 전설 같기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흥분에 다시금 사로잡혀 그는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천상배필이란 말은 필시 이 두 남녀를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닐까. 휘영청 밝은 달이 두둥실 중천에 걸려 백사장에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등아가 가만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서방님, 우리 도망칠까요?"
"어떻게 도망을 친단 말이오, 저 삼로의 무공아 귀신 같다는데. 무공으로 삼로를 꺾을 만한 사람은 황약사와 구양봉밖에 없다고 하지 않소."
"그럼 날샐녘까지 계속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뭐."
등아는 애교를 떨며 한 눈을 꿈쩍여 보이더니 다시금 곽명송의 넓은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무렵, 향녀들은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북방으로 북방으로 가고 있었다. 강남에는 그간 적을 삼은 무리들이 너무나 많아 도무지 자리를 잡고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풍막을 씌운 마차 네대에 나누어 앉아 온종일 길을 다그쳤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그녀들은 해묵은 홰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하룻밤 묵어 가기로 했다. 홍사가 향녀 셋을 불러 놓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이젠 등아 언니도 없고 하니 각별히 조심들을 해야겠어. 먼저 너희 셋이 보초를 서되 무슨 자그마한 동정이라도 있으면 지체 말고 우리를 깨워야 해."
셋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쪽으로 걸어갔다.
향녀들은 마차 옆에 나란히 누웠다. 하루종일 피곤했던 터라 그녀들은 이내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동정의 백사장에서 곽명송과 등아가 기이한 첫날밤을 지내던 바로 그 밤이었다. 문득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에 뒤미처 성난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보초를 서던 향녀들이 기겁을 하여 뛰어오면서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들 일어나요, 어서들!"
마차 옆에 누웠던 향녀들은 일제히 발딱발딱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사방에 횃불이 번쩍이고 웬 사내들 한 무리가 그녀들을 에워싸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웬 사람들이오?"
홍사가 다그쳐 물었다. 횃불을 든 사내들 속에서 누군가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네 년들이 사람을 죽일 때도 그렇게 점잖게 묻고는 죽였더냐?"
향녀들은 저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향녀들과 원수진 놈들임에 틀림 없었으나 도대체 어느 패거리인지 알 길이 없었다. 향녀들은 서로 등을 돌려대고 둥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단검을 빼 들었다. 놈들은 횃불을 치켜 들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점점 더 죄어 들었다. 하나같이 흉측하게 생긴 몰골이었다.
"대관절 어쩔 셈이오?"
홍사가 다시금 재우쳐 물었다. 그러자 볼따구니가 흉하게 축 처진 사내가 씩 웃으며 우쭐거렸다.
"그래 네 년들은 운남 십팔마(十八馬)라는 이름도 듣지 못했단 말이냐?"
운남 십팔마란 이름 그대로 열여덟 명으로, 운남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사나운 도적 떼였다. 이들은 돈과 재물을 빼앗는 짓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사람을 잡아죽이는 악귀와 진배없는 놈들이었다. 향녀들은 운남 십팔마라는 말에 저마다 오싹 소름이 돋아 서로 쳐다보며 마음을 다졌다. 향녀 하나가 짐짓 눈웃음을 치면서 나섰다.
"아이 참, 이제 보니 운남 십팔마 형제들이로군요. 실례했어요. 여기서 만나 뵐 줄은 몰랐어요. 참말 뜻밖이군요! 늦었지만 저희 향녀들의 인사나 받으세요."
그러자 키가 껑충한 사내가 말을 받았다.
"닥쳐! 입에 발린 인사나 받자고 온종일 뒤쫓아온 줄 아느냐? 우린 네 년들 몸뚱어리가 탐나서 일심으로 뒤쫓아온 게야. 듣자니 네 년들은 악양루에서 갖은 교태를 다 부렸다더군. 심지어 천하호걸들 앞에서 훌훌 앞가슴을 헤치고 탐스러운 젖가슴까지 자랑했다면서? 우리 운남 십팔마도 병신이 아닌 이상 네 년들 맛을 좀 봐야겠다. 세상일이란 늘 공평해야 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여긴 황량한 들판이라, 남의 눈도 없으니 조금도 내숭떨 것 없다. 자, 걱정 말고 어서 옷
들이나 홀랑홀랑 벗으라구! 일이 끝난 다음에는 우리가 너희 서른 남짓을 모두 거두어 줄 테니! 너희들같이 굴러먹던 계집들에겐 꿩 먹고 알 먹기 아니냐, 으하하하……."
사내들은 일제히 허리를 꺾어가며 박장대소했다.
향녀들은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용 빼는 재주도 없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무공이 뛰어난 등아 향녀만 있다면 사생결단하고 싸워 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 사나운 도적 떼를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은 말로 구슬리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향녀들은 웃는 얼굴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 향녀가 또 환히 웃으며 말했다.
"십팔마 오라버님들, 저희 향녀들은 악양루 잔치가 파한 그날부터 강호의 주먹놀음이나 칼부림에서는 손을 씻고 나앉기로 했어요. 다시 그런 싸움판에 뛰어들면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비웃을 거예요. 그런즉 저희 향녀들 체면을 봐서 더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그러자 키가 장대 같은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구말구! 바로 네 년들이 피를 보는 싸움에서 손을 씻고 착한 계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여편네로 삼으려는 거야. 아직도 천방지축 날뛰는 계집들이라면 누가 주워 가겠니. 아무튼 네 년들은 스물여덟이고 우린 열여덟이야. 한 사내 앞에 두 계집씩은 좀 모자라니까 우리들끼리 제비를 뽑아야 하겠군. 제기랄, 그래도 반 이상은 둘씩 차지한단 말이야, 으하하하……."
향녀들은 서로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주고받았다. 아마도 일장혈투는 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향녀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좋아요, 그래도 오라버님들이 이 누이동생들을 사람 취급해 주는군요. 그럼 어디 한번 맞붙어 보십시다!"
향녀들은 단도를 움켜쥐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나갔다. 젱겅젱겅 칼날이 부딪치고 번쩍번쩍 밤 하늘에 불꽃이 튀었다. 일장 악전(惡戰)이 이제 막 밤 공기를 가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맞붙어 보니 난다 긴다 하던 소문은 다 헛소문인 듯 운남 십팔마도 그다지 무예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힘이 장사요, 병장기 또한 가지각색이라 장검이 번쩍이고 철퇴가 윙윙 울어대고 쇠채찍이 가로세로 기승을 부렸다. 향녀들은 고작 손에 잡은 것이 단검밖에 없는지라 자연 지탱해 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향녀들은 공격을 들이대지는 못하고 가벼운 경공으로 요리 조리 몸을 피하면서 허점을 노릴 뿐이었다.
아까 그 장대 같은 사내가 서넛 되는 향녀들을 맡아 싸우며 큰소리로 지껄여댔다.
"여보게 아낙네들, 괜히 칼부림에 힘 다 쓰고 나면 이따가 무슨 힘으로 우릴 받아 주겠나. 힘은 두었다 그때 쓰라구!"
그 말에 여기저기 널려 있던 십팔마 패거리들이 낄낄 웃으며 병장기를 휘둘러댔다. 일순 향녀 하나가 칼을 맞고 찢어지듯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걸 보고 가까이 있던 향녀 하나가 다급히 달려갔다. 바로 그때, 한 사내가 그녀를 바짝 뒤쫓아 삽시에 낚아채 옆구리에 끼고 큰소리로 외쳤다.
"형제들, 힘들 내. 난 벌써 여편네 감을 하나 골라 잡았어!
"잘했어! 누구든 잡으면 임자지!"
놈들은 맞장구를 치면서 더욱 기세 좋게 병장기를 휘둘러댔다. 장대 같은 사내도 덥석 향녀 하나를 낚아챘다. 그러자 그녀는 몸부림을 치면서 악을 쓰더니 대뜸 사내의 팔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향녀를 떨어뜨려 버렸다. 그때를 틈타 향녀는 땅에 떨어진 단검을 거머쥐고 번개같이 자기 가슴을 콱 찔렀다. 짐승 같은 놈들에게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기로 모질게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녀는 가슴에 꽂힌 칼자루를 부여잡은 채 힘
없이 풀썩 쓰러졌다.
"멍청이 같은 자식, 다 잡은 년을 놓치고 난리야, 병신같이!"
사내들은 하나같이 핀잔을 주었다.
마차 옆에서는 한 놈이 향녀 하나를 땅에 쓰러뜨린 채 깔고 앉아 마구 옷을 벗기고 있었다.
"이 짐승 같은 놈아, 이걸 놔라, 이걸 놔!"
그녀는 두 손으로 옷고름을 거머쥐고 악을 써댔다. 그러자 사내는 향녀의 손을 비틀면서 저고리를 확 잡아 찢고는 능청을 떨었다.
"예전에는 말이야, 향녀들이 아양을 떨고 끝내 주게 교태를 부려 사내를 녹여 놓았지만 젖통만은 꼴불견이었다구. 그런데 이거 어이구…… 아무래도 황약사란 양반한테 감사를 드려야겠어. 글쎄 그대들의 젖통을 진짜 이팔청춘 아가씨들 모양으로 곱게 치료해 주었으니깐. 어이구 탐스러워라, 요것아!"
사내는 향녀의 도도록한 젖꼭지를 잡아 살짝 비틀었다. 향녀는 고개를 모로 꺾은 채 눈가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다른 사내들은 향녀를 깔고 앉은 사내가 부러워 침을 질질 흘리며 더욱 사납게 향녀들에게 달려들었다. 향녀들은 이제 기진맥진 해서 날아드는 검이며 철퇴를 가까스로 피하며 홰나무까지 바투 물러섰다. 향녀 하나가 다른 향녀들을 둘러보며 비장하게 외쳤다.
"우리 내세에서 다시 만나자!"
그녀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순식간에 가슴에 단검을 푹 박았다. 또 향녀 하나가 죽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하나 둘 가슴에 칼을 박고 연달아 푹푹 쓰러졌다. 잠깐 사이에 홰나무 주위에는 예닐곱 향녀의 시체가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그러자 운남 십팔마의 두령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등신 같은 자식들아, 다 죽기 전에 어서 사로잡지 못햇! 그래, 죽은 귀신을 가져다가 여편네로 삼을 셈이냐?"
놈들은 두령의 호령이 떨어지자 더욱 바짝 다가들면서 칼을 휘두르다가 틈만 생기면 향녀들에게서 단검을 빼앗아 휙 던져 버리고는 그녀들을 깔아뭉갰다. 얼마나 흘렀을까, 더러는 죽고 더러는 크게 상처를 입은 채 향녀들은 모두 놈들에게 사로잡혔다.
사내들은 삭정이를 주워다 화톳불을 피워 놓고 빙 둘러앉더니 왁자지껄 떠들어대면서 술을 마셨다.
두목이 도끼눈을 해 가지고 좌중을 둘러보더니 운을 뗐다.
"몇 년 죽어 넘어졌어도 아직 우리보단 많아. 하니 맏이인 내가 일단 계집 둘은 가져야겠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내가 대뜸 나섰다.
"나는 셋을 잡았어. 그러니까 최소한 둘은 가져야 해. 그래도 하나는 양보하는 셈이라구."
"이 놈들, 장유유서도 모르냐? 나이에 따라 순서가 있는 법이야. 맏형이 끝났으면 내 차례지 네 녀석이 왜 나서!"
늙수그레한 염소 수염 사내가 발딱 일어서며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다른 한 놈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빈정댔다.
"둘째형님은 계집 하나 잡지 못한 주제에 침대 위에서 어떻게 둘씩이나 다루겠다구 욕심을 부리는 게요.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좀 체면을 차릴 줄도 알아야지, 나 원……."
그러자 사내들은 배를 그러안고 박장대소를 했다. 염소 수염은 발끈하며 칼을 휙 뽑아들고 으르렁거렸다.
"이 놈, 다시 한 번 그따위 잡소리를 하면 모가지가 날아갈 줄 알앗!"
허장성세로 저런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내들은 누구 하나 대거리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향녀를 차지하는 일에서 만큼은 누구도 양보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한동안이나 옥신각신 다투며 내남없이 언성을 높여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한 순간 모두를 제압하며 두목이 꽥 소리를 질렀다.
"주둥이 닥치지 못햇! 내 칼 맛을 보아야 닥치겠느냐?"
이 두목이란 자는 성미가 불 같은지라 모두들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는 두목의 눈치만 살폈다.
두목은 진작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계집은 무슨 일에서든 늘 불화의 화근인 법이다. 그러니 만약 이 계집들을 공평하게 나누지 못하면 앞으로 형제들의 의가 벌어지게 되고 말 것임에 틀림없었다. 두목은 짐짓 점잖게 훈계를 했다.
"향녀들을 계집으로만 봤다간 큰코다친다! 저 년들은 겉은 계집이지만 속은 여느 사내보다 더 독해! 아무때든 복수하려고 날칠 날이 있을 테니 단단히 조심들 하란 말이야. 행여 끼고 살다가 행실이 석연치 않은 구석만 보이면 가차없이 죽여 버려야 한다구."
장대 같은 사내가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참 형님도, 계집이면 그냥 계집이지 뭘 그러시우? 이제 사내맛을 한번 보면 집고양이처럼 온순해질 거외다."
"맏형, 꺽다리 말이 옳지요, 계집이야 분명 계집이겠지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어요. 다들 싫으면 나한테 둘도 좋고 셋도 좋고 몽땅 주시라요. 나 한번 진시황처럼 살아 보게시리."
다른 한 놈이 맞장구를 쳤다. 그 말에 사내들은 또 한 번 웃음보를 터뜨렸다.
향녀들은 결박당한 채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모두들 초췌하기 이를 데 없고 저마다의 눈빛엔 애잔하고 처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등아 향녀가 부럽기도 할 뿐더러 원망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등아 향녀는 곽명송 같은 순박하고 듬직한 낭군을 만나 일평생 행복하게 살 터이나 남아 있는 이 향녀들은 이게 무슨 꼴인가? 애초에 세상을 쉽게 보고 등아를 시집보낸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여인들을 욕심내고 괴롭히는 색마들이 있는
한 향녀들은 똘똘 뭉쳐서 싸워야 했다. 한데 지금에 와서야 도로 물릴 수도 없는 터, 이를 어쩐단 말인가? 향녀들은 실로 후회막급이었다. 그녀들은 얼핏 맥을 놓고 앉아 있는 듯했지만 내심 잔뜩 긴장한 채 틈만 노리고 있었다. 틈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자결하리라.
운남 십팔마는 그제야 간신히 합의를 보았다. 맏이로부터 차례로 둘씩 갖고 그 다음엔 하나씩 가지기로 했다. 둘째는 아무런 재주도, 공로도 없었지만 항렬이 높은 까닭에 향녀 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한껏 기분이 좋아서 맏이에게 공손히 권했다.
"형님, 먼저 고르시죠!"
그러자 십팔마는 일제히 일어나 향녀들에게로 다가왔다. 맏이가 제일 먼저 나서서 으쓱거리며 향녀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는 손끝으로 향녀들의 턱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보더니 난색을 지었다.
"제기랄, 다 한 어미 구녕으로 나온 딸년들인지 모두 신통하게도 닮았군. 하나같이 예쁜데 어느 년을 고른단 말인가?"
사내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더니 복판에 있는 두 향녀를 끌고 나오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고분고분하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다!"
그러자 사내들은 잇따라 향녀들을 하나 둘씩 꿰차고 저마다 희희낙락거리며 어둠이 내려앉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가련한 향녀들은 마치 거친 사냥꾼에게 끌려가는 꽃사슴 같았다.
향녀들은 그 당장 자결을 못할 바에야 덮어놓고 악을 쓴다고 소용이 없을 게 뻔하므로 갖은 교태와 아양을 부려 이 우악스러운 사내들을 꺼꾸러뜨리자고 나직이 입을 모았었다. 키다리 사내에게 끌려간 향녀는 사내가 포승을 풀어 주자마자 사내의 목에 냉큼 감기면서 아양을 떨었다.
"당신들은 참 무지막지한 양반들이에요. 계집에게 이렇듯 포승을 지워 죄인 다루듯 하다니, 그래선 안 되는 거예요. 자고로 계집이란 햇병아리 다루듯 품어 주고 쓰다듬어 줘야 하는 거예요……."
그러자 키다리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 숨을 헐떡거리며 서둘러 향녀의 앞가슴을 풀어헤쳤다. 그와 동시에 향녀의 오른손은 슬그머니 사내의 허리춤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묵직한 물건을 텁석 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으악!"
사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향녀를 콱 떠밀었다. 그녀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면서도 간드러지게 깔깔 웃어댔다. 사내는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두어 바퀴 뱅뱅 돌더니 장검을 쓱 뽑아들었다.
"요 앙큼한 년, 이 어른을 병신으로 만들려고 수작을 부린! 내 네 년을 당장 죽여 버리고 말 테다!"
키다리는 장검을 높이 쳐들고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온몸의 힘을 다 두 팔에 모았는데도 어인 영문인지 장검은 얼어붙은 듯 허공에 멈춘 채 꼼짝도 안 했다.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키다리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다 허사였다. 필시 누군가 허공에서 장검을 붙잡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ㄴ!"
키다리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호탕한 웃음 소리가 어둠을 뚫고 휙 내리꽂혔다.
"누구냐고? 난 황약사란 사람이다. 네 놈들도 귀가 있다면 똑똑히 들었을 것인즉, 내 악양루 잔치 때 분명히 말해 둔 바 있다. 이제부터 착한 여인들로 환생한 이 향녀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은 내가 친히 나서서 가차없이 죽여 버릴 것이라고 말이다!"
그 소린 마치 고요한 밤 하늘에 울리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한창 몸이 달아올라 가쁘게 숨을 몰아 쉬며 쓱쓱 팔소매를 걷어붙이던 사내들은 너나없이 눈들이 떼꾼해졌다. 황약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재주를 가졌다더니 과연 또 나타났구나! 사내들은 갈팡질팡 종을 못 잡다가 얼른 향녀들을 붙잡았다. 향녀들을 방패로 삼아 대적할 심산이었다.
십팔마 두목은 양손에 두 향녀의 팔을 비틀어 잡아 쥐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언뜻 기골이 장대한 사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그 곁에 그림자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달빛에 기대어 자세히 살펴보니 나중에 떠오른 그림자는 여인이었다. 미목이 수려한 것이 향녀들보다도 훨씬 아리따웠다. 천하 미인으로 이름 높은 황약사의 아내 아형이 분명했다. 두목은 그녀를 보자 얼른 약은 꾀가 하나 떠올랐다. 듣자니 저 여자는 무공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저 여자를 사로잡
아 방패로 삼는다면 난다 긴다 하는 황약사도 쩔쩔매지 않겠는가. 두목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여덟째까지는 나하고 저 놈의 여편네를 빼앗자!"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여덟 놈이 일시에 황약사와 아형에게로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머지 놈들은 잽싸게 향녀들을 한곳에 몰아붙였다.
"신난다, 많이 덤빌수록 좋다! 거기 놈들도 어서 덤비거라!"
황약사는 호기롭게 외쳐대며 번개같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쌩 바람소리가 일면서 계란만한 돌멩이 하나가 휙 날아가더니 허공에서 짝 갈라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칼을 비껴 들고 앞장서 달려들던 세 놈이 으악, 으악 비명을 지르며 칼을 팽개치고는 두 눈을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금세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물컹물컹 흘러 나왔다. 세 놈은 선 자리에서 뱅뱅 돌며 아우성을 쳤다.
"어이구, 이를 어쩌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중 한 놈은 혼비백산하여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갈지자로 뛰어가다가 일순 향녀들의 다리에 걸려 기우뚱 나자빠졌다. 향녀 하나가 슬쩍 단검을 뽑아 그 놈의 가슴팍에 깊숙이 박았다.
두목은 가슴이 철렁했다. 황약사의 탄지신법이 이토록 무서울 줄은 천만 뜻밖이었다. 두목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공중제비를 돌며 껑충 솟구쳐 올랐다가 대번에 황약사에게 덮쳐 들었다. 황약사는 피식 웃으며 또다시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두목은 뒤로 넉 장이나 밀려가 벌렁 나자빠졌다.
"형님, 형님!……."
두목이 나가떨어지자 운남 십팔마들은 우왕좌왕 비틀거리더니 다시 뭉쳐서 일제히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모두 열여섯 놈이었는데 개중 둘은 이미 두 눈을 잃고 무리에 섞여 허우적허우적 달려들고 있었다. 무시로 철퇴가 날아들고 시퍼런 장검이 허공을 가르며 머리 위에 떨어졌다. 황약사는 아형을 안고 경공으로 슬슬 몸을 피하며 속삭였다.
"아형, 당신은 말끝마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지? 그럼 이 개 같은 놈들도 죽이지 말아야 하나?"
그러자 아형은 곱게 눈을 흘겼다.
"저들도 사람인가요? 저는 분명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녀는 깔깔 웃었다. 황약사는 아형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능청을 떨었다.
"아무렴, 과연 동사 황약사의 여편네가 다르긴 다르군! 그럼 내 저 놈들을 잡아죽이는 걸 보라구!"
황약사는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처럼 아형을 데리고 떠다녔다. 흉물스럽게 생긴 사내 하나가 검질기게 다가들었다.
"황약사, 네 놈의 여편네를 다친 것도 아닌데 왜 오지랖 넓게 나서는 게냐?"
황약사는 픽 웃으면서 그 놈의 정수리에 한 장을 먹였다. 팍 소리가 일며 사내의 두 눈알이 벌컥 튀어나왔다. 놈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꼬꾸라져 버렸다. 그 틈에 다른 한 놈이 아형의 가슴을 겨누고 시퍼런 장검을 똑바로 쏘아붙였다.
"네 년이 황약사의 여편네냐? 내 네 년부터 먼저 죽여야겠다!"
그러나 아형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기실 아형은 도화도에서 나는 명물 고슴도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 옷은 아무리 예리한 칼이라도 뚫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내는 내심 흠칫 놀라며 주춤거렸다. 그 순간 황약사가 퉁긴 돌멩이 하나가 그 사내의 뒤통수로 된통 내리꽂혔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푹 꼬꾸라졌다.
황약사가 아형을 데리고 놈들의 주위를 건들건들 돌다가 슬쩍 멈춰 설 때마다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한놈씩 쓰러졌다.
십팔마는 벌써 여섯이 죽고 열둘이 남았다. 이젠 도저히 황약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도망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놈이 용기를 내서 불쑥 물었다.
"황약사, 우리가 당신한테 굴복한다면 당신은 우리들을 어떻게 조처할 셈이오?"
"너희들의 죄로 봐선 백번 죽여 마땅하나 병장기를 놓고 손을 든다면야 목숨은 살려 주지. 하나 네 놈들은 내가 주는 독약을 먹고 스스로 혀를 잘라 버린 뒤 도화도로 가서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한다. 이를 거역하는 놈은 그 당장 죽여 버릴 테다!"
"에끼, 이 지독한 놈아! 내 칼이나 받아라!"
한 사내가 버럭 성을 내며 장검을 내질렀다. 황약사는 슬쩍 피하며 번개같이 칼등을 잡아 살짝 틀었다. 삽시에 시퍼런 칼날은 두동강이 났다. 십팔마 패거리들을 그만 돌처럼 굳어 버렸다.
"네 놈은 살길을 틔워 줘도 굴복치 않으니 죽는 길밖에 없다!"
황약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점잖게 내쏘더니 칼자루 쥔 놈의 가슴팍에 번개같이 한 장을 날렸다. 놈은 입가로 왈칵 피거품을 빼물더니 휙 넘어갔다.
살아 남은 열한 명은 이제 완전히 기가 죽어 서로를 멍청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이젠 운남 십팔마도 끝장이란 말인가……. 사내들은 어지러이 널려 있는 형제들의 시체를 보며 장탄식을 토해냈다. 하나 자기들이 죽은 형제들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었다. 황약사에게 무릎을 꿇는다 한들 죽는 것보다 무엇이 낫겠는가. 세상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황약사의 도화도에는 혀 잘린 사내들이 피골이 상접해서 매일 무서운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지 않은가.
"악귀 같은 놈! 말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노역에 시달리다가 도화도에서 무주고혼이 되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고 말겠다!"
한 사내가 한걸음 쓱 내닫더니 이내 칼을 부여잡고 배를 푹 찔렀다. 시퍼런 칼날이 번쩍였다. 잇따라 또 두 놈이 의미심장하게 눈짓을 주고 받고는 악 소리를 지르며 칼날을 서로 상대방의 가슴에 깊숙이 박고는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이젠 여덟 놈밖에 남지 않았다. 개중에는 두 눈을 잃은 둘째 두령도 끼여 있었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면서 넙죽 엎드려 애걸복걸했다.
"황 도주님, 난 도화도에라도 쾌히 가겠소!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도화도에 양곡을 실어 가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너같이 앞 못 보는 병신은 밥이나 축내지 아무런 쓸모도 없어!"
황약사는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한 장을 날렸다.
"참, 서방님도!……."
아형은 민망스럽다는 듯 흘끔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황약사는 빙긋 웃어 보이며 잽싸게 주워섬겼다.
"이 놈은 여간 심사가 고약한 놈이 아니라서 살려 두면 후환이 될걸세."
그리고는 살아 남은 일곱 놈에게 휙 약을 던져 주었다.
"너희들은 어서 그 약을 먹어라. 그리고 이 길로 당장 동해 바닷가에 가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거라. 반나절 정도 노를 저어 가노라면 쪽배 한 척이 나타나 너희들을 도화도로 인도해 갈 것이다. 섬에 오르면 자연히 독을 풀어 줄 사람이 나타날 것이나 만약 삼십일이 넘도록 도화도에 가지 않으면 필연코 죽게 될지어다."
일곱 사내는 넙죽 절을 하고는 서로들 눈치를 살피며 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꽁무니 빠지듯 숲 속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향녀들은 왈칵 눈물을 쏟으며 황약사와 아형 앞으로 달려왔다. 아형은 측은하니 향녀들을 둘러보며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고생들을 하셨어요? 울지들 말고 어서 여기 앉아요."
그러자 향녀들은 더한층 서럽게 울어댔다. 실로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그녀들은 의연하게 앉아 있는 황약사와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는 아형을 쳐다보면서 등아를 사무치게 그리고 있었다. 등아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황약사는 조용히 옥퉁소를 꺼내 입으로 가져 갔다. 이윽고 유연한 퉁소 소리가 은은한 달빛에 실려 멀리멀리 울려 갔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향녀들도 마음이 잠차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희뿌여니 동이 트기 시작했다. 곽명송과 등아는 여전히 부둥켜안고 서로를 애무하고 있었다. 삼로는 진작부터 잠이 깨어 눈동자를 말똥말똥 굴리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세 늙은이는 서로 앞다투어 선 하품들을 해댔다.
등아가 조용히 속살거렸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이젠 정말 죽어도 원이 없어요!"
곽명송은 뜨거운 눈길로 등아를 바라보더니 다시금 으스러지게 껴안으면서 그녀의 달아오른 입술이며 능금알 같은 두 볼에 미친 듯이 입을 맞췄다.
세 늙은이는 짐짓 헛기침을 해 가며 서로 쳐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어쩌면 저렇게도 뻔뻔스러운 연놈이 있단 말인가. 세 늙은이는 낮간지러워서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어 제각각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노래소가 선뜻 나서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곽명송, 날이 훤히 밝았다. 어서 우리 삼로의 칼을 받아라!"
곽명송은 애잔한 눈길로 등아를 바라보았다.
"당신, 후회하지 않겠지?"
등아는 담담하니 말을 받았다.
"후회하기는요? 저는 일생에 서방님과 같은 사내를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한걸요. 정말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됐어, 됐어! 우리 세 늙은이들 코앞에서 온밤 내내 물고 빨고 했으면 지칠 때도 됐다. 이제 어서 발딱 일어서거라!"
노불락은 귀찮다는 듯이 이맛살을 찡그리고 투덜댔다. 노시락이 말을 이었다.
"명송이, 죽기 전에 남길 말은 없나?"
곽명송은 등아의 손을 가만히 떼놓고는 천천히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저는 다만 세 분 사숙조님께서 기울어지고 있는 화산파를 바로 잡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못 쓸쓸한 기색이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조용히 꿇어앉아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칼 받을 채비를 했다. 노래소는 곽명송을 그윽이 내려다보더니 등아를 건너다보며 이죽거렸다.
"너는 꽤나 총명하게 생겼는데 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지?"
"도망요? 저도 겪을 건 다 겪었어요. 이런 곤경도 여러 번 당했고 또 여러 번 도망을 쳤었지요. 하지만 이번만은 다 늙어빠진 영감태기들 손에서 도망을 치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등아는 생글거리며 비꼬았다. 그러자 노불락이 버럭 화를 냈다.
"뭐야? 이 앙큼한 년이 늙은이들을 데리고 놀려 들어? 어디 한번 다시 지쩔여 봐! 주둥이를 찢어 놓을 테니!"
"좋아요, 얼마든지 다시 지껄이죠! 당신들은 젊었을 적에도 계집 하나 낚을 줄 모르는 밥통들이었고 수염이 허옇게 된 지금도 눈치코치 모르는 등신들이라구요! 남의 장단에 춤만 추지 말고 늙을수록 제정신으로 살아야죠. 늙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겠어요?"
등아는 연주포 쏘아대듯이 쏘아붙이고는 까르르 웃어젖혔다. 삼로는 머리 끝까지 분이 치밀어 올라 길길이 날뛰었다.
"뭐야? 네 년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아니, 저런 년 봤나? 우리보고 등신이라네!"
"아니, 이 년은 입이 개차반이군그래, 감히 제 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삼로는 일제히 장검을 빼 들고 곧바로 등아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찌를 염은 못 냈다. 칼끝이 바르르 떨렸다.
"왜 찌르지는 못하고 그렇게 떨기만 하나? 방금 자네들에게 밥통이라고 욕을 했는데도!"
노래소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짜증을 냈다. 그러자 노불락이 울상이 되어 노시락을 돌아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저 년은 노형보고 등신이라고 한 거야! 저 년은 노형 손으로 죽여야 해!"
노시락도 질세라 느물거리며 따지고 들었다.
"이것아, 네 년이 날보고 욕했단 말이냐, 아니면 이 두 양반을 욕했단 말이냐? 날 보고 욕했다면 내가 널 죽이겠지만……."
삼로는 실없이 티격태격하면서 좀체로 누구도 선뜻 칼을 쓰려 하지 않았다. 등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 다들 찌르지 못하고 그러고 있는 거예요? 말뚝처럼 서 있기만 할 거면 저희 둘은 그만 가보겠어요! 자 서방님, 그만 가요!"
등아는 등을 돌리며 곽명송에게 말을 건넸다. 노래소가 안달을 하며 대뜸 소리쳤다.
"멍청히 서서 뭣들 하고 있나? 이 연놈들이 슬쩍 꽁무니를 빼려고 하는데!"
그러자 노불락은 기막힌 꾀가 있다는 듯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럼 이렇게 하세나. 셋이 함께 일시에 찌르는 거야, 먼저 사내놈을!"
"그, 그러세!"
다른 두 늙은이도 마지못해 응수를 했다. 셋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입술을 깨물고는 고함을 지르며 검을 내질렀다.
"화산병풍!"
검 세 개는 일제히 곽명송의 가슴으로 똑바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곽명송의 가슴팍과 단 일 촌을 사이에 두고 검 세 개는 아교로 딱 붙인 것같이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음 순간, 세 늙은이는 너나없이 맥빠진 한숨을 날렸다.
노래소가 제일 먼저 검을 푹 모래사장에 박으면서 중얼거렸다.
"어이구 맥빠라지네. 자네들 둘도 어쩌면 그렇게 나와 똑같나! 무정키로 이름 높던 우리 화산삼경(華山三劍)도 이젠 인정에 울고 인정에 떨리는구먼. 난 도무지 이 새파란 놈들의 가슴팍에 칼을 댈 수가 없으어. 자네들도 그런가 보이, 그런가 보아!"
그러자 노불락과 노시락도 제가끔 게두덜거렸다.
"어린 양처럼 모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놈한테 어떻게 칼을 댄단 말이여?"
"밉든 곱든 우리 후배가 아닌가? 젖비린내 나는 놈한테 칼을 댈 수야 없지."
삼로는 연해 한숨만 날릴 따름이었다. 곽명송과 등아는 서로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세 늙은이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에 빠지더니 이윽고 노래소가 입을 열었다.
"이 놈아, 너는 화산파의 후배가 아니냐? 선배님들 모두가 난감해하고 있으니 네 스스로 목숨을 끊거라. 그래야 후배 된 도리를 하는 거다."
그 말에 곽명송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숙조님, 저는 스스로 자결할 수는 없소이다. 사숙조님들은 저의 죄를 논하고 계시지만 저로서는 제가 도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그러니 지그시 눈을 감고 검을 받을 수는 있사오나 스스로 자결할 까닭은 없는 줄로 아옵니다!"
노래소가 대번에 펄쩍 뛰었다.
"어이구, 이 놈이 그래도 바락바락 대드네, 바락바락 대들어! 그래 네 놈이 죄가 없단 말이냐?"
그러자 노시락이 노래소를 제치며 능글맞게 눈웃음을 쳤다.
"명송이, 그렇다면 좋아! 이젠 이 늙은 것들을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말고 독주나 한잔 마시게. 그게 아마도 제일 점잖은 방책일 듯싶네, 이히히……."
그러나 곽명송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노래소는 그의 정수리를 얄밉게 쏘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내가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아마 이 방법이 제격일 게야!"
다른 두 늙은이가 다그쳐 물었다.
"무슨 방법이게?"
"이 검을 계집에게 주어 먼저 사내를 찌르게 하잔 말야. 그러면 사내도 화가 나서 계집을 찔러 눕힐걸세. 이렇게 하면 우리도 손을 더럽히지 않고 얼마나 좋은가 말이여!"
"그 방법도 좋긴 한데 누가 저 계집에게 권고한단 말인가?"
셋은 아뿔싸 하며 또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저마다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노형이 권고해 보세나, 노형이!"
"에끼, 이 사람! 내가 어떻게……."
삼로는 또 한참이나 옥신각신하더니 그래도 말을 꺼낸 노래소가 나서기로 입을 모았다. 노래소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가씨, 내 말 좀 들어 보라구. 자네는 총명해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서도 사람이란 백 살을 살다가 죽을 수도 있고 여남은 살 꽃 같은 나이에 죽을 수도 있어. 하나 내 칠십 평생을 보면 스무 살 먹기 전이 그래도 제일 재미가 있었지, 그 뒤의 생활은 통 재미가 없더라구. 그런즉 아가씨도 부득부득 오래 살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한창 나이일 때 껌뻑 속세를 떠나란 말야. 한마디로 인생은 살수록 괴롭고 귀찮은 법이니까. 내 말 알아듣겠어?"
"알겠어요."
등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소는 뛸 듯이 좋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허 참, 정말 똑똑한 아가씨로군, 흐흐흐……."
그때껏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던 곽명송이 한숨을 내쉬고는 울적하니 말했다.
"사숙조님들, 세 분의 딱한 사정도 알 만하외다. 저희를 죽이고 돌아가야 화산파 형제들에게 큰소릴 칠 수 있다 이거겠지요. 그럼 세 분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제 스스로 자결 하겠으니 어서 검을 주십시오!"
그러자 삼로는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서로 마주보았다. 두 늙은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노래소가 곽명송에게 검을 건네 주었다. 시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여인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 왔다.
"이 미욱한 사람들이 예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삼로는 깜짝 놀라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운고 노파 아닌가?"
"글쎄……."
"맞아, 분명 그 할망구야!"
세 늙은이가 한마디씩 중얼거리는데 휘익 바람소리가 일며 순식간에 학발계안의 깡마른 노파가 삼로 앞에 떨어져 내렸다. 복색으로 보아하니 꼭 여승 같은데 기상은 흉맹하기 짝이 없었다. 노파는 독수리같이 사나운 눈매로 삼로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삼로는 횡설수설 잘도 지껄여 대더니 이 깡마른 노파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얼굴들이 벌개져서는 눈치만 살폈다.
노파는 곽명송에게 선뜻 눈길을 던지며 매섭게 캐물었다.
"네가 이 낭자의 남정인가?"
"네, 그렇소이다. 등아의 남편이지요."
노파는 얄미운 눈초리로 등아를 흘겨보았다.
"반반하게. 생긴 계집이 바보 같은 남편을 섬기고 있군! 덮어놓고 죽여 주십사 하고 설설 기는 사내는 당장에 차 버리란 말야!"
노파는 벽력같이 꾸짖고 나서 다시 곽명송을 쏘아보았다.
"이 미련퉁이 같은 자식아, 물건을 달았으면 여편네 거느릴 줄도 알고 배짱도 있어야지, 그래 남이 죽으란다고 그렇게 순순히 죽는단 말이냐! 여기 이 세 영감태기는 말라 비틀어진 여편네 하나 없는 홀아비들이지만 너는 꽃 같은 새색시를 맞은 새신랑이 아니냐? 새색시를 두고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냐?"
"서방님이 죽으면 저도 죽을래요."
등아는 얼른 끼여들어 짐짓 울상을 하고 중얼거렸다. 노파는 장탄식을 하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런 미친 것들 봤나!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방정맞게 죽겠다는 소리밖에 안 하는군. 여기 이 세 영감태기들을 보란 말야. 호두알같이 쭈글쭈글 늙어빠진 주제에 그래도 남에게 잘 보이겠다고 버둥거리질 않나 말이야? 나 원 기가 막혀서……."
노파는 대놓고 삼로에게 욕을 퍼부었으나 그들은 잠자코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노파는 다시 곽명송을 보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너도 화산파냐?"
"그렇소이다."
곽명송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똑바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그는 하마터면 앗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노파가 바로 그 옛날 삼로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 여인이 아닐까? 만약 그 여인이 아니라면 우악스럽고 괴팍한 삼로가 이처럼 고분고분 말을 들을 리 만무였다.
노파는 곽명송과 등아를 번갈아 보더니 불쑥 말했다.
"너희 둘은 어서 가보거라. 이 세 영감태기가 다시 너희들을 못살게 군다면 내 정녕코 용서치 않으리라, 기어이 죽여 버리고 나도 자진하고 말 것이야!"
그제야 비로소 화산파세 노인은 서로 흘끔흘끔 쳐다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운고! 장문이 보검을 잡고 분부한 일이니 우린들 어쩔 도리가 있겠소."
노파의 쭈글쭈글한 양 볼에 한 가득 홍조가 어리더니 삽시에 사그라졌다. 운고라니, 몇 십 년 만에 들어 보는 이름인가. 노파는 일순 마음이 두근거려 숨을 크게 한번 꿀꺽 삼키고는 다시금 호되게 삼로를 닦아세웠다.
"선우순이 자기 사형을 암해하고 장문 자리에 오른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이 젊은이들한테 듣기는 들었소만……."
"그런 배은망덕한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 당신들은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얼뜨기들이군요! 속된 말로 만약 검둥개가 장문의 보검을 차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들은 그 검둥개를 따라 멍멍 짖어댈 위인들이라구요! 제발 좀 치신머리 있게 사시라구요!"
세 늙은이는 톡톡히 무안을 당해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젠 선우순의 됨됨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그가 장문의 보검을 가지고 있는 이상 새삼스레 등을 돌려 대기도 뭣한 노릇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두 남녀를 처치하려던 터였다. 삼로는 명분을 지키는 데 이미 머리가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노불락은 울상을 해 가지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운고, 이제부터 선우순 놈과 담을 쌓고 지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소만 우리가 평생 지켜 온 명분과 절의는 어떡하란 말이오?"
노파는 허탈하게 웃었다.
"참 답답한 양반들이군요! 아무튼 화산 삼로 노릇을 그만둘 생각이 있는 사람은 저의 암자에 와서 문지기 노릇이나 해 줘요."
화산 삼로 노릇을 집어치우고 운고의 말동무나 하면서 문지기 노룻을 한다……, 이보다 더 멋들어진 소임이 어디 있겠는가. 세 늙은이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앞다투어 청을 넣었다.
"좋았어, 좋아! 이 지긋지긋한 삼로 노릇은 그만두고 내가 문지기 노릇을 하겠어!"
"좋아요, 세 분 다 원하신다면 지금 즉시 암자에 가 계세요!"
그러자 세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곽명송을 힐끔 돌아보았다. 노래소가 정색을 하고 곽명송에게 신신당부했다.
"명송이, 자낸 솔직히 화산파에서 제일 듬직한 사나일세. 화산파는 앞으로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선우순 놈이 화산파를 말아 먹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도리를 해야 해. 알겠나? 부탁일세!"
곽명송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선우순을 다스릴 사람은 이 삼로밖에 없는데 그런 중임을 다 팽개치고 자기한테만 미뤄 버리다니, 곽명송은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노래소는 다시 등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히죽거렸다.
"참 복성스러운 계집이야! 미안하지만 저 노파가 젊었을 때보다도 더 예쁘단 말이여……."
세 늙은이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흐물흐물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