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장 만남
①
"홍루부인이 직접 남궁청운의 목을 베기 위해 오신단 말씀이오?"
"그렇다네."
"이상한 일이군요. 그럼 홍루부인이 과거 남궁청운이나 무림군왕성에 깊은 원한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나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네."
"빌어먹을, 아쉽군요. 그 오만한 놈 만큼은 내 손으로 처단하고 싶었는데."
"후후, 물론 그렇겠지. 그동안 녀석의 종노릇하느라 오죽이나 한이 맺혔겠느냐? 노부는 충분히 이해한다."
"어쨌든 소문만 듣던 홍루부인의 미색을 이번에는 직접 볼 수 있게 됐군요."
종리무와 소손방이었다.
두 사람은 무림군왕성의 잠룡헌에 술상을 차려놓은 채 대화하고 있었다. 성주인 남궁청운은 수하들과 함께 녹림과 십정회를 대적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그들은 성내에 남아 편안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떠냐? 요즘 재미가."
소손방이 외눈에 묘한 빛을 띄우며 물었다.
"하하하! 몰라서 물으십니까? 한마디로 꿀 속에 잠겨 사는 기분입니다. 하하하핫!"
종리무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녀석, 그리도 좋으냐? 그런데 네 어여쁜 각시는 왜 골방에 처박혀 꼼짝을 않는 거냐?"
"후후, 아직은 사람들 보기가 부끄러운가 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복에 불과했던 놈과 부부지간이 된다고 공표했으니 말입니다."
"오라! 이젠 변론까지 하는구나? 어쨌든 좋다. 넌 그 계집을 잘 다스려라. 네가 군왕성의 성주로 공인받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말이다."
"흐흐, 걱정 마십시오. 그녀는 평생 이 놈을 하늘처럼 받들고 살 겁니다."
"흐흐, 자신이 넘치는구나."
종리무는 어깨를 으쓱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참, 괴수신의란 놈이 도주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소손방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 철통 같은 경비를 뚫고 어떻게 놈이 탈출했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놈은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는 상태니 요행이 목숨은 건진다 해도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할 테니 걱정할 건 없다."
"대체 어떤 놈이 그자를 구해냈단 말입니까?"
"현재 조사중이니 조만간 밝혀질 것이다. 분명 본천에 첩자가 있는 것 같다. 혐의가 있는 놈들이 압축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종리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흐흐, 주기가 오르니 어디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소손방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무슨 뜻인지 깨달은 듯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이놈아, 중이 고기맛 보면 절간의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더니 네가 그 꼴이구나. 너무 서둘지 마라. 어차피 네 놈의 정식 계집이 될 것 아니냐?"
"헤헤헤! 그때는 그때고 오늘은 시원하게 몸 좀 풀어봐야겠습니다."
종리무는 교활한 웃음을 흘리며 밖으로 사라졌다.
②
"수선언니,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어요. 사실 저라고 뭐 별다른 사람인가요. 부모님은 모두 비참하게 돌아가시고, 유일한 혈육인 오라버니는 권좌에만 눈이 멀어 있으니 전 천애고아나 다름없어요. 더구나 여인이 가야 하는 길은 정해져 있잖아요? 어떤 이유든 간에 이미 순결을 바쳤으니 그 사람을 향해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운명이잖아요?"
"......."
황보수선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남궁소연이 종리무와 혼인한다는 공표를 했을 때 너무나 놀랐었다. 그래서 말리려고 찾아왔으나 남궁소연의 결심은 너무나 확고한 것이었다.
"소연 동생, 아무리 그런 일이 있다 해도 꼭 부부가 될 필요는 없지 않아? 더구나 네 마음속에는 당소협이 있지 않니?"
남궁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언니, 그 사람은 이미 잊었어요. 혼인도 않은 채 성급히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 내가 거절했다고 휭하니 사라져 버렸잖아요? 그런 소인배는 이제 생각도 하기 싫어요. 거기에 비한다면 종리공자님이야말로 진짜 사나이에요."
"......!"
황보수선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종리무에 대한 호칭조차 어느새 공자님으로 바뀌어 버린 이상 더 이상은 설득이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란 느낌이 든 것이다.
"하지만......."
이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종리무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암, 그렇고 말고. 난 하시라도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지! 하하하......!"
대소를 터뜨리는 종리무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물씬 풍겨나왔다.
그는 술이 몹시 취한 듯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남궁소연을 향해 다가가더니 황보수선이 보는 가운데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어! 수선낭자는 언제 왔소?"
황보수선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이 작자가? 이젠 안하무인이로구나.'
거만해진 종리무의 태도에 그녀는 불쾌함을 금치 못했으나 남궁소연의 입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간신히 고개를 까딱했다.
"방금 왔어요, 오랜만이군요."
"하하하! 수선낭자의 인사를 받는 기분도 나쁘진 않구려."
종리무는 남궁소연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소연, 볼일이 있으니 어서 일어나시오."
남궁소연은 아미를 곱게 찌푸렸다.
"안돼요, 일부러 수선언니가 찾아왔는데......."
종리무는 갑자기 버럭 외쳤다.
"안되긴 뭐가 안돼!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텐데. 아! 수선낭자도 원한다면 함께 있어도 좋소. 소연의 뜻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종리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황보수선을 훑어보았다. 황보수선은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남궁소연이 질겁을 하고 일어났다.
"공자님, 너무 취하셨어요. 그만 말씀하시고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도 곧 들어갈 테니."
그러나 종리무는 남궁소연의 어깨를 홱 낚아채더니 침실 쪽으로 끌고 갔다.
"시간 낭비할 필요가 뭐 있어? 어차피 지아비나 다름없는데. 벌써부터 내 말을 무시해도 된단 말이야?"
"악! 아파요."
침실로 끌려가던 남궁소연이 비명을 질렀다. 황보수선의 눈은 한껏 크게 떠졌다. 그녀는 도무지 눈앞의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는... 어째서 저런 천박한 작자와.......'
두 사람의 모습은 침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 직후.
"아아! 공자님. 제발... 제발... 아아!"
황보수선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보지 않아도 침실 안에서 어떤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지 뻔했다. 그녀는 귀를 틀어막은 채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③
회군(回軍).
녹림을 정벌하러 나갔던 무림군왕성의 무사들이 돌아왔다.
남궁청운은 힘없이 모습으로 성내로 들어섰다. 그를 따랐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정벌에서 무림군왕성은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예상 밖으로 녹림도가 십정회와 연합하는 바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무거운 부담만 안은 채 정벌을 포기하고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남궁청운은 잠풍각의 침소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번뇌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을까?
왜 군웅들은 자신을 따르려 하지 않는 것일까? 비록 겉으로는 그를 따르는 척하지만 충심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을 패도적인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녹림도와 십정회는 무림군왕성과의 결전을 번번이 회피하곤 했다. 그 바람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기력만 소진한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무림군왕성의 기강이었다.
근자 들어 성내의 규율이 흩어지고 있었다. 특히 총관 소손방과 종리무의 태도가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점점 더 오만불손해지고 있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의문이 일어났다.
과연 부친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그가 출정중에 일어난 사건도 그렇다. 모친이 능욕당한 채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는 사실을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누이동생 남궁소연이 종리무와 혼례를 치른다니?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으으! 대체 뭐가 어찌 되가는지 모르겠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신음을 흘렸다. 이때였다.
"나으리, 군향이옵니다. 잠시 여쭐 말이 있사옵니다."
밖에서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라."
방문이 열리며 예군향이 들어섰다. 그녀는 여전히 화려한 궁장 차림이었다.
"오랜만이군. 그대의 얼굴을 본 지도."
"송구스럽사옵니다. 성주님."
살짝 허리를 숙이면서도 그녀는 예전처럼 그에게 바짝 다가오지 않았다.
"요즘 무림군왕성의 사기가 예전같지 않아 성주님의 심려가 크신 줄 알고 있습니다."
"으음, 그래도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군."
"하여 드리는 말씀이온데 신첩도 이만 만화루를 정리할까 하옵니다."
"그야 그대가 알아서 할 일 아닌가?"
"신첩의 말은 그동안 곁에 두어온 두 명의 고수를 이곳으로 불러오려는 것이옵니다. 그들을 성주님 곁에 둔다면 도움이 될까해서지요."
남궁청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개 기루의 종을 불러 뭐하겠단 말인가?"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들의 무예는 성주님께 버금갈 경지이옵니다.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사오나 분명 본성의 기둥이 될 인물들이옵니다."
"하하하! 방금 뭐라고 했느냐? 나와 버금간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남궁청운은 어이가 없다못해 광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예군향은 차갑게 말했다.
"직접 보시면 아실 것이옵니다."
남궁청운은 너무나 기가 막혔으나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아, 좋아. 어쨌든 날 위해 마음을 써주는 것은 고맙구만."
용건을 마친 예군향은 미련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날이 밝는 대로 그들을 불러들이도록 하겠사옵니다. 신첩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군향!"
남궁청운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하실 말씀이 있사옵니까? 나으리."
형식에 얽매어 있는 딱딱한 예군향의 말투였다. 남궁청운은 그녀를 쏘아보다가 털썩 주저앉으며 힘없이 물었다.
"말해다오. 어찌하여 그대마저 날 냉대하는가?"
순간 예군향의 속눈썹이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그러나 순간에 불과했다.
"그건 오해며 억측이옵니다."
"그렇지 않다. 어서 말해다오."
"신첩은 난감할 따름이옵니다. 그런 적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남궁청운이 절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군향! 난 지금 몹시 괴롭소. 부디 진실을 말해주시오."
예군향의 어깨가 부풀었다가는 이내 가라앉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선 성주님의 헛된 야망을 버리고 진실을 찾으셔야 할 것으로 아옵니다. 하지만... 늦었어요. 너무 늦었어요."
"군향, 늦었다니 아니 대체 그게......."
남궁청운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으나 예군향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궁청운은 머리칼을 움켜쥐고 도로 주저앉았다. 그의 머리는 난마처럼 엉키고 말았다.
갑자기 외로움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고독(孤獨)이 그의 전신을 폭풍처럼 몰아쳐 아득한 고도(孤島)로 밀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전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문득 그의 가슴속에 한 여인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는 머리를 움켜쥔 채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아, 연소저! 채령... 당신은 지금 어디 있소?"
무림군왕성을 빠져나온 황보수선은 말을 타고 무작정 달렸다.
남궁소연과 종리무의 이해할 수 없는 관계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말을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말이 멈춘 곳은 한 야산 계곡을 흐르는 개울 앞이었다.
그녀는 말에서 뛰어내려 밑바닥까지 보이는 맑은 물에 얼굴을 씻었다. 비로소 흐트러졌던 마음이 약간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또다시 왈칵 설움이 치밀어들어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녀는 오랫동안 고독하게 살아왔다. 태중정혼한 사람을 그리며 희망도 없이 살아온 나날이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죽은 줄 알았던 관운빈을 만났을 때, 그녀는 비로소 자신에게 행복이 찾아왔다고 믿었다.
이젠 단 하루도 혼자서는 살 수가 없을 정도로 관운빈에게 모든 것을 바친 상태였다.
그런데 정인은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더구나 강호에 떠도는 풍문에는 악도들의 기습을 받아 처참하게 죽었다지 않은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어진 것이다.
기실 그녀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관운빈의 뒤를 따라 죽으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아아! 운빈... 당신은 대체 어디 있나요? 어찌하여 제게 돌아오지 않는 건가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오랜만이구려. 황보소저."
갑자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는 바람에 그녀는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앗! 너는......?"
음악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자는 놀랍게도 옥선공자 호사붕이었다.
"후후,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슬피 우는 것이오? 그리도 외롭다면 이 호사붕이 위로해 주리다."
"이... 원수! 잘 만났다!"
황보수선은 치를 떨며 검을 뽑았다. 호사붕이 누구인가? 부친을 해한 불구대천지수가 아니던가.
"어이쿠! 얌전한 벽월선자께서 어찌하여 이리도 흉폭해지셨나?"
호사붕은 훌쩍 뒤로 몸을 날리며 이죽거렸다.
"어디로 가느냐?"
황보수선은 신형을 날려 호사붕을 덮쳐갔다.
슈슈슈슉!
"앗!"
황보수선은 비명을 질렀다. 사방으로부터 무수한 암기가 그녀를 향해 폭사되었던 것이다.
'아차! 내가 정신을 놓고 있었구나. 포위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녀는 검을 휘둘러 암기들을 쳐냈다. 그러나 아무 대비도 없이 기습을 받은 터라 모든 암기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흑!"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깨의 결분혈(缺盆穴)과 다리의 복토혈(伏兎穴) 부근에 비추가 박혀버린 것이다.
"이... 비열한 놈! 이런 암수를 쓰고도 네놈이 영웅이랄 수 있느냐?"
"흐흐흐! 자고로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 했다. 어쨌든 네 고운 몸뚱이가 벌집이 될까 걱정했다만 다행이로구나. 하하하하!"
"이... 더러운 놈!"
노기충천한 황보수선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부상을 고려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러갔다.
그러나 무리한 일이었다. 두 곳의 요혈에 박힌 비추로 인해 그녀의 신형은 허공에서 급격히 중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를 기다린 듯 호사붕은 무엇인가를 휙 던졌다.
쏴아아!
시커먼 그물이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아차! 지난 번처럼.......'
황보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화산장의 수렵장에서도 똑같은 수법에 당했던 것이다. 천잠사로 짠 그물이라 일단 갇히면 꼼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번쩍!
하는 광망이 뻗어왔다. 동시에 허공을 가득 메웠던 흑망이 두쪽으로 갈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어떤 보검으로도 자를 수 없다는 천잠사로 짠 그물이 여지없이 걸레쪽처럼 잘려져 바닥에 떨어졌다.
"웬 놈이냐?"
호사붕은 안색이 흙빛이 되며 소리쳤다.
일남일녀가 숲속으로부터 서서히 걸어나왔다.
그들은 특이한 행색이었다. 남자는 등에 도를 멘 채 머리에 방립(方笠)을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괴이하게도 그는 팔이 하나밖에 없었다. 여인은 흑색 장포로 전신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고, 얼굴도 검은 면사로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한 자루의 장검이 들려 있었다.
호사붕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천잠사를 절단한 것은 저 여인의 검이다. 대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귀하들은... 뉘시요?"
그는 주눅든 음성으로 물었다.
"네놈은 물을 자격이 없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방립을 쓴 사내에게서 차디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호사붕의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건방진 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여봐라! 이 연놈들에게 황금총(黃金總)의 무서움을 보여줘라!"
휘휙휙!
사방으로부터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날아와 일남일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은 황금총의 고수들이었다. 비록 만금산장에서 패퇴하여 달아났지만 여전히 황금의 유혹에 눈이 멀어 황금총을 떠나지 않고 있는 작자들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일남일녀를 좁혀 들어갔다.
방립인의 뾰족한 턱이 움직였다. 그는 외팔이 손을 뒤로 넘겨 등에서 칼을 뽑아냈다.
스르릉!
칼이 뽑히는 소리에 황금총의 무사들은 간이 오그라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살벌한 도기(刀氣)가 찌르는 듯 사방으로 발산되었던 것이다.
이때 황보수선과 호사붕은 거의 동시에 부르짖었다.
"검후! 도귀!"
그렇다.
일남일녀야말로 강호에 풍운을 일으키고 있는 검후(劍后)와 도귀(刀鬼)였다.
무림에 출도한 지 불과 두 달도 안되어 두 사람은 일대풍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을 만났던 자들은 거의 모두가 황천으로 갔던 것이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도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는 칼을 뽑자마자 황금총의 무사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도무지 인간의 신법이, 인간의 도법이 그처럼 빠르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영이 황금총의 무사들 사이를 스칠 때마다 수급이 떠올랐다. 무사들은 공격은커녕 방어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그의 도법은 중원의 도법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체의 변식은 철저히 배제한 채 오직 극쾌(極快)와 힘만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는 허식(虛式)은 전혀 없이 오직 일직선으로 도를 긋고 있었다.
그러나 실전에서 드러난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황금총의 무사들이 도기(刀氣)를 느꼈을 때는 이미 목이 베어진 후였다. 그들은 도귀의 도를 어떻게 막아야 하고,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감을 잡지 못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명이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호사붕은 가슴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지독한 공포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공포감은 머리털이 난 이후 처음 겪는 것이었다.
"그만 하세요."
흑색 면사를 쓴 여인, 검후의 입에서 영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도귀의 동작이 뚝 멈춰졌다.
그때까지 요행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칠, 팔 명의 무사들은 호사붕을 내버려둔 채 일제히 줄행랑을 쳐버렸다. 호사붕도 그들을 붙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도주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검후가 그를 줄곧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묻겠어요. 괴수신의 백공자님은 어디 계시죠?"
검후의 질문이 떨어졌다.
사색이 된 호사붕은 눈을 크게 떴다. 너무나 뜻밖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한편 황보수선도 당혹을 금치 못했다. 관운빈의 행방을 묻다니?
"유감이군요, 대답만 하면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호사붕이 식은땀만 흘릴 뿐 대답하지 못하자 검후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도귀가 성큼 다가오며 피묻은 도를 치켜들었다.
"자, 잠깐! 말씀... 드리겠소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모두 말씀 드릴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털썩!
놀랍게도 호사붕은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녹녹치 않은 무예를 지닌 그였으나 승산 없는 싸움을 택하느니 구차한 애걸을 택한 것이다. 그만큼 공포심이 심신을 지배해버린 것이다.
"말해 보세요. 백공자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검후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예! 소인도 그자... 아니 백대협과 잘 아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항간에 떠도는 풍문처럼 그분이 죽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소인도 그분의 실종에 대해 의아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믿기 어렵군요."
면사 뒤에서 흘러나온 검후의 음성은 차갑기만 했다. 호사붕은 황급히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소인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마당에 어찌 거짓을 고할 수 있겠습니까? 소문대로 그분을 흑련사의 잔당이 시해했다면 어찌 제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분의 실종은 우리와는 완전히 무관한 일입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검후는 고개를 돌려 도귀와 시선을 교환했다. 도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구의 소행일까요?"
검후는 재차 물었다. 다소 맥이 풀린 듯한 음성이었다.
"그거야 소인이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다만......."
"다만 뭐지요?"
검후는 한 걸음 다가서며 다그쳤다. 그녀의 태도로 볼 때 관운빈에 대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소인이 짐작컨데... 그분을 음해할 만한 인물이나 세력이라면... 오직 무림군왕성밖에 없습니다."
"터무니 없는 소리!"
황보수선이 참다못해 노성을 발했다. 검후와 도귀의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호사붕에게 향해졌다.
"근거는 뭐죠?"
여전히 차분한 검후의 질문이었다.
"예... 백대협 같은 초절정 고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세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림군왕성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흑련사는 이미 기세가 꺾인 터라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추측만으로는 근거가 미약하군요. 당신은 혹시라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알량한 술수로 무림군왕성에 화를 전가하려는 건 아닌가요? 그럴 셈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우리들이 그토록 어리석지는 않으니까요."
"아, 아닙니다. 제가 무림군왕성을 의심하는 까닭을 말씀드리지요. 사실 무림군왕성은 백대협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왜 그렇죠? 백공자님은 무림군왕성을 도와 흑련사를 괴멸시키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잖아요?"
"그건... 무림군왕성의 성주인 칠절신군은 워낙 호승심이 강한데다 무림지존의 야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백대협이 나타나 명예를 독차지했으므로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자와 백대협은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연적관계에 있기도 합니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요?"
검후의 음성이 약간 떨려 나왔다.
"물론입니다. 마침 그 여인이 이 자리에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호사붕의 눈길이 황보수선을 가리키자 검후와 도귀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이렇게 되자 황보수선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금치 못했다.
검후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자의 말이 사실인지?"
"사실이 아니에요."
황보수선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호사붕은 펄쩍 뛰었다.
"이, 이보시오, 황보소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어찌 잡아뗀단 말이오?"
검후는 다시 물었다.
"그럼 낭자는 백공자님과 연인 사이가 아니란 뜻인가요?"
황보수선은 입술을 잘근 물었다.
"그 말은 맞아요. 저와 백공자님은 장래를 약속한 사이에요."
"......!"
검후는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도귀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는 손을 들어 방립을 밀어 올렸다. 그의 움푹한 두 눈에서 서릿발 같은 한광이 뻗어 나왔다.
"그럴 리가 없다! 너희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 더 이상 허튼 소리 한다면 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칼바람을 일으킬 듯 도귀는 노기충천했다. 검후가 만류했다.
"진정하세요. 이분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가 않군요."
그녀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물었다.
"죄송한 부탁입니다만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황보수선은 한숨을 쉰 후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 간악한 자가 지껄인 말 중에 백공자님과 저의 관계는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칠절신군과 관련된 부분은 틀려요. 칠절신군이 저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따라서 백공자님과 칠절신군이 연적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저는 태어나기 전부터 백공자님의 여인이었고, 지금도 저의 생명까지도 바칠 정도로 백공자님만을 사랑하고 있어요. 물론 백공자님도 절 사랑하고 계세요."
"닥쳐라!"
도귀의 입에서 노갈이 터져나왔다. 그는 검후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 계집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태어나기 전부터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가 아닙니까?"
"......."
검후는 침묵했다. 이 순간 그녀는 기묘한 느낌에 빠져 있었다. 괴수신의를 사랑한다고 스스럼없이 밝히는 황보수선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느낀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저도 그래요. 낭자가 태어나기 전부터라는 표현은 이해가 안 되네요.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부드럽고 상냥한 검후의 질문에 황보수선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과 저 사이의 일을 모두 밝힐 수는 없는 일이에요. 미안해요."
황보수선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검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다소 격앙되어 있었어요."
검후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를 지켜보던 도귀가 다시 분노를 터뜨리려는 순간 황보수선의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공자님과 저 사이의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도 있어요. 물론 전제조건이 있긴 하지만......."
"그래요? 그 조건이 뭔가요?"
검후는 관심을 보였다.
"제가 왜 좀더 일찍 알아보지 못했는지... 제 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입가에 배시시 미소를 흘리는 황보수선을 검후는 의아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만일 제 앞에 계신 분이 죽음의 섬 동사군도에서 오신 사사영(四四零)이란 분이라면 모든 것을 당연히 말씀드릴 거예요."
쿵!
검후, 그리고 도귀까지 큰 충격을 받은 듯 신형을 비틀거렸다. 그들은 온몸이 굳어진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후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제가 사사영이랍니다. 그럼 이제 말씀해 주세요, 모든 것을."
황보수선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나갔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오더니 두 손을 내밀어 검후, 사사영의 손을 꼬옥 잡았다.
"후후! 말씀드리고 말고요. 사소저는 그 말을 들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분이에요."
이때, 호시탐탐 도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호사붕이 갑자기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쏜살같이 뒤로 몸을 날렸다.
황보수선은 크게 놀랐다. 호사붕이 누구인가? 그는 부친과 가문의 원수였다.
"멈춰라!"
그녀는 몸을 날려 뒤쫓았으나 그만 한 걸음 늦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호사붕은 숲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황보수선은 발로 땅을 구르고 말았다.
"그자와 무슨 깊은 원한이 있나요? 그런 줄 알았다면 단단히 잡아둘걸. 우리가 잘못했나 봐요."
사사영이 미안한 듯 말했다. 황보수선은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언제고 반드시 제 손으로 복수하고 말 거예요."
그녀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후 이번에는 도귀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혹 백사호(百四號)란 분이 아닌가요?"
도귀의 냉막한 얼굴에 한 가닥 따뜻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형님이 제 얘기도 해주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백사홉니다."
방립을 벗어젓히자 영준한 얼굴을 드러났다. 비록 약간 강팍해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매력 있는 백사호의 얼굴이었다.
백사호.
그는 관운빈과 사사영을 술통에 담아 망망대해로 밀어낸 후 동포락과 관리들의 칼을 몸으로 받은 후 무참히 쓰러졌었다. 그런 그가 죽지 않고 중원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사사영과 함께.
④
당시 백사호의 목숨을 구한 것은 그의 모친인 백삼호였다.
이미 동포락에 의해 오른쪽 팔이 잘리고 전신에 도상을 입은 채 나뒹굴던 백사호를 부둥켜 안은 채 목숨을 구걸한 덕분에 한 가닥 남아있던 생명의 불씨를 간신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동포락이 백삼호의 간청을 받아들인 것은 도주 조탁의 뒤를 이어 그녀를 마음껏 농락하기 위해서였다.
육노인마저 도상을 입은 채 절벽에서 뛰어내리자 동포락은 수하들을 이끌고 돌아섰다. 이후 백사호는 모친의 보살핌으로 인해 간신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흘렀을 때, 바다에 투신했던 육노인이 두 척의 해적선을 이끌고 동사군도로 돌아왔다.
그는 동사군도의 와류에 휩싸여 죽기 직전 부상국의 해적선에 구함을 받았는데, 해적들은 그의 신기에 가까운 의술 솜씨에 반했고, 동사군도에 각종 진귀한 약재(藥材)가 넘친다는 말에 넘어가 함께 쳐들어 오게 된 것이었다.
오백 명이 넘는 해적들이 상륙하자 동사군도의 관리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해 버렸다. 해적들은 약초들을 캔 후에도 관리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그곳에 있던 죄수들은 노예를 감독하는 일꾼으로 삼아 모두 해적선에 태워 돌아갔다.
그들의 본거지에서 육노인은 신기에 가까운 의술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백삼호는 해적 두목의 열렬한 구애를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녀는 해적 두목의 아내가 되어 그들의 주모(主母)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자연 백사호도 덩달아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해적들 특유의 패도적인 도법(刀法)까지 익히게 되었다. 기실 해적선의 두목은 부상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법가(刀法家)였는데 치열한 영주 싸움의 희생양으로 해적생활에 뛰어든 위인이었던 것이다.
그후 백사호는 육노인에 의해 모든 신체의 압제를 벗어나게 되었고, 부상국의 도법을 익혀 일류고수가 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중원행(中原行)을 결심했다.
그의 모친도 비로소 그에게 출신(出身) 내력을 밝혀주었다. 백사호의 부친은 과거 어림군의 대장군으로 모함으로 역모의 누명을 썼던 위인이었던 것이다.
백사호는 중원으로 건너왔다. 육노인도 해적 두목의 허락을 받고 함께 올 수 있었다.
백사호와 육노인은 중원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건친왕부 주위를 탐색하며 관운빈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당시 관운빈은 아직 무림에 명성을 날리기 전이라 그를 아는 사람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친왕부에 몰래 뛰어들었던 백사호는 왕부의 고수들과 일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왕부에 침입했던 사사영과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었다. 사사영 역시 관운빈의 행방을 탐색하기 위해 왕부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한편, 사사영은 뜻밖에 관운빈과 이별하게 되자 처음에는 큰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혼신의 힘을 다해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관운빈과 재회할 수 있을 뿐더러 자신의 혈한을 풀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무예를 가르쳐 준 사부는 바로 검각(劍閣)의 각주인 고죽신니(古竹神尼)였다.
고죽신니는 해적선에서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사사영을 남해의 검각으로 데려갔는데, 거기에는 한 가지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이백여 년이 넘도록 검각이 검후(劍后)를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검후의 맥이 단절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성령옥체를 타고 난 사사영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데려간 것이었다.
검각에는 각종 진귀한 영약이 즐비했다. 따라서 고죽신니는 사사영을 검각으로 데려오자마자 아낌없이 영약을 사용해 사사영의 병을 치료했을 뿐더러 그녀의 내공을 단번에 증진시켜 주었다.
과연 사사영은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기대 이상의 놀라운 성취를 단시일에 이루어냈다. 검후가 되기 위한 필수요건인 심검(心劍)의 경지를 사사영은 불과 육개월 만에 완성한 것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자신을 능가하는 제자 사사영에게 고죽신니는 무림출도를 허락했다.
사사영은 중원에 들어선 후 백방으로 관운빈을 찾았으나 별 소득이 없자 건친왕부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왕부의 무사들과 격전을 벌이는 육노인과 백사호를 만나게 되었다.
결국 삼 인은 우여곡절 끝에 재회하게 되었다.
동사군도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삼 인은 재회의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그럴 즈음 그들은 낭보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관운빈에 관한 소식이었다. 그가 흑련사를 물리치고 대영웅으로 무림에 쟁쟁한 명성을 날린 것이다.
삼 인은 지체없이 무림군왕성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하루 차이로 길이 엇갈리고 말았다.
사사영은 그제서야 관운빈과 목화루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들려주었다. 삼 인은 다시 악양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정확히 중추절에 목화루에 도착했다. 육노인은 어렵게 구한 노백주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은 관운빈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 목화루에서 밤을 새웠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록 관운빈은 끝내 나타날 줄 몰랐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