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병 시절 첫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자대배치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단체로 우르르 버스에 올라타 용산 어딘가에 있는 동사무소에 가서 투표를 했다. 겨울 초입의 그 투표장 모습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정치인과 법관출신의 엘리트. 두 후보는 퍽이나 다른 인생 행로를 걸어왔다. 진보를 대표하는 사람은 시골 출신에 고졸이었다. 시골에서 독학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이력이 돋보였다. 보수를 대표하는 사람은 서울대 법대를 나와 법관의 길을 걸어 온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전자는 개혁을 제 일의 기치로 내걸었고, 후자는 사회 안정을 우선시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보수를 찍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와 고학을 하던 당시 내 상황을 고려해보면 다소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개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개혁’
말 하기는 참 쉽고 멋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로 보였다. 개혁, 혁명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얘기하던 대학 선배들의 모습이 떠 올랐다. ‘미숙’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회불평등 개선’이나 ‘약자의 보호’는 선배들이 좋아하는 단어였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야 말로 가난과 불평등의 상징 아니었던가. 나만큼 가난한 친구를 나는 대학에서 보지 못했다. 가난에 대해서 만큼은 내가 가장 잘 알았지만 가난이라는 ‘관념’에 대해서는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나는 이게 못마땅했다. 나에게는 지극히 현실인 가난을 왜 그저 하나의 ‘관념’으로 다루는 저들이 재단하고 판단하려 하는가.
신구는 말했다.
“니들이 게맛을 알어?”
나는 말하고 싶었다.
“니들이 가난을 알어?”
나에게 있어 가난은
‘과연 다음 학기 등록을 할 수 있을까’
‘반지하 월세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 고민이었다면, 가난이라는 ‘관념’을 다루는 그들에게 있어 가난은 그저 여름 농활에 가서 들판에서 막걸리 한잔 하며 사진 찍고 오는 추억의 한 페이지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 미래를 맡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안정의 상징으로 보였던 보수쪽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해당 후보는 낙선했고 내 표는 사표가 되었다.
두 번째 대선은 사회생활 초년생 시절에 치렀다. 후보로는 아나운서 출신의 정치인, 그리고 그 반대편에 기업인 출신 서울시장이 있었다.
그 시절 만나던 사람이 있었다. 강남에 거주했던 그 사람은 부유했다. 그 사람의 아버지는 인터넷에 조회하면 나오는 유명한 분이었다. 당시 나는 논현동 힐탑호텔 고개 뒷편 옥탑방에 살았다. 옥탑방 화장실에서 그 사람이 살던 고급 아파트가 보였다. 성처럼 웅장했다. 그 사람은 틈만 나면 나에게 말했다.
“x동x 찍어”
명령과도 같았다. 설명은 없었다. 살펴보니 그 사람의 아버지는 대선후보와 동향이었다. 그 이상의 인연의 고리가 있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기업인 출신의 서울시장에게 표를 주었다. 사회생활 시작하며 성공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었다. 정주영의 ‘이 땅에 태어나 나의 살아온 이야기’,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읽었다. 대선 후보의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를 읽었다. 제목은 잘 생각이 안나지만 해당 후보의 성장과정과 기업에서 일할 때의 이야기를 쓴 책도 읽었다.
지나고 돌이켜 보면 이런 책들은 다분히 정치적 여론 형성을 위해 대필 작가를 시켜 영웅담 위주로 쓴 책들임이 보인다. 당시에는 그런걸 보지 못했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것만 얻으면 그만이었다.
당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나?
삶에 대한 ‘희망’이었고,
가난으로부터 탈출 할 수 있다는 ‘용기’였다.
둘만 얻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지지리도 가난했지만 보란듯이 성공한 사람이 좋았다. 살아있는 증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세 번째 대선은 신혼 때 치렀다. 과천주공 1단지에 살던 시절이다. 낡고 오래된 단층건물의 관리사무실이 아직도 생각난다. 관리사무실 건물에 투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햇살 좋던 그날 아침 아내와 나란히 가서 투표를 했다. 나는 선거 전후에 그 누구에게도 내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누구에게 표를 주었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소모적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 탓이다.
그리고 ‘감히 네까짓 게 뭔데 그런 무식하고 개념없는 투표를 하느냐’는 알듯 모를듯한 사회적 분위기도 싫었다. 예나 지금이나 진보를 지지해야 젊은이다워 보이고 배운 사람 같다. 그래서 진보는 서슴지 않고 정치적 의사를 내비치고 논쟁을 즐기는게 아닌가 싶다. 그 표면에 흐르는 도덕적 허영과 우월감이 싫었다. 그래서 정치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 하지 않았다. 누구를 지지하는지, 누구를 뽑았는지도 함구했다.
인권변호사와 전직 대통령 딸의 대결이었다. 사실 인권변호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제외하고는 그 딸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향수 또한 내가 겪은 향수가 아니고 부모님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었다. 굳이 내 시간 들여가며 두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여전히 내 앞가림 하기에도 바쁜 시절이었다.
이번에도 보수에게 표를 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직 대통령 딸이니 주변에 능력있는 사람이 많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자꾸만 룰을 바꾸겠다는 사람은 불편했다. 있는 룰에서 어떻게든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발버둥치는 나였다. 나를 위해 룰을 바꿔주겠다는 그 말은 달콤했으나 나는 있는 룰에서 내가 노력하는게 더 낫겠다 생각했다. 내 삶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게 불편했다. 그래서 안정을 원했다. 룰따위 상관없다. 내가 적응하면 된다. 어렴풋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한동안 아내와 처가의 직간접적인 눈초리를 받았다. 말은 안했지만 대략 나의 성향을 아는 듯했다. 죄없는 죄인이 된 기분이라고할까.
영국사업장에서 일하는 동안 국내에 많은 사건이 있었다. 아이들을 태운 배가 가라앉았다. 모두가 한탄과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한탄과 상실은 분노로 바뀌었고 들불처럼 번졌다.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예정보다 한참 빨리 대선이 치뤄졌다. 미국으로 근무지를 옮긴 뒤의 일이었다.
한인센터에 설치된 간이투표장에 동료들과 같이 가서 투표를 했다. 기쁜 마음으로 투표를 하고 인증샷도 찍었다. 투표용지에 누구를 찍었는지 표기 후 인증샷을 찍어 아내에게 보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투표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줬다. 그게 자랑인 시절이었다. 새로운 희망으로 들떴고 진보집권에 대한 청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수많은 개혁안이 쏟아졌다. 지금도 쏟아지고 있다. 혼란과 혼돈이라는 단어도 같이 쏟아지고 있다. 룰이 계속 바뀌고 있다. 당장 다음 달의 룰이 어떨지, 내년의 룰이 어떨지 가늠이 안된다.
네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나도 나이가 들었다. 끼니 걱정하던 그 청년은 간데 없고 그간 이뤄놓은 것 지키기에 급급한 나를 본다. 룰이 자꾸 바뀌기 때문이다. 피곤하지만 단련중이다. 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정도 시련이야 달게 받는다.
후회는 없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유리하게 룰이 바뀌어 주기를 기대했던 적은 없다. 룰을 바꿔주겠다는 사람을 멀리했다. 믿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다. 내 삶을 현실이 아닌 ‘관념’으로 다루는 사람들에게 내 미래를 기탁하는 일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출처: 부동산 스터디 몬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