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에 오는 많은 사람들은
한쪽은 바다를 끼고 반대쪽은 깎아지는 듯한 가파른 산이 맞닿은
일주 아스팔트 도로를 한바퀴 돌아보는 게 보통이다.
중간에 겨우 암자를 면한 사찰과 대평양의 출발대에 선 전망대, 그리고 등대와 자갈마당...등을
자신의 컨디션과 기호에 맞게 경관을 선택적으로 취하는 게 일반이다. 그런데 나는 태종대 입구
좌측으로 난 숲길을 선호 한다. 야간 산책일 때야 어쩔수 없지만 어둠이 가시 전이라면
그 숲길로 자주 간다. 그쪽으로는 다니는 사람이 없어 호젓한 맛을 오롯이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들이 일상에서 너무도 싑게 접하는 언어 공해와 폐기물과 다름 없는 크고 작은
소동을 수시로 목격하다 보니 고요함이나 침묵이 어떨 땐 널들거리는 정신에
진정제 역활을 하기도 하거니와 다가 올 일상에 대한 촉진제 또는 매개체 작용도 하기에
가끔은 일부러 인적 드문 곳을 찾아서 가기도 한다.
내가 태종대 관광 해설사나 홍보 대사도 아니면서,
더군다나 한국 사람이면 태종대를 모르는 사람이 없데 설마 설명하려고 글을 썼겠는가.
지난 주말에 그 숲길로 가면서 솔방울이 소복히 떨어진 모습을 보았다.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 '마른꽃인가!'
얼마 전 감나무에 달린 홍시를 따서 무심코 풀 위에 놓았는데 그 홍시와 진녹의 조화가
절묘하여 흥취를 북돋운 것이나, 봄 어느날 동백나무 아래 땅바닥에 흐드러지게 핀 낙화에서
느끼는 애절한 정취처럼 솔방울 또한 낙화한 마른꽃으로 인식되어
운치가 있어 보였다.
그처럼 자연현상 하나가 미적 성감대를 터치한 경우와 달리, 아득한 기억 하나가
쩌벅쩌벅 걸어오더니 무심코 피어난 아름다운 생각을 마구 짖밟아 버린다. 그러더니
아물고 봉합된 줄 알았던 어린 시절 솔방울 기억이 그 자리에 올라 서 분노를 드러내며
악의 감정이 키워지고 있었다.
또래의 연배라면 누구나 다 그랬을 것이다.
겨울이 오면 고사리 손을 빌려 초칠을 해서 교실 바닥의 노후를 막았다.
칠한 초의 광택과 나무결 사에에 골고루 스며들게 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걸래를
만들어 오게 하였다. 말이 걸래지 부모님이 어디 그렇나, 학교에서 해 오라고 하는 것이다 보니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주눅든 심정으로 집에서 얼굴 닦는 수건보다 더 깨끗한 걸로
몇개나 만들어 가곤 했지. 그 뿐인가, 자연보호라는 명목아래 하천 청소를 하러 가고
주변 환경 미화라는 꼼수로 아스팔트 도로변에 코스모스를 심었는가 하면 수시로 잔디씨를
훑어 오라고 했었다. 게다가 숙직시에 당사자가 해결하거나 학교에서 조달해야 할 식사용 쌀은
이삭줍기를 통해 충당하였으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쌀로 떡도 해 먹었을 거라는 의심이 간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교과 시간을 축내어 솔방을 줍기를 하러 갔었다.
그 시절에는 어느 학교에서나 주조된 난로를 사용하였는데 연료로는 석탄을 땠었지.
양철 연통을 연결해서 연결부는 어설픈 철사로 고정했으나 석탄을 땔 때마다 누른 코 색깔을 한
석탄 연기가 온 교실에 퍼졌지. 그나마도 충분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안 그래도
맨발인 아이들이 무슨 공부가 되었고 되었다한들 옳게 되었겠는가 말이다.
선생님 지들은 털신을 신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교무실에 가면 언제나 후끈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더욱이 석탄 연기가 하나도 없는 교무실이었다.
교무실 난로에 쓰인 연료는 우리가 수업을 빼먹고 튼 손으로 한알 한알 모아 온
솔방울 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랬지만 큰 누나 보다도 나이가 작은 선생님인데도 모든 부모가
굽신거리며 쩔쩔매 했으니 선생님들의 그 부당한 처사가
당연한 권리인줄로만 알았다. ...
한나 더 고발을 하자면,
초등학교 시절 키가 나보다 한뼘이나 더 큰 여자애들이 더러 있었다.
그 여자 애들은 운동회 때에 달리기를 한다던가, 고무줄 놀이를 하는 여자들 틈에
은근슬쩍 끼어들어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머시마를 죽일 요량으로 뛰어갈 때 보면
가슴이 덜렁덜렁 했었는데 난 그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부라자라는 단어 하나에도 성적인 놀림감이 되었고 여인숙이나 침대라는 것도
숙박에 필요한 침구라는 느낌 보다는 남녀간의 잠자리를 연상캐 하는
겸연쩍은 단어였을 정도로 성적으로는 미성숙 했고 문외한이었다.
그랬으니 뒷쪽에 앉은 성숙한 또래들의 고충을 알턱이 있었으랴.
그랬던 나와 달리 일찍 신체적 성숙에 다다른 여학생에게 선생님은
환경 미화로 남으라고 하는가 하면, 시험 채점을 도와 달라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등사실로 불러 은근슬쩍 성적 추행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수십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서로 잊고 지냈던 세월만큼 그리움의 부피도 커져, 어느 때인가
동창회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시절 은사를 초정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여러 스승 중에서도 그 시절 우리에게 승승으로서 자질이 다분하고 헌신과 반듯한 품행으로
참교육을 실천했다고 여겨진 은사를 한 두 분 추천하였는데, 그시절에 신체적으로 완숙했던
여동창 몇몇이 아연실색을 하며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자기의 반대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동창회 불참은 커녕 동창들과 연을 끊겠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연유를 모르는 좌중은 각자의 추측만 난무할 뿐 정확한 경위를 알수 없는지라, 딱 깨놓고
자신이 한 추측을 입 밖으로 발설하는 이는 없었지만 모아진 의견은 은사를 초청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부산 모임을 같이 하는 땡순이 가수나의 귀뜸이 있었다.
땡순이는 여자 붕알친구라 할 만큼 스스럼없고 성별 구분없이 막역한 사이 이다.
그러다보니 동창회 추진때 있었던 그 사단에 대해 들려주었다. 물론 누구 누구가 그랬고
어느 누구가 당했다는 지목은 뺀 것이었지만 노골적인 어법으로 제법 소상하게
들려준 내용은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게 했다.
그 시절에 나름 짓누른 솔방울 이야기 하나가 어떤 악의를 불러와
이렇게 허튼 소리를 늘어 놓게 되었네. 마른꽃으로 바라보며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암튼 품격을 잃지 않고 스승이라는 직업 양심에 부끄럼 없이 살오 온 스승이 얼마나 많으랴.
하지만 저런 망나니 물건들이 전체를 욕보이게 하는 게 안타깝다는.
@더하기 빼기 허허허~
@보리보리쌀 왜 그리 너긋한 웃음이야.
그리고 그 웃음 속에 다 이해한다는 느낌이 삐져 나오는 건 왜일까?
@더하기 빼기 우리학교에서도 있었던 일이라 ㅋㅋ
@보리보리쌀 아~
혹시 본인은 아니지? ㅎㅎㅎ
@더하기 빼기 반사! ㅎ
@보리보리쌀 그 반사 감사!!
하긴, 갓 졸업해서 발령 받아 온 여 선생 자취 방에 애들이 놀러 가기도 하고 그러더라.
@뽀돌 못된 쌤들도 참 많았어요