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만남
무이산(武夷山). 복건성(福建省) 북부에 있는 험준한 산으로서, 절강성이나 강서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곳에도 소위 '녹림'이라고 불리는 산적들이 존재했다.
"당주님! 한 1리 밖에서 두 명이 오고 있습니다."
손에 도끼를 든 우락부락한 장한(壯漢)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산적 주제에 당주라는 호칭이 조금은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들도 분명히 무림인이었다. 그들의 조직이나 명칭이 무림 문파의 그것과 비슷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오, 그래? 돈은 좀 있게 생겼나?"
산채로 원체 유명한 곳이라 인적이 드물기는 하지만 지나는 이가 전혀 없지는 않다. 녹림에 정식으로 소속된 산적들은 사람들을 거의 죽이지 않기 때문이다. 재수 없게 이들과 마주친다 해도 가진 돈 전부를 순순히 내놓으면 큰 해는 면할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수중에 돈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곳을 당당하게 지나갈 수도 있었다.
당주란 인물은 대도(大刀)를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활짝 젖혀진 상의 사이로 보이는 가슴의 털이나 험상궂은 인상이, 누가 봐도 딱 산적임을 알 수 있게 할 정도였다. 소싯적에 중원 무림에서 제법 유명했다며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돈은 있게 생겼는데, 문제가……."
도끼를 든 장한의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무슨 문제인가?"
"아무래도 무림인 같습니다. 둘 다 검을 착용했습니다."
"뭐라고? 그런데 왜 여기까지 뛰어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냐?"
당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수하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무림인이 확실할 경우, 산적들은 무조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냥 못 본 체한다. 혹시라도 엄청난 고수가 아닐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산채 내부에서 거의 명령으로서 그런 행위를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녹림에 속한 산채의 수입은 9할 이상이 표국을 통해서 얻어진다. 산속에서 만난 행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은 산채의 입장에서 볼 때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무림인과 시비가 붙어 그 와중에 수하들이 한 명이라도 상한다면, 산채의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손해였다. 게다가 무림인이 속한 문파와 전혀 쓸데없는 원한 관계가 생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몇몇 어리석은 인물들은 산적들의 이런 행태를 보고, 그들이 무림인들을 무조건 두려워한다는 식으로 잘못 알고 녹림을 우습게 보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이런 사정을 도끼를 든 수하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가 여기까지 헐레벌떡 뛰어와 보고를 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저, 그런데… 한 명이 여자인데, 굉장히 예쁩니다."
"사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휴! 사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 말고 복건성에서 누가 그들을 상대할 수가 있겠어요?"
무이산 깊숙한 곳까지 겁도 없이 발을 들여놓은 두 남녀. 소녀라 해도 전혀 의심치 않을 정도의 앳된 용모를 지닌 여인의 말에 남자는 그저 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나저나 검을 괜히 착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산적들이 겁을 먹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여인의 말에 남자는 왠지 허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거야. 단지 무림인 같아서 포기하기엔, 너의 미모가 너무 돋보이니……."
"사형도, 참 별 말씀을……."
쑥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히는 여인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청의경장(靑衣輕裝)을 통해 은근히 드러나는 날씬한 몸매는 둘째 치고, 서글서글한 눈매하며 오뚝한 콧날, 게다가 작고 도톰한 입술까지, 미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다 갖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잠깐!"
산속을 한참 걸어가던 중, 뭔가 낌새를 느꼈는지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여인 역시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같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주위에서 10명의 낯선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척 보기에도 산적들로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굳이 죽일 생각까지는 없다. 갖은 돈을 순순히 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당주라 불린 장한이었다. 그는 도를 꼭 움켜쥔 채, 그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의 시선은 온통 여인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으! 정말이지, 내 저런 미인은… 옆에 있는 놈의 기도가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아무리 탐나는 물건(?)이 있다 해도, 무림인으로 보이는 인물 앞에서 함부로 출수를 할 수는 없었다. 일단 돈을 내놓으라고 했으니 상대방도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걸 봐서 별것 아니다 싶으면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고, 아니라면 일이 좀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의 상황들을 감안해 미리 포기하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여인이 너무나 예뻤다.
"아, 그 전에……."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시 무이산채의 당주가 입을 열었다.
"뭐 하는 놈들이기에 여기까지 왔나? 설마, 길을 잃은 것은 아닐 테고."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10명의 인원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닌지도 중요했지만, 상대가 속한 문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다.
1남 1녀 중,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대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겠다는 투였다.
"우리는 월영문(月榮門)에서 왔다. 나는 그곳 문주이신 월야검객(月夜劍客) 유협 님의 제자이고, 여기 있는 여인은 그분의 따님이시다."
순간 당주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월영문이라면 익히 아는 문파였다. 게다가 그곳의 문주인 유협을 모르는 무림인은 최소한 복건성 내에는 없었다. 그는 복건성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고수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길을 터주는 것이 상식이겠는데.
"오! 그러신가? 그렇다면 그대가 한때나마, 강북(江北)-복건성을 관통하는 민강을 경계로 그 이북 지역을 지칭- 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리었던 왕덕진이란 분이시고 그 옆에 계신 분은 강북 제일미라는 유세희 낭자겠군. 그런데 이렇게 먼 곳까지 어인 행차신가?"
당주는 특히 '한때나마'라는 부분에서 힘을 잔뜩 실어 말했다. 그의 음성에는 전체적으로 조롱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또한 상대가 '제일의' 후기지수라는 평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허어! 일개 산적들에게까지 이제 본문이 업신여김을 당하는가?'
5년 전, 불과 5년 전만 해도, 사부의 존함 세 글자에 무릎이라도 꿇고 용서를 빌었으리라. 아니, 예까지 와서 이런 수모를 당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5년 전, 무림 역사상 가장 치열했다는 마교와의 정사대전! 그 와중에 사부는 한 팔을 잃은 채, 영원히 무공을 쓰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그 후 5년이 지난 지금, 일개 산적에게조차 머리를 숙여 도움을 청해야 할 신세로 몰락한 것이다.
"혈쾌검을 만나러 왔다."
순간, 상대를 향해 서서히 접근하던 당주의 동작이 멈칫했다.
"그, 그 분과… 아시는 사이요?"
말투도 확 바뀌었고, 당주의 눈에서는 두려움까지 실려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어서 혹시나 했는데… 다행이군!'
왕덕진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데, 옆에 있던 유세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수였다.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 분을 꼭 만나야 되요."
'이런?'
왕덕진의 안색이 바로 굳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당주의 표정도 변하고 있었다.
"응?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난 또… 흐흐! 그 분은 워낙 바쁘셔서 아무나 만날 수가 없소이다. 유 소저."
음흉한 미소와 함께 당주는 다시 서서히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산적들도 그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은 탐욕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사매! 내 옆에 꼭 붙어라!"
"아!"
왕덕진의 다급한 음성과 함께, 그제야 그녀도 자신의 실책을 깨닫는 표정이었다.
챙!
왕덕진이 먼저 검을 뽑았고, 뒤이어 유세희도 따라 검을 뽑았다.
"우리는 당신들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혈쾌검 그 분을 만나러 왔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대했다는 것을 알면 그 분이 좋아하겠는가?"
왕덕진의 말에 당주는 잠시 동요하는 듯했으나 바로 원래의 안색으로 돌아왔다.
"흐흐! 그거야 진짜 손님일 때 얘기고… 게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않겠나?"
10명의 산적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왕덕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들의 의도는 뻔했다. 자신을 죽이고 유세희를 취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 혼자라면 최소한 죽지 않고 도주할 자신은 있다. 이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유세희란 존재가 걸림돌이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죽더라도 지켜야 할 여인이었다.
산적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질수록, 왕덕진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녹림 18채에 못지않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무이산채가 18채 중에 못 들은 이유는 그 가진바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복건이라는 외진 곳에 있다 보니, 그 수입이 중원의 요지에 근거를 둔 18채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었다.
왕덕진은 제법 고수란 소리를 듣는 인물이지만, 상대의 기세도 결코 만만찮았다. 특히 무리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의 기세는 일 대 일로 싸우더라도 결코 확신까지는 할 수 없는 상대였다. 게다가 어느 정도 무공을 익혔다 싶은 수하들까지 합세할 것이 틀림없었다. 특히 무공이 약한 유세희를 돌보며 싸워야 하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당주는 둘이서 전음으로 뭔가를 주고받고 있음을 눈치 챘다.
「사매! 기회를 봐서 도망가거라. 너만 없으면 나는 충분히 이들을 상대할 수가 있으니.」
「알았어요, 사형.」
"이봐! 저 계집을 특히 신경 쓰도록 해라! 아무래도 눈치가 도망가려는 분위기다."
"걱정 마십시오, 당주님."
'이런, 제기랄!'
포위망은 서서히 좁혀 오고 있었고… 순간.
"타앗!"
왕덕진을 향해 도끼가 날아들었다. 왕덕진은 급히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깡!
"윽!"
도끼와 검이 부딪쳤는데, 도끼를 휘두른 사나이는 손목에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몸이 휘청거렸다. 그 틈을 이용해 왕덕진의 검이 다시 상대를 향해 날아들었는데, 옆에서 누군가의 검이 날아들었다. 왕덕진은 그것을 살짝 피하고 검을 휘두른 상대를 향해 일검을 날렸다.
"크흑!"
상대는 어깨 부근에 피를 흘리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적들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이번에는 3명의 산적들이 동시에 그를 향해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마구잡이 합공이 아니었다. 그들은 품(品)자의 형태를 취하며 왕덕진의 앞뒤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하고 있었다.
산적들의 공세는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앞쪽에서 공격을 해오는 상대에게 일검을 날렸다. 왕덕진의 반격을 받은 산적 한 명이 검을 쥔 손목에서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뒤로 비틀거렸다. 자신의 등 뒤와 오른쪽에서 거의 동시에 날아오는 검과 도를 피해야 했던 터라 재차 공격할 여유도 없었다.
'위험하다.'
왕덕진은 황급히 그 공세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1장(약 3m) 가까이 몸을 날린 왕덕진은 바로 몸을 추스르고, 계속해서 이어질 적들의 공세에 대비를 했는데…….
"꺄악!"
갑자기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
'이런!'
왕덕진이 급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크크! 더 할 텐가?"
어느새, 유세희가 당주에게 제압되어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축 늘어져 있었다. 그새 이미 혈도가 몇 군데 짚인 것 같았다. 그녀는 검은 바닥에 처량하게 뒹굴고 있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적들의 공세에 정신이 팔려 유세희와의 거리를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결과였다. 당주는 수하들과 왕덕진이 대결하는 틈을 노려 왕덕진이 눈치 못 채게 유세희에게 접근을 했었던 것이다.
"아아, 사형! 저는 신경 쓰지… 헉!"
유세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주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도록 그녀의 아혈을 짚은 것이다. 그녀는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의 사형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를 놔주지 못할까?"
왕진석의 분노 섞인 일갈이 터져 나왔지만, 당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순간, 산적 한 명이 왕진석에게 접근하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실력은 충분히 알았던 것이다.
"검을 버리지 않으면, 이 계집을 죽이겠다!"
당주가 유세희의 목에 도를 들이댔다.
"이…!"
왕덕진은 그런 당주를 정말이지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그때까지도 검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 계집의 목숨은 끝이다. 하나, 둘……."
정말로 검을 버리고 상대의 처분에 맡길 수는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상대는 절대로 자신의 사매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당주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당주의 음성은 계속 들렸다.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막 열을 헤아리려는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이봐! 길 좀 비켜 주겠나?"
왕덕진과 당주의 옆 방향, 정확히 말해 당주의 오른쪽으로 2장 정도 떨어진 숲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내뱉은 말이었다. 당연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숲에서 나와 몇 걸음 움직인 상태였지만, 왕덕진이나 산적들이나 서로에게 신경을 쓰느라 전혀 몰랐었다.
길을 비켜 달라고 하는 사나이!
위아래 온통 흑의를 입고 있었다. 키가 상당히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나이는 3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물건이 시선을 확 끌었다. 어떤 동물의 꼬리를 오른손으로 잡고 질질 끌며 오고 있었다. 그 동물이 문제였다. 호랑이였다.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
'저자는 뭔가?'
왕덕진은 그 긴박한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황당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호랑이를 끌고 오는 것도 상당히 놀랄 일이었지만, 그거야 '사냥꾼이구나' 하며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10명이 넘는 인물들이 병장기를 꺼내 들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무리들을 향해 길을 비키라니! 정신이 어떻게 된 인물인가?
그런데 그보다 더 황당한 장면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 비켜 주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 운운하며 단칼에 목을 베어도 뭐랄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분위긴데, 산적들은 군말 없이 길을 비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산적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급하게 뒤로 물러섰고, 당주 역시 유세희를 끌어안은 채 황급히 물러서고 있었다. 오직 왕덕진만이 그의 길을 막은 형국이었다. 그는 걸어오는 흑의인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나한테… 무슨 용무라도 있나?"
흑의인은 왕덕진을 향해 '왜 안 비키고 내 앞길을 막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에? 아, 아니오."
왕덕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유유히 호랑이를 질질 끌며 길을 통과하던 흑의인이 갑자기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당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뭐 하나 부탁 좀 해도 될까?"
"헉, 마, 말해 보게. 천호(天虎)."
당주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흑의인은 호랑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술이 과했는지, 좀 피곤해서 그런데… 어차피 이놈은 자네들 있는 곳으로 가져가려던 참이야. 그러니 누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안 되겠나?"
"안 될 리가 있나? 이봐, 뭐 하나? 천호가 힘들다고 하지 않나?"
"예! 당주님."
갑자기 산적 5명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호랑이를 흑의인의 손에서 받아들었다.
"죄송합니다. 진즉에 저희가 들었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4명이 각자 호랑이의 사지를 잡았고 한 명이 가운데에서 호랑이의 몸을 떠받드는 형국이었다. 왕덕진은 그 광경을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일개 사냥꾼에 불과한 인물 같은데, 저렇게 쩔쩔매는 모습이라니…….'
"응? 그런데……."
흑의인은 묘한 눈길로 당주를 응시했다. 아니, 당주의 손에 축 늘어진 채로 있는 유세희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자네들, 여자 장사도 하나?"
순간 당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헉! 아, 아니야. 영업 중인데… 저, 저자가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는 왕덕진을 가리키며 대답을 하는데,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조금 흐르고 있었다.
흑의인은 이번에는 왕덕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봐! 그냥 있는 돈 줘버려. 이 친구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돈 몇 푼에 쓸데없이 목숨 걸고 그러나?"
원래 멍한 표정의 왕덕진이었는데, 그를 더욱 멍하게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흑의인은 상대의 대답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바로 몸을 휙 돌려 근처에 있던 바위에 턱 걸터앉는다. 그리고 다시 당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기다리기 지루하니, 영업 빨리 끝내게."
"아! 그, 그래야……."
당주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덕진의 뇌리에 뭔가가 떠올랐다.
'왠지, 이 자에게 말을 하면 될 것 같다.'
"우리는 단순히 이곳을 지나는 행인이 아니오. 무이산채에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오. 그런데 저자가……."
"우하하!"
왕덕진의 말을 가로막는 당주의 광소! 왕덕진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산적들까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이런, 이런! 그런 오해가 있었군. 하하! 진작 말을 하시지. 난 또 그것도 모르고……."
왕덕진은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이때쯤 산적들은 뭔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저자가 갑자기 무슨 속셈으로?'
도무지 영문을 몰라 하며 다시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왕덕진의 귀에 당주의 전음이 들려왔다.
「부채주님을 만나게 해줄 테니, 얌전히 있어라! 만약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이 여인을 죽이겠다!」
내용과는 달리, 당주의 눈빛은 뭔가 두려움에 떤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보이던 왕덕진은 천천히 당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었다니… 이제 그만 사매의 혈도를 풀어 주시겠소?"
"아, 이런, 그래야지."
당주가 유세희의 몸을 몇 군데 두드리는 것 같더니 잠시 후, 유세희는 '후!'하는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왕덕진의 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마워요, 정말."
당연히 흑의인을 향해 하는 소리일 텐데, 흑의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동작을 취한다.
"나에게 하는 소린가?"
"예? 아, 그래요."
"뭐가 고맙다는 것이지?"
"예?"
"난 너에게 그런 말을 들을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아, 그게……."
유세희가 생각해 보니, 정말로 흑의인이 자신들을 위해 한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산적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한 것뿐이었다. 그 이유가 흑의인 때문이란 것은 확신할 수 있었지만.
'참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사람이구나. 굳이 저런 식으로 말할 것까지야…….'
"혹시, 무림인이십니까? 저는 월영문의 문주이신 유협님의 제자인 왕덕진이라고 합니다. 옆은 그분의 따님입니다. 이름은 세희라고 합니다."
무이산채로 가는 도중이었다. 당주가 앞장을 섰고, 그 뒤로 5명의 산적들이 끙끙대며 호랑이를 들고 갔다. 그리고 제일 후미에 흑의인이 뒤따랐다. 당연히 왕덕진과 유세희는 흑의인과 걸음을 같이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걷기가 상당히 답답했는지, 왕덕진이 흑의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선 상대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저 통성명이나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
갑자기 흑의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우뚝 그 자리에 선 채,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흑의인은 왕덕진의 질문에는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서서히 몸을 돌려 유세희를 묘한 눈길로 응시했다.
'헉!'
순간, 유세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거의 충격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상대의 눈빛이 무섭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어떤 강렬한 슬픔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너무나도 깊어 보이는 저런 회한(悔恨)의 눈빛이라니…….'
"네 이름이… 뭐라고?"
"예? 저 세, 세희. 유…세희에요."
"세희, 세희라고? 흐흐, 세희라? 세희……."
마치 미치기라도 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던 흑의인은 뜻 모를 광소를 터뜨리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하하! 앞으로 술을 좀 줄이려 했는데, 오늘 밤새 술 마실 이유가 생겨났군."
왕덕진이나 유세희는 그저 멍한 눈으로 흑의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누나는 생일 선물로 뭘 사달라고 할 거야? 나는 옷하고 신발을 사 달라고 할 건데."
"글쎄, 누나는 아버지 오시면 그때 생각해 볼래."
마을하고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장원. 그 대문 앞에서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 아이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는데, 그 예쁘장한 용모하며 몸매에서 제법 여인의 태가 나는 귀여운 소녀였다. 두 아이는 공교롭게도 태어난 날이 같았는데 며칠 후면 그 날이었다.
이들의 아비는 무림인으로서 소녀가 태어나자마자 외지로 떠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생일이면 어김없이 집에 들렀기에, 혹시라도 아비가 오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서 두 남매는 며칠 전부터 매일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 누나 저기……."
동생이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소녀는 제법 놀라운 광경에 그 귀여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머, 세상에! 저 말들 좀 봐."
말 한 마리의 가격이 워낙 비쌌기에, 말을 타고 다니는 일반인을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보이는 말의 무리는 30마리는 족히 되어 보였으니, 소녀에게는 아주 신기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말 위에 탄 인물들이 하나같이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으니, 그 모습은 일대장관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소녀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이 있었다.
"어머, 이쪽으로 오네?"
처음에는 설마 하는 심정이었는데, 그들 일행은 정말로 남매가 사는 장원으로 오고 있었다.
"너희는 이곳에 살고 있니?"
일행 중 선두에 있던 한 청년이 소녀를 향해 물었다. 일행은 대부분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었고 몇 명은 부상을 당했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동생은 겁먹은 표정을 한 채 소녀의 등 뒤로 얼른 숨었지만, 소녀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예, 저희 집이에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소녀는 무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어도 상식이랄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지금 무림은 좋은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고, 최소한 '사천 당문'이 코앞에 있는 이곳에는 사람을 마구 해치는 나쁜 무림인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정도. 물론 그 유명한 '사천 당문'이 바로 하루 전, 완전히 멸문당했다는 것을 소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전혀 두려움 없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대꾸하는 소녀의 모습이 조금은 의외였을까? 청년은 약간 묘한 눈빛을 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집이 제법 큰데, 살고 있는 식구가 많니?"
"아니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까지 모두 다섯 식구에요."
1년이면, 집에 묵는 날이 보름도 채 안 되는 아비였으니, 소녀가 생각하기에 '살고 있는' 식구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어른 한 분만 모셔 오겠니?"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소녀의 할아버지는 청년이 아닌 웬 중년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상자의 치료를 위해 며칠 묵었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소녀의 할아버지는 선불로 숙식비에 해당되는 돈을 지급하겠다는 말에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참, 네 이름이 뭐니?"
장원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갑자기 처음 소녀에게 말을 건넨 청년이 소녀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처음과는 달리 부드러운 눈빛에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비치고 있었다.
"예? 아……."
소녀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바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부끄럼이 아니었다. 청년이 소녀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몸을 멈추었는데, 그 순간 일행 모두가 청년을 따라 동작을 멈추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들의 모든 시선이 소녀에게 모두 쏠리고 있었다.
소녀는 30명의 시선을 차마 감당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간신히 대답했다.
"세희… 라고 불러 주세요."
* * *
"나를 찾은 이유가 궁금하군."
호피로 둘러싸인 커다란 의자에 몸을 푹 기댄 채, 상당히 거만을 떠는 40대의 중년인!
그러나 실제로는 6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의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는 이곳 무이산채에 있는 3명의 부채주들 중 한 명이었는데, 원래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쪽 눈에 커다란 안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유세희와 왕덕진이 서 있었다. 왕덕진은 상대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어떤 의혹을 느꼈다.
'과연, 대단한 기도구나! 나 따위는… 혈쾌검의 이름이 역시 허명이 아니었군. 그런데 그가 독안(獨眼)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혈쾌검(血快劍)!
불과 5년 전만 해도, 그의 이름은 절강 무림에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별호에서 보듯이 그의 쾌검은 천하를 통틀어도 가히 일절(一絶)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 손속이 워낙 잔인해 비무를 벌인 상대들 중 살아남은 이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색을 밝히는 것으로도 꽤나 유명했었다.
마교가 천하를 지배하던 당시, 그는 마교에 대항하지 않고 협력함으로써 마교 절강지부의 부지부장 중의 한 명으로 임명되어 막강한 위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5년 전, 마교가 무림맹이 주도하는 정도 무림에 의해 중원에서 쫓겨난 후, 그 행방이 묘연했었다. 그러다 6개월 전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무림맹 소속 문파의 무인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 와중에 수십 명의 무인들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후, 무림맹에 의해 쫓기다가 이곳에 몸을 의탁한 것이다.
녹림이야말로 무림에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현(現) 무림을 주도하는 무림맹의 힘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녹림의 힘이 강하다기보다는 무림맹의 힘이 약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5년 전, 마교를 중원에서 몰아내면서 정도 무림에서 치룬 희생은 실로 막대했다. 최소한 수십 년은 지나야 다시 예전의 힘을 되찾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도움을 청하러 왔어요."
유세희의 말에 혈쾌검은 계속해서 거만한 말투로 대꾸를 한다.
"호, 도움이라?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부채주님의 능력이라면 충분한 일이에요. 그 대가는 충분히……."
"아, 잠깐!"
혈쾌검은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더니 묘한 눈길로 왕덕진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좀 나가 있었으면 하는군."
왕덕진은 움찔하며 뭐라고 하려 했지만, 유세희가 만류를 하고 있었다.
"사형! 그렇게 하세요."
왕덕진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흠, 이제야 좀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군. 아, 자리에 앉지."
상대의 어울리지 않는 친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유세희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그녀가 철이 들면서부터 정말이지 질리게 봐왔던 사내들의 눈빛이었다.
"어디 한 번, 그 부탁이란 것을 들어볼까?"
"저희 월영문을 대표해서 비무를 해주시면 됩니다."
"비무?"
"본문과 천형방 간에 분쟁이 생겼는데, 비무를 통해서 모든 것을 결정 짓기로 합의를 봤어요."
혈쾌검은 대충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음, 원래부터 천형방 놈들이 월영문을 호시탐탐하고 있었지. 월영문의 위치가 좀 좋나? 예전에는 네 아비 때문에 엄두도 못 내다가 지금에야 그 행동에 돌입하는군. 이것도 좀 늦은 감이 있군. 하긴, 정사대전 직후에는 그래도 좀 힘이 있었지, 아마? 그 후, 쓸 만한 인물들이 하나둘 떠나고… 지금은 남아 있는 문도들도 별로 없으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제 부탁을 들어줄 건지 아닌지를 말해 주세요."
상대의 말이 상당히 듣기 싫었는지, 그녀의 안색은 꽤나 굳어졌다.
"하하! 이런, 급하기는 그거야… 가만, 그런데?"
혈쾌검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비무로써 분쟁을 해결한다? 이상하군. 이해가 안 돼. 천형방의 힘이라면, 월영문을 어떻게 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일 텐데, 비무라? 문파 전체의 힘에서야 비교도 안 되겠지만, 고수급의 인물은 천형방에도 거의 없지 않나? 무공은 정말로 별 볼일 없는 것들인데… 그들에게는 일종의 모험일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
"우리가 이길 경우, 천형방에서는 향후 20년 간, 우리 구역을 못 넘어오게 돼 있는데… 우리가 질 경우, 우리는 상대에게 합병이 되요. 그런데… 다른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다른 조건?"
"저하고 천형방의 소방주하고… 결혼하는 거예요."
"결혼?"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혈쾌검이 광소를 터뜨렸다.
"우하하! 그 소방주란 놈이 네 미모에 눈이 돌아갔나 보군. 하긴, 우격다짐으로 월영문을 피로 물들였다가는 너를 취할 수가 없겠지. 최소한 복건 무림의 모든 이목이 쏠릴 텐데, 강제로 취하기도 난감하겠고 말이야. 하하하!"
잠시 후, 웃음을 그친 혈쾌검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는데, 왠지 상당히 끈적거리는 느낌의 음성이었다.
"너 같은 미인을 그런 놈에게 줄 수야 없겠지. 흐흐!"
그의 눈길을 받는 순간, 유세희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
'참아라, 유세희! 이깟 몸뚱이 뭐가 대수야? 상대는 색을 밝히는 것으로 유명한 인간인데… 어차피, 각오를 한 것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지요?"
"하하! 물론이지. 자, 그럼,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에 대한 대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그 전에… 비무할 상대에 관해 알고 싶지 않나요?"
"하하! 천형방의 방주라 해도 내 상대가… 응?"
갑자기 뭔가 느껴지기라도 한 듯, 혈쾌검이 말을 하다 말고 뭔가 생각에 잠긴다.
'가만? 월영문의 입장에서 나는 외부에서 초빙한 고수가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천형방에서도 외부에서 고수를 초빙하나?"
"맞아요. 남북 쌍괴라고 들어보셨나요?"
"뭐라고? 남북… 쌍괴?"
처음으로 혈쾌검의 안색이 굳어졌다. 속으로 '이 지역에서 그놈들만 아니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그였다.
굳은 안색으로 뭔가 고민하는 혈쾌검의 귀에 계속해서 유세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각 문파에서 서로 3명까지 고수를 내보낼 수가 있어요. 3명 중에서 2명이 이긴 문파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이 계속해서 싸울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확실한 고수 한 명만 있으면 이번 비무에서 승리를 할 수가 있다는 소리에요."
"그런데 상대는 2명뿐인가?"
"그래요. 아마 그 둘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하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겠지. 그 둘이라면… 허, 이거 참."
"설마, 자신이 없다는 뜻인가요?"
순간, 혈쾌검의 한쪽 눈이 번뜩이며 유세희를 처음으로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그 따위 놈들을 두려워 할 놈으로 보이나?"
유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런데 왜 그렇게 망설이는……."
"하나라면 확실하게 자신이 있는데, 둘이니까 문제지. 설마 밖에 있는 저 허약한 놈이 나머지 하나를 상대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한 명씩 상대하면 되요. 서로 원한다면 승자가 바로 다음 상대와 비무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다음 날로 비무를 미룰 수가 있어요."
"이런 답답하기는, 내가 무슨 천하제일 고수라도 되는 줄 아나?"
"예? 무슨……?"
"그 정도 고수와 한 번 싸움을 벌인 후의 내공 소모가 얼마나 심한 줄 알기나 해?"
"……."
"최상의 몸 상태라면 자신이 있지만, 한 번 힘을 뺀 다음 날의 싸움까지는 확신할 수 없단 말이야. 더군다나 내가 첫 번째 싸움에서 전혀 부상을 안 당한다는 보장도 없고."
"아! 제발 부탁드려요. 만약 저희 가문을 무사히 지켜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시란 대로 다 하겠습니다."
상당히 난색을 표하는 혈쾌검을 향해 유세희가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복건성 최고의 미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유세희의 간절한 눈빛! 사내라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마력까지 풍기는 듯했다.
애틋하게까지 보이는 그녀의 눈망울을 혈쾌검은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까지 꿀꺽 삼키고 있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준다고?"
"그, 그래요. 가문만 지켜 주신다면……."
끈적끈적하다 못해 아예 뜨겁기까지 한 사내의 눈빛.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차마 상대의 얼굴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유 소저!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보겠나?"
갑자기 혈쾌검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물론 유세희로서는 차라리 원래 목소리가 훨씬 더 듣기 좋았다.
그녀는 상대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짐작했는지, 별 반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으로 좀 나와봐."
천천히 중앙으로 나오는 그녀의 몸은 미세하나마 떨리고 있었다.
"흠, 확실히… 정말로 좋군!"
자신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상대의 시선에, 그녀는 또 다시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지만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눈빛이었다.
무슨 예술품이라도 감상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던 혈쾌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그의 몸이 그녀 바로 앞까지 도달하자 그녀는 어떤 소름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말이지, 내가 숱한 계집을 접해 봤지만 너 같은 우물(尤物)은 내 평생 처음이구나."
혈쾌검의 손이 그녀의 양 볼을 쓰다듬는다. 흠칫하며 몸을 빼려던 유세희는 속으로 길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그저 상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정말이지, 인간의 살이 이토록 부드러울 수도 있구나."
유세희의 양 볼은 도화 빛으로 물들었다. 수줍다는 의미가 아니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그 모습에 혈쾌검은 순간적으로 거의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잠시 후, 혈쾌검의 손이 점점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희고 긴 목덜미를 지나 동그랗게 예쁜 곡선을 그린 그녀의 좁은 어깨, 그리고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탄력을 자랑할 것 같은 봉오리를 슬쩍 지나쳐 한 줌도 안돼 보이는 그녀의 허리, 그리고 그 밑으로 갑자기 생기는 엄청난 굴곡.
그녀의 둔부를 쓰다듬는 순간, 혈쾌검의 눈은 거의 충혈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 미세한 떨림! 틀림없는 숫처녀로군. 빨리 채주에게 보고를 하고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야겠군.'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그의 손이 다시 한 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냥 스쳐 지나간 것이 못내 아쉬웠을까? 그의 손은 그녀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꺄악!"
그때까지 얌전히 상대의 손길에 자신의 청백지신을 맡기던 유세희가 더는 못 참겠는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몸을 움직였다. 혈쾌검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아예, 옷 속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쾅!
그 순간, 문이 급하게 열리며 왕덕진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매! 무슨 일이냐?"
혈쾌검은 그저 멀뚱멀뚱 서 있었고, 구석에서 유세희는 얼굴이 온통 붉어진 채 가슴 부위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안 봐도 너무나 뻔한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왕덕진은 너무나 흥분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순간, 혈쾌검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의 몸은 어느새 왕덕진의 바로 앞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왕덕진이 화들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혈쾌검의 몸은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빨랐다. 혈쾌검의 손이 상대의 손목을 한 번 내리치자 바로 왕덕진은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와 동시에 혈쾌검의 오른손이 왕덕진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유세희의 육안으로는 그 과정을 전혀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정말이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커억! 커억!"
왕덕진은 숨을 제대로 못 쉬는 것은 물론이고,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혈쾌검의 손아귀에서 볼썽 사납게 바동거릴 뿐이었다.
"제발, 놓아주세요."
유세희가 혈쾌검 앞으로 급히 달려가 사정을 하자, 혈쾌검은 손에 힘을 풀었다.
우당탕!
물론 얌전히 손에 힘만 푼 것이 아니라 왕덕진을 거의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식이었다.
"운이 좋은 놈이군. 나에게 검을 겨눈 놈을 살려준 적이 없는데."
혈쾌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비참한 모습으로 나동그라진 왕덕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유세희의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거의 악을 쓰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가세요!"
"사, 사매!"
"나가 계시라고요. 제발!"
"……."
왕덕진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그저 말없이 다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앙다문 그의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부님! 무능력한 내가 저주스럽습니다!'
'사형! 알아요. 그 마음. 그러나… 차라리 죽는 게 훨씬 편할 것도 같군요.'
"거참, 저자와 정인 사이라도 되나? 왜 저렇게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건가?"
'정인(情人)'이라는 말에 흠칫하던 유세희는 바로 원래 표정으로 돌아간다.
"아니에요. 그저… 사형일 뿐입니다."
"흠, 그런가? 어쨌든, 내 도움을 받을 건가 아닌가?"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 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하! 좋아. 도와주지."
그는 다시 유세희에게 접근했다. 그는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가 채주에게 허락을 받고 바로 올 테니……."
가기 전에 아까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려는 듯,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가슴으로 접근했다. 다시 한 번, 그의 손이 옷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비명 소리 따위는 없었다. 혈쾌검의 손이 너무나 탄력적인 그녀의 젖무덤을 지나 봉오리 정상의 돌출 부위를 막 정복하려는 순간.
꽝!
또 다시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누군가 문을 발로 힘껏 박차고 들어왔다.
"아니, 이놈이 또!"
왕덕진의 짓이라 생각한 혈쾌검이, 마치 이번에는 무조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식으로, 한껏 성을 내며 문 쪽을 향해 돌아섰는데.
"헉!"
갑자기 혈쾌검은 헛바람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의 한쪽 눈은 뭔가에 크게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한 없이 커지고 있었다.
'저 사람은……?'
"자, 자네가… 여기에는 웬일로……?"
문이 부셔져라 박차고 들어온 인물. 여기 오는 도중에 유세희가 만났던 그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혈쾌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묘한 눈길로 유세희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비명 질렀냐?"
"예?"
유세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혈쾌검이 끼어들었다.
"하하! 비명은 무슨? 좀 전에 뭔가 오해가 있어서 그런 것이네. 우리는 사업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네. 안 그런가? 유 소저?"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어색했지만, 흑의인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예? 아, 맞아요."
그녀는 얼떨결에 혈쾌검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래도 뭔가 미심쩍은지 흑의인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세희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녀의 머리는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난 흑의인의 행동도 그랬지만, 혈쾌검 정도 되는 인물의 태도 역시 좀 전에 산적들이 보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대체, 왜 저렇게 쩔쩔 매는 것일까?'
"이거 미안한데… 우리가 지금, 중요한 얘기를 나누어야 되는데……."
그만 나가 달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혈쾌검은 차마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행동은 안절부절 그 자체였다.
"아, 그런가? 내가 쓸데없이 방해를 했나 보군. 미안하게 됐네."
흑의인은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를 향해 다시 혈쾌검이 입을 열었는데, 아무리 봐도 아부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하! 이 사람. 미안하기는 우리 사이에, 전혀 신경 쓰지 말게나."
순간 유세희의 가슴 속 한 구석에 뭔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잡아야 돼! 저 사람을 이대로 돌려보내면… 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돼!'
그러나 그런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아니야. 저 사람이 고수라서 쩔쩔 맨다고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그런 고수가 사냥이나 할 리가 없어. 괜히 부채주의 비위를 건드렸다가…….'
엄청난 혼란을 느끼며 아무런 행동도 못하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서려던 흑의인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 깜빡했군."
"또, 무슨……?"
단지 뒤돌아섰을 뿐인데, 이상하게 혈쾌검은 놀라는 것 같았다.
"자네 안대를 보니까 갑자기 떠오르는군."
"헉!"
혈쾌검은 다시 한 번, 헛바람을 들이킨다.
"그날, 내가 좀 심하게 힘을 준 것 같아서 말이야. 아직까지 안대를 하고 있다니, 어디 한번 보세나."
"아, 아닐세. 다 나았어. 정말 괜찮다니까!"
'저건 또 뭐지?'
유세희도 그렇고 밖에 있는 왕덕진 역시 거의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대' 이야기가 나오자 혈쾌검이 아예 발악하듯 말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계속 마음이 쓰여서 그렇다네. 어느 정도인가 한 번 보자니까."
"괜찮아! 정말 괜찮다니까!"
"잠깐만 좀… 봤으면 좋겠군."
사람의 음성이 저토록 감정이 없을 수가 있을까? 정말이지, 혼이 없는 어떤 물체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같았다. 흑의인은 화나거나 굳은 것도 아닌, 그저 무표정이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냉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듣는 순간의 혈쾌검의 표정이란.
'맙소사! 저거… 내가… 잘못 보는 것인가?'
유세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이는 혈쾌검의 얼굴은 틀림없이 겁에 질린 그것이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눈을 씻고 봐도 확실했다. 그의 이마에서 몇 방울 떨어지는 식은땀이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그래. 보고 싶다니……."
혈쾌검은 서서히 자신의 안대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정말로 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표정이 저럴까?
그리고 드러난 혈쾌검의 한쪽 눈!
'저…!'
그것을 본 유세희의 눈은 처음엔 어떤 경악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은 바뀌었다. 그녀로서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런 심정은 왕덕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혈쾌검의 한쪽 눈!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왜 안대로 가렸을까 하는 의문은 바로 풀렸다. 분명히 존재하는 그의 눈. 그것은 반쯤, 아니, 거의 감겨져 있었다. 그리고 눈 주위가 퉁퉁 부어 있는 상태에서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좀 잔인한 말이겠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도 상당히 우스운 모양새일 것이다. 그런데 좀 전까지만 해도 마치 제왕이라도 되는 양, 온갖 거드름을 다 떨었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인물의 눈 주위가 그런 모습이었으니, 그 우스움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흠, 다행이군. 난 또 실명이라도 한 줄 알고 놀랐지 뭔가? 내가 원래 그렇게까지 세게 사람을 안 때리는데, 그날은 자네가 상당한 고수인 줄 알고, 나도 모르게 힘이 좀 많이 들어갔다네. 어쨌든, 다행이군."
'뭐라고?'
자신의 처지도 잊은 듯, 고개를 숙인 채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던 유세희의 눈빛이 경악에 물들었다.
'그럼, 저 상처가… 저 사람에게 맞아서……?'
그녀는 그 눈빛 그대로 고개를 들어 흑의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의 용건은 없다는 듯이 막 문 밖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혈쾌검은 어느새 다시 안대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의 얼굴은 좀 전의 유세희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그것과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였다. 아예, 불타는 듯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잠깐만요!"
"…?"
갑자기 유세희가 악을 쓰듯, 흑의인을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그녀는 황급히 몸을 움직여 흑의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